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화산파
부모는 자식이 달라져도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다.
그 거리가 한참 멀어도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한참 텃밭을 가꾸던 선우비연이 허리를 세우고 서서는 서 있기만 하자 화중옥도 무슨 일인가 싶어 일어섰다.
“누구지? 우리 집으로 오는 건가?”
화중옥은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제아무리 자식을 사랑하더라도 아비는 어미의 섬세함을 따라가지 못하는 법이다.
화중옥은 좀 더 가까워져서야 화운을 알아봤다.
“운이? 부인, 저기 저······!”
“예, 운이가 돌아오고 있어요.”
“운이가······.”
화중옥은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꾹 참았다.
고지식한 면이 있어 부인 앞에서 경망스럽게 보일까 봐 억지로 참고 기다린 것이다.
그랬더니 선우비연이 얼른 걸어갔다.
화운과 함께 오고 있는 이가 무영투라는 걸 알아보고는 가만히 서서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제야 화중옥도 얼른 선우비연의 뒤를 따라 화운에게로 향했다.
“저 돌아왔습니다.”
두 사람 앞에 도착한 화운이 그 자리에서 절을 올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선우비연은 화운이 일어나자 무영투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성질 급한 이 녀석 때문에 무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당치 않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으니 아이가 부모를 먼저 본다고 하여 무례일 것까지는 없소. 여튼 간만에 봅니다 그려.”
무영투가 점잖게 말했다.
사실 십 년 후의 무영투는 점잖음과는 거리가 좀 있는 편이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십 년 빠르게 화운을 만났고, 나름 신분세탁을 한답시고 무게를 잡다보니 조금씩 무림명숙다운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었다.
“혹여 무영투 어르신인 것이오?”
화중옥이 선우비연을 향해 물었다.
“예. 맞습니다.”
선우비연이 대답하자 화중옥이 한 걸음 다가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운이 녀석 애비입니다. 부족한 자식 놈을 많이 가르쳐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스승은 따로 있고 또 워낙 잘난 놈이라 가르쳐주고 말고 할 것도 없소. 이 녀석과는 장차 큰일을 함께 할 사이이니 그렇게만 알아두면 될 것 같소이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아무리 잘난 사람도 홀로 모든 일을 다 할 순 없는 법이지요. 하물며 이제 열두 살인 놈입니다. 옆에서 지켜봐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어줄 때입지요.”
“이런 더는 낯부끄러워 못 듣겠습니다. 간만에 보는 아들이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구려. 난 이곳에서 경치나 감상하고 있겠소.”
계속 듣기가 민망해진 무영투가 얼른 화운의 등을 떠밀었다.
잠시 후, 세 가족이 방안에 함께 모여 앉았다.
“얼굴에 뭘 뒤집어 쓴 것이냐?”
화운을 빤히 바라보던 화중옥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뇨.”
“그럼 왜 그렇게 생긴 것이냐?”
“아버지 눈에는 이상해 보입니까?”
“그게 아니라 네 엄마가 미인이긴 하다만 지금 같은 얼굴이 태어날 정도는 아니지 싶어서 그런다.”
“하긴 아버지 얼굴을 보면 이 얼굴이 과하긴 하지요.”
“욘석아, 아빠도 젊었을 땐 잘생겼다는 소리 좀 듣곤 했다.”
“촌에서나 그랬겠지요.”
“그래, 뭐, 그랬긴 했다만 여튼 이상이 있는 건 아니지?”
“예. 환골탈태를 해서 이렇게 된 겁니다.”
화운은 환골탈태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화중옥은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화운이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내놓았다.
“여튼 몸에는 이상이 없고 좋은 거라고 알아듣겠다. 그건 그렇고, 자식의 일을 어찌 아비가 모르고 넘어가겠냐며 엄마가 네가 겪었던 일을 모두 다 이야기해 주었다.”
“······!”
화운은 걱정스런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봤다.
“아빠는 당최 믿기지가 않는다. 네 엄마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한다만, 네 녀석이 내 아들인 것만은 틀림없겠지?”
“예. 언제나 두 분 자식입니다. 두 분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됐다. 이건 네가 장성하면 말해주려고 했던 건데, 사내는 아무리 힘겨워도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뒤를 돌아볼 때는 목표한 바를 이뤘거나, 최선을 다해 그 끝에 다다랐을 때여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가기 전에 고민하고, 행동하기 전에 살펴본다면 돌아볼 일도 없을 것이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해줄 말은 이것뿐이다. 너도 다 컸고, 네가 가는 길은 아빠의 길과는 다르니 이제 스스로 가길 바란다.”
“감사합니다. 항상 유념하겠습니다.”
“녀석, 진짜 다 커버렸네.”
