#175. 북궁설
구룡성.
사파의 정점에 선 곳.
단일 문파로는 천하 최강인 곳으로 천하제일인을 논할 때면 천마와 함께 가장 먼저 거론되는 구룡제가 천하를 굽어보는 곳.
짙은 어둠이 온 세상을 무겁게 짓누른 시각.
구룡성은 어둠을 거부하듯 곳곳에 불을 밝혀놓고 있었다.
밤하늘에 뜬 채 구룡성을 내려다보고 있는 화운은 기감을 풀어 북궁설을 찾고자 했다.
시간을 돌리기 전의 그녀와는 뭐가 달라도 다를 것이지만, 근본적인 기질마저 다르진 않을 것이기에 당당했던 그녀의 기질을 떠올리며 구룡성 내성 쪽부터 샅샅이 살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거대한 기운이 자신의 기감을 잡아채는 걸 느꼈다.
“들켰군.”
역시 구룡제는 구룡제였다.
화운은 자신을 부르는 거대한 기운을 향해 날아갔다.
구룡대전.
화운이 구룡대전의 출입문 앞에 소리 없이 내려서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기겁하여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구룡제가 머무는 구룡대전을 지키는 자들답게 일사불란하면서도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화운은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런 화운의 태도에 무인들이 난감해 하는 순간 구룡대전의 정문이 덜컥 열리더니 구룡제의 위엄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와라.”
화운은 자신을 겨누고 있는 날카로운 병장기들 사이를 지나 구룡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대전을 가로지르는 안쪽 끝에 그가 보였다.
구룡제 북궁도.
태사의에 정좌한 채 냉엄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한데 혼자가 아니었다.
이렇다 할 장식도 없는 평범한 무복을 걸쳤음에도 서 있는 자태만으로도 미색을 과시하고 있는 꽃다운 나이의 여인.
틀림없는 북궁설 그녀였다.
‘그때보다 더 예쁘군.’
그러고 보면 대환단이 참 대단한 모양이다.
환골탈태를 통해 육체를 단단히 재구성해줄 뿐만 아니라 얼굴형과 이목구비마저 반듯하게 잡아주고 피부 또한 옥같이 만들어주었다.
화운이 그런 생각을 하며 대전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였다.
“저 녀석을 죽여라!”
구룡제가 나직이 명했다.
그러자 북궁설이 곧장 몸을 날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화악!
검신을 따라 지독한 열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용광로 속에서 막 꺼낸 것 같았다.
북궁설은 구룡제의 독문심공인 제왕심결이 여인의 몸에는 맞지 않아 화륜심결을 익혔다.
그 덕분에 검을 뽑을 때면 지독한 열기가 검신에 이글거렸다.
“간다!”
화운의 코앞까지 돌진한 북궁설이 검을 휘둘렀다.
지독한 열기를 동반한 검격이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그때까지 뒷짐을 지고 있던 화운이 오른손을 전방으로 내밀었다.
쾅!
북궁설의 검격이 막혔다.
화운이 내민 오른손 앞에 강기의 막이 펼쳐져 있었다.
북궁설이 눈매를 좁혔다.
화운이 너무나 간단히 막아버리자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북궁설은 다시 달려들며 연거푸 검을 휘둘렀다.
북두제왕검의 절초들이 그녀의 손에서 쏟아졌다.
일초식 북두개벽에서 이초식 북두절멸, 삼초식 북두명강을 거쳐 육초식 북두일광극까지 여섯 검초를 폭발적으로 발휘했다.
화운은 오른손만 움직여 막았다.
놀랍게도 걸음도 계속 옮기고 있었다.
북궁설이 쏟아내는 검격은 강기의 막에 철저히 막혔다.
이건 마치 세살 아이가 놀자고 휘두르는 막대를 어른이 방패로 막으며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화운은 그렇게 구룡제의 바로 앞까지 이동했다.
“그만.”
북궁설이 아직 완성하지 못한 북두제왕검의 궁극 북두무한경을 펼치려고 하자 구룡제가 막았다.
북궁설은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그녀는 처참하게 구겨진 얼굴로 화운을 쏘아보고 있었다.
“패배는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화운이 북궁설을 향해 말하며 빙긋 웃었다.
지금 화운이 한 말은 원래 북궁설이 했던 말이었다.
정무맹에 사신으로 왔던 북궁설이 화운에게 비무를 청했고, 그때 화운은 창피를 당할 각오가 있다면 응해주겠다고 했다.
-패배는 창피한 게 아니야. 그리고 왜 내가 패배할 거라고 생각하지?
당시에 북궁설이 했던 말이었다.
화운은 당시의 일이 떠올라 말한 것인데, 북궁설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이게 단순한 패배냐!”
화운은 자신이 너무 심했나 싶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도망치듯 구룡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구룡제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너로구나.”
뭔가를 확신하는 구룡제였다.
화운은 그가 무엇을 확신하는 것인지 알았다.
