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무당검성과 제천마존.
살았던 시대도 다르고 걸었던 길도 다르다.
그런데 함께 찾아왔다.
화운은 궁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봤다.
“아수라가 인간도로 향하고 네가 수라도로 온 건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
화운은 제천마존의 말에 눈을 치떴다.
“정확히는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알고 널 선택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누가 알았고, 누가 선택했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으나 지금 화운의 상태로는 깊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녀석아, 본좌가 말했었지 않더냐. 너만이 법보의 뜻을 행하였다고.”
“아!”
화운은 이제야 알아들었다.
지금의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내다본 이는 다름 아닌 제천마존이었던 것이다.
제천마존은 여기까지 내다보고 자신의 다음으로 경천보패를 가져갈 이로 화운을 택했었다.
“절 선택하지 않았다면······.”
“네가 아니어도 결과는 같다. 아수라가 인간도로 향하는 걸 막을 순 없다. 마신의 뜻이거늘 인간이 어찌 막겠느냐.”
제천마존의 말에도 화운은 답답함을 느꼈다.
왜 하필 자신이어야 했는지.
“그나마 너였기에 아수라의 종들이 이곳에 갇힌 것이다. 그리고 네가 이곳으로 왔기에 등천보패를 확보한 것이니라.”
“등천보패라면?”
“맞다. 언제든 천계에 오를 수 있다고 알려진 그 법보이니라.”
화운은 손을 들어보았다.
자신의 꿈속이라 그런지 빈손에 구슬이 저절로 나타났다.
등천보패.
마신 아수라의 권능 중 하나.
이것으로 무얼 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제 자네가 말하게.”
제천마존이 무당검성을 향해 말했다.
화운은 이제 두 분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말하려한다는 걸 직감하고 무당검성을 응시했다.
“너에겐 경천보패와 등천보패의 힘이 있다.”
무당검성이 말했다.
이때 화운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경천보패는 제게 없습니다. 마신 아수라가 저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가져가 버렸습니다.”
“두 법보는 마신 아수라가 자신의 권능으로 차지한 것이니 그에게 귀속되는 게 맞겠지. 허나 아직 네겐 경천보패의 힘이 남아 있다.”
“예?”
“아수라가 경천보패의 뜻을 행하지 않는 한 네겐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느니라.”
“······!”
화운의 눈이 번쩍 커졌다.
맞다.
경천보패를 부순다면 모를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죽으면 시간이 되돌아간다.
‘이런 멍청이!’
아수라에게 귀속된다는 천마의 말만 듣고 너무 쉽게 포기해버렸다.
사황이 시간을 되돌리라고 했을 때 심장을 터트렸다면 기암괴봉에서 사황을 만났던 시점으로 되돌아갔을 것인데.
화운이 자신을 책망할 때였다.
제천마존이 화운의 속내를 들여다본 듯이 말했다.
“그때 네가 시간을 되돌렸다면 아수라에게 경천보패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걸 자각하게 만들었을 게다.”
“예?”
“아수라는 경천보패의 진짜 힘을 모른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경천보패가 자신의 몸 상태를 일각 전으로 되돌려준다는 것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천신과의 싸움에서 큰 힘이 되었겠지만.”
순간 화운의 머릿속에 마신 아수라가 싸우던 광경이 떠올랐다.
모산파에서 했던 초혼의식을 통해 육조 혜능을 만나고, 그때 육조 혜능이 보여주었던 마신 아수라의 싸움.
하늘에서 떨어진 빛의 기둥이 아수라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는데, 아수라의 미간에 모습을 드러냈던 오색찬란한 빛의 세 번째 눈알.
그건 분명 경천보패였고, 경천보패가 오색의 광휘를 쏟아내자 걸레처럼 찢어졌던 그의 육신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갔었다.
그 광경을 떠올린 화운은 제천마존의 말을 정리해 봤다.
마신 아수라는 수라도를 평정할 때 경천보패를 얻었다. 그리고 경천보패가 자신의 몸 상태를 일각 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자신의 권능에 귀속시켰다.
하지만 그는 경천보패를 부숨으로써 시간 자체를 일각 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다.
‘맞는 것 같아. 아수라가 시간 자체를 되돌릴 수 있다는 걸 안다면 지금 쯤 난 아수라의 손아귀에 잡혀 있거나 죽었을 테니까.’
화운 때문에 수라도에 있는 아수라의 종들이 인간도로 나가지 못했다.
그러니 화운을 놓친 아수라의 입장에서는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화운을 잡아야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아수라가 경천보패를 부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당검성의 말대로 자신의 몸에는 아직 경천보패의 힘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화운은 고개를 쳐들었다.
“시간을 되돌려야겠습니다.”
