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147화 (147/207)

#147. 다시 화산에서

“사황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사황혈천의 그 사황을 말하는 것이냐?”

맹주 조극산이 경악하며 물었다.

맹주전의 모두가 크게 놀란 얼굴로 화운의 대답만 기다렸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미친 늙은이가 나타났으니까 그 쪽엔 관심도 두지 말라고요.”

“······!”

조극산이 더욱 놀라고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혈존이 버럭 일갈했다.

“놈! 무엄하다!”

“무엄은 개뿔! 영감님한테나 주군이지, 나한텐 그냥 미친 늙은이니까 할 말 다 전했으며 그냥 가세요, 가.”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을 봤나!”

혈존이 더욱 사납게 소리친 순간이었다.

화운에게서 무지막지한 기운이 쏘아져나가 혈존을 짓눌렀다.

지금 맹주전 내에 있는 정무맹의 그 누구보다 약하지 않다고 자부하던 혈존이었으나 화운이 기세를 터트리자 단숨에 눌려 버렸다.

거대한 바위에 짓눌린 것처럼 움직이기는커녕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가 없어 놀란 눈만 치떠야 했다.

“······!”

“······?”

충격, 경악, 의문 그리고 혼란.

화운이 기세만으로도 혈존을 제압해 버리자 조극산을 비롯한 맹주전의 모두가 경악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화운만 바라봤다.

또래 중에서 발군인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다.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무위를 과시하고 있으니 그 충격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연합이고 뭐고 나도 그냥 확 성질 터트려 버려?”

화운이 혈존을 쏘아보며 인상을 쓰자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혈존이 입을 씰룩였다.

그에 화운이 그를 짓눌렀던 기운을 거둬들였다.

“주, 주군께서 네놈 성질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다.”

혈존이 자존심을 굽히며 말했다.

“진짜요?”

“주군의 명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 원한다면 목을 떼도 좋다.”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없다.”

“흠, 제대로 해볼 생각인가 보네.”

“······.”

“알았어요. 화산에서 뵙겠다고 전해주십시오.”

화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선 혈존은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버렸다.

말과는 달리 목을 떼어놓긴 싫었던 게 분명해 보였다.

화운이 혈존을 그렇게 보내고 돌아보니 맹주 조극산을 비롯하여 모두들 자신만 쳐다보고 있었다.

설명을 바란다는 무언의 압박과 함께.

화운은 사황과 천마 그리고 검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적당히 바꾸고 버무려서.

믿기지 않을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사황을 주군으로 모시는 혈존까지 나타났고, 화운이 놀라운 무위를 드러낸 상황이라 나름 신빙성을 갖추게 되었다.

거기다 이심환이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화산에 빨리 가야 한다고 재촉해댄 통에 화산으로 향하는 것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

화산파.

산문 앞에서 벌어진 사황과 정파고수들의 대면은 사황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댄 덕분에 무사히 넘어갔다.

정파는 구룡제와 적성대도황 그리고 태양존자가 묵묵히 사황의 뒤만 따르자 진짜 사황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산파 진궁.

화산파 장문인이 원로들과 함께 대소사를 논의하는 곳이다.

사파인이라고는 하나 거두 중의 거두인 사황을 객청으로 모실 수 없어 진궁에 자리를 잡았다.

정무맹과 천사련의 고수들이 한 자리에 모이니 진궁의 대청이 꽉 들어찼다.

상석에는 사황이 앉았다.

붉은 머리에 붉은 수염.

앉아서 사람들을 응시하는 모습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했다.

정무맹과 천사련의 고수들은 사황의 앞쪽에 서로를 마주보는 모습으로 길게 줄지어 앉았다.

그리고 화운은 정무맹 고수들의 맨 끝에 앉아 있었는데 사황이 냉랭한 눈초리로 화운에게 말했다.

“거기서 뭐하는 것이냐?”

사황의 물음에 모두들 화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놈이 주관해야 할 것이 아니냐.”

“제가 감히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요.”

사황의 눈초리가 냉랭했다면 사황을 대하는 화운의 태도는 시큰둥했다.

“네놈이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 천마의 손발들이나 겨우 상대할 놈들이 뭘 안다고 이 자리를 주관한단 말이냐.”

“말씀이 심하십니다. 다들 제가 모시는 분들인데 그렇게 막말하시는 거 아닙니다.”

“이런 육시를 낼 놈이 어디서 감히!”

“제가 못 할 말 했습니까! 제 부모 욕하는데 기분 안 나쁠 사람이 어딨습니까! 혈존도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욕한다며 성을 내던데 그게 잘못한 겁니까?”

