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171화 (171/207)

#171. 천하제일고수

열한 살의 어린 백리연은 무척 까칠했다.

쉽게 생각하고 다가가려던 화운의 앞에 냉소적인 벽을 세워 놓았다.

하지만 지금 열네 살의 백리연은 조금 달랐다.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모습이라 그런지 냉소적으로 보이는 건 비슷했으나 까칠해 보인다기 보단 도도해보였다.

“날 몰라보는 건가?”

화운이 중얼거리며 시선을 돌려 백리명을 돌아봤다.

선우유성은 본 적이 없으니 몰라볼 것이고, 남궁현은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잠깐 본 것인데다 당시엔 화운이 낭왕에게 부상을 당해 초췌한 몰골일 때여서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열네 살의 나이에 화운을 만났던 백리명이라면 기억할 것이 분명했다.

“······!”

화운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백리명이 고개를 갸웃한 채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어이, 반반한 얼굴만 믿고 어디서 수작질이야!”

황보장이 소리쳤다.

한 주먹에 얼굴을 뭉개버릴 기세였다.

‘날려버려!’

처음으로 우문산이 황보장을 응원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앵두처럼 붉은 입술을 비집고 나직한 이름 하나가 흘러나왔다.

“화운······.”

애써 억누른 음성이었다.

하지만 반가운 기색을 완전히 억누르진 못했다.

바로 앞에서 그 같은 감정의 조각을 느낀 화운은 당황하고 실망했던 기분을 단숨에 떨쳐버리고 더욱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푸하하하하!”

돌연 자리가 떠나가라 요란한 웃음이 터졌다.

백리명이었다.

갑자기 크게 웃은 백리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운을 향해 다가갔다.

“운 동생!”

“형님?”

“야, 내가 널 어떻게 몰라보겠냐! 당황하던 얼굴 하고는! 크하하하하!”

“형님도 참.”

화운이 머쓱하게 웃자 백리명이 웃음을 딱 그치더니 도끼눈으로 흘겨봤다.

“삼 년 만에 보는 것인데, 아무리 호색한이라도 그렇지 이 형님보다 연이한테만 눈길을 주는 게 괘씸해서 그래봤다.”

“아, 그건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연 누이가 워낙 눈에 띄어서요.”

“예쁘지?”

“예. 그때보다 더 예뻐졌어요.”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냐?”

“사실이 그런걸 뭐 어쩌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저 녀석들과도 인사 좀 나누어야겠습니다.”

“아, 그래야겠지.”

백리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켜주자 화운은 선우유성과 남궁현의 앞으로 다가갔다.

“현이는 날 몰라보겠느냐?”

“친구로 삼고 싶었는데, 형님이라고 우기시던 모습이 가물가물 합니다.”

“그래.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형님일 거다.”

화운은 알았다는 듯이 웃는 남궁현의 어깨를 두들겨주어 반가움을 표한 후 선우유성을 돌아봤다.

“날 처음 보지?”

“예. 말씀만 많이 들었습니다.”

“핏줄로는 너한텐 내가 유일한 형이다. 형이 뜻한 바가 있어서 이렇게 늦게 오게 되었다. 앞으로는 함께 지내게 될 테니까 잘 지내보자.”

“예.”

화운은 아직 어색해 하는 선우유성의 어깨를 두들겨준 후 그의 옆에 서 있는 황보혜에게 눈길을 주었다.

선우유성에게 착 달라붙듯 가까이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다.

“유성이 사촌 형인 화운입니다.”

“아, 전 황보세가의 황보혜에요. 이쪽은 제 오라버니인 황보장이구요.”

황보혜가 황보장을 손으로 가리켜가며 인사했다.

화운은 하필이면 황보장의 동생이냐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녀가 무슨 잘못이냐는 생각을 하며 좋게 보고자 했다.

“황보혜 소저이셨군요. 반갑습니다.”

“네에.”

황보혜가 쑥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척 귀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화운이 힐끔 고개를 돌려보니 선우유성이 황보혜에게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

화운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때까지 황보장과 우문산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자, 두 사람은 여기 운 동생을 모르지? 운 동생은 들었다시피 유성이의······.”

백리명이 얼른 끼어들어 화운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운이 얼굴에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

“화운이오. 황보소협 그리고 우문소협. 만나서 반갑소.”

화운의 태도는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정중했다.

포권까지 하였으니 흠 하나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중한 만큼 그 태도에 내포된 뜻은 확연했다.

니들만큼은 친근하게 굴고 싶지 않다.

그러니 함부로 나대지 마라.

바로 그런 뜻을 대놓고 드러낸 것이었다.

황보장과 우문산의 얼굴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운은 백리명을 향해 말했다.

“형님, 소개해줄 녀석이 있습니다. 명아, 이리 와라.”

