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당신은 편히 죽어선 안 돼!
‘왜 또 나냐고?’
암영총주의 얼굴이 불만으로 일그러졌다.
짓이겨졌던 얼굴이 본모습을 찾기도 전에 천종천마교의 강시당을 찾아가라고 해서다.
말수가 적어서 실수하지 않을 거라나.
웃기는 소리다.
항상 할 말은 하고 살았는데 무슨 말수가 적어!
차라리 가장 믿을 만하다고 하던지.
비서둔주나 흑서담주보다는 신중한 게 맞으니까.
‘니미랄, 이러다 제 명에 못 죽지!’
신중하고 말실수하지 않는다고 다 무탈한 건 아니다.
왜 말이 없냐고, 심심하다고 죽일 수도 있는 곳이 이쪽 세상이니까.
약한 게 죄라는 말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립되는 곳이다.
그럼에도 암영총을 이끌면서 오랫동안 무탈할 수 있었던 건 밖으로 나돌지 않아서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성현들의 가르침을 철저히 신봉해서다.
거처에만 틀어박혀 지냈기에 지금껏 무탈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찾아온 자들이 있었지만.
‘니미랄 것들! 잘 살고 있는데, 왜 찾아와서 이 지랄이냐고!’
암영총주는 화운과 무영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천종천마교 정문에서 동패를 꺼내 건넸다.
문지기들 앞에서조차 주눅이 들어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동패는 혹시라도 심각한 일이 벌어지면 찾아오라며 강시당의 사자가 남겨주고 간 것이었다.
“따라 와.”
문지기들 중의 하나가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예, 예.”
암영총주는 잔뜩 굽실거리며 따라갔다.
강시당.
암영총주는 강시당으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벌하게도 강시당주를 만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짓이겨놓았던 악독한 년까지 보게 되어 반사적으로 꾸벅 허리부터 조아렸다.
“니가 여긴 왠 일이야?”
악독한 년, 사연홍이 물었다.
암영총주는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잔뜩 허리를 조아린 채 대답했다.
“방주께서 보내셨습니다.”
“방주? 그가 보냈단 말이야?”
“예.”
“왜?”
“당주께서 저희들께 맡기셨던 일을 다시 논의하자고 하셨습니다.”
사연홍이 강시당주를 쳐다봤다.
“맡긴 일이 뭐예요?”
“흑귀로 만들 애들을 잡아오는 일이다.”
“그걸 왜 다시 논의하자는 거지?”
사연홍의 시선이 느껴진다.
암영총주는 자신에게 묻는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꾸벅 조아리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금액을 다시 논의하자고 하셨습니다.”
“야!”
“예!”
“니가 죄송하다고 하면 그의 입장이 뭐가 돼! 너 죽을래?”
“죄송합니다. 살려주십시오.”
암영총주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 빌었다.
‘니미, 이럴 것 같아서 오기 싫었는데. 근데 강시당주가 아니고 왜 니년이 지랄이야!’
암영총주는 바짝 엎드린 채 사연홍을 속으로 욕했다.
그랬더니 사연홍이 냅다 걷어찼다.
“야! 니가 막 엎드리고 그러면 그의 입장이 뭐가 되냐고! 이 멍청한 찐따야!”
저만큼 나동그라진 암영총주가 벌떡 일어났을 땐 사연홍은 강시당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걔가 돈이 좀 궁한가 봐요. 적당히 맞춰주세요.”
“글쎄다. 일단 만나 보고 생각해 보자.”
“직접 만나 보게요?”
“탈태환골에 반로환동까지 했다며?”
“세 살 더 어려진 것도 반로환동일까요?”
“몸이 재구성 된 거니까 넓은 의미로 보면 같은 거겠지. 여튼 만나보자. 만나보면 뭐든 알게 되겠지.”
탈태환골에 반로환동.
그런 자들을 만나기는 정말 쉽지 않다.
그런 걸 겪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도 없으니까.
‘기회인데. 그런 자의 몸뚱이를 해부해서 살펴볼 수만 있다면 금강마인보다 더 단단한 강시를 만드는 데에 큰 도움이 될 텐데 말이야.’