“네놈이 알량한 무공만 믿고 기고만장하는구나!”

“그 알량한 무공 덕분에 거기 앉으셔서 안하무인하시는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네놈이 정녕!”

격분한 사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에 조극산이 화급히 끼어들었다.

“잠시 고정하시고······.”

“닥쳐라! 어디서 감히 끼어드는 것이냐!”

사황의 분노가 조극산에게 향하자 화운이 발끈했다.

“말도 못 하게 하실 거면 이 자리에 왜 오신 겁니까?”

“이들을 불러모은 건 네놈이었다!”

“유마정을 부순다면 도움이 될 거라고 인정하셨잖습니까.”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계속 그렇게 본좌의 성질만 돋우겠다는 것이냐!”

“합니다, 해! 할 테니까 사황께서도 존중이라는 걸 좀 해주십시오!”

화운이 마지못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도 이놈이!”

“하지 말까요?”

화운이 다시 시큰둥하게 바라보자 잔뜩 눈을 부라리던 사황이 포기하듯 자리에 풀썩 앉았다.

사황은 내심에서 끓어오르는 격노를 억누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황이 이렇게까지 참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난번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정도였던 터라 화운이 벌이는 일에 시큰둥하게 그저 응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기암괴봉에서 마지막으로 겪었던 화운의 무위가 실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강함이라면 천마를 제대로 상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치솟는 격노를 꾹꾹 눌러 참았다.

“시끄럽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화운은 정사의 고수들에게 정중히 허리를 조아리며 사과부터 했다.

다들 괜찮다고 할 수도 없고, 나무랄 수도 없어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화운은 그런 사람들의 상황을 알기에 얼른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들 궁금하신 게 많을 줄 압니다. 하지만 죄송스럽게도 다는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양해를 바랍니다.”

경천보패의 존재를 말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한 것인데 사람들은 사황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짐작하며 가타부타 아무런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

“천사련 분들께선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자리에 이렇게 정사가 모인 건 천마를 치기 위함입니다.”

구룡제를 비롯한 천사련의 고수들이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황이 천마를 치러간다는 말 정도는 해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천마를 쳐야 하는 이유는 그가 마신 아수라를 이 땅에 강림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신 아수라가 얼마나 강할지는 상상불가에 측량불가입니다. 하지만 그가 이 땅에 강림하게 되면 인간들의 세상이 끝장이 나거나 모두 그의 발아래 엎드리게 될 것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자신의 무공과 마신 아수라의 기운을 융합한 것만으로도 여기에 계신 사황께서도 어쩌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게 천마이니까요.”

밑도 끝도 없는 말이지만 상황의 심각성만큼은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그렇다 해도 워낙 믿기 어려운 말인지라 다들 옆에 사람과 소곤거리거나 당최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로 화운을 빤히 쳐다봤다.

사황은 자신이 천마를 어쩌지 못한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인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으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여기 계신 분들께서 상대해야 할 적은 천종천마교의 명왕과 구천각의 구호법, 광명좌사, 북명우사 그리고 십이무상들입니다. 강시당의 금강마인들도 동원될 공산이 큽니다. 이건 사황께서 사전에 말씀해 주신 것인데, 명왕은 구룡제께서 맡아주셔야 합니다. 다른 분들께서는 멸제나 마존을 상대해 주셔야 하구요.”

멸제와 마존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천마에게 죽는다.

하지만 그때가 되려면 아직 며칠 더 남았다.

그리고 혹시나 자신들이 쳐들어가는 게 변수가 되어 그들이 죽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영악한 놈!’

사황은 화운이 자신을 들먹인 것에 내심 조소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뭐라고 내색하지 않았다.

이제는 좀 강해졌다며 막나가는 화운의 모습을 보는 게 더 짜증나고 화가 나서였다.

“이번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천마를 처치하는 것입니다. 천종천마교를 멸문시키는 게 아닙니다. 천종천마교에 큰 피해를 주겠다고 엉뚱한 데다 힘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천종천마교가 아니라 천마를 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힘주어 강조한 화운은 곧장 말을 이어나갔다.

“사황께서 천마를 상대하게 되면 천마의 근거지인 지하가 드러날 것입니다. 거기 수백 장 아래 지하에 돌로 지어진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유마정이라고 하는데 마신 아수라의 세계와 이어진 통로일 것으로 짐작합니다. 사황께서는 그걸 부숴 버린다면 천마의 힘이 약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니 적을 상대하면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으신 분은 유마정을 집중 공략해 주십시오.”