“그래야 한다. 하지만 한 가지가 더 남았다.”
무당검성의 말에 화운은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제천마존이 책망하듯 불쑥 말했다.
“이 답답한 놈아, 지금 너한텐 등천보패가 있잖으냐.”
“예?”
“써먹어야 할 것이 아니냐!”
화운은 자신의 손에 들린 등천보패를 들여다본 후 제천마존을 쳐다봤다.
뭘 어떻게 써먹느냐는 얼굴이었다.
“천계의 기록에서 두 법보에 대해 알아봤다. 두 법보는 시간과 공간. 시공을 완벽히 제어하는 신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것이더구나.”
무당검성의 설명이었다.
“네놈 몸에는 경천보패는 없지만, 그 법보의 힘이 남아 있고, 지금 네놈 수중엔 등천보패가 있다.”
제천마존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두 개의 법보를 다 가진 건 아니지만, 두 힘이 네게 있는 건 맞다.”
무당검성의 말이고.
“둘을 한꺼번에 발동시킨다면 완벽은 아닐지 몰라도 어느 정도는 시공을 제어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게 우리 둘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 천마와 아수라의 야욕을 상대하는 데에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시공으로 네놈이 되돌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다.”
“······!”
제천마존의 말이 끝나자 화운은 비로소 두 분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화운이 알겠다는 표정을 짓자 무당검성이 빙그레 웃었다.
“시공의 법보는 신의 의지로 행하게 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더구나.”
“신의 의지······.”
화운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엇, 벌써 시간이 다 된 건가? 어린놈의 잠이 뭐 이리도 짧아!”
“늘 지켜보고 있었느니라.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혼자라고 너무 힘들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제천마존이 투덜거렸고, 무당검성이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두 분의 모습이 흐릿해지기 시작하자 화운은 부모와 떨어지게 된 아이처럼 가슴이 덜컥했다.
하지만 눈물짓고 매달린다고 하여 달라지는 게 없음을 안다.
산 자와 죽은 자 간에는 함부로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는 법이니까.
“너 자신을 믿어도 된다. 훗날 천상에 올라 네놈이 구한 기린을 타고 금강신들을 이끌 너이니 틀린 길을 걸을 일이 없다.”
제천마존이 뜻밖의 말을 했다.
그러자 무당검성이 놀라 말했다.
“신의 뜻을 누설하시면 어쩝니까!”
“뭐 어떤가. 우리도 신인데······ 하급말단이긴 하지만······ 젠장.”
제천마존의 투덜거림을 끝으로 두 분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런데 아주 희미하게 두 분의 대화가 들려왔다.
“하급말단인 걸 다행으로 여기십시오. 위로 올라갈수록 인간도엔 관심조차 없어질 테니까요.”
“그러게 왜······ 그깟 천상의 법도가 뭐기에 다들 거기에만 목매다는 것일까?”
“삼라만상을 관장하는 법도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이겠지요.”
“무너지지 않게 바로 잡으면······.”
“완벽한 건 없다는······ 설사 신이라 하더라도······.”
“그럼 뭐하러 신이······.”
“글쎄요.”
두 분의 대화가 끊기듯 들려오더니 종래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화운은 두 분이 자신의 궁금증 하나를 풀어주고 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인간도에 천신들이 관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천상의 법도, 삼라만상을 관장하는······ 법도.”
화운은 홀로 중얼거리다 현몽에서 깨어났다.
눈을 뜬 화운은 자신의 몸이 푹신한 무언가를 기대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얼른 돌아봤다.
오색의 털을 가진 신수, 기린이었다.
화운이 잠에서 깨자 기린이 고개를 돌렸다.
말이 투레질을 하는 것처럼 낮게 콧김을 흘렸다.
이제 깨었냐, 반갑다.
마치 그리 말하는 것 같아 화운은 절로 기분이 좋아져 기린의 몸을 쓸어주었다.
“두 분의 말씀이 맞다면 훗날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 그때 잘 부탁한다.”
화운의 말을 알아들은 모양인지 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운은 빙그레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이곳을 벗어나볼까.”
주위를 한차례 둘러본 화운은 품에서 등천보패를 꺼냈다.
그리고 잠시 머릿속으로 현몽 중에 들었던 내용을 정리한 다음 등천보패를 손에 쥔 채 심장이 있는 가슴팍을 힘껏 쳤다.
등천보패와 심장이 동시에 부서졌다.
오색의 섬광이 눈부시게 폭발했다.
그 찬란한 광채가 눈동자를 물들이며 머릿속을 헤집은 순간 화운이 간절하게 외쳤다.
“난······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
별이 총총한 밤이다.
밤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한 밤이었다.