강시당주 고루마군의 눈에 음침한 탐욕이 발동하고 있었다.
***
암영총주가 돌아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마차에서 사연홍이 내렸다.
“운, 나 왔어.”
사연홍이 화운을 보자마자 친근하게 굴었다.
“어제쯤 올 줄 알았더니?”
“오호, 기다렸던 거야?”
사연홍이 싱글싱글 웃었다.
“이틀 후에 올 거라고 했잖아.”
“그랬지. 근데 강시당주님이랑 함께 오느라고 오늘 온 거야. 인사드려. 여기 이분이 강시당의 당주님이셔.”
사연홍이 자신의 뒤를 따라 내린 중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랄! 어디서 사기를 쳐!’
화운은 고루마군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강시당에서 한바탕 한 적이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중노인은 고루마군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차 안에 또 한 사람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가 고루마군이겠지. 근데 얼굴을 보이지 않는 이유가 뭐지? 날 의심하는 건가?’
화운은 모른 척하며 정중히 포권했다.
“마운이라고 합니다. 직접 오시라고 한 건 아닌데 뜻이 잘못 전달된 건 아닌지 우려가 됩니다.”
“귀야방을 만들었다고 들었네. 돈이 많이 들어가겠지.”
“이공녀가 말했나보군요.”
“연홍이랑 가깝게 지낸다고 하니 필요한 자금은 내가 대줌세. 그러니 사업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했으면 하는데 어떤가?”
“제 발목을 잡으시려는군요.”
“왜 싫은가?”
“그냥 일개 방파였다면 그랬을 겁니다. 전 자유로운 게 좋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경외하는 곳에서 오신 분인데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다만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많이 도와주셔야 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런, 되레 내가 물주가 된 기분이로군.”
“하하하! 도와주시는 것 이상으로 보답해 드릴 날이 반드시 올 겁니다.”
“웃는 게 시원한 걸 보니 얍삽하진 않겠군. 좋네. 연홍이를 보아서라도 힘닿는 데까지 투자해보지.”
“감사합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헌데 마차에 계신 분께는 제가 인사드리지 않아도 됩니까?”
“아! 내 개인적인 손님이네. 자넨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아, 알겠습니다. 그럼 다 같이 밖으로 나가시지요.”
“밖으로?”
“어디까지 들으셨는지는 모르나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이곳에서는 술 한잔 대접해 드리지 못합니다. 하여 가까운 주루에라도 모실까 합니다.”
마차로 가게 되면 안에 고루마군이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마차를 두고 그냥 걸어가게 되면 마차와 광마종의 마인들을 떼어놓을 수 있다.
화운은 그런 계산을 하고 주루로 가자고 했다.
“아! 술이라면 마차에 있어. 아까 오는 길에 술도가를 지나다가 향이 좋아서 한 병 사 왔어. 운이랑 밤에 마시려고 산 건데, 일단 그걸로 대접해 드려. 우리가 마실 건 나중에 또 사지 뭐.”
사연홍이 방긋 웃으며 마차로 달려가 문을 열고 술 한 병을 꺼내왔다.
화운은 마차 문이 열린 순간 안을 살펴보고자 했으나 열린 문짝과 사연홍의 몸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확인할 수가 없었다.
“잔도 샀어. 이쁘지?”
사연홍이 두 개의 잔을 들어 보이며 자랑하듯 말했다.
한 쌍의 원앙이 새겨진 잔이었다.
“그래. 술도 있으니 안으로 들어갈까.”
화운이 대충 대답하며 대청으로 안내했다.
“야백은 밖에서 기다리는 게 좋겠어.”
무영투가 따라서 들어가려고 하자 사연홍이 웃으며 막았다.
무영투는 화운을 쳐다봤다.
“야백은 암영총주를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고, 나간 김에 앞으로는 귀한 손님도 모실 수 있도록 장원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하도록 해. 아, 일꾼들도 좀 알아보고.”
“존명.”
화운의 말에 공손히 포권한 무영투가 암영총주를 이끌고 장원 밖으로 사라졌다.
“자, 한 잔씩들 해요.”
