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시간을 되돌려라!
육신이 너덜너덜해지고 정신조차 갈가리 찢긴 것 같다.
화운은 차가운 암반위에 뻗은 채 고개만 돌려 살펴봤다.
모두가 널브러져 있었다.
구룡제, 적성대도황, 정무맹 맹주를 포함한 정사연합의 고수들 심지어 사황과 천마조차 쓰러져 있었다.
“끝난 건가?”
화운이 중얼거릴 때였다.
우-우웅!
대지가 울었다.
마치 땅 속 저 깊고 깊은 곳에서 뭔가가 울부짖기라도 하는 것처럼.
“크크큭! 일만 년의 대계가 완성되었구나!”
천마가 괴소를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사황과 화운은 천마에게 속았다.
천마는 유마정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 부수려고 했던 것이다.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화운이 고개를 돌렸다.
유마정은 박살이 나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왜지? 왜 잘못 된 것 같은 느낌이지?’
천마의 말도 그렇고, 땅의 진동도 그렇다.
아무래도 뭔가가 단단히 잘못 된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화운은 억지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바로 이때였다.
땅의 진동이 갈수록 커지더니 유마정이 있던 자리가 화산 폭발처럼 터졌다.
쿠-앙!
거대한 존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곧 천마의 마기를 능가하는 엄청난 마기가 허공에서 천지사방으로 폭사했다.
산 자들은 모두 허공을 쳐다봤다.
그들은 곧 볼 수 있었다.
머리 셋에 여섯 개의 팔을 가진 마신 아수라의 현신을.
“마신 아수라의 종들아! 모조리 나와서 마신 아수라의 강림을 경배하라!”
천마의 외침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지축을 흔들며 빠르게 몰려오는 존재들이 느껴졌다.
‘흑귀들?’
화운이 놀라 주위를 둘러본 순간 사방에서 수만에 달하는 흑귀들이 개떼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시간을 되돌려라!”
사황의 외침이다.
화운이 돌아보니 너덜너덜해진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늦었다! 법보는 마신 아수라의 권능! 아수라께서 강림하신 이상 법보의 힘은 아수라께 귀속된다!”
천마의 조소다.
‘아수라한테 귀속된다고? 그럼 난······!’
화운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경천보패의 힘이 아수라한테 귀속된다면 자신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당황하는 표정을 짓던 화운이 갑자기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어? 없다! 없어! 경천보패가······ 없어!”
“말했잖느냐! 법보는 마신 아수라의 권능이라고!”
천마의 비웃음을 들으며 기겁한 화운이 허공을 쳐다봤다.
마신 아수라의 여섯 개 손 중의 하나가 오색광휘의 구슬을 들고 있었다.
“어, 언제······!”
심장이 덜컥 할 정도로 놀란 화운.
화운은 심장을 터트려 시간을 되돌릴 수가 없었다.
“멍청한 놈!”
사황도 마신 아수라의 손을 확인했다.
사황은 화운에게 시간을 되돌리라는 말을 더 이상 하지 못하고 천마를 돌아봤다.
“한심한 놈 같으니! 더 이상 니놈을 인정하지 않겠다!”
사황은 천마를 향해서도 욕설을 내뱉더니 너덜너덜해진 육신을 이끌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따라오지 말고 방법이나 찾아!”
화운이 자신을 따라서 허공으로 솟구치자 사황이 엄하게 소리쳤다.
이때 사방에서 흑귀들이 들이닥쳤고 살아남은 고수들이 너덜너덜해진 육신을 이끌고 흑귀들을 상대했다.
화운은 다시 지상으로 내려갔다.
펏펏펏펏펏펏펏!
구룡제의 광검에 십여 명의 흑귀들이 일제히 몸이 갈라졌고, 적성대도황이 날린 도환에 땅이 터지고 흑귀들이 뭉개졌다.
태양존자가 발출한 백열의 강환이 시커멓게 태우고, 맹주 조극산의 검강이 일직선으로 뻗어가며 걸리는 족족 쪼갰다.
하지만 달려드는 흑귀들의 숫자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십만에 가까운 숫자인지라 죽여도 죽여도 끝도 없이 몰려왔다.
“내가 사황이다! 이 땅의 최강은 바로 나다!”
허공에서 사황의 외침이 들렸다.
마신 아수라를 향해 전륜멸천파를 발휘하는 사황의 모습이 보였다.
천지간을 짓누르듯 쏟아져 내리는 마기를 밀어내며 마신 아수라를 향해 솟구치는 모습에 화운을 비롯하여 모두들 흑귀를 상대하면서도 일말의 기대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사황의 당당함을 느꼈음인가.
잔혹함과 무자비함 그리고 오만함이 가득한 마신 아수라의 시선이 사황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곧 여섯 개의 팔 중 하나가 아래로 향했다.
슈-욱! 퍽!
경악스럽게도 묵빛의 기운이 전륜멸천파를 꿰뚫고 사황을 강타했다.
