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무영투
무영투는 도둑답게 사람을 믿지 않았다.
게다가 대환단 때문에 소림의 눈과 귀를 피해야 했다.
무영투는 누구도 자신을 쉽게 찾지 못하도록 일정한 거처를 두지 않았고, 어디든 열흘 이상은 머물지 않았다.
그 때문에 늘 새로운 곳에서 잠깐씩 머물렀고, 그러다 보니 그의 곁에는 사람이 없었다.
끊임없이 흘러간 세월은 무영투를 외롭게 만들었고 늘 신나 하던 도둑질조차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러던 때에 제천마존의 비동이 열렸고, 그곳에서 화운을 만나 정말 오랜만에 재밌는 일을 알게 되었다.
무영투는 화운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매번 다시 돌릴 때마다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려달라고 했다.
화운과 그렇게 약조하며 부풍무영을 가르쳐주었고, 대륙시까지 내놓았다.
그리고 한번은 그 걸로도 안심이 안 되는지 천하로 나갔을 때 자신을 찾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하남성 낙양 동쪽에 가시면 백마사가 있습니다. 백마사 주지스님께 대웅전 뒤뜰에 있는 석탑을 옮겨놓고 싶지만 주인이 화를 낼까봐 못 하겠다고 하십시오. 그러면서 혹여 주인이 찾아오거든 스승님을 찾아오라고 담가장의 위치를 알려주십시오. 그럼 무영투 영감님이 틀림없이 찾아갈 겁니다.”
“백마사 주지와 무영투가 아는 사이인 모양이구나?”
“도둑들 세계에서 흔히 말하는 장물아비입니다. 좋게 말하면 무영투 영감님 스승과 함께 가난한 분들을 돕는 분이시고요.”
“······?”
“무영자라는 분을 아십니까?”
“무림에 관심이 없었다.”
“무영투 영감님의 스승이십니다. 그분과 백마사 주지스님께서 막역지우이시고, 오래전부터 무영자 어르신이 훔쳐온 물건들을 돈으로 바꿔 가난한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좋은 분들이구나.”
“물건을 잃은 사람들이야 죽이고 싶겠지만, 제가 보기에도 좋은 분들입니다. 여튼 무영투 영감님이 스승님을 찾아오면 여기를 알려주십시오.”
“그러마. 한데 정말 괜찮겠느냐?”
담대후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화운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석조정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 몸으로는 처음 펼치는 것인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끝난 순간 화운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공공무영비를 펼친 것이다.
일단공 십보분영부터 시작해서 오단공 질풍무영까지 펼치자 거센 질풍이 비동에 흙먼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육단공 수상무영부터는 지금의 몸으로는 무리여서 더 이상 펼치지 않고 멈추었다.
담대후는 손을 휘둘러 손바람을 일으켜 흙먼지의 소용돌이를 위쪽으로 날려 비동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는 놀란 눈으로 화운을 응시했다.
“무영투 영감님께 배웠던 공공무영비입니다. 이 몸으로는 상승의 절예까지는 펼치지 못하겠습니다.”
멋쩍게 웃으며 말한 화운은 석조정자로 들어가 검 한 자루를 가지고 나왔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두 자루의 검을 구입했는데, 그중 열 살짜리 아이의 몸에 맞는 길이의 검이었다.
화운은 검을 뽑아들고는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배운검, 비응삼십이검, 사혼구검까지.
각 검법들의 후반부 절초들은 생략했으나 담대후 자신이 익히고 있는 검법이거늘 어찌 몰라볼까.
담대후는 불쑥 찾아드는 놀람을 애써 떨쳤다.
“잘하는구나.”
“이제는 제 한 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승님께서 사주신 육포들이 있으니 한 달 정도는 이곳에 머물러도 됩니다.”
“그 이후엔 어쩔 생각이냐?”
“무영투 영감님이 도와줄 겁니다.”
“그것보다는 담가장이 낫지 않겠느냐?”
담대후는 열 살짜리 아이를 홀로 두고 가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화운에겐 이곳에서 수련하는 게 좋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지금 제가 해야 할 건 육체를 성장시키는 것과 혼원여의공을 대성하여 중단전을 여는 것입니다. 혼원여의공을 대성하는 건 한 번 가본 길이지만 집중이 필요합니다.”
“······.”
담대후는 입을 열지 못했다.
화운의 생각을 이해는 하지만 그럼에도 홀로 남겨두기가 염려스러웠다.
“계절마다 무영투 영감님을 통해 안부를 전해드리겠습니다.”
“하아,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 가끔씩 찾아오도록 하마.”
“예.”
일다경 후 담대후가 떠났다.
화운은 석조정자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곧장 수련에 들어갔다.
혼원여의공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
담대후가 떠나고 이십 일이 지났을 때다.
작은 체구의 중노인이 비동 안으로 조용히 내려왔다.
바람 한 점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극상승의 경신법을 발휘하여 바닥에 착지한 중노인은 한쪽에 나뒹굴고 있는 거대한 이무기 사체에 크게 놀랐다.