대청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사연홍이 술잔에 술을 따르더니 고루마군 흉내를 내는 중노인과 화운에게 건네주었다.
‘미리 준비한 술에 밖에는 진짜 고루마군이 대기하고 있는 게 정상적인 상황일까?’
화운은 머릿속으로 의문을 떠올리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감사의 의미로 석 잔은 마셔야 하나 몸이 이렇게 어리다 보니 한 잔밖에 마시지 못함을 양해해주십시오.”
“나도 술을 그리 좋아하진 않으니 이 한 잔으로 자네의 성공을 미리 축하해 주겠네.”
두 사람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단숨에 털어 넣었다.
꿀꺽!
화운의 목울대가 시원하게 움직이며 술이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독하면서도 달짝지근하군요.”
“원래 몸에 해로운 건 달짝지근한 법이네.”
“······?”
무슨 뜻이냐는 듯 의문을 짓던 화운이 돌연 두 눈을 함지박 만하게 치뜨며 가슴팍을 움켜쥐더니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죽은 거 아니지?”
사연홍이 다급히 화운을 똑바로 눕히며 물었다.
“당주님께서 말씀드렸잖습니까. 일시적으로 심장을 멈추는 것뿐이라고.”
고루마군 행세를 하던 중노인이 공손히 말했다.
“아직 심장이 뛰는데?”
“그럴 리가요.”
중노인이 자세를 낮춰 화운의 심맥을 살폈다.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었다.
“환골탈태한 몸이라 버틴 모양입니다.”
“상관없어?”
“의식을 잃었으니까 대법을 펼치는 데에는 상관없을 겁니다. 그럼 당주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사연홍이 고개를 끄덕이자 중노인이 밖으로 나갔다.
“운, 난 널 믿지 않아. 무상 마백을 죽인 게 너라는 것도 알아. 증거 같은 건 없어. 그냥 너야. 네가 한 짓이 분명해. 그래서 북명사자들이 조사를 하기 전에 널 이렇게 하기로 결정한 거니까 날 탓하진 마.”
혼자 중얼거린 사연홍은 화운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댔다.
그리고 속삭이듯 계속 말했다.
“염려 마. 운을 해치려는 게 아니니까. 금령대법을 펼칠 거야. 그럼 밤이면 나와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고, 아침이면 나와 함께 나란히 눈을 뜰 거야. 너도 좋지? 그래, 나도 너무 기뻐.”
사연홍이 들뜬 표정을 지으며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화운의 뺨을 어루만졌다.
서로의 코끝이 닿을 듯 가까이 한 채 바라보다 참지 못하겠는지 입술을 포개려는 사연홍.
바로 이때 한 사람이 대청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연홍이 입술을 포개지 못하고 떨어지며 고개를 돌려봤다.
시체처럼 창백하고 깡마른 노인이 보였다.
진짜 강시당주인 고루마군이었다.
고루마군이 안으로 들어서자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칙칙한 흑의인 두 사람이 뒤를 따라 들어왔다.
머리에 철립을 깊이 눌러 쓰고 있는 두 사람의 정체는 다름 아닌 금강마인들이었다.
“그놈이 그토록 마음에 드느냐?”
“제 운명의 짝을 만난 것 같아요. 그러니 대법이 절대 실패하면 안 돼요.”
“염려 놓거라. 너만 바라보게 만들어주마.”
“고마워요. 조금 있다가 봐.”
뒷말은 화운을 보며 한 사연홍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고루마군이 다가와 화운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봤다.
“허! 니 녀석이 반할 만하게 생기긴 했구나.”
“우린 서로가 반한 영혼의 짝이에요. 그러니까 늦기 전에 얼른 대법이나 펼쳐주세요.”
사연홍이 재촉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시간이 더 지체되었다간 대법을 펼쳐도 의식이 아예 없는 강시가 되고 만다.
사실 고루마군이 바라는 건 그 상태였지만, 멸제로 이어지는 줄을 안정적으로 잡고 있으려면 사연홍이 필요했다.
고루마군은 화운의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려다 인상을 쓰며 발을 뻗었다.
혹시라도 몰라 화운을 경계하며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검을 밟아 한쪽으로 밀어버렸다.
