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합공
사연홍은 화운을 생강시로 만들어 자신의 곁에 두려고 했다.
심장을 멈추게 하는 독을 먹였으니 금령대법을 펼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고루마군도 미처 알지 못하는 게 있었다.
중단전.
화운이 중단전까지 열었다는 사실이다.
독이 심장을 공격하자 화운의 의지가 발동하기도 전에 중단전의 공력이 즉각 발휘되어 독기운을 막아낸 것이다.
게다가 공청석유와 인형설삼 그리고 이무기의 내단까지 복용하여 환골탈태를 하였기에 어지간한 독으로는 중독시킬 수가 없는 몸이었다.
화운은 그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술잔을 비웠고 보기 좋게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고루마군을 벤 것이다.
이제 문제는 광마종의 마인들이었다.
화운은 광마종의 마인들과 싸워본 적이 있었다.
이들을 죽이려면 강한 파괴력으로 육신을 박살내야 한다.
아직은 검환을 발휘하지 못하고 절대검력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로는 그만한 파괴력을 낼 수가 없기에 가급적 이들과의 싸움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치가 않았다.
사방과 지붕까지 포위가 된 상황이었다.
싸움은 피할 길이 없다.
다행이 지켜주어야 할 사람이 없는 자유로운 상황이다.
공공무영비의 궁극인 무풍무영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어 경신술과 속도에는 자신이 앞설 것이다.
‘좋아! 피할 수 없다면 맘껏 놀아주지!’
화운이 마음을 정한 순간 사연홍이 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왜? 대체 왜?”
“어린아이들을 납치해서 흑귀로 만든 니들은 죽어 마땅하니까.”
“뭐?”
“소나찰 사연홍! 넌 결국 사람이 되지 못하니까 이 자리에서 죽어라.”
화운이 싸늘히 말하며 벼락같이 쏘아갔다.
곧게 뻗은 연검의 검첨이 사연홍의 심장을 노렸다.
하지만 그녀의 옆에는 광마가 있었고, 혈쇄도 있었다.
촤라라라락!
붉은 쇠사슬이 성난 이무기처럼 꿈틀거리며 뻗어왔다.
부딪치기 직전 화운의 연검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화운이 달려들던 모습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좌측이다!”
광마가 소리쳤다.
혈쇄가 반사적으로 쇠사슬의 방향을 틀어 좌측 공간을 휩쓸었다.
하지만 빈 허공만 사납게 유린했다.
“끄억!”
누군가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고루마군이었다.
어느새 혈쇄의 공세를 벗어난 화운이 고루마군의 한쪽 다리를 잘라버린 것이다.
“찢어죽일!”
혈쇄가 대노하여 더욱 사납게 쇠사슬을 휘둘렀다.
하지만 어느새 화운이 자리를 이동해버렸다.
혈쇄는 성큼 다가가며 대청 전체를 헤집어 버리겠다는 듯이 쇠사슬을 광포하게 휘둘렀다.
하지만 화운이 펼치는 공공무영비는 환술로 여겨질 정도로 뛰어난 신법이었다.
게다가 지금 화운의 육신은 무척이나 작았다.
혈쇄의 삼분의 일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혈쇄가 광풍처럼 쇠사슬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화운의 옷자락조차 걸려들지 않았다.
“끄윽!”
고루마군의 입에서 다시 신음이 터졌다.
화운의 연검이 고루마군의 한쪽 눈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이들을 재물로만 보는 눈!”
“죽어라!”
혈쇄가 더욱 날뛰었다.
순간 고루마군의 눈알을 찔렀던 검을 뽑은 화운이 그 자리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그 틈에 혈쇄는 고루마군의 곁으로 이동하여 자리를 잡았다.
강시들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몸뚱어리가 썰리는 것쯤은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지켜줄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때 화운이 소리치며 새파란 검광을 날렸다.
“아이들의 원망을 듣지 못하는 귀!”
“어림없다!”
혈쇄가 쇠사슬을 미친 듯이 휘둘러 막고자 했다.