그런데 돌연 오색의 광채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번-쩍!
산골마을 중에서도 외진 곳에 자리한 초가를 강타하듯 내리 꽂히는 오색섬광.
분명 초가의 지붕을 뚫었음에도 소리도 충격파도 없었다.
그리고 곧 오색의 광채가 지붕을 뚫고 솟아오르더니 초가를 몇 바퀴 돌다가 다시 야천으로 솟구쳐 사라졌다.
산골마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로웠고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
화운은 번쩍 눈을 떴다.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황토를 바르고 뜨거운 열기로 말린 허름해 보이는 천장.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천장이었다.
“정말 온 건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화운은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인석아, 문 부서지겠다.”
차분하고 인자하기 짝이 없는 중년의 목소리가 마당 한쪽에서 들렸다.
부리나케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 계셨다.
어린 시절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인 아버지께서.
너무나 보고 싶었고, 너무나 그리웠던.
“아버지······.”
“왜 그러느냐, 무서운 꿈이라도 꾼 게냐?”
걱정스레 묻는 부친의 모습에 화운은 가슴이 울컥하여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런데 웬걸 마음은 부친 앞에 다다랐는데 몸은 그 자리에서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인석아, 늘 앞을 살피라고 했잖느냐.”
고개를 들어보니 아버지께서 바로 앞에서 손을 내밀고 계셨다.
화운은 손을 내밀었다.
“으억?”
화운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괴성을 지르고 말았다.
“왜 그러느냐?”
“제 손이······!”
“손을 다친 것이냐? 어디 보자.”
아버지께서 자리에 쪼그려 앉으며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화운은 그 자리에 앉으며 다른 손을 들어봤다.
“작다······ 작아.”
정말 작았다.
열 살짜리 손처럼 작았다.
‘열 살·····! 맞아,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뵈었던 게 그때쯤이었어!’
화운은 작아진 자신의 몸을 둘러본 후 다시 아버지를 쳐다봤다.
걱정스레 작은 손의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혹여 뼈가 다친 건 아닌지 살짝 눌러보며 아들의 반응을 살피곤 했다.
화운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러는 것이냐?”
“이제 괜찮습니다.”
“진짜 괜찮으냐?”
“예.”
화운은 대답하자마자 손을 빼내고는 주방으로 뛰었다.
좀 전에 그랬던 것처럼 경신을 발휘하려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가볍게 뛰어가 주방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가 않았다.
“어머닌요?”
“엄마는 요 앞 텃밭에 갔다.”
화운은 텃밭을 향해 뛰었다.
“인석아, 넘어지겠다!”
“조심하겠습니다!”
화운은 걱정하지 마시라고 대답한 후 빠르게 뛰어갔다.
텃밭이라고 해봐야 두 평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다.
어머니께서 그곳에 계셨다.
“어머니!”
화운이 부르는 소리에 잡초를 뽑던 것을 멈추시고 돌아보셨다.
화운은 한달음에 달려가 덥석 안겼다.
“다 큰 놈이 무슨 짓이냐.”
말씀은 그리 하셔도 손으로는 등을 쓸어주고 계신다.
화운은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부볐다.
흙냄새와 어머니 특유의 포근한 냄새가 왈칵 눈물이 솟구치게 만들었다.
“오늘은 늦잠도 자고 어디가 아픈 것이냐?”
한참 후에 화운을 떼어내고 물었다.
화운은 그저 좋아서 눈물을 훔친 후 방글방글 웃었다.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어렸을 때 봤던 어머니의 얼굴 그대로인 게 너무나 신기하고 좋아서 들뜬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난다.”
“뿔나도 좋습니다. 이렇게 다시 뵈었는데 그깟 뿔 정도야 뭐 어떻습니까.”
“······!”
“왜 그러십니까?”
화운은 어머니께서 빤히 바라보기만 하시자 의아하여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손을 뻗으셔서 머리에 꿀밤을 먹이셨다.
“그 말투는 어디서 배운 것이냐? 감나무집 할아버지께서 그리 하라고 가르쳐 주시더냐?”
“헤에!”
열 살짜리 애가 스무 살 말투를 사용하니 이상할 수밖에.
화운은 얼버무리듯 히죽 웃었다.
“가자. 아버지께서 먼 길을 떠나셔야하니 아침 준비를 해야겠다.”
먼 길?
화운은 그 자리에 굳었다.
‘오늘이 그날이구나!’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집을 떠나시던 날!
오늘 이후로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안 됩니다! 절대 보내시면 안 됩니다!”
화운은 잔뜩 굳은 얼굴로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하도 강경하게 말하자 어머니께서 놀란 얼굴로 돌아보셨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버지를 보내면 안 된다니?”
화운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를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된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