그때까지 화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객이 검을 잃는다는 건 권객이 팔이 잘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라 마지막 남은 의심마저 지워버린 고루마군.
그가 가부좌를 틀고자 자세를 낮추었다.
바로 이때 죽은 듯이 누워있던 화운이 번쩍 눈을 떴다.
“······!”
고루마군이 당황하여 굳은 순간.
화운의 몸이 누운 채로 허공으로 떠오르며 빠르게 휘돌았다.
팟팟팟팟!
“엇?”
사연홍이 뭔가 잘못 되었다고 느껴 소리친 것과 동시에 화운이 튕기듯 물러났다.
“······!”
“······?”
화운과 고루마군 그리고 사연홍은 입을 다물고 서로를 바라봤다.
금강마인들은 고루마군이 미처 골적을 불지 못해 별도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서 있기만 했다.
뚝! 뚝!
죽은 듯 한 고요를 깨트리는 소리.
사연홍의 시선이 소리의 진원지를 응시했다.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화운이 비껴들고 있는 검.
허리를 휘감고 있던 연검의 검신을 타고 붉은 핏방울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사연홍이 흔들린 눈빛으로 고루마군을 돌아봤다.
앉으려던 자세 그대로 엉거주춤 서 있는 고루마군.
그의 아랫배를 가리고 있는 옷자락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당주님?”
사연홍이 불길한 얼굴로 부른 순간.
뭔가가 왈칵 쏟아졌다.
“······!”
고루마군과 사연홍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어, 어어?”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귀신처럼 창백하던 고루마군의 얼굴이 죽음의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두 손으로 쏟아지는 것들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바로 밑에서부터 올라온 뜨거운 김이 숨통을 달구었지만, 살고자 악착같이 몸부림을 쳤다.
바로 이때.
쓰억!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고루마군의 팔 하나가 싹둑 잘려 나갔다.
“당신은 편히 죽어선 안 돼!”
화운이 싸늘히 말하자 고루마군이 전신을 덜덜 떨며 화운을 쳐다보았다.
왜냐는 표정이었다.
“당신이 흑귀로 만든 수만 명의 아이들! 그 복수다!”
“······!”
화운의 말에 고루마군의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진 순간.
콰앙!
대전의 벽이 갑자기 터지며 누군가가 난입해 들어왔다.
‘광마종!’
화운이 고루마군에게서 시선을 돌린 순간.
촤라라라락!
뻥 뚫린 대청 벽의 구멍을 통해 사나운 기세가 들이닥쳤다.
꽈과과과과광!
화운의 연검이 요동치며 공세를 막았다.
하지만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욱신거리는 손아귀로 인해 화운이 인상을 쓴 순간.
퍽퍽!
대청 벽을 꿰뚫은 두 가닥의 무언가가 화운의 육신을 향해 쏘아져왔다.
화운이 공공무영비를 펼쳐 뒤로 물러나며 살펴보니 붉은 채대였다.
‘혈접! 그렇다면······!’
그렇다면 손아귀를 욱신거리게 만든 자는 혈쇄일 것이다.
광마종의 마인들 중 원거리 병기를 사용하는 자들은 그들 둘뿐이었으니까.
저벅저벅!
뻥 뚫린 구멍을 통해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쇠사슬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혈쇄였다.
사연홍의 앞을 막아선 자는 광마다.
그리고 그의 옆에 혈쇄가 합류했다.
우측 벽 너머에는 혈접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혈우, 혈검 그리고 사령은 바깥에서 움직이고 있다.
한 사람은 우측 벽 너머로, 한 사람은 뒤쪽 벽 너머에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지붕 위로 올라가는 게 감지되었다.
땅으로 꺼지지 않는 한 사방팔방이 완전히 막힌 것이다.
“왜? 대체 왜?”
사연홍이 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어린아이들을 납치해서 흑귀로 만든 니들은 죽어 마땅하니까.”
“뭐?”
“소나찰 사연홍! 넌 결국 사람이 되지 못하니까 이 자리에서 죽어라.”
싸늘히 말한 화운이 벼락같이 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