모두들 천마를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느낌을 받아 놀라워하면서도 화운이 이토록 세세하게 알고 있는 것에 의아해했다.

그러나 사황의 눈치를 보느라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대충 천마를 치는 이번 일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궁금하신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대답해 드릴 수 있는 한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화운이 사람들을 둘러봤다.

모두들 사황의 눈치를 보느라 선뜻 나서지 않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가자 남궁검가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학후배는 남궁검가의 남궁백이라고 합니다. 사황께서 천마의 위험성에 대해 그렇다고 하시니 그런 줄 알겠습니다. 여기 계신 다른 분들께서도 그에 관해서는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목숨을 내던지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공개한 정보에 대한 출처나 경위 정도는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남궁검가주가 공손히 말했음에도 사황의 얼굴이 못마땅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남궁검가주가 한 말은 실로 교묘해서 자세히 뜯어보면 그냥은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때 사황의 일그러진 얼굴을 확인한 화운이 얼른 나섰다.

“천마에 관한 정보는 사황께서 알고 계신 것과 제가 검성께 전해들은 걸 취합한 것입니다. 검성께선 등선하시기 전까지 천마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아! 천사련 분들께서는 모르시겠군요. 전 무당검성께 무학을 배웠습니다.”

천사련의 고수들은 화운이 검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에 놀라면서도 역시 하는 표정을 지었다.

화운의 나이 대에 그 정도로 강해지려면 검성 정도는 스승으로 모셔야 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어쨌든 화운의 대답은 만족할 만큼은 아니나 나름 설명이 되었다.

게다가 천사련의 고수들이 있는 자리에서 화운에게 꼬치꼬치 묻는 모습을 보일 순 없었던 남궁검가주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이후로는 누구도 묻지 않았다.

다들 어느 정도 알아들었고, 대체적으로 이번 일에 수긍하는 모습들이었다.

그에 사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행동 하나에도 정사의 고수들이 긴장하는 반응을 보였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지.”

사황이 이 자리의 끝을 알렸다.

번갯불에 콩 볶듯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정사를 막론하고 모두들 답답한 얼굴들이었다.

궁금한 것도 많고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사황의 기세와 검성의 명성 때문에 누구 한 사람 나서지 못하고 눈치만 봤다.

화산 장문인은 주인된 도리로라도 사황을 마냥 세워둘 수는 없었다.

“거처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황은 거만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화산 장문인이 사황을 안내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화운은 이 자리에 있다가는 정사의 고수들에게 시달릴 것 같아 재빨리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화산 장문인은 화산파 경내에서 한적한 곳으로 사황을 안내했다.

건물이 크지는 않았으나 조용한 것이 마음에 든 사황은 별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쉬십시오.”

화운이 사황의 뒤에다 대고 말했으나 사황은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화운은 화산 장문인과 함께 걸음을 돌렸다.

그러다 곧 걸음을 멈췄다.

멀리 연화봉이 보였기 때문이다.

화운이 멈추자 화산 장문인도 의아하여 멈추었다.

“상궁엔 화산파의 선령들께서 계신다지요?”

화운이 물었다.

“그렇네만 어디서 들은 겐가?”

생각 없이 말을 꺼냈다가 화산장문인의 물음에 대답이 궁색해진 화운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끄집어 냈다.

“선친께서 화산파에 대해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아, 시중에 떠도는 화산의 무학서적들도 구해주셨구요.”

“그러셨군.”

선친이라 했으니 돌아가셨다는 뜻일 터, 화산장문인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사실 화운은 화산이 싫었었다.

칠대문파 중 유일하게 싫어하던 곳이 바로 화산파였다.

어린 시절 화산파 무학서적을 읽던 화운이 궁금해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 화산파를 찾아왔던 부친이 문지기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계곡물의 깨끗함이 하류에까지 전해지지 않듯이 사람 사는 세상도 다 그런 거겠지.’

화산의 문턱은 너무 높은 것 같다는 말을 하려던 화운은 자신이 무슨 자격인가 싶어 그만두었다.

“무릇 도라는 것은 행함에 있는 것이지 머릿속에서 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겠지요.”

할 말이 없어진 화운은 선령께 받았던 가르침을 그대로 들려준 후 다시 움직였다.

화산 장문인은 화운이 그 말을 남긴 이유를 몰라 고개만 갸웃하다 손님들을 떠올리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정무맹과 천사련의 오십여 명의 고수들은 사황과 화운의 뒤를 따라 천마를 잡기 위해 마인들의 땅으로 출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