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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으로 무림지존-164화 (164/207)

#164. 끔찍하리만치 하기 싫은 말

화운이 마백의 머리를 베어버리자 기겁한 혈삭마가 당황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순간 화운이 혈삭마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동시에 움직인 무영투가 혈삭마가 끌고 온 이십여 명의 수하들을 쓸어갔다.

번-쩍!

검광이 번뜩이자 혈삭마가 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소맷자락 안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붉은 빛의 방어막을 쳤다.

혈삭!

물소의 힘줄을 꼬아 만든 일종의 밧줄이었다.

신검보도가 아니라면 결코 자를 수 없을 정도로 질긴데다 지금은 혈삭마의 내력까지 머금은 상태였다.

화운의 검격이 들이닥치자 충격음이 터졌다.

하지만 혈삭은 멀쩡했다.

그에 혈삭마가 안도하며 몸을 날려 도망치려고 땅을 박찼다.

“······!”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가 않자 혈삭마가 당황했다.

뻐버버버벅!

거의 동시라 할 만큼 둔중한 타격음이 잇달아 터지며 혈삭마의 수하들이 모조리 고꾸라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수하들이 모조리 당했다는 걸 깨달은 혈삭마는 살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바로 이때 그의 몸 안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뭐, 뭐냐! 좀 전의 검격이 몸 안을 베어버렸다는 것이냐! 그런 말도 안 되는······!’

혈삭마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게 당연했다.

절대검력!

완성경에 오른 절대검력이라면 걸리는 모든 걸 베어버렸겠지만, 지금 화운은 그 경지에 미치지 못했다.

하여 목표로 한 공간만을 베어놓았다.

마백이 그랬듯이 혈삭마 역시 그런 검공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해 무기력하게 당한 것이었다.

이때 무영투가 혈삭마의 곁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화운을 쳐다봤다.

화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안 돼!’

화운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본 혈삭마가 입 안으로만 소리친 순간 무영투의 철곤이 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뻑!

혈삭마가 그 자리에 픽 고꾸라졌다.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장원 밖에서 지켜보던 사갈마희 등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화운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힐끔 본 후 뒤돌아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 계속 그러고 있을래? 얼른 치워.”

무영투의 말에 사갈마희 등이 흠칫 정신을 차렸다.

***

“죽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사갈마희가 말했다.

그녀는 화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으나 다른 이들은 감히 화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만한 고수를 상대로 내 뜻대로 될 것 같아?”

“그럼 애초에 싸우질 말았어야 해요.”

“애초 니들의 시험이었잖아. 난 거기에 응해 그를 쓰러트린 것뿐이야.”

“그게 무슨······?”

“그들을 불러온 건 니들이고, 나와 싸움을 붙인 것도 니들이야. 어물쩍 발 빼려고 하지 마.”

화운의 말에 모두들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지만 이렇게 책임을 전가할 줄은 몰랐다.

사갈마희는 대꾸조차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화골장이 조심스런 태도로 물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저희들을 옭아맬 생각이었습니까?”

“아니 다 죽이려고 했어. 너희들을 없애버려도 세 방파가 돌아가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만나보니 그럭저럭 쓸 만해 보이는 것 같아서 한 번 기회를 준 거야.”

“······!”

기회를 주었다는 건 결과에 대한 대가가 있을 수 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모두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마음에 들어. 그럭저럭 쓸 만한 고수들을 데려와 주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화운이 말을 멈추자 결과가 마음에 들었다는 말에 안도하던 이들이 숨을 멈추고 쳐다봤다.

화운은 그런 사람들을 무심히 쓸어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의 모습은 마음에 안 드는군. 이런 상황까지 왔는데도 발뺌할 생각만 하다니 말이야.”

화운의 눈초리가 극도로 차갑다.

은연중에 내비치는 살기에 다섯 사람은 심장마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발뺌하려던 게 아닙니다!”

비서둔주가 고개를 넙죽 조아렸다.

그는 짧은 순간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여기서 발뺌하려다간 눈앞의 화운에게 이 자리에서 죽는다. 설사 산다 하여도 천종천마교에 죽을 수밖에 없다.

한 명의 무상과 한 명의 대마가 죽은 일에 연루되고도 살 생각을 한다면 천종천마교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천종천마교는 자신들의 권위에 생채기를 낸 자들을 결코 살려두지 않는다.

“발뺌하려던 게 아니라고?”

“예. 결코 아닙니다.”

화운의 물음에 비서둔주가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화운은 흑서담주와 암영총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른 생각이면 둘은 그만 가봐.”

“······!”

“······?”

화운의 말에 모두들 또 한 번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비서둔주조차 진심이냐는 얼굴로 쳐다봤다.

화운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무료한 표정으로 바꾸며 말했다.

“두 사람이 이끌던 방파는 그대로 두고, 지금 곧바로 난주를 떠나. 한번은 봐주겠다고 했으니 살려주겠다.”

