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무영천, 출도하다
호북성 대무당파.
뜨거운 한여름의 시기에 정도 칠대문파의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칠대문파의 수장들이 모두 모인 건 근 이십여 년 만의 일이었다.
“구룡성, 적성대도문, 이화태양종 아래로 흑천, 도탑, 잔월교, 혈악, 흑마갱 그리고 낭혈은 물론이고 장강수채와 녹림을 비롯하여 천하 스물네 개 사파가 연합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라는군요.”
말을 한 무당파 장문인이나 듣고 있는 다른 장문인들이나 얼굴이 무겁긴 매한가지였다.
천하사파연합!
일명 천사련!
사도삼천이라 불리는 구룡제, 적성대도황, 태양존자.
그들 아래로 천하사파가 모조리 모여드니 정파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규모였다.
“우리끼리 이럴 게 아니라 오대세가에도 연락을 하여 정파맹이라도 결성하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점창파 장문인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인 이는 청성파 장문인과 아미파 장문인 뿐이었다.
지리적으로 가장 위태로운 세 문파만이 마음이 다급한 것이다.
“오대세가도 회합을 한다고 하니 그쪽에서도 뭔가 말이 나오겠지요. 우선 칠파의 공조를 더욱 공고히 한 후 오대세가와도 발 빠르게 연대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는 정도로 합시다. 우리까지 연합을 만들었다간 정말 정사대전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외다.”
소림사 장문인이 무겁게 말했다.
“저들은 사파천하를 만들겠다고 한 자리에 모였는데 우린 정사대전을 우려하여 기다리자는 것입니까?”
사안이 워낙 심각하다보니 점창파 장문인이 무례를 무릅쓰고 말했다.
“빈승이 구룡제와 적성대도황을 만난 적이 있소이다. 그 두 분은 천하제일을 추구할 뿐, 쓸데없이 천하에 피바람을 일으키는 걸 바라진 않는다고 하였소.”
“허면 천사련을 결성한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점창파 장문인의 물음에 소림사 장문인은 대답을 못했다.
대신 화산파 장문인이 차분히 끼어들었다.
“사공이 많으면 오히려 탈이 나는 법이지요. 이때는 누군가가 나서서 이끌 수밖에요.”
“그러니까 사파천하로 이끌려는 게 아니겠느냔 말입니다.”
“사파의 칼이 꼭 정파로 향하라는 법은 없지요.”
“그게 무슨 소리요?”
“구룡제와 적성대도황은 천하가 인정하는 절대고수들입니다. 게다가 소림 장문인 말씀대로 천하제일만 추구할 뿐 사파천하 같은 미명에는 관심이 없다면 그들이 향할 곳은 한 곳 뿐입니다.”
“한 곳?”
“마교 말입니다. 진짜 천하제일이 되려면 천마를 반드시 넘어서야 하잖습니까.”
천종천마교와 천마가 언급되자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하지만 곧 점창파 장문인이 고개를 저었다.
“백 년째 잠들어 있는 그들이잖소?”
“잠들어 있다고 누가 그러더이까?”
화산파 장문인의 반문에 점창파 장문인은 눈을 치떴다.
뭔가 있음을 감지한 것이다.
“그들이 움직이기라도 한 것이오?”
“삼 년 전에 본파에 무영천의 천주라는 아이와 우호법이라는 분이 찾아왔었소.”
화산파 장문인은 화운과 무영투가 찾아왔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청성파 장문인이 바로 말을 이었다.
청성파에도 찾아왔었다는 말인지라 화산파 장문인의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해준 셈이 되었다.
수십 년 째 아이들이 납치되고 있었다는 말에 모두들 말문이 막힌 듯 무겁게 침묵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에 난주에서 일이 터졌더군요.”
“강시당주가 변고를 당한 일 말이군요.”
“예.”
“그때부터 본파도 난주 일대를 더욱 예의주시한 터라 조금 알아낸 바가 있는데, 당시에 그 장원에 머물렀던 이들이 무영천 인물들의 인상착의와 같았습니다.”
“본파도 그들일 거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화산파 장문인과 청성파 장문인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실내의 다른 장문인들은 무거운 얼굴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이윽고 화산파 장문인이 모두를 둘러본 다음 마지막으로 점창파 장문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정파도 맹을 만들자는 장문인의 말씀에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만들어야지요.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교 쪽의 동향도 더욱 더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무영천의 사람들을 찾아봤으면 합니다. 그들이라면 정파에 아주 큰 힘이 될 테니까요. 화산의 인력만으로는 삼 년이 지났는데도 여태 그들의 그림자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화산파 장문인은 화운과 무영투를 진심으로 찾고 싶어 그 같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성파 장문인 역시 화산파 장문인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임으로써 같은 생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
안휘성 남궁검가.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매년 열리던 오대세가의 회합과는 별개의 자리였다.
이들 역시 천사련이 창설된 일로 화급히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긴 시간동안 오대세가 가주들이 하나로 모은 의견은 칠대문파와 연합하여 정파무림맹을 만드는 건 시기상조라는 것이었다.
