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백리연
열한 살의 백리연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다.
이 년 전에 영약을 보내주어 환골탈태를 한 덕분에 무공이 강해진 것은 물론이고 피부와 얼굴도 더욱 좋아졌다.
거울을 볼 때마다 얼굴도 모르는 무영천주에게 감사를 표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자신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정말 마도와의 싸움에 대비하려는 것뿐인지.
많이 궁금했고, 다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 궁금증과 시간이 지날수록 나날이 더 커져가는 호기심 때문에 오매불망 잠을 못 이루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년.
궁금증에 잠 못 이루던 시간이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 궁금증을 풀어줄 무영천주를 만나게 되었다.
자신만큼이나 어렸다.
그래서 반갑고 좋았다.
자신만큼이나 대단한 미소년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기뻤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눈길 한 번 준 것이 다였다.
단 한 마디의 말도 걸지 않은 채 오라버니와만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백리연은 갈수록 입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화운의 입장에서는 백리연에게 말을 거는 것부터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가주님과 백리 소저를 구해주었을 때와는 상황이 달라.’
지나친 관심은 딸 가진 부모 마음에 경계심을 일으키게 만든다고 들었다.
그러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가야 한다.
백리세가주님을 안심시키고, 백리연의 마음이 자신에게만 향하도록 만들어야한다.
이제는 시간을 되돌리지 못하니 그녀를 얻기 위해서는 절대로 어긋나지 않도록 계획을 세워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네가 연이구나. 난 화운이야.”
화운이 백리연에게 눈길을 주고 인사를 건넨 건 한참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샐쭉하게 쳐다보던 백리연의 얼굴이 더욱 샐쭉하게 변했다.
“왜 반말해요?”
“······!”
화운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백리연의 입에서 너무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한 살.
소저라고 칭하기엔 너무 어렸다.
귀여운 얼굴 때문에 소저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연아, 유성이 사촌 형이라는 걸 너도 들었잖으냐. 너보다 한 살 위니까 오빠처럼 대하거라.”
백리세가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예쁜 딸이라 화도 내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유성이 사촌 형이지, 제 오빠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전 가문의 핏줄이기 전에 그냥 백리연으로 존중받고 싶단 말이에요.”
또박또박 자신의 불만을 말하더니 무영투를 향해서만 포권하고는 나가버렸다.
‘저 나이에 원래 저렇게 당돌했을까? 아니면 환골탈태 한 것 때문에 성격이 달라진 걸까?’
화운이 백리연이 사라진 문을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자 백리세가주가 헛기침을 했다.
“험험! 선배님께 인사하고 나가는 걸 보면 아시겠지만 막되 먹은 아이는 아니랍니다.”
“귀엽네, 귀여워. 저런 딸을 가졌으니 전전긍긍하느라 하루하루 어찌 밤잠 주무시는 겐가?”
“하아, 말도 마십시오. 밖으로 나가는 게 무섭습니다. 세 살 먹은 사내애만 봐도 도둑놈처럼 보일지경입니다.”
“껄껄껄! 이해하네. 이해해. 나라도 그랬을 것 같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아나?”
“그런 방법도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그런 방법을 아시면 이 아둔한 후배 좀 일깨워주십시오. 이렇게 청하겠습니다.”
백리세가주가 포권까지 하며 청했다.
그에 강호무림 선배 노릇에 맛 들려 있던 무영투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빨리 제 짝을 찾아주는 것이라네. 아주 잘 어울리는 짝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화운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무영투.
그의 시선을 따라 화운을 바라보는 백리세가주의 얼굴이 복잡 미묘하게 변하는 순간.
화운이 백리연을 쫓아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에 백리세가주가 따라 나가려고 하자 무영투가 잽싸게 붙잡았다.
“아이들에겐 아이들만의 세상이 있는 법이라네.”
“선배님······!”
“저 녀석들은 단지 친해지겠다는 것뿐인데, 어른들의 눈으로 끼어들어서야 쓰겠는가.”
백리세가주는 말도 못하고 눈만 끔벅거렸고, 무영투는 정말 선배가 된 것 같아 스스로를 흐뭇해하며 히죽히죽 웃었다.
바람이 불었다.
세찬 바람이었다.
그 바람과 함께 한 사람이 앞을 막아서자 백리연은 깜짝 놀랐다.
“뭐, 뭐에요?”