화중옥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화운은 뭘 아쉬워하는지 알기에 몹시 미안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네 엄마 말대로 우릴 잊지 않고 찾아와 주어 고맙다. 우리가 잘못 가르치지 않은 것 같아 기쁘기도 하구나.”
마지막으로 화중옥의 얼굴에 떠오른 건 기특함이었다.
화운은 그제야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무공은 얼마나 성취한 것이냐?”
선우비연이 처음으로 물은 건 무가의 여식답게 무공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어딜 가든 제 한 몸 정도는 스스로 건사할 정도는 됩니다.”
“말하는 걸 보니 갈 데가 있는 모양이구나?”
“예.”
“언제쯤 볼 수 있느냐?”
“늦어도 이 년 후에는 뵐 수 있을 겁니다.”
화운의 대답에 선우비연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열 살에 헤어져 이 년 만에 만난 것인데, 또다시 이 년이나 떨어져야 한다니 감정이 북받친 것이다.
“녀석, 또 다시 이 년을 기다리게 만드는구나.”
화중옥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죄송합니다.”
화운은 분위기가 자꾸만 무거워지자 화제를 바꾸고자 품에서 옥병을 꺼내놓았다.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훗날 선우세가로 찾아가셔야 할 일이 생길 겁니다. 그때 세가로 가셔서 숙모님께 복용시키십시오.”
“그 일, 맞다. 그래서 말인데 미리 찾아가서 조심하라고 하는 게 어떻겠느냐?”
화중옥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원래는 그게 맞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운은 고개를 저었다.
“외숙부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면 아버지께서 숙모님을 낫게 해드리는 게 좋습니다. 또 주화입마에 들었다가 완치를 하게 되면 전화위복처럼 숙모님께도 도움이 됩니다.”
사실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른다.
혹시라도 고리타분한 기질이 꽤 있는 화중옥이 아프지 않게 미리 알려드리는 게 도리라고 할까봐 잔꾀를 부린 것이었다.
“알겠다. 네 말대로 하마.”
화중옥이 보기 좋게 넘어가자 화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선우비연이 물었다.
“언제 떠날 참이냐?”
“간만에 뵈었는데 어머니께서 해주신 밥은 먹고 가야지요. 내일 가겠습니다.”
“그러려무나. 어르신을 너무 기다리게 했구나. 이제 가서 모시도록 하자.”
선우비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 아침.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화운과 무영투는 작별을 고하고는 다시 먼 길에 올랐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것이냐?”
“사천과 섬서를 거친 후에 마도, 마인들의 땅으로 가야 합니다.”
***
섬서성 화산파.
화산파 장문인 임장홍은 생전 처음으로 들어보는 문파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영천이라고?”
“예. 무영천의 천주와 우호법이라는 자들이 산문 앞에 나타났사온데 수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뭐가 수상하단 말이냐?”
“피투성이가 된 세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피투성이?”
“예. 두 다리 빼고는 전신이 망가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을 앞세워 본파에 시비를 걸려고 왔단 말이냐?”
“내방한 연유는 장문인을 뵙고 말씀드리겠다고 하는데, 배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흠, 알았다. 일단 안으로 들이라 하고, 무진각에 일러 일대제자들로 하여금 본파 일대를 살피라고 하여라.”
“존명.”
임장홍은 제자가 밖으로 사라지자 천천히 몸을 일으킨 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런 후 애검 청명을 쳐다본 후 그냥 밖으로 나갔다.
감히 화산파 경내에서 사달을 일으킬 자들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임장홍이 밖으로 나가 접객당으로 향하다 보니 한 중년인이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화영객 허정양이었다.
“장문인, 불청객들이 있다고요?”
“무영천이라는데 들어본 적이 있는가?”
“무영천이오? 그런 문파도 있답니까?”
“무영천의 천주와 우호법이 직접 내방했다고 하여 일단 안으로 들이라고 하였네.”
“신분이 확실치도 않은데 검도 없이 만나십니까?”
“본파의 경내에서조차 검을 차고 맞이한다면 우스워 보일 것 같아서네.”
“그도 그렇군요. 혹여 사달이 벌어지면 제가 우선 막을 테니 장문인께선 제자들의 검을 빌리십시오.”
“그렇게 함세.”
두 사람은 곧장 접객당으로 향했다.
잠시 후 접객당에 도착해보니 이대제자들의 삼엄한 경계 하에 다섯 사람이 보였다.
화려한 복색의 일노일소와 피투성이 몰골의 세 중년인들이었다.
“화산의 장문인이오. 무영천에서 오셨다고요?”
임장홍은 노인을 향해 공수하며 물었다.
그런데 웬걸 노인은 가만히 있고 열두어 살이나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입을 여는 것이 아닌가.