화운이 부르자 함께 왔던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여긴 제 스승님의 손자인 담명이라고 합니다. 명아, 이쪽은 너와 내가 형님으로 모셔야 할 백리세가의 백리명 형님이셔.”

“담명입니다. 이름에 같은 글자를 쓰는 걸 보니 보통 인연이 아닌 모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첨 보는 데도 농을 칠 줄도 알고, 아주 마음에 드는 걸! 반갑네. 앞으로 잘 지내봄세.”

백리명이 환하게 웃어주었다.

담명 역시 마주 웃었다.

아직 앳된 모습이었으나 담대후의 혈족답게 시원해 보이는 이목구비였다.

이어서 담명과 다른 사람들도 간단히 인사를 했다.

모두들 화운과 담명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대했다.

그렇게 인사가 끝나자 화운은 백리명을 향해 말했다.

“저희가 끼어도 되겠지요?”

“그럼, 당연하지. 자, 다들 앉지.”

백리명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과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즐거움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선우유성과 남궁현이 엉거주춤 앉으려는 순간이었다.

황보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연매는 돌아가고 싶다고 하였으니 내가 데려다주겠다.”

황보장은 백리연이 생각하는 누군가가 화운이라고 짐작했다.

게다가 자신을 대하는 화운의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흥! 제대로 한 번만 걸려라. 계집애 같은 낯짝을 다시는 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뭉개주마!’

황보장이 화운에 대해 칼을 갈고 있을 때 우문산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흥! 선우세가 쪽이라면 별 볼일 없겠군. 선우세가의 완전한 몰락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너 역시 철저히 짓밟아 주마!’

우문산은 이를 갈며 자리에 앉았다.

백리연을 데려다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아직은 황보세가와 황보장의 위세를 넘을 수가 없으니 도리가 없었다.

“연매, 가자.”

황보장이 백리연을 향해 말했다.

백리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먼저 돌아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터라 도로 자리에 앉기가 민망했다.

하나뿐인 친 오라버니는 나서서 슬쩍 도와주기는커녕 더 놀려대지 않으면 다행이어서 속으로 한숨만 내쉬며 어쩌나 고심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우리끼리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일부러 찾아온 길이다. 어디 불편하거나 급한 용무가 있는 게 아니라면 자리에 남아주었으면 하는데, 안 될까?”

화운이 백리연을 보며 말했다.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예의가 없군. 돌아가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다니 말이야.”

황보장이 시큰둥한 태도로 백리연이 반응하기도 전에 끼어들어 말했다.

“황보 소협, 나와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뜻은 잘 알겠으니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말았으면 싶소.”

“뭐? 내가 끼어들었다고?”

어이없어하는 황보장의 얼굴에 분노의 기색이 한 겹 드리워졌다.

열여덟 살의 황보장은 한참 자신감 넘치고 혈기 왕성한 시기다.

자신만의 대계를 품고 속마음을 감추려면 일이 년은 더 지나야 했다.

성난 기색이 뚜렷해 보이는 황보장과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 화운.

두 사람의 대치에 긴장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런데 단 한 사람만은 처음 그대로 싱글싱글 웃고만 있었다.

바로 담명이었다.

‘뭐가 저리 태평해? 강호초출이라도 되나? 황보세가를 모르는 거야?’

우문산이 담명의 태도에 의아해 할 때.

백리연이 자신의 자리에 도로 앉아버렸다.

황보장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진 순간이었다.

“고맙다.”

화운이 웃으며 빈자리에 앉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반말이군요.”

백리연이 살짝 날을 세웠다.

그에 화운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야. 남녀 사이가 그렇더라. 존대하는 만큼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생기더라. 이번엔 그 벽을 넘어서고 싶다.”

“그 나이에도 남녀를 알았다니, 정말 조숙했군요.”

백리연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가 불쾌함으로 변했다.

“그 벽을 넘어서는 날 해줄 말이 많아. 그때가 되면 많은 걸 알게 될 거야. 내가 조숙한 게 아니었다는 것 역시.”

“······!”

백리연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꼬치꼬치 물을 수가 없었다. 자신들만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이렇게 궁금증만 잔뜩 안겨주더니 또 그러는 거야?’

백리연은 답답한 마음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인상만 썼다.

“연매가 돌아가지 않겠다면 뭐 그렇게 하도록 해.”

황보장이 어물쩍 자리에 앉았다.

“다들 앉지. 담명, 너도 거기 빈자리에 앉도록 해.”

“예, 형님.”

백리명의 말에 담명이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빈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화운과 황보장의 대치가 끝났으나 분위기가 완전히 좋아진 건 아니어서 다들 어색하게 앉아만 있었다.

“즐겁게 보내기엔 늦은 것 같고, 긴히 할 이야기라는 게 뭔지 들어볼까?”

백리명이 화운을 향해 말했다.

화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이 없는 자리에서 미리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오긴 했지만, 자신 때문에 즐거운 시간이 방해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얼굴에 살짝 드러났다.