화운의 말에 흑서담주와 암영총주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만 지었다.

화운은 그런 두 사람을 두고 비서둔주를 향해 말했다.

“저 둘이 떠나면 여기 우호법이랑 함께 가서 두 방파를 거둬들이도록 해. 우호법은 걸리적거리는 놈들이 있으면 싹 쓸어버리고.”

“존명.”

화운의 명령에 무영투가 힘차게 대답했다.

바로 이때였다.

“갈 수 없습니다!”

흑서담주가 소리쳤다.

그에 무영투가 철곤을 꺼내들었다.

“그럼 여기서 죽어야지.”

“거둬주십시오!”

흑서담주가 화운을 향해 꾸벅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암영총주 역시 그 자리에 넙죽 고개를 숙였다.

결국 두 사람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잠시 후, 화운은 세 방파의 주인들에게 명을 내렸다.

“자잘한 일들은 세 사람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 단 큰 돈이 걸린 사업이나 수하들을 대거 동원해야 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내게 보고하도록 해. 기존에 해왔던 사업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야. 알았나?”

“예.”

“존명!”

“그렇게 하겠습니다.”

“귀야방을 키우기 위해서는 고수들을 끌어들여야 하니까 상당한 자금이 필요할 거야. 거기에 투입할 자금을 어떻게 끌어 모을 것인지 세 사람이 상의해 봐. 세 사람이 따로 찬 주머니까지 내놓을 필요는 없고, 세 방파가 맞물려 있는 사업들을 어떻게 키울지 머리를 맞대보면 방법이 있을 거야.”

따로 찬 주머니는 허락한다는 말에 세 사람이 밝은 얼굴로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천종천마교에서 죽은 자들 때문에 찾아오면 이쪽으로 보내. 도움을 청했고 금전까지 바쳤는데 왜 그대로냐고 따지면 세 사람을 의심하지는 않을 거야. 의심하더라도 이쪽을 먼저 처리하려고 할 테니까 내가 있는 한 세 사람도 안전할 거야. 알아들었으면 물러가도록 해.”

사실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마백과 혈삭마가 죽은 일도 이쪽으로 떠넘기라고 하니 세 방파의 주인들로서는 썩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마음 놓고 물러날 수 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물러가자 화골장과 사갈마희가 남았다.

“이제 두 사람이 남았군.”

화운이 두 사람을 응시하며 고민하는 척했다.

기실 화운이 하려는 건 귀야방을 키우는 게 아니었다.

세 방파를 손에 쥐고 강시당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애들을 납치해 오라는 거래를 하기 위해 강시당의 누군가가 찾아오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강시당주를 꾀어낼 수 있을 테니까.

강시당주만 죽인다면 더 이상 흑귀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니 아이들을 납치할 일도 없을 거라는 게 화운의 생각이었다.

예전의 무위만 회복한다면 이럴 필요도 없이 그냥 쳐들어가 강시당주만 베어버리면 되지만, 그럴 정도의 무위를 회복하려면 적어도 일 년 이상은 더 수련해야 한다.

반면 아이들이 납치되는 주기는 반 년 정도밖에 안 남은 상황이라 수련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강시당주를 잡을 덫을 놓고 수련도 이곳에서 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런 화운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화골장과 사갈마희는 화운의 처분만 기다렸다.

“화골장이라고 했나?”

“예.”

“주색잡기 좋아하나?”

“아닙니다.”

“돈은?”

“쓸 데도 없습니다.”

“술도 여자도 도박도 좋아하지 않고 흑서담의 뒤나 봐주고 있었다고? 그럼 둘 중의 하나로군. 어느 곳인가의 간자이거나 천하에 갈 데가 없는 처지이거나. 어느 쪽이지?”

“난주에는 저 같은 이들이 수십 명은 됩니다. 그들 대부분은 천종천마교에 들어가려고 왔다가 발이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자들입니다.”

“천종천마교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오랫동안 고인 물이라 새로운 물이 흘러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다 보면 어느 순간 수중에 돈이 떨어집니다. 그럼 그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합니다. 누군가를 죽여 달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누군가를 지켜달라는 일, 저처럼 운이 좋은 이들은 크고 작은 방파의 뒤를 지켜주기도 합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낭인이 되는 게 낫겠군.”

“다들 한 번쯤은 그 생각을 합니다. 낭인을 무시해서 혹은 천하를 떠도는 게 싫어서 각자의 이유로 거부하고 미루다 보면 시간만 갑니다. 그리고 각자의 생활에 삶에 익숙해져 버립니다. 그때부턴 난주에 완전히 발이 묶이게 됩니다. 누구도 떠나지 못합니다. 죽어서조차 난주의 어느 시궁창에 처박히지요.”

처량한 신세 이야기가 화골장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마치 준비된 대답 같았지만 화운은 무시하고 물었다.