이무기의 몸에 잔뜩 붙어 있는 비늘을 본 중노인은 그쪽으로 한달음에 달려가려다 우뚝 멈췄다.
돌로 지어진 정자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중노인은 정자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차가운 돌난간 위로 정자 안쪽을 살펴보니 천상의 동자처럼 생긴 아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정말 있네?”
중노인이 놀라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아이가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는 앉은 채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중노인이 깜짝 놀라 난간에서 물러난 순간 아이가 허공을 날아 난간을 단번에 넘으며 중노인을 덮쳐왔다.
깜짝 놀란 중노인은 허겁지겁 경신술을 펼쳐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아이의 속도도 만만치가 않아 금세 따라붙었다.
중노인은 눈을 치뜨며 더욱 속도를 올렸다.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질풍만이 비동 안을 휩쓸었다.
그런데 웬 걸 아이 역시 질풍이 되어 중노인을 따라잡았다.
“뭐, 뭐야!”
중노인은 기겁하여 그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내달렸다.
아이와의 간격이 벌어진다 싶자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쳐 단박에 비동 밖으로 나갔다.
그에 아이가 우뚝 멈추었고, 바로 그 순간.
“뭐야! 내가 왜 도망치지!”
분기탱천한 목소리와 함께 중노인이 비동 안으로 내리 꽂히듯 돌아왔다.
화-악!
땅에 발을 디디기 직전에 허공에서 멈추자 후폭풍으로 바람이 세차게 일어나 뿌연 흙먼지를 잔뜩 일으켰다.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 어떻게 좀 해보세요!”
흙먼지 속에서 아이가 소리쳤다.
중노인은 잠시 고민하다 신형을 팽이처럼 휘돌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흙먼지가 그의 신형을 따라 모조리 빨려갔다.
중노인은 잠시 후에 다시 돌아왔다.
“넌 누구냐? 백마사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중노인이 묻자 아이가 빙그레 웃었다.
“영감님, 다시 보니 좋네요. 정말 좋아요.”
***
검마와 무영투.
두 사람은 화운이 겪었던 일을 알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들이다.
그만큼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화운은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이는 무영투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세세하게 들려주었다.
무영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당장 달려가려고 할 것이고, 화운 자신에겐 무영투를 막을 힘도, 무영자를 구할 능력도 없었다.
한참 이야기를 듣고, 궁금한 건 물어보고 하더니 화운이 막힘없이 술술 대답하자 무영투는 고개를 끄덕이며 믿음을 보이려고 했다.
“근데 말이야 내가 암만 생각해봐도 공공무영비를 그냥 가르쳐 주지는 않았을 것 같다.”
“······!”
“그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말해봐라. 어떻게 배운 것이냐?”
무영투가 날 선 눈으로 화운을 쏘아봤다.
거짓 따위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화운은 도리없이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날강도 같은 놈이로구나!”
무영투는 화운이 자신을 속여 공공무영비를 배웠다는 말에 화를 냈다.
당연한 일이다.
무인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무학을 사기당한 것이거늘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분한 심정 이해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게 죄송하다는 말로 끝날 일이냐?”
“그래서 영감님께 무풍무영을 가르쳐 드리려고 합니다.”
“······!”
무영투의 얼굴이 놀람으로 급변하자 화운이 빙그레 웃었다.
“절대경지를 넘어섰던 접니다. 무풍무영도 완벽히 익혀냈었습니다.”
“그, 그게······ 그게 정말이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십시오.”
무영투가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마음을 가라앉히자 화운은 무풍무영을 익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무풍무영은 공간을 넘나드는 무척 심오한 수법이다 보니 이해하기가 무척 난해했다.
그래도 십 년 후의 무영투는 익히는 것에는 애를 먹었어도 이해는 금방 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무영투는 그렇지가 않았다.
“운해비룡과 무영비천은 어느 정도 익히셨습니까?”
“그건 왜 묻는 것이냐?”
“무풍무영을 이해조차 못 하는 게 이상해서 그럽니다.”
“뭔 이해를 못 해? 이해는 하지. 아니 했지. 했는데 그냥 뭐 워낙 심오해서······.”
“영감님!”
“왜?”
“제대로 익히기 싫은 겁니까? 이해를 못 했으면 못 했다 그러면 되는 것이지 어찌 두루뭉술 대충 넘어가려고 그러십니까?”
“창피해서 그런다! 왜?”
“스승님께서 남기신 무학을 완성하는 일인데 뭐가 창피하다고 그러십니까!”
“······.”
무영자를 생각하는 것인지 금세 시무룩해지는 무영투.
화운은 무영투가 생각을 털어내도록 잠시 기다려주었다.
“무풍무영······ 스승님께서도 완성하지 못하신 거다.”
화운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나중에 무영자를 구할 수 있을 때쯤에 그가 살아 있고 갇혀 있다는 걸 말해줄 생각인데, 그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염려가 되었다.
“난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생각한다. 말해봐라. 또 뭘 사기 치려고 무풍무영을 가르쳐준 것이냐?”