꽈다다당!
충돌음이 잇달아 터졌다.
막은 것이다.
그런데도 고루마군이 신음을 흘렸다.
“크음!”
혈쇄가 고개 돌려보니 핏줄기와 함께 고루마군의 귀가 허공으로 튕기고 있었다.
“막, 막았는데······!”
당황하는 혈쇄.
이때 화운이 차갑게 말했다.
“고루마군! 지옥에 가서도 육신이 갈가리 찢기는 형벌을 백 년이고 천 년이고 끝도 없이 받아라!”
저주 가득한 말이었다.
그에 고루마군이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미친······!”
혈쇄가 왼팔에 감고 있던 쇠사슬마저 휘둘렀다.
촤라라라락! 촤촤촤촤!
도저히 빠져나갈 틈이 없을 것 같았다.
화운은 피하지 않고 연검을 거푸 휘둘렀다.
번-쩍! 번쩍!
절대검력을 연거푸 펼치자 불꽃이 잇달아 튀며 쇠사슬의 궤적이 어지럽게 튕겼다.
“······!”
혈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막았는데······!’
불꽃이 튀기는 것도 봤고, 쇠사슬을 통해 묵직한 충격도 감지했다.
그런데 자신의 가슴팍을 강타한 건 뭐란 말인가?
무쇠처럼 단단한 몸뚱이라 긁힌 것 같은 생채기 밖에 나지 않았으나 충격을 느낀 순간엔 깨나 놀랐다.
“대형, 애새끼가 이상한 수법을······!”
혈쇄가 광마를 향해 놀람을 내비친 순간 화운이 쥐고 있던 연검을 허리춤에 납검했다.
그리고는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바라보는 혈쇄를 쳐다본 채 오른손을 한쪽으로 뻗었다.
고루마군이 한쪽으로 밀쳐놓았던 화운의 장검이 날아와 손에 잡혔다.
그 묵직한 감촉에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 화운.
스-릉!
검이 뽑히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화운의 팔 길이에 맞게 길이가 약간 짧은 검이었다.
이무기 비늘로 만들어진 검은 백리연에게 주었기에 그냥 보통의 장검이었지만, 길이와 무게가 만족스러워 맘껏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병기를 가려서야 수중무검의 경지에 오르려면 한참 멀었군.”
광마가 살짝 놀랐다.
‘검의 경지가 벌써 수중무검을 생각할 정도라는 건가?’
광마가 놀란 눈으로 이제 열두 살에 불과해 보이는 화운을 응시하고 있을 때 혈쇄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촤라락!
혈쇄는 화운의 검술이 괴이쩍은 것인지 고수이기에 그러는 것인지 밝혀낼 생각으로 전력에 가까운 무력을 발휘했다.
허공을 때리고 훑어버리는 쇠사슬의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대기가 웅웅거리며 울어댔다.
꽈다당!
쇠사슬은 요란한 굉음만 터트렸지 화운의 옷자락 하나 건들지 못했다.
반면에 혈쇄의 가슴팍에는 생채기들이 더 늘어났다.
화운은 공공무영비를 다시 펼쳐가며 상대했다.
혈쇄가 집중적인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함과 동시에 절대검력을 발휘했다.
혈쇄의 공격은 그야말로 파상적이었다. 상대가 숨 돌릴 틈도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몰아쳤다.
하지만 폭풍 같은 공세에도 불구하고 이득이 전혀 없었다. 혼자 발광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비효과적이었다.
반면 화운은 이쪽에서 번쩍! 저쪽에서 번쩍!
바쁘게 움직인 건 같았으나 여유가 느껴졌다.
그 차이를 감지한 건 광마였다.
그대로 두었다간 혈쇄의 가슴팍에 늘어나고 있는 상처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발생할 것 같았다.
“모두 합공해라!”
“팔다리를 잘라 버려!”
광마가 소리치자마자 사연홍이 표독하게 외쳤다.