“무영천의 천주입니다. 이쪽은 우호법이시구요.”
“아, 실례를 하였습니다.”
임장홍이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러자 무영천의 천주 화운이 빙그레 웃었다.
“산문을 넘는 것조차 간단치 않을 줄 알았는데, 장문인을 이렇게 빨리 뵐 줄은 몰랐습니다.”
“일파의 주인께서 내방하셨으니 주인 된 도리로 직접 맞이해야지요. 헌데 무슨 연유로 본파를 내방하셨는지요?”
화운의 말에 응대하면서 임장홍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말하는 태도가 아이답지가 않아서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그 짝인 건가?’
임장홍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화운이 세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안 일대에서 나쁜 짓을 도맡고 있는 흑도방파의 우두머리들입니다.”
“그렇습니까?”
“흑도의 무리들을 어찌 그냥 두는 것이냐고 물으려고 찾아온 게 아니니 그리 언짢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뽑고, 뽑아내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자라나는 게 흑도의 무리들인데 그 많은 자들을 모조리 죽일 순 없다는 것쯤은 잘 압니다.”
“허면 무슨 일로?”
“죽이진 못해도 이 자들이 하는 짓만큼은 경계해야 한다는 말씀을 전하고자 왔습니다.”
임장홍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임장홍이 듣기에는 결국 흑도의 무리를 방치한 것 때문에 따지려고 온 것처럼 여겨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허정양은 금방이라도 발끈하여 소리칠 기세였다.
“그자들이 무슨 짓을 하였기에 한나절이나 떨어져 있는 본파에까지 따지러 온 것인지 한번 이야기해 보시오.”
임장홍이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화운은 자신이 끌고 온 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자들은 삼 년에 한 번씩 수백 명의 아이들을 납치하고 있었습니다.”
“······!”
임장홍은 물론이고 허정양뿐만 아니라 경계를 하고 있던 화산의 제자들까지 깜짝 놀랐다.
납치, 그것도 아이들을, 수백 명씩이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누구 하나 입도 벙긋하지 못할 충격이 몰아쳤다.
대화산파의 장문인 조차 말문이 막혀 버릴 정도의 강한 충격이었다.
“너희들이 한 짓을 화산 장문인께 낱낱이 고하라.”
화운의 말에 세 사람이 임장홍을 향해 덥석 무릎을 꿇었다.
“소인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맞습니다! 따르지 않으면 소인들은 벌써 죽었을 겁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세 사람이 임장홍을 향해 굽실거렸다.
그에 허정양이 호통을 쳤다.
“어서 고하지 못할까!”
허정양이 내력을 실어 호통을 치자 기세가 눌린 세 사람이 다급히 말했다.
“아이들을 납치했습니다! 삼 년에 한 번씩 그자가 찾아왔고 소인들은 두 당 열 냥을 받아 아이들을 납치해 넘겼습니다.”
“그자가 누구냐?”
“소인들도 그자가 누군지는 모릅니다. 워낙 무서운 자라 정체를 물을 엄두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이들을 감숙으로 보내라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 온 것이 아닐지······.”
차마 언급하기조차 두렵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에 허정양이 앓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교······.”
“아이고, 소인들은 그 이상은 모릅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세 사람이 넙죽 고개를 조아려댔다.
그 모습에 임장홍이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자 화운이 넌지시 불렀다.
“장문인.”
임장홍이 화운을 돌아봤다.
“이 같은 일은 사천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여 그쪽의 일은 청성파에 부탁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
“이자들의 처리는 화산에서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자들을 심문해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만, 아이들의 납치를 사주하는 자가 또다시 방문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자를 잡아 다시는 그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아주십시오.”
화운의 말에 임장홍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길 잠깐.
“무영천의 이름을 알릴 기회일 텐데요?”
“장문인, 감숙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감숙에서도요?”
“그곳에 원흉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곳에 가겠다는 겁니까?”
“그곳까지 쳐들어갈 간담은 없습니다. 다만 막을 수 있는 데까지는 막아볼 생각입니다.”
임장홍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화산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대단하다는 칭찬의 말도, 일개문파가 그들의 안방에서 무얼 할 수 있겠느냐는 염려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임장홍은 화운의 발걸음을 붙잡을 수도 없었다.
화운의 포권에 응하여 마주 포권만 하였다.
“제가 배웅해 드리겠소.”
허정양이 나서서 화운과 무영투를 산문 밖까지 직접 안내하였다.
그렇게 화운과 무영투가 물러갔으나 임장홍은 적잖이 충격 받은 얼굴로 피투성이 몰골의 세 사람만 내려다봤다.
‘화산은 자리를 지키는 것 외에 무얼 하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