“지금쯤이면 제 스승님께서 세가의 어른들을 만나고 계실 겁니다.”

다들 급 궁금해진 표정이 되었다.

화운은 그런 모두를 둘러본 후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앞날을 결정하기 위해섭니다.”

궁금증이 더욱 커지게 만드는 말이었다.

모두들 화운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가운데 백리연이 불쑥 물었다.

“영약들을 준 것과 관련이 있나요?”

“맞아. 영약들을 준 건 지금을 위한 준비였어. 이제 우리들의 앞날을 위해 함께 준비를 할 때가 되었어.”

더욱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화운.

그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남궁검가.

“무영천의 태상호법 담대후외다.”

“우호법 무영투요, 다시 뵈는 분들도 계시니 반갑소이다.”

“잘 오셨습니다. 남궁가의 남궁백입니다. 우호법께선 이게 몇 년 만입니까? 그때 그렇게 떠나시고 너무 격조하셨습니다.”

“백리가의 백리모가 태상호법을 뵈오. 선배님도 정말 오랜만입니다. 헌데 천주께선 안 오신 겝니까?”

“선우가의 선우덕입니다. 두 분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두 사람의 등장에 오대세가 회합을 하던 세 가주들은 놀람과 반가움으로 소란을 떨었다.

황보세가주와 우문검가주만이 동떨어져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천주께선 세가의 자제분들을 찾아갔습니다. 어른들을 먼저 뵈어야 하는 게 도리일 것이나 우리끼리 긴히 대화를 나누고자 그리 하시라고 했습니다.”

무영투가 점잖을 떨며 말했다.

지금 그의 모습과 태도는 무림명숙 대우를 받기에 충분했다.

“자, 자. 어서 앉으십시다.”

백리세가주가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야지요, 허나 그 전에 이쪽 두 분께 할 말이 있소이다.”

담대후가 황보세가주와 우문검가주를 향해 섰다.

순간 황보세가주와 우문검가주는 태산이 자신들을 향해 돌아서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옆에서 지켜볼 땐 그저 풍모가 좋아 보이는 정도였는데 정면으로 대하고 보자 기도가 완전히 달라져 자신들을 압도하자 깜짝 놀랐다.

“일전엔 우호법과 천주께 무례를 하여 죄송한 마음입니다.”

우문검가주가 포권했다.

마차로 화운과 무영투의 앞을 가로막았던 일에 대해 먼저 사과를 하여 혹시라도 모를 불이익을 사전에 막으려고 했다.

“그 이야긴 되었고, 본인은 말을 돌리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소. 우문가는 해적도의 해적들과 관계를 끊으셔야겠소. 아울러 선우세가를 찍어 누르고자 손을 벌였던 모든 사업에서 손을 놓도록 하시오.”

담대후의 말에 우문검가주는 가슴이 덜컥 주저앉았고, 다른 세가주들은 이게 다 무슨 말이냐며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담대후와 우문검가주를 번갈아봤다.

“이 무슨 해괴한 말이외까! 본가를 업신여겨도 유분수지!”

“해적도의 도주와 부도주를 잡아두었으니 발뺌하셔도 소용없소. 우문검가의 이름이나마 남기고 싶다면 이 자리에서 인정하는 게 좋을 거요. 아울러 대륙전장에서 선우세가에 천금의 자금을 투자하기로 하였으니 사업 쪽도 깨끗하게 손을 떼는 게 다만 얼마라도 지키는 걸 거요.”

“그, 그게······!”

우문검가주의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해적도의 도주와 부도주를 잡았다는 것도 충격이고, 대륙전장에서 선우세가에 투자하기로 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우문검가주는 다른 세가주들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인지······!

모두들 놀란 얼굴로 사실이냐고 응시할 뿐이었다.

‘증거 따위는 없어! 해적들이야 발뺌하면 그만이야. 하지만 대륙전장이 끼어들었다면 싸울 수가 없어······!’

우문검가주는 망연자실하여 담대후를 쳐다봤다.

“열흘 드리겠소.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향후 삼십 년간 봉문 하시오.”

“대체······ 대체 당신이 왜 본가를 괴롭히는 것이오? 당신이 누구이기에?”

“내가 누군지는 중요치 않소. 본천의 천주가 누구냐가 중요하지.”

“누구요? 그 천주라는 작자의 정체가 뭐요?”

“선우세가주의 조카요. 당신은 건드리지 말아야할 가문을 건드린거요.”

“조카라면······ 그때 그 아이가 진짜 천주였단 말이오?”

우문검가주의 눈이 무영투에게로 향했다.

순간 무영투가 눈을 부라리며 엄중한 태도로 말했다.

“아이라니! 말 함부로 하지 마시오! 그는 본천의 천주이고, 세상을 구할 천하제일고수요!”

천하제일고수!

우문검가주는 물론이고 다른 세가주들까지 깜짝 놀라게 만드는 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