“예. 접니다.”
“이유가 뭐냐?”
“설 누님이 필요해서입니다.”
“필요하다? 그깟 약 하나 주고 감히 내 후계자를 데려가겠다고?”
“그깟 약이 아닙니다. 대환단입니다.”
“······!”
대환단이라는 말에는 천하의 구룡제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잠깐이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생각보다 대환단의 효과가 좋았네요.”
화운이 북궁설을 힐끔 본 후 말했다.
지금 북궁설은 화운이 정무맹 시절에 비무를 했을 때, 그러니까 서른 살 시절의 철봉황 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소림의 제자더냐?”
“그렇게 보입니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군. 헌데도 대환단을 가지고 있었다니 이상하지 않느냐?”
“목숨조차 사사로이 남의 칼 위로 떨어지는 세상인데, 그깟 신외지물이 누구의 손에 있든 무에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화운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구룡제는 그런 화운을 지그시 응시하다 위엄서린 얼굴로 말했다.
“여튼 대환단을 복용시켰으니 이제 데려가겠다고 찾아왔다는 것이냐? 감히 내 자식을 말이야.”
“맞습니다만,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허락을 구할까 합니다.”
“나를 꺾어라. 그럼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다.”
구룡제가 태사의에서 일어섰다.
순간 태산이 움직이는 것 같은 거대한 기운이 유동을 했다.
뿐만 아니니라 뒤쪽 벽에 걸려있던 구룡제의 검이 허공을 둥실 떠서 날아왔다.
“그거 아십니까?”
화운이 태연한 모습으로 물었다.
구룡제는 그 어떤 말도 자신을 멈출 수 없다는 듯 검을 움켜잡았다.
“구룡제께선 광검에 너무 집착하셨어요. 그 집착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만 맴돌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치장을 해도 검의 근본은 결국은 베는 것, 광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결국 베어야 하는 한 점을 보신다면 다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구룡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날카로운 안력으로 본다면 검을 쥔 그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터였다.
구룡제는 결국 검을 뽑지 못했다.
그는 다시 태사의에 앉으며 화운을 바라봤다.
구룡제는 묻지 않았다.
너의 정체가 뭐냐?
나와 광검에 대해 어찌 아는 것이냐?
당연히 물었어야 할 물음을 미룬 채 미동도 없이 화운만 응시했다.
화운은 기다려 주었다.
구룡제가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를.
한편 북궁설은 북궁제의 침묵에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화운을 바라봤다.
자신의 침소로 들어와 잠들어 있는 자신에게 대환단을 복용시킨 사내.
말도 안 되는 무위로 자신을 처참하게 무너트린 사내.
하늘같은 부친조차 침묵에 잠기게 만든 사내.
그런 사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신비하기 짝이 없는······!
뒤늦게 화운의 얼굴이 북궁설의 눈에 들어왔다.
조각 같은 외모.
하늘같은 부친을 당당히 바라보는 얼굴에 북궁설은 자신의 피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아 더욱 눈매를 찌푸렸다.
“무얼 할 참이냐?”
한참 만에 구룡제가 입을 열었다.
그는 화운이 대답하기 전에 다시 물었다.
“설아를 데려가서 무얼 할 참이냐?”
“지금 보다 배는 더 강하게 만들 생각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강해지면 천종천마교와의 싸움에 함께할 생각입니다.”
“천종천마교······?”
“천마와 그의 권속들을 막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설아를 내놓을 줄 알았느냐?”
“아뇨.”
“······!”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아 몰래 데려갈 생각이었습니다.”
“납치를 할 생각이었단 말이냐!”
“그럴 리가요. 지금쯤이면 자신의 길을 스스로 정할 수 있을 것으로 봤습니다. 한데 조금 다른 상황이라 당황하고 있는 중입니다.”
구룡제는 다시 침묵했다.
절대의 경지에 올라서고 수천 명을 거느리다보면 사람을 보는 눈이 생긴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놈은 올바른 자다.
정파의 길을 걷는 놈이다.
위선으로 자신을 감추는 거짓 정파가 아니라 오롯이 한 길만 걷고 있는 진짜인 놈이다.
이런 놈은 허투로 거짓을 일삼지 않는다.
“반로환동한 것이냐?”
“그 비슷합니다만 조금 다릅니다.”
맞다. 일반적인 반로환동은 아닐 게다.
설아를 누님이라고 불렀으니까.
그렇다면 대체 어찌 된 놈인 것이냐?
화운은 구룡제의 그런 궁금함을 읽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무영천의 천주인 화운이라고 합니다. 무영천은 오랫동안 천종천마교를 감시해 온 곳입니다. 수 년 전부터 그들의 동태가 염려스럽다는 걸 알아낸 본천은 그때부터 천마와 그의 권속들을 막기 위해 기재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화운은 무영투가 만든 무영천의 이름을 요긴하게 써먹었다.