정파의 주축인 칠대문파와 오대세가는 천하각지로 흩어져 있어 한 자리로 모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과 정파맹이 창설되더라도 칠대문파에 비해 오대세가의 입지가 좁다는 것이 좀 더 두고 보자고 의견을 모으게 된 배경이었다.
오대세가는 그런 자신들의 뜻을 칠대문파에 보내는 한편 천사련의 동태를 예의주시하자는 쪽으로 잠정적인 합의를 보았다.
그렇게 무거운 안건이 끝나고 좀 한숨 돌리려고 했더니 우문검가주가 뜬금없이 한 마디 했다.
“백리세가와 남궁검가 그리고 선우세가에 기연이 있었다지요?”
“아! 그 이야기는 본 가주도 들었소이다. 본가와 우문검가만 쏙 빼놓고 세 가문이 아주 좋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소이다.”
우문검가주가 이야기를 꺼내자 황보세가주가 서운하다는 투로 말을 받았다.
우문검가주가 삼 년이 지나서야 그 이야기를 꺼낸 건 그동안 황보세가주가 폐관수련을 하느라 오대세가 회합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무영천의 두 사람의 앞을 마차로 막은 일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하여 애써 잊으려고 했는데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면서 세 가문의 아이들이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 선우세가의 후계자인 선우유성의 성장은 우문검가의 앞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일이어서 몹시 우려가 되었다.
하여 이번에 천사련의 일로 급히 모이게 되자 황보세가주를 미리 만나 그 이야기를 들려준 후 한목소리를 내자고 했었던 것이다.
반면 세 가문의 가주들은 입을 다물었다.
벌써 삼 년이나 지난 일인데다 무영천에 대해 속 시원히 말할 수 있을 만큼 아는 바도 없었다.
“대체 무영천은 어떤 곳이오? 어디에 있는 곳이냔 말입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보았습니다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문파인 양 아는 자가 없더이다.”
우문검가주가 세 가주들을 쓸어보며 말했다.
“우문가주.”
“예. 말씀하십시오.”
백리세가주가 조용히 부르자 우문검가주가 그를 쳐다봤다.
백리세가주는 우문검가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찬찬히 말했다.
“일전에도 내가 말한 적이 있을 것이네. 사업 확장을 자제하는 게 좋겠다고.”
“그 일과 이게 무슨 상관이라고 자꾸 그러십니까. 그리고 사업은 사업일 뿐이거늘 어찌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제가 선우세가의 사업을 방해했습니까? 선우세가가 내놓은 사업들을 사들인 게 전부잖습니까.”
“정녕 그것뿐인가?”
“그것뿐입니다.”
“허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겠다는 건가?”
“말씀이 심하십니다!”
“자네 말대로 말이 나왔으니 말해봄세. 자넨 선우세가의 영역을 야금야금 먹어치우면서 선우세가와 관련한 무영천에 관한 일까지 꺼내놓으라고 하는 건가? 욕심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건가?”
“무영천이 선우세가와 관련이 있습니까?”
언성을 높였던 우문검가주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난 분명히 자넬 염려해서 일전에 충고를 해주었네. 그걸 무시한 건 자네이고. 그러니 더 이상 무영천에 관해서는 묻지 말게. 이 자리의 누구도 그에 관해 대답해줄 의무도 없거니와 그들 스스로가 나타나지 않는 한 우리가 알려줄 만한 것도 없네. 황보세가주님, 양해해 주십시오.”
우문검가주는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황보세가주는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네. 괜찮아. 부러워서 시샘하고 싶어서 그런 것인데,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구만. 자, 그 이야긴 그만하고 술이나 한 잔 함세. 자네들과 마시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지 않은가.”
황보세가주가 호탕하게 말하며 분위기를 바꾸고자 애썼다.
그러자 빙그레 웃으며 말한 이가 있었다.
“소제가 한 잔 사고 싶습니다만, 본가가 아닌지라 이 친구에게 일임토록 하겠으니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이 친구에게 말씀하십시오.”
선우세가주가 남궁검가주의 어깨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그 밝은 모습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제수씨께서 몸져누웠다가 좋아졌다더니 그 일이 자넬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나보군.”
황보세가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호쾌한 성격이 묻어나는 광경이었다
“언제는 제가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늘 울상만 짓고 있는 석상 같았네.”
“울상까지 짓지는 않았습니다만, 여튼 소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웃는 일이 많을 것 같으니 그만 놀리십시오.”
“그래, 바로 그거네. 인생 뭐 있나. 이렇게 웃고 떠들면서 한 잔 마시고 그렇게 사는 거지. 남궁가주, 뭐하는 겐가? 어서 한 상 차려주지 않고.”
“이미 준비해 놓았으니 자리를 옮기시지요.”
남궁검가주의 말에 황보세가주가 가장 먼저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무거운 이야긴 그만하세. 강호정의도 좋고 천하안녕도 좋지만 그 전에 내 뱃속에 술부터 채워 넣어야겠네.”