좌우측의 양쪽 벽과 뒤쪽의 벽이 터지며 세 사람이 난입함과 동시에 천장에 구멍이 뻥 뚫리며 사이한 기운이 화운의 머리 위를 급습했다.
지붕위로 올라갔던 이는 사령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네 사람이 난입하자 화운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급격히 좁아졌다.
하지만 화운의 전투 경험은 지금의 겉모습과는 달리 이곳의 그 누구보다 풍부했다.
화운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번쩍!
머리 위로 일검을 휘두름과 동시에 두 가닥의 채대를 빨랫줄처럼 쏘아 보내고 있는 혈접을 향해 쏘아갔다.
혈접의 채대는 원거리 병기이면서 혈쇄의 쇠사슬과는 또 달라 지금처럼 일직선으로 찌르거나 흡사 살아 있는 독사처럼 끝부분을 꼿꼿이 세웠다가 사각이나 빈틈을 노리고 불쑥 찔러대는 날카로운 공세가 특기였다.
그래서 화운처럼 간격을 순간적으로 좁히고 달려드는 상대에겐 약점을 노출할 수밖에 없어 뒤로 물러나야 했다.
예상대로 혈접이 뒤로 물러나며 두 가닥의 채대를 화급히 거둬들였다.
촤라라락!
원거리 병기인 쇠사슬이 화운의 등을 노리고 뻗어왔다.
혈접이 급히 거둬들였던 채대를 다시 뿌리려는 순간 화운의 모습이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가르고 날아든 건 혈쇄의 쇠사슬이었다.
“망할!”
혈쇄가 황급히 쇠사슬을 거둬들인 순간 화운은 혈검을 향해 쏘아가고 있었다.
혈검은 잔인한 만큼 간사한 자였다.
시공의 저쪽에서 싸울 때 혈우의 몸을 갈라버리면서까지 화운을 죽이려고 했던 자였다.
간사한 자는 누구보다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법.
화운이 눈 깜짝할 사이에 쏘아져오자 뒷걸음질부터 쳤다.
그가 물러난 만큼 공간이 확보되자 화운은 다시 한 번 공공무영비를 펼쳤다.
이때 허공에서 사령이 흑색의 장력을 폭포수처럼 발출하며 덮쳐왔다.
뚜다다다다당!
요란한 충돌음이 터지며 사령이 이득 없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사혼구검의 유일한 방어검초인 사혼망을 뚫지 못한 것이다.
촤라라라락!
혈쇄의 쇠사슬이 광풍처럼 덮쳐왔다.
하지만 화운의 속도를 따라잡기엔 모자랐다.
번쩍!
뚜당!
쇠사슬을 쳐낸 화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번엔 자신의 차례일 것이라고 짐작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던 혈우.
하지만 그에게 날아든 건 화운이 아니라 절대검력이었다.
쩌걱!
혈우가 검을 휘둘러 막았다.
하지만 또 하나의 검력이 그의 가슴팍을 그어놓았다.
“······!”
피가 튀었다.
혈쇄처럼 육신까지 단단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때 화운은 다시 혈접을 향해 쏘아가고 있었다.
화운이 장원의 대청 안에서 좌충우돌하며 숨 가쁜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담벼락 위로 머리만 내민 채 지켜보고 있는 세 사람이 있었다.
무영투와 사갈마희 그리고 화골장이었다.
“맙소사 혼자서 저들을 전부 상대하고 있잖아요!”
사갈마희가 놀람을 터트렸다.
화골장의 얼굴에도 경악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무영투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마음만 먹으면 빠져나올 수 있을 텐데 왜 저러고 있지?”
“내가 보기에도 빠져나오지 못해서 싸우는 것 같지 않습니다.”
화골장이 무영투에게 동감을 드러냈다.
“그럼 왜 저러고 있는 건데요? 설마 우리가 가담해서 저들을 함께 처치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요?”
사갈마희가 싸움에 뛰어들기 싫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 년아 그건 아닐 테니까 염려마라. 내가 방해가 될까봐 일부러 내보낸 놈이다.”