“미안하다.”
“······!”
다짜고짜 사과부터 하는 화운.
백리연은 그런 화운을 빤히 쳐다봤다.
“널 무시해서가 아니야. 어른들 흉내를 내기에는 우리가 너무 어려서 그런 것뿐이다. 그래도 네가 마음 상했다면 미안하다.”
“······.”
“백리연.”
화운이 이름을 부르자 백리연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널 오랫동안 알고 있다. 누구보다 널 존중하고, 누구보다 너의 가까이에 있고 싶다. 매일매일 보슬비처럼 다가가겠다는 약속. 너무나 소중한 약속이지만 아직은 지키지 못해서 늘 미안했다. 하지만 늦더라도 반드시 지킬 거다. 네가 더 성장해서 누구의 보살핌도 필요 없을 나이가 되면 그땐 항상 네 곁에 내가 있을 거다. 그러니 그때까지, 오늘 나한테 실망했던 마음을 그때까지만 미뤄다오.”
열한 살의 백리연에게는 너무 갑작스럽고 어려운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화운은 더 이상 어긋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받아.”
화운이 자신의 검을 내밀었다.
지금까지 수련하는 데에 사용했던 이무기 비늘로 만들어진 검이었다.
열 살 전후의 아이에게 맞도록 짧은 길이로 제작되어 있어 백리연에게도 딱 맞았다.
얼떨결에 검을 받아든 백리연은 아무 말도 못하고 화운만 쳐다봤다.
“몇 년 후에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때까지 날 잊지 말아줘.”
화운은 그 말을 끝으로 웃어주었다.
백리연의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지는 밝은 웃음이었다.
***
화운과 무영투는 반 시진 만에 백리세가에서 나왔다.
백리세가주와 백리명이 하루라도 묵고 가라며 붙잡았으나 이 년 만에 부모님을 뵙기 위해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자 하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했다.
두 사람은 백리세가를 나와 다시 복건으로 향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한 대의 마차와 이십여 기의 인마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차에는 우문검가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자연 화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딸깍!
마차 문이 열렸다.
그리고 우문위가 내렸다.
지금의 우문위는 십년 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창 장년의 시기였다.
“뵙고 싶어 무례를 범했소. 우문검가의 가주 우문위요.”
화운의 외모에 크게 놀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인사를 하는 우문위.
그의 눈은 쉴 새 없이 화운과 무영투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그리 대단한 분께서 무슨 일이시오?”
무영투가 나섰다.
화운과 백리세가주가 나누던 대화를 들어서 화운이 우문검가를 좋지 않게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영천주이시오?”
“우릴 아시오?”
“다른 세가에는 찾아가셨으면서 본가엔 오시지 않아 서운하외다.”
“생면부지이거늘 어찌 찾아간단 말이오?”
“백리세가와는 잘 알던 사이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참으로 말씀을 이상하게 하시는구려. 우리가 누굴 찾아가던 그게 귀가와 무슨 상관이라고 이런 무례를 범하는 것이오?”
우문위는 상대가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느꼈다.
하여 아예 대놓고 물었다.
“무영천은 어떤 곳이오? 백리세가와 가깝다면 본가와도 아주 인연이 없다고 할 수 없어서 묻는 것이니 경계하지 않으셨으면 하오.”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을 짓는 우문위.
하지만 무영투는 오랫동안 천하를 떠돌아 경험이 많고 노회하였다.
“귀가와는 일면식도 없거니와 아무런 인연도 없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잖소.”
“무뢰배가 지나가던 아낙을 희롱해도 인연이랄 참이오?”
“본가를 너무 무시하는구려.”
“허어! 적반하장이로다! 다짜고짜 앞을 막아놓고는 누가 누굴 무시한다고 그러는 것이오!”
“뵙고 싶어서 무례를 범했다고 사과했잖소.”
“우문가는 사과만 하면 되는 거요? 우문가의 체면을 보아 무례를 당해도 전부 이해해 주어야 한다는 거요? 참으로 대단하오! 대단해!”
무영투의 언성이 커지고 빈정거리기까지 하자 우문위의 미간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오가던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지켜보고 있어 함부로 검을 뽑을 순 없었다.
바로 이때 화운이 무영투를 불렀다.
“우호법.”
“예. 천주님.”
무영투가 화운을 향해 천주라고 하자 우문위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이후에 벌어졌다.
