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
광마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반로환동이든 환골탈태든 상대는 혼자였다. 그리고 광마종이 전부 나서서 처치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상대가 절대경 이상의 초고수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공녀를 따라와 애송이를 처음 봤을 땐 할 일이 없겠구나 싶었다.
오늘 일이 터져 애송이가 고루마군을 베었을 땐 교가 시끄럽겠구나 싶었다.
애송이를 처치하지 못할 것이라고는 일절 생각하지 않았다.
둘 혹은 셋만 나서도 충분해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 생각은 싸움이 시작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다만 애송이의 움직임이 예상 밖으로 빨라서 시간이 좀 걸리겠구나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생각이 달라졌다.
건물이 무너지고 다시 한 식경이 지났으나 싸움의 양상이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놈의 옷자락 하나 베지 못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게 되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 뛰는 놈 때문에 광마종 형제들의 상처만 더 늘어나고 있었다.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안에서 일다경 그리고 건물이 무너진 후 밖에서 한 식경.
놈은 그 시간 동안 형제들의 합공에 쉬지 않고 움직여야했다.
그런데도 지칠 기미조차 보이지가 않았다.
공력이 바닥을 드러낼 때가 지난 것 같은데도 처음의 기세 그대로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형제들의 몸에 새로 생겨나고 있는 상처들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싸울수록 강해지고 있어!’
광마는 전신의 터럭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더 시간을 주었다간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결과를 초래할 것만 같았다.
“모두 물러나라!”
광마종의 형제들에게 일갈하는 광마의 두 눈이 희번덕거리며 검게 변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신에서 검은 연기가 샘솟듯 흘러나오며 몸뚱이가 부풀기 시작했다.
부-욱! 찌-익!
옷이 찢어지고, 그 안의 살가죽이 쭉쭉 갈라지더니 단단한 근육이 튀어나와 갑옷처럼 뭉쳤다.
덩치괴물처럼 거대해진 것이다.
광마가 환신대법을 펼치자 광마종의 형제들이 사방으로 물러나 화운이 도주할 퇴로를 막았다.
싸움을 멈출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화운은 입 꼬리를 비틀었다.
“멸신······ 훌륭해! 아주 훌륭한 상대야.”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절대검력이 빠르게 강해졌지만 조금 아쉬웠다. 미친 듯이 공공무영비를 발휘하는 것을 멈추고 온 신경을 절대검력에 극한으로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차였다.
기특하게도 광마가 그런 무대를 만들어주고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화운은 기꺼운 미소를 지으며 광마를 맞았다.
아니 광마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멸신이라던 존재를.
번쩍!
새파란 검광이 광마를 향해 쏘아갔다.
핏!
광마의 몸에서 피가 튀었다.
하지만 육신이 쪼개지기는커녕 베어지지도 않았다.
“크크큭! 간지럽구나!”
광마인지 멸신인지 모를 존재가 비웃었다.
하지만 화운도 웃고 있었다.
반 시진 전이었으면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을 터인데 지금은 피를 튀게 만들었다.
실전을 통해 절대검력이 빠르게 성취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지금 화운에겐 그것이 중요했다.
“자,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히죽 웃은 화운이 전광처럼 달려들었다.
반시진이 지났다.
화운과 광마는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동안 화운은 절대검력을 완성했던 순간순간의 기억들을 떠올려가며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화아아악!
길이가 반 자(15cm)나 되는 날카로운 손톱이 화운을 향해 사납게 할퀴었다.
걸리는 순간 육신이 찢어지고 머리통이 조각날 것 같았다.
열혼수라조!
혼마저 찢어버린다는 광마의 성명절학.
하지만 열혼수라조가 찢어놓은 건 빈 허공일 뿐이었다.
번쩍!
허공으로 튀어 오른 화운이 절대검력을 펼치자 광마의 어깨가 쩍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금강불괴라 할만큼 단단한 광마의 육신이 반 시진 만에 쩍쩍 걸라지고 있었다.
“대형을 돕자!”
혈쇄가 소리치며 쇠사슬을 팔에 휘감은 다음 주먹을 움켜쥐었다.
화악!
지독한 불길 같은 기운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두 눈에서조차 붉은 혈광을 번뜩이며 격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구혈미공을 발휘한 혈접이 아홉 가닥의 피처럼 붉은 강기를 쏘아 보냈고, 혈우와 혈검 그리고 사령 역시 각자의 괴공을 발휘하며 싸움에 끼어들었다.
이때 광마와 부딪치면서도 다른 마인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화운이 공공무영비를 펼쳐 이 장여를 단숨에 물러났다.
그리고는 검을 들어올렸다.