당당히 솟구쳤던 사황의 육신이 허공에서 터져버렸다.
‘······!’
제아무리 부상을 입었어도 사황은 사황이다.
전륜멸천파에 실린 힘은 지금의 절대검력을 능가하면 능가했지 모자라진 않는다.
그런데 전륜멸천파를 아무렇지도 않게 꿰뚫고 사황을 부숴버렸다.
흔적도 없이.
화운의 얼굴이 암담함으로 굳어졌다.
이때 마신 아수라는 화운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이들에겐 관심도 없다는 듯 하늘을 쳐다보며 천둥 같이 외쳤다.
“이제부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수라도와 인간도의 힘을 하나로 만들어 천도에 오를 것이다!”
천신 인드라(제석천)에게 보내는 도전장일까.
마신 아수라의 음성에서 들끓는 투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범람하는 해일처럼 몰려들던 흑귀들이 마신 아수라의 음성에 제자리에 바짝 엎드렸다.
마신 아수라의 권능에 바짝 엎드린 것이다.
우우우웅!
땅속에서 들려오는 진동.
화운은 발밑을 간지럽히는 진동을 느끼고 유마정이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마신 아수라가 뚫고 올라온 자리가 거대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아직 눈에 보이지 않으나 까마득한 저 아래에서 수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뭔가가 떼로 솟구쳐 오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신 아수라의 종복들이다. 나 천마가 그 군단을 이끌고 천상에 오를 것이다! 크핫하하하하!”
천마가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군단이라고?’
화운은 눈을 치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천하를 호령하던 고수들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얼굴로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렇게······ 천마와 사황만 두려워하다 이렇게 끝나야 한다고······? 젠장! 젠장! 제-엔-장!”
이 땅에 강림한 마신 아수라가 인간의 무공으로는 대적불가인 이상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짜증이 났고, 화가 치밀었다.
뭔 놈의 삶이, 인생이 이 따위냐는 분통이 터졌다.
“좋아! 대가리를 못 친다면 손발이라도 잘라버리겠다! 모조리!”
화운은 갈라진 틈 아래 수라도를 향해 뛰어내렸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
마신 아수라의 군단을 모조리 쓸어버리기 위해.
***
강한 압력이 느껴졌다.
까마득한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압력이.
화운은 중단전의 공력을 다리로 보내 공공무영비 오단공 질풍무영의 속도를 더욱 배가시켰다.
하단전의 공력은 묵검으로 보내 아래에서 몰려오고 있는 마신 아수라의 종들을 날려버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때 위쪽에서 마신 아수라의 분노가 들렸다.
“감히!
느껴졌다.
마신 아수라의 권능이.
사황을 날려버렸던 그 권능이.
“막으시오! 마지막 희망이오!”
맹주 조극산의 목소리였다.
‘뭘 어떻게 막아?’
화운이 의아해한 순간 위에서 내리꽂히던 마신 아수라의 권능이 폭음과 함께 소멸했다.
조극산을 비롯한 정파의 고수들이 몸을 날려 막은 것이다.
그들은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 비루한 놈들이 감히!”
아수라의 분노가 들렸다.
“죽여라!”
천마의 냉랭한 목소리와 다시 날뛰기 시작하는 흑귀들.
그 와중에 내리 꽂히는 마신 아수라의 권능.
슈-욱! 퍽!
누군가가 또다시 몸을 던져 막았다.
한참을 수직강하 한 화운은 누군지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누군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모두다 몸을 던져 막고 있었으니까.
슈-욱! 퍽!
또 다시 그리고 또 다시!
구룡제가 막았고, 적성대도황이 막았고 심지어 태양존자조차 몸을 날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마신 아수라의 권능에 대항했다.
천하를 군림하다시피 하던 절대의 고수들조차 처절한 발악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 발악조차 약간의 시간을 벌어준 것일 뿐.
슈-욱!
이제 막 아래쪽에 날개달린 마귀들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 위쪽에서 마신 아수라의 파괴의 권능이 쏘아져 오는 게 느껴졌다.
“니미! 죽기 밖에 더하겠어!”
신형을 뒤집는 화운.
이를 악물고 대항하려 해보지만 마신의 권능이 신벌처럼 느껴져 어차피 안 된다는 생각이 온몸을 무기력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불현듯 떠오른 생각.
마신과 천상의 신은 상극!
마신 아수라의 종들과 싸울 때 분명히 느꼈었지 않은가!
화운은 검을 힘주어 잡았다.
그리고 땅속이라 그런지 얼마 느껴지지 않는 천기를 있는 대로 끌어당겨 응축하고 또 응축하여 아수라의 권능을 향해 일시에 그어올렸다.
쿠-앙!
귀를 먹먹하게 만들고 가슴을 직격하는 충격.
화운은 자신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몸이 부서지지는 않았다.
있는 대로 끌어 모은 천기가 아수라의 권능을 감당해낸 것이다.
‘좋아! 천기라면 적어도 발버둥 칠 수는 있다는 거잖아!’