“갈 길이 멉니다.”
말이 끝난 순간 화운의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대기가 들어 올려주듯이 천천히 부상을 하자 우문위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그사이에 일 장 높이로 부상을 한 화운은 뒷짐을 지고 우문위를 내려다봤다.
자신을 발치에 두고 내려다보는 태도에 우문위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 순간 무영투마저 천천히 부상하여 우문위를 내려다봤다.
“우호법.”
“예.”
“쓸모없는 일로 시간을 소모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조아리는 무영투.
우문위는 쓸모없는 일이라는 말에 발끈하여 한 마디 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화운이 일섬이 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나를 보면 둘을 안다고 했다.
경신술이 저 정도일진데 다른 무공은 또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화운의 엄청난 경신술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문위.
“우문가주, 다시는 무례를 범하지 마시오. 그땐 후회하게 될 테니까.”
무영투가 낮은 목소리로 엄포를 놓은 후 일섬이 되어 화운의 뒤를 쫓아 사라졌다.
우문위는 닭 쫓던 개처럼 멍청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복건성 남평.
남평 외곽에서 한 식경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
화운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와, 진짜 촌구석에서 태어났구나!”
무영투가 놀렸다.
사실 촌이라고 놀림 받을 일도 아니지만, 촌구석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도 아니었다.
복건성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발달한 남평의 중심에서 반 시진 거리이니 말이다.
오는 내내 입을 심심해하던 무영투가 작은 마을을 보고는 한 마디 던져본 것이다.
물론 이 정도에 발끈해서 무영투를 재밌게 해줄 화운이 아니었다.
들리지 않은 것처럼 무시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화운을 보고도 마을 사람들이 경계하며 움츠렸다.
달라진 화운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데다 두 사람의 복장이 과하게 화려한 탓이었다.
화운은 걸음을 멈추었다.
“저 운입니다. 저 위쪽 화 씨네 아들이요.”
마을 사람들은 화운의 집을 ‘화 씨네’라고 부르곤 했다.
그제야 화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정말 운이구나! 운이였어!”
“언제 이렇게 컸누?”
“어려서부터 눈망울이 남다르더니 성공했구나!”
“허어! 이 옷 좀 보게. 비단이야, 비단!”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용포는 아무나 입는 게 아닌데······.”
사람들이 화운을 두고 저마다 한 마디씩 할 때 칼칼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뭐랬어? 이놈 크게 성공할 놈이라고 했지! 불알이 크게 태어난 걸 보니 씨를 많이 뿌리겠더라고. 씨를 많이 뿌리려면 당연히 성공할 수밖에 없는 법이거든. 저 생긴 것도 좀 보라고. 계집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 게 생겼잖어!”
어려서부터 무공을 수련한답시고 집밖으로 나가지 않아 마을 사람들과 왕래가 많지 않았지만, 집이 가까웠던 감나무집 노인이 툭 하면 찾아와 어른들에게나 할 소리를 하곤 했다.
화운은 반가운 얼굴로 얼른 다가가 꾸벅 허리를 조아렸다.
“영감님, 정정하시네요.”
“욘석아, 늙은이한테 정정하다는 말은 어째서 빨리 안 죽고 밥만 축내느냐는 소리다.”
“에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아시잖아요.”
“그런 뜻이고, 저런 뜻이고 간에 열두 살이더냐?”
“예.”
“옷차림을 보니 새끼용이 탈각한 모양새다만, 아직 멀었다. 계집은 열여섯이면 우주의 기운을 받아 가장 순수한 꽃으로 피어나지만, 사내는 다르다. 열일곱은 되어야 비로소 몸 안의 약이 튼실해지는 법이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함부로 교접하면 안 된다.”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제 몸을 잘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싹퉁머리 없이 말하는 걸 보니 아는 것 같구만. 여튼 알아들은 것 같으니 얼른 가봐라. 네놈 애비가 아침마다 싸리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미는 꼴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예.”
화운은 감나무 노인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서도 꾸벅 인사한 후 집으로 향했다.
그 뒤를 무영투가 따라갔다.
“저 늙은인 뭐지?”
“뭐긴 뭐야, 딱 보니 노복인 모양이구만.”
“노복까지 데리고 다닌다고? 허허, 정말 크게 출세했구나!”
저만큼 가던 무영투가 발끈하여 달려오려다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