광명을 뒤로 하고 암중에 숨어 천하를 지키는 신비의 문파.
참으로 그럴듯하지 않은가.
나이에 맞지 않는 화운의 강함도 적당히 얼버무리듯 설명할 수도 있고.
“······.”
구룡제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래 침묵하지 않았다.
“설아 외에 또 누가 있지?”
“남궁검가의 소가주, 백리세가의 소가주와 영애, 선우세가의 소가주 그리고 본천의 태상호법의 손자가 있습니다.”
“죄다 정파뿐이로군.”
“북궁무결과 적성대도문의 사도강 그리고 이화태양종의 명강은 자질이 설 누님에 미치지 못할 뿐더러 어떻게 자란 것인지 성격이 비뚤어졌습니다. 본천이 가르치려는 무학과 맞지 않습니다.”
“단지 그뿐이냐?”
“그게 큽니다. 모난 성격은 금방 강해질 수 있지만,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구룡제께서 잘못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좀 더 늦었다면 설 누님도 어긋날 뻔했습니다.”
철봉황 시절의 백리설은 사파의 기질이 다분한 가운데에도 마음이 올곧았다.
과격할지언정 포악하거나 잔인하지는 않았다.
패도적이면서도 정정당당한 무인의 길을 좇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는 지금처럼 구룡제의 전폭적인 가르침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대환단을 복용하여 탈태환골을 한 북궁설을 본 구룡제가 자신을 넘어서는 고수로 만들고자 욕심을 부려 집요하게 가르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북궁설의 모습에 독기가 서려 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구룡제는 자신이 잘못 가르치고 있었다는 말에 다시 침묵에 빠졌다.
정말 잘못 가르친 것인가?
아니라고, 자신의 가르침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눈앞에 있는 화운의 무위를 생각하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를 못했다.
구룡제는 결국 북궁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올해 나이가 몇이더냐?”
“스물다섯 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더냐?”
구룡제의 얼굴에 약간의 당황이 묻어났다.
하지만 곧 천하사파의 거두다운 냉엄한 얼굴로 모든 감정을 감추었다.
“네가 결정하거라.”
“······!”
북궁설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강함 외에는 돌아보지도 않던 분이 자신에게 길을 열어주려는 것 같아서다.
북궁설은 망설였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궁금해. 어떻게 그리 강해질 수 있는 것인지.’
북궁설은 고개를 들었다.
“따라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거라.”
구룡제는 망설임 없이 허락했다.
북궁설이 공손히 예를 취하자 구룡제는 고개만 끄덕인 다음 화운을 바라봤다.
“천사련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천하사파연합이 만들어졌고, 한참 건물들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구룡제께선 사도천하 따위에는 관심이 없잖습니까. 지기이신 태양존자께서는 욕심이 과한 걸로 압니다만. 아마 태양존자께서는 세력을 확장하고 소림을 치려고 할 겁니다. 그분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시면 무당검성의 제자가 나타났으니 지켜보자고 하십시오.”
“검성의 제자?”
“제가 검성께 검을 배웠습니다.”
“······!”
잠깐 놀란 표정을 지은 구룡제는 화운의 강함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천사련은 천사련으로만 남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다시 뵐 때는 설 누님 때문에 크게 놀라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딸에 대한 말이 나오자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구룡제.
그의 시선은 한차례 북궁설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화운에게로 돌아갔다.
“그만 가도 좋다.”
“예. 물러가겠습니다.”
화운은 공손히 포권한 다음 북궁설을 향해 돌아섰다.
“누님, 가시지요.”
북궁설은 부친인 구룡제를 향해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인 후 화운을 향해 섰다.
이윽고 두 사람은 대전을 나란히 가로질렀다.
구룡대전에 홀로 남은 구룡제는 기대와 허탈한 심경 사이에서 오랫동안 머물러야 했다.
***
백리세가로 가는 길.
북궁설은 화운이 가는 대로 잠자코 따르기만 했다.
이삼 년 정도는 정파의 후기지수들과 함께 수련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할 때도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런데 백리세가를 하루 앞두고 객잔에 묵었을 때였다.
어쩌면 단둘만 있을 수 있는 자리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북궁설이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술 한 병과 간단한 요리 하나만 시켜 객방에 마주 앉은 두 사람.
북궁설은 잔에 술을 따라 천천히 마셨다.
어둠 가득한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화운은 그녀가 무슨 말이든 할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려주었다.
그런데 반 시진이 지나도록 천천히 술잔만 기울일 뿐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창밖만 내다보던 북궁설이 화운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툭 던지듯 물었다.
“대환단을 복용시킬 때 내 몸을 만졌어?”
“······!”
생각지도 못했던 물음에 화운은 당황했다.
무영투가 복용시켰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북궁설의 얼굴을 보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필요한 만큼만 만졌습니다.”
화운은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하며 북궁설의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화운을 빤히 쳐다보는 북궁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어쨌든 만졌다는 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