“기특하네요. 근데 아니면 아니지 왜 욕이에요?”
“그래도 하오문이면 정파에 한 발 정도는 담근 셈인데 저 어린놈이 혼자 저러고 있는 걸 보고도 그 따위로 말해서 그런다.”
“반로환동 한 고수잖아요!”
“반로환동 했다고 육칠십 넘은 늙은인 줄 아느냐! 스무 살 짜리다. 스무 살!”
“네에?”
“······!”
사갈마희와 화골장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냥 아무데나 처박혀서 이삼 년만 수련하면 천마랑 어깨를 나란히 할 놈이 바로 저놈이다.”
“말도 안 되요!”
“우물 안 개구리한테는 말도 안 되겠지. 근데 저놈 덕분에 우물 밖으로 나오게 된 나는 안다. 저놈은 반로환동하기 전에 절대경까지 올라갔었다는 걸.”
“······!”
“······?”
“더 놀라운 건 그럼에도 저놈이 여기까지 와서 저러고 있는 건 더 이상 아이들이 납치당하는 걸 막기 위해서고, 더 나아가 천마와 마교로부터 천하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거다. 니년처럼 하오문이나 지키려는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놈이다. 내가 이 나이 처먹고도 경외감을 느끼게 된 놈이 바로 저놈이다.”
“······!”
사갈마희가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입만 쩍 벌리고 있을 때 화골장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감정에 휩싸였다.
-고수들이 있어서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말은 하지 마. 어떻게든 한 명의 아이라도 구했어야 해.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그래야 다른 누군가도 그쪽의 아이를 보면 구해줄 거라는 기대를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왜 아이를 포기하라고 한 것인지 자세히 말해주지 않아 원망만 했었는데, 아이들이 납치당하는 걸 막기 위해 저렇게 싸우고 있다고 하니 가슴에 돌덩이가 들어앉은 것처럼 무겁고 답답했다.
이때 무영투가 화골장의 모습을 일견했다.
“아들이랬어?”
“예.”
“화골장 말고 원래 이름이나 별호는 뭐요?”
무영투가 말투를 바꿨다.
이젠 상황이 달라지고 있으니 제대로 대우해주기 위해서였다.
“추뢰수라고 불렸습니다만, 워낙 무명이라 모르실 겁니다.”
“추뢰수 섭일환?”
“······예.”
“산서성 태원일대에서 추뢰수 하면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인데, 어찌 무명이라는 거요?”
“자식조차 지키지 못한 허명입니다.”
“자식 일은 안타깝게 되었소.”
“혹여 뭔가 아시는 게 있습니까?”
“난 모르오. 알고 싶다면 저놈이 무사히 나오기를 비시오.”
무영투는 흑귀에 관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아 화운에게로 떠넘겼다.
화운이 왜 말하지 않고자 했는지 이제야 느낀 것이다.
‘진짜 말해주고 싶지 않구나.’
대청 안의 격전은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었다.
“죽여! 죽여 버리라고!”
사연홍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포악하게 외쳐댔다.
그녀는 싸움이 길어지자 광마종이 화운을 사로잡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는 죽여 버리라고 했다.
하지만 점점 격렬해지기만 할뿐 화운을 잡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공공무영비가 워낙 절묘한 경신술이어서고, 화운의 육신이 워낙 작아서였다.
게다가 전투경험이 풍부한 화운이 협소한 공간을 역이용하여 마인들의 협공이 서로를 위협하게 만들었다.
콰앙! 쿠웅!
애꿎은 사방의 벽만 터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충격이 쌓이고 쌓여 결국 건물이 송두리째 풀썩 무너졌다.
쿠-웅!
광마는 사연홍을 껴안아 건물 밖으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놓치지 마라! 오 장씩 물러나! 어서!”
뿌연 흙먼지 속에서 마인들이 광마의 명에 따라 각자가 맡아야 할 방위로 분분히 몸을 날리는 가운데 화운의 목소리가 비릿하게 흘러나왔다.
“그만둘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게 안달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