새파란 검강이 한 자 길이로 넘실거렸다.
“검강 따위로는 어림없다!”
혈쇄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주먹에 숨통을 태워버릴 것 같은 강렬한 열기가 이글거렸다.
“알아!”
화운이 마주 외친 순간.
화아아아악!
대기가 화운의 검을 향해 일시에 빨려드는 것 같더니 검강이 두 자 길이로 길어지며 더욱 세차게 넘실거렸다.
번-쩍!
화운은 쾌속하게 짓쳐오는 혈쇄를 향해 검강이 넘실거리는 검을 단호하게 휘둘렀다.
콰앙!
혈쇄의 육중한 몸이 뒤로 확 기울더니 쿵쿵거리며 수 걸음을 물러났다.
씨익!
화운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피어올랐다.
궁즉변 변즉통!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기 마련이라 위기가 닥쳐오면 새로운 길도 보이는 법이다.
실전을 통해 절대검력이 상당한 경지에 오른 상태에서 다시 혼전을 벌여야 할 상황이 닥쳐오자 불현 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고민할 이유가 없고 그럴 성격도 아니어서 바로 펼쳐봤는데, 결과가 썩 만족스러웠다.
검강에 대자연의 기운을 합일하는 것!
절대검력 자체가 대자연의 기운과 소통하는 것이라 상당한 경지에 오른 지금은 검강에 대자연의 기운을 합일하는 게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었다.
쾅!
이번엔 광마가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검강과 대자연의 기운이 합일하자 검환에 못지않은 강력한 파괴력이 폭발했다.
“와 봐! 전부 와!”
화운이 다시 바빠졌다.
두 자 길이로 사납게 넘실거리는 강기를 잔뜩 머금은 검을 사방을 향해 숨 가쁘게 그어댔다.
번쩍!
청광이 대기를 가르면 충격파와 함께 한 사람이 주르륵 밀려났다.
예외는 없었다.
광마도 거구의 혈쇄도 화운의 일검에 튕기듯 휘청거리며 밀려나야 했다.
혈접이 발휘한 아홉 가닥의 강기는 모조리 튕겨버렸고, 혈인처럼 변해 십여 장의 간격을 일시에 없애버리는 굉장한 속도로 쏘아져 온 혈우는 더욱 빠른 속도로 튕겨 날아갔다.
죽음의 기운 같은 시커먼 기운을 뭉클뭉클 피워 올리며 달려든 사령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와 혈검 역시 수 장을 주르륵 밀려버렸다.
“으흐흐! 이제부터 전부 죽었다고 복창해라!”
화운은 속도에 이어 파괴력까지 압도하게 되자 거침이 없었다.
쾅!
화운은 혈쇄가 휘청 물러나자 벼락같이 쫓아가 이 검을 휘둘렀다.
속도가 워낙 빨라 혈쇄는 무방비로 등짝을 내주고 말았다.
쾅!
앞으로 고꾸라질 듯 휘청이는 혈쇄.
때마침 광마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화운의 삼격이 혈쇄의 머리통을 가격했을 터였다.
꽈앙!
광마의 열혼수라조를 정면으로 쳐서 막은 화운.
광마가 다른 손을 휘두른 순간 공공무영비를 펼쳐 자리를 이동한 다음 깜짝 놀란 광마가 신형을 빙글 돌린 순간 측면을 가격했다.
콰앙!
휘청거리는 광마.
이번엔 그가 집중 공세를 당할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녀석! 진짜 절대경까지 갔었나 보군.”
무영투가 중얼거리며 담벼락 위로 올라갔다.
머리통만 내밀고 있다가 아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때 사갈마희와 화골장, 아니 추뢰수 섭일환은 화운의 신위에 넋을 잃고 바라봤다.
“이제 안전하니까 그러고 있지 말고 올라와서 편하게 구경해.”
무영투가 평상시의 목소리로 천연덕스레 말했다.
“안전하다고요?”
사갈마희가 의아하여 쳐다봤다.
“보고도 몰라? 저 녀석, 자기 실력을 상당수 회복한 거야. 내가 들었던 게 사실이라면 지금부턴 쟤들이 감당 못해. 끝났다고 봐야지.”
담벼락 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까지 흔들어가며 본격적으로 구경꾼 행세를 하는 무영투.
사갈마희는 멍청한 눈으로 무영투를 쳐다보다 격전지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그가 압도하고 있어······.’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다.
열두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광마종의 미친 마인들을 홀로 압도하고 있었다.
“내가 정말 보고 싶은 건 검멸인데, 그건 아직 안 되는 모양이군.”
“검멸이요?”