화운이 잠깐 생각하는 사이에 무영투가 물어왔다.
“사기는 아니고······.”
“아니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움? 뭔 도움?”
“대환단이요.”
순간 무영투가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대환단을 어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어림없다! 누굴 얼치기 빙신으로 아느냐!”
“제가 복용하려고 그러는 거 아닙니다. 엄지발가락 밑에 숨겨둔 것까지 전부 달라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이야기라도 들어보십시오.”
엄지발가락 이야기가 나오자 기겁한 무영투가 더 멀리 물러났다.
“천마와 천종천마교의 마인들을 상대하려면 고수들이 필요합니다. 대환단은 그들에게 복용시킬 겁니다. 그리고 영감님이 소림사에 더 이상 쫓기지 않도록 풀어줄 방도가 있습니다.”
“······!”
무영투에게는 귀가 솔깃한 이야기였다.
소림사가 대놓고 쫓고 있지는 않았으나 늘 자신을 예의주시하고 있어 바짝 신경 써야했기 때문이다.
“듣기만 할 거다.”
“금강부동.”
“뭐?”
“소림의 전설이라는 금강부동을 돌려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대환단을 가져간 일을 실토하더라도 용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육조 혜능의 그 금강부동을 알고 있다고?”
“예.”
“말도 안 돼! 그 금강부동은 천마가······· 너 천종천마교에도 갔다 왔다고 했었지?”
“예. 천마동에 고이 모셔져 있더군요.”
“전부 외운 것이냐?”
“무풍무영과 금강부동은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금강부동 덕분에 무풍무영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
“영감님,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천마를 막지 못합니다. 천마를 막지 못하면 이 땅에 마신이 강림하게 되고요. 그럼 대환단이 수억 개가 있어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게, 그게 다 사실이란 말이냐?”
“아까 제가 해드렸던 말을 어디로 들으신 겁니까? 그 긴 이야기를 다시 해드려요?”
“마신, 마신 아수라라고······. 천마까지야 뭐, 근데 아수라가······.”
무영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이 세상 전체를 지키려면 영감님께서 많은 일을 해주셔야합니다.”
“내가?”
“이런 몸으로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오 년은 지나 열다섯 살은 되어야 뭐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는 영감님께서 애를 써 주셔야지요.”
“일단 들어는 보마.”
가까이 다가온 무영투는 화운의 앞에 앉으며 쳐다봤다.
화운은 그동안 자신이 생각해두었던 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곳을 나가시면 담가장으로 가십시오. 가셔서 장주님의 손자인 담명한테 대환단을 복용시키십시오. 그 후에 제 어머님과 함께 남궁검가로 가십시오. 어머니께서 남궁검가에 영감님의 신분을 보장해 주실 겁니다. 그럼 대환단 한 알을 건네주고 남궁검가의 소가주한테 복용시키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거기 소가주가 대환단의 효과를 보거든 남궁검가주님께 서찰 하나를 써달라고 하십시오. 그 내용은 백리세가주께 영감님과 대환단에 대해 보장한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걸 가지고 가서 백리세가의 소가주한테 복용시키라고?”
“거기는 둘입니다. 소가주와 그의 동생 백리연 소저. 두 사람에게 복용시키십시오.”
“그럼 네 개나 쓰라는 것이냐?”
“그 후엔 선우세가로 가십시오. 아, 남궁검가주님께 그쪽에 보내는 서찰도 써달라고 하십시오. 선우세가엔 소가주 한 명입니다.”
“다섯 개·····!”
“그 다음엔 구룡성으로 가셔야합니다. 거기 가시면 소성주 말고 북궁설이라고 소성주의 누이에게 복용시켜야 합니다. 문제는 남궁검가주님의 서찰이 안 통할 거라는 겁니다. 몰래 잠입하셔서 복용시켜야 하니 꽤 어려울 겁니다.”
“여섯 개······ 미쳤다.”
“들으셨습니까?”
“들었으니까 여섯 개라는 걸 알지!”
“아뇨, 구룡성에서는 남궁검가주님의 서찰이 안 통할 테니까 몰래 잠입해서 복용시켜야 하니 무척 어려울 거라는 거 말입니다.”
“나한테 어려운 건 여섯 개나 내놓는 것이지 그딴 게 아니다!”
“영감님, 복용해 봤자 영감님껜 도움도 안 되는 대환단 여섯 개를 내놓는 대신 공공무영비를 무풍무영까지 완성하게 되는데 그게 그리 아깝습니까? 게다가 소림과의 일도 무마시켜 드릴 텐데요.”
무영투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괜히 투덜거려보았다.
“그게 다 사실이라면야······.”
“영감님, 부탁드리겠습니다.”
화운이 공손히 허리를 조아렸다.
무영투는 그 모습에 미간만 찌푸리며 어쩔 줄을 몰랐다.
혼란스러워 얼른 판단이 안 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그 와중에도 느껴지는 건 결국 이 아이의 말대로 하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젠장! 완전히 귀신에 홀린 기분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