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암습
땅거미가 지자 객잔이 더욱 붐볐다.
객잔주인은 바빠 죽겠는데 십오륙 세로 보이는 놈이 나타나 점소이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어서 짜증이 났다.
“필요 없으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얼른 나가거라.”
객잔 안에 손님들이 많아 짜증을 내지는 못하고 서둘러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에 객잔주인이 돌아보니 탁자를 치우고 주방으로 향하던 점소이가 손님과 부딪쳐 넘어졌다.
“조심하지 않고, 손님께 무슨 짓이냐!”
객잔주인이 호통을 치며 한달음에 달려가 손님한테 미안하다며 굽실거렸다.
“주인장, 애가 다친 거 같은데 너무 그러지 마슈.”
“예, 예.”
대답하고 살펴보니 점소이가 발목을 붙잡고 있었는데, 벌써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일할 수 있습니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으나 간신히 일어섰을 뿐, 제대로 걷지도 못 했다.
“이렇게 바쁠 때 다치면 어쩌자는 것이냐! 이 시간에 어디서 일꾼을 구하라······!”
화를 내던 객잔주인이 부리나케 돌아봤다.
점소이를 구하지 않느냐고 묻던 놈이 이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객잔주인은 잽싸게 다가갔다.
“점소이로 일해본 적이 있느냐?”
“팔 년 동안 일하던 객잔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여긴 장사 땅이다. 장사 땅에는 장사만의 일당이 정해져 있다.”
“시켜만 주십시오. 돈은 주시는 대로 받겠습니다.”
객잔주인은 넙죽 조아리는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좋다. 저기부터 치우거라.”
“예, 예.”
아이는 잽싸게 달려가 다친 점소이가 어수선하게 만들어 놓은 자리부터 치우기 시작했다.
손놀림이 어찌나 야무진지 객잔주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두 시진(4시간) 후 객잔에서 조금 떨어진 어두운 골목.
“화주 세 병에 모주 두 병이 들어갔습니다.”
“지금도 마시고 있고?”
“예. 일찍 끝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약은 쓰지 말고, 조금씩 독한 술로 넣도록 해봐.”
“존명.”
한 시진 후.
“두 놈은 널브러졌고, 백봉이랑 신풍대주 둘이 대작하고 있습니다.”
“상태는?”
“백봉은 혀가 꼬부라졌고, 신풍대주는 백봉을 바라보는 눈이 게슴츠레한 상태입니다.”
“둘은 취했고, 둘이 널브러졌으면 자리가 끝나진 않겠군.”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좋아.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목을 따겠다.”
“존명.”
두 시진 후.
온 장사 땅이 새벽의 고요함에 잠긴 시각.
골목의 어둠속에서 복면을 한 이십여 명이 일체의 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쏟아져 나왔다.
그들 중 일부는 객잔 일층 창문을 통해 스며들 듯 안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객잔의 벽을 타고 목표인 객방 이층 창문가에서 숨죽이고 대기했다.
비살문의 부문주 곡불환은 그 광경을 지켜본 후 몸을 날려 야조처럼 객잔 지붕위로 올라갔다.
비살문 특급살수를 거쳤던 경험을 살려 일체의 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지붕위에 내려선 곡불환은 장침처럼 가느다란 병기를 꺼내 지붕을 뜯었다.
목재로 만들어진 지붕의 일부가 소리 없이 해체되었다.
급작스런 대기의 흐름은 고수의 기감을 건드리는 법이지만, 실내의 공기가 갑작스레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미리 준비한 천으로 막아가며 구멍을 뚫었기에 술 취한 놈에게 발각될 염려는 없었다.
곡불환은 만반의 준비를 한 후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멀리서 밤새 소리가 울렸다.
고요한 밤을 조금도 자극하지 않는 먼 산의 밤새 소리였다.
그런데 그 소리가 들려온 직후였다.
객방의 출입문과 창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대기 중이던 복면인들이 흐르는 바람처럼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지붕위의 곡불환은 반 호흡을 기다렸다가 공기의 흐름을 막고 있던 천을 치우고 안으로 뛰어내렸다.