무영투의 중얼거림에 사갈마희가 물었다.
그러자 무영투가 자신이 앉아 있는 옆 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여기 올라와 앉아봐. 그럼 말해줄게.”
망설이던 사갈마희는 격전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는 담벼락 위로 올라가 무영투 옆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검멸이 뭐예요?”
“검환.”
“검환이면 검환이지······.”
“저 녀석만의 검환이라 따로 이름을 지은 거래. 뭐가 다르냐면 검끝에 구처럼 뭉친 게 아니고 고리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거야.”
“모양만 다르잖아요.”
“하나가 아니래.”
“예?”
“검신을 따라서 고리모양의 검환 백 개를 만드는 거래. 그걸 또 한꺼번에 날릴 수도 있는데 절대경 이하인 자들한테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나.”
“말도 안 돼.”
“그래, 말도 안 돼지. 검환 백 개가 한꺼번에 날아온다고 생각해봐 정말 악몽일 거야. 저 녀석 말로는 무리를 하면 이백 개까지도 가능한데 백 개 정도가 가장 편하게 여의할 수 있는 거래.”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그래 거짓말이다. 거짓말이야. 으흐흐!”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괴이쩍게 웃는 무영투.
사갈마희는 그 웃음이 무척 거슬렸다.
거짓말이라고 한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 같아서였다.
‘저 사람······ 진짜 정체가 뭘까!’
“봐주지 말고 죽이란 말이야! 죽여! 죽여 버려! 죽이라고!”
사연홍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하지만 격전의 양상은 일방적이었다.
중과부적!
수가 적으면 많은 적을 상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광마종은 그 반대 처지였다.
개가 아무리 많이 모여도 범을 이길 수 없듯이 숫자는 오히려 많았으나 힘이 모자라 갈수록 밀리고 있었다.
화운이 검강으로 모두를 상대하기 시작한지 한 식경.
시간이 지나자 검강의 길이가 두 자에서 석 자로 길어졌다.
검환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검강이 무려 석 자 길이로 휘저어대자 광마종의 마인들은 속수무책으로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설상가상 광마의 환신대법이 끝나버렸고, 각자의 마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던 이들은 마기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러난다!”
광마가 결단을 내렸다.
그는 사연홍을 옆구리에 끼고는 전력을 다해 도주를 감행했다.
그에 다른 마인들 또한 메뚜기처럼 튀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두 명은 잡힐지언정 모두가 당하진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공공무영비 앞에서 달아나겠다고! 푸하하하!”
담벼락 위에서 무영투가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공공무영비 구단공 무영비천은 일섬의 속도를 자랑한다.
화운이 마음먹고 펼친다면 한둘만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한둘 빼고는 모조리 잡을 수 있다.
그런데 막 쫓아가려던 화운이 우뚝 멈추고는 한쪽을 돌아봤다.
“왜?”
무영투가 담벼락에서 훌쩍 뛰어내려 화운에게로 다가갔다.
화운은 무너져버린 장원의 잔해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자가 있었다.
고루마군.
그가 아직 죽지 않고 살고자 꿈틀거리고 있었다.
화운은 그를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섭일환을 손짓하여 불렀다.
담벼락을 단숨에 뛰어넘은 섭일환이 궁금한 얼굴로 다가왔다.
사갈마희 역시 어물쩍 뒤따라왔다.
두 사람은 아랫배가 갈라져 처참한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고루마군을 보고는 인상을 썼다.
“아이들을 납치하라고 사주한 자 입니다.”
“······!”
화운의 말에 섭일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납치한 것인지는 직접 물어보십시오.”
화운은 그 말을 남기고는 저만큼 가버렸다.
무영투는 멀어지는 화운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루마군의 곁에 쪼그려 앉았다.
“넌 절대 살지 못해. 조금이라도 고통 없이 죽고 싶거든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다.”
고루마군의 눈빛이 체념으로 물들어 가는 걸 지켜보던 무영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섭일환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화운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갈마희는 고루마군과 섭일환을 번갈아본 후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었다.
잠시 후.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섭일환은 울분을 터트리며 돌멩이를 들어 고루마군의 머리통이 한 줌도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찍었다.
피와 뇌수로 흥건한 두 손을 멍청히 내려다보던 그는 절망의 밑바닥에서 간신히 눈만 뜬 모습으로 화운에게로 왔다.
“방법이······ 정말 없는 거요?”
“미안합니다.”
화운의 대답이 끝난 순간 섭일환이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끄어어억! 정평아!”
가슴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비통한 광경이었다.
화운도, 무영투도 그리고 사갈마희도 말없이 곁을 지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