화운은 몸을 뒤집었다.
아래쪽에서 솟구쳐 오르고 있는 마귀들이 보였다.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와중에 절대검력을 펼쳤다,
콰콰콰콰쾅!
지금 화운이 펼치는 절대검력!
이것이야 말로 마귀들에겐 신벌이자 신들의 철퇴였다.
자신들이 모시던 마신 아수라를 향해 개떼처럼 몰려가던 수십만의 숫자가 선두에서부터 짓이겨지고 갈라지고 쪼개져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조리! 모조리 죽는 거다!”
화운은 절대검력을 거푸 발휘했다.
슈-욱!
위에서 다시 한 번 아수라의 권능이 느껴지자 돌아보지도 않고 천기를 끌어 모아 위로 날렸다.
쿠-앙!
아수라의 권능은 화운을 더욱 빠른 속도로 떨어트릴 뿐이었다.
경신을 펼치던 중단전의 공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어진 화운은 아래쪽에서 끝도 없이 솟구치고 있는 마귀들을 향해 절대검력을 미친 듯이 발휘하며 아래로 아래로 추락했다.
슈-욱! 쿠앙!
네 번째 마신 아수라의 권능을 끝으로 화운의 신형이 인간의 세상과 연결된 통로의 밖으로 튀어나갔다.
화운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인간들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자신의 아래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수라도?’
메마르고 황폐한 땅을 생각했었다.
그 정도면 낙원이다.
지금 화운의 아래에 펼쳐져 있는 세상은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곳이다.
벌건 용암이 도처에 흐르고 있고, 유황 냄새가 온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도 득시글거리는 존재들.
마신 아수라의 종이라는 마귀들이 개미의 군집처럼 바글거렸다.
그리고 지금도 끝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수라도의 세상에서 보자면 화운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있었고 수십만의 마귀들은 벌떼처럼 하늘로 솟구치고 있는 형국이었다.
“한 놈도 보내주지 않겠다!”
화운이 일갈을 터트리며 절대검력을 발휘했다.
그 무지막지한 검력에 솟구쳐 오르던 마귀 떼가 속수무책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바로 이때 화운의 눈이 이채로 반짝였다.
‘저건?’
아래쪽에 거대한 구층석탑이 보였다.
그리고 그 석탑 꼭대기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위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마귀들은 그 강력한 힘에 몸을 실어 인간도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운은 보자마자 눈치 챌 수 있었다.
인간들의 세상과 여기 수라도의 세상을 연결하고 있는 힘이라는 걸.
“그래, 저 거야! 저걸 부순다면 인간들의 세상엔 아수라 홀로 남게 되는 거야!”
화운은 절대검력을 펼쳐 솟구쳐 오르는 마귀들을 날려버린 후 석탑을 향해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최강의 절대검력을 발휘했다.
지난번 기암괴봉을 무너트릴 때 사황조차 놀라게 만들었던 그 검력을.
쿠-와아아앙!
수라도의 세상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석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전신의 힘을 일시에 쏟아내 버린 화운은 땅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냥 바닥에 드러누운 채 암울한 잿빛인 하늘을 쳐다봤다.
인간도와 연결된 통로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큭큭큭! 아수라고 지랄이고 모든 게 니 뜻대로 될 것 같아?”
마신 아수라의 뒤통수를 한 방 갈겼다는 생각에 조소를 흘렸다.
하지만 금세 시무룩해졌다.
인간들의 세상이 끝났다는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신 아수라가 본신으로 현신하였으니 그걸로 끝이었다.
사황조차 일격을 감당 못하고 죽어버렸거늘 누가 있어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제발······!’
화운은 간절했다.
법보의 이능이 아수라에게 귀속되었다고 했으나 지금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건 스스로 죽어 시간을 되돌리는 것뿐이었다.
화운은 간절함을 담아 자신의 심장을 터트리려고 했다.
사방에서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마귀들의 성난 괴성을 들으며 중단전의 기운을 심장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부서진 석탑 잔해에서 뭔가가 굴러 떨어져 화운의 손에 닿았다.
차가우면서도 매끈한 감촉.
화운은 뭔가 싶어 들어보았다.
“······!”
오색영롱한 빛을 은은하게 발하고 있는 구슬이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란 화운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았다.
헛것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 오색영롱한 빛을 발하는 구슬이 들려 있었다.
“경천보패?”
화운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몇 번 눈을 깜박인 후 다시 살펴봤다.
달랐다.
새하얀 광채가 유달리 강렬한 경천보패와는 다르게 붉은 빛의 광채가 좀 더 강렬했다.
“혹시?”
화운은 불현듯 떠오른 이야기가 있었다.
마신 아수라에겐 두 가지 권능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것을 되돌려버리는 힘이고, 또 하나는 언제든 천상에 오를 수 있는 힘이라고 했다.
‘첫 번째가 경천보패라면 두 번째는······!’
화운은 자신의 손에 들린 구슬을 내려다보며 눈을 치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