어두운 실내.
소리 없이 뛰어내리는 곡불환의 양손에는 아주 작은 비도들이 손가락 사이마다 끼워져 있었다.
퍼버버버버벅!
동시 다발적으로 들리는 소리.
‘발각된 건가? 하지만 늦었다! 내가 이미 들어와 있으니까!’
곡불환은 수하들 쪽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여섯 개의 비도를 일제히 날렸다.
목표는 침상 위다.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며 침상 위의 존재를 확인해 두었다.
술 냄새가 진동하고 코고는 소리가 요란한 실내를 가르는 여섯 개의 비도를 날림과 동시에 바닥에 사뿐히 안착한 곡불환.
침상을 향해 쏘아져가려던 곡불환은 바닥에 내려선 자세 그대로 굳었다.
“쉬잇! 난 지금 이 자세가 너무 좋아. 그러니까 조용히 사라지도록 해.”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분명 눈앞의 침상에서 들려왔다.
‘들킨 건가?’
곡불환이 당황한 바로 그 순간.
마침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민 달이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침상을 비춰주었다.
일남일녀.
사내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고, 여인은 사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곡불환은 망설였다.
왠지 모르게 오싹한 느낌이 들었으나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는 놈을 처치 못할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에 벼락같이 덮쳐가려고 했다.
“돌려줄 테니까 가지고 가.”
막 튀어나가려는 순간에 튀어나온 말이 곡불환의 발목을 붙잡았다.
‘돌려줘? 뭘?’
의문이 떠오른 찰나 놈 앞의 허공에서 뭔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둥실 뜬 채 천천히 방향을 돌리고 있는 것들의 정체는 놀랍게도 비도였다.
곡불환이 날렸던 여섯 자루의 비도.
‘······헉?’
곡불환은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그가 날렸던 비도들이 모조리 허공에 붙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기의 유동만으로 비도를 잡아버린 고수.
곡불환은 다리가 다 떨려왔다.
독사 앞의 개구리처럼 옴짝달싹 못하고 숨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면 자신을 향해 천천히 날아오고 있는 비도들이 일제히 빛살이 되어 온몸을 꿰뚫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억겁같이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가자 비도들이 그의 코앞 한자리에서 마치 가져가라는 듯 가지런히 멈췄다.
죽음의 코앞에서 혹시나 하는 희망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곡불환은 두 손을 편 채 조심히 뻗었다.
그러자 비도들이 그의 손바닥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비도들을 얼른 감춘 곡불환은 침상을 바라봤다.
이때 침상의 사내가 손을 들어 바닥을 가리키더니 다시 창문을 가리켰다.
분명 수하들을 데리고 물러가라는 뜻이다.
곡불환은 창문을 넘어오자마자 뭔가에 당해 쓰러진 수하들 중 하나를 짊어지고는 창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세 걸음 걸을 때였다.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코고는 소리를 뚫고 날카롭게 울렸다.
“으음.”
침상의 여인이 뒤척였다.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여인의 잠을 방해한 것이리라.
깜짝 놀란 곡불환은 그 자리에 돌처럼 굳었다.
침상에서 쏘아져온 섬뜩한 살기가 뒷골을 강타했다.
곡불환은 식은땀을 흘리며 간절히 빌었다.
‘깨지 마라. 깨지 마라. 깨지 마라. 제발 깨지 마라. 천지신명이시여 제발 꿈속에서 함께 놀아주시어 저년이 깨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간절한 바람이 통한 것인가.
여인의 숨소리가 다시 평온해졌다.
그제야 속으로 한숨을 내쉰 곡불환은 경신술을 발휘할 때처럼 몸을 가볍게 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창가로 가서 짊어지고 있던 수하를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털썩!
축 늘어진 수하가 땅바닥에 떨어진 소리가 제법 둔탁했으나 이층의 잠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곡불환은 일부러 침상쪽에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수하들을 하나씩 짊어지고 와 창밖으로 던졌다.