“소제도 간만에 취해볼 생각이니, 버릇없다고 뭐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선우세가주가 웃으며 받아주자 황보세가주가 더욱 호탕하게 말했다.
“술자리에 술동무, 술벗이라는 말은 있어도 형님동생은 없는 법이니 염려 말고 어여 감세.”
황보세가주와 선우세가주가 허물없이 웃으며 자리를 벗어나자 우문검가주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본가에 사업들을 죄다 빼앗기고도 뭐가 그리 좋다고 희희낙락한단 말이냐!’
우문검가주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이 선우세가주에겐 가주가 된 이후로 가장 행복한 시기라는 걸.
아들 선우유성이 자신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고, 주화입마하여 식물인간이 될 것 같았던 부인이 동생 내외가 가져다준 영약을 복용하고는 거뜬히 일어났다.
그 덕분에 오랫동안 담을 쌓았던 동생과 지난 과거를 잊고 핏줄의 정을 다시 돈독히 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기쁠 순 없었다.
“우문가주.”
갑자기 선우세가주가 걸음을 멈추고 부르자 당사자인 우문검가주는 물론이고 다른 가주들도 살짝 긴장했다.
“술자리에서만큼은 다 잊고 즐겁게 마셔봅시다.”
선우세가주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우문검가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관리를 하느라 무척 힘겨운 순간이 되고 있었다.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술자리로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남궁검가의 정문에서 다급한 보고가 전달되었다.
“무영천의 태상호법과 우호법께서 내방하셨습니다.”
갑작스런 방문이었다.
남궁검가주는 물론이고 모두들 깜짝 놀랐다.
“무영천이라고?”
“그들이 왔다고······!”
남궁검가주를 필두로 모두들 정문으로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
백리연은 따분했다.
그녀의 앞에 놓여있는 건 맛갈스럽게 보이는 요리들이었고, 식탁 주위로 앉아 있는 이들은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비슷한 또래들이었다.
친오라버니인 백리명과 같은 오대세가의 일원인 남궁현, 선우유성, 황보장, 황보혜 그리고 우문산까지.
다들 뭐가 그리 신나는지 웃고 떠들고 하지만, 백리연은 즐겁지가 않았다.
이럴 시간에 차라리 혼자 수련이나 했으면 싶을 정도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것이오?”
우문산이 물었다.
백리연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까부터 팔짱을 끼고 있던 황보장이 끼어들어 물었다.
백리연은 대답하는 것도 귀찮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옆에서 시큰둥하게 쳐다본 백리명이 툭 내뱉었다.
“상사병이야.”
“오라버니!”
백리연이 쏘아보며 소리쳤다.
“야, 자나 깨나 생각나면 상사병 맞잖아.”
백리명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귓구멍을 쑤시며 말했다.
백리연은 오빠의 장난에 화가 났으나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이런 자리에서 함께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질투가 나는 걸. 누가 감히 연매의 마음을 훔쳐간 것이야?”
황보장이 짐짓 성난 척 말했다.
백리명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부터 저었다.
“얼굴로는 누구도 상대가 안 되니까. 질투할 생각도 하지 마라.”
“유성 오라버니보다 더 잘생겼어요?”
귀여운 목소리로 끼어든 건 황보혜였다.
아까부터 선우유성만 쳐다보더니 이토록 당돌하게 말할 줄이야.
가장 어린 황보혜였기에 다들 웃어주었다.
선우유성만 얼굴이 벌게졌다.
“먼저 돌아갈래요.”
백리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려다 주마.”
황보장이 함께 일어서며 말하자 막 일어나려던 우문산이 엉거주춤 하다 도로 앉았다.
우문산은 삼 년 만에 얼굴을 본 순간부터 천상의 선녀처럼 아름다워진 백리연의 미모에 온 마음을 빼앗겨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자꾸만 황보장이 선수를 치고 있어 기분이 나빴다.
가문의 위세도 개인적인 무력도 딸리기에 말은 못하고 속으로 온갖 저주의 욕설만 퍼부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백리연이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귀신이라도 본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백리연의 모습에 모두들 시선을 돌려보았다.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두 명의 소년이 보였다.
한 명은 아직 앳된 소년의 모습이었고, 한 명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고 있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백리연은 둘 중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고 있는 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옥으로 조각해 놓은 것처럼 무척이나 잘생긴 얼굴이었다.
“계집애 같군.”
황보장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하며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백리연의 옆에 자릴 잡았다.
사내라면 응당 자신처럼 당당해야 한다는 듯 가슴을 활짝 펴고 굳건한 기도를 은연중에 과시했다.
그러나 백리연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두 눈은 깜빡임도 잊은 듯 황보장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한 사람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윽고 두 사람이 걸음을 멈췄다.
백리연의 바로 앞이었다.
“어이,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나?”
황보장이 기분 나쁘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바로 이때 조각남이 백리연을 향해 무척이나 싱그러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여심을 단숨에 사로잡아버릴 아주 매력적인 미소였다.
“잘 지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