“천종천마교에 들어가려고 한 이유는 뭐지?”

“다들 각자의 이유가······.”

“그쪽 말이야. 그쪽은 무슨 이유로 천종천마교에 들어가려고 한 거지?”

“천종천마교가 천하제일방파이기 때문입니다.”

“야심도 야욕도 없으면서 천하제일방파에는 관심이 있다는 건가?”

“무인이라면 누구나······.”

“그런 대답으로는 천종천마교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데?”

“······.”

화골장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화운은 그 얼굴을 직시하며 말했다.

“간혹 멍청한 놈들은 큰물에서 노는 게 최고라며 여기저기 굽실대며 들어가려고 난리지. 근데 그쪽은 그렇게 멍청해 보이지 않아. 그러니까 다른 이유를 대봐.”

“간자로 의심하는 겁니까?”

“간자 노릇을 하려면 이쪽처럼 능글맞아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잖아.”

화운이 사갈마희를 턱짓하며 말했다.

“음? 지금 제가 간자라고 의심하는 건가요?”

사갈마희가 놀랍다는 얼굴로 말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니까 그렇게 과민반응 보이지마. 설마 진짜 간자는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전혀 아니라고 말하는 사갈마희의 두 눈이 이채로 반짝였다.

‘뭐야, 장난할 줄도 알아? 지금까지의 모습은 전부 가짜였다는 거잖아! 그래, 왠지 그럴 것 같았어. 저 얼굴······ 저런 얼굴로 그렇게 얼음처럼 굴면 안 되는 거거든!’

사갈마희의 얼굴에 점점 눈웃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화운은 얼른 화골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단한 마인도 아니고, 천하일통 같은 엄청난 야망을 가진 것도 아니고, 멍청한 놈들처럼 큰물에서 놀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돈에 여자에 환장한 것도 아니고······ 대체 이유가 뭘까? 천종천마교에 들어가려는 이유가 정말 궁금하군.”

“꼭 말해야 합니까?”

“밝히기 싫으면 그냥 가봐. 약속한 대로 그냥 보내줄 테니까.”

“······.”

잠깐 침묵하던 화골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화운이 갑자기 인상을 썼다.

‘저 뒷모습, 누구랑 정말 닮았어!’

화운은 축 처진 화골장의 어깨를 응시하며 내던지듯 물었다.

“사람을 찾아 온 건가?”

“······!”

화골장이 우뚝 멈췄다.

“대답을 못하는 걸 보니 맞군.”

화골장은 다시 움직이지 못하고 두 주먹만 움켜쥐고 있었다.

화운은 그 모습에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흑서담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것도 그 이유와 관계가 있나?”

화골장이 돌아섰다.

얼굴은 잔뜩 굳었는데 두 눈엔 놀람이 가득했다.

“다시 앉지.”

화골장은 뭔가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다가와 다시 앉았다.

“운명 같은 게 정말 있나봐. 그것도 참······ 싫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화운은 두 사람을 번갈아본 후 사갈마희의 얼굴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사갈마희는 하오문에서 왔어. 간자지. 걸리면 처참하게 죽을 거야.”

“너무하네, 정말.”

사갈마희가 화골장을 흠칫 돌아본 후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화운은 모른 척 하며 화골장을 돌아봤다.

“아마도 화골장은 아이를 구하려고 왔을 거야. 핏줄인지 제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아이를 구하려고 왔다는 게 알려지면 흑서담주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비서둔주와 암영총주 역시 마찬가지고. 난주를 떠나지 않는 한 화골장도 죽는다고 봐야겠지.”

이번엔 화골장이 크게 놀라 사갈마희를 경계한 후 화운을 쳐다봤다.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는 얼굴이었다.

“반로환동했다고 했잖아. 내가 오래 살아서 아는 게 많아. 천종천마교는 물론이고, 흑서담, 비서둔, 암영총 그리고 하오문까지 모르는 게 없지.”

화운은 사갈마희에게 눈길을 돌렸다.

“믿지 않는 눈치네.”

“좀······ 그렇잖아요.”

“사갈마희는 난주를 떠날 때가 되었어. 그래서 내가 난리를 쳐주면 그 틈에 사라질 거야. 맞지?”

“······!”

놀라는 사갈마희.

화운은 화골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화골장은 내가 난리를 치는 게 반갑지 않을 거야. 죽을 수도 떠날 수도 없을 테니까. 어떻게든 난주에 남아서 천종천마교에 들어가 아이를 찾아야 하니까.”

두 사람 다 굳은 얼굴로 화운을 쳐다봤다.

화운은 그런 두 사람을 다시 한 번 쓸어본 후 화골장에게 눈길을 두었다.

그리고 끔찍하리만치 하기 싫은 말을 해야 했다.

“화골장.”

“······?”

“아이는······ 포기해. 이미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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