방문을 열고 난입했다가 쓰러진 수하들까지 모조리 창밖으로 던져버린 곡불환은 침상을 쳐다봤다.
침상의 사내가 손을 내젓는 게 보였다.
가슴을 쓸어내린 곡불환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인 후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불청객이 사라지고 나자 어두운 가운데 코고는 소리만 울렸다.
침상의 화운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백리연이 자신의 무릎을 베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이토록 가까이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그녀와 함께 있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 어떤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도 좋으니 그녀가 깨지 않았으면 싶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깰까 봐 무릎 한번 움직이지 않으며 가만히 있었다.
두 녀석들이 한꺼번에 코고는 소리만 아니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밤이었다.
‘추우려나?’
화운은 대기 중에서 따스한 성질의 기운을 끌어당겨 백리연의 몸을 감싸주었다.
몸이 따뜻해지니 백리연의 몸이 이완되는 게 느껴졌다.
화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행복에 젖어 있는 사내의 미소였다.
해가 떴다.
따스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천 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백리연은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실내의 낯선 광경에 흠칫 놀랐다.
‘여기가 어디지?’
분명 처음 보는 곳이었다.
의아하여 끔벅거리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선우유성과 남궁현이 보였다.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린 백리연은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 번개처럼 빠르게 눈을 번쩍 떴다.
‘어, 어쩌지······!’
백리연은 크게 당황했다.
자신이 누군가의 무릎을 편하게 베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고, 그 누군가가 화운이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차라리 좀 전에 깨닫자마자 벌떡 일어나버릴 것을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때 늦은 후였다.
‘어떡하지?’
백리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숨만 죽였다.
‘하아, 어쩌다 이렇게 됐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술이 들어오자마자 대주의 기분을 풀어준답시고 권하고 마시고 그랬던 것만 기억이 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없다.
술이 술을 마신다더니, 취한 후로는 취기로 자꾸만 마셨나보다.
‘하아······.’
시간이 자꾸만 가고 있다.
금세 일다경이 흘렀다.
‘아플 텐데······.’
백리연은 슬쩍 아주 슬쩍 머리를 들어 주었다.
“물······ 무울······.”
남궁현이 뒤척이며 물을 찾았다.
그 소리에 백리연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단숨에 침상 아래까지 내려간 백리연은 잔뜩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돌아봤다.
“······!”
화운이 보였다.
침상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두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운기행공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백리연은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며 잽싸게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남궁현이 찾고 있는 물을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사뿐사뿐 출입문까지 다가가 손잡이를 잡은 백리연은 그제야 뭔가를 깨닫고는 흠칫했다.
화운 정도 되는 고수가 자신이 벌떡 일어난 기척을 감지하지 못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을 배려하여 그냥 눈을 감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백리연은 고개를 떨궜다.
“물을 가져올 게요.”
다 내려놓은 심정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백리연.
그제야 화운이 슬며시 눈을 떴다.
“멋쩍군.”
멋쩍지만 나쁘지 않았고, 조금은 아쉬웠다.
남궁현이 물만 찾지 않았어도 좀 더 같이 있을 수 있었을 거라는 걸 생각하니 괘씸했다.
퍽!
눈덩이처럼 뭉친 기운이 남궁현의 머리통을 때렸다.
“으악!”
남궁현이 머리통을 감싸 쥐고 벌떡 일어났다.
아픈 머리통을 마구 비벼대더니 낯선 방이라는 걸 깨닫고는 부리나케 주위를 둘러보던 남궁현이 침상의 화운을 발견했다.
“유성이 깨워서 내려가자. 늦었지만 배는 채우고 복귀해야지.”
화운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살살 좀 깨우시지. 아프잖아요.”
남궁현이 아픈 머리통을 문지르며 선우유성을 흔들어 깨웠다.
비몽사몽인 상태로 힘겹게 눈을 뜬 선우유성.
두 사람은 선우유성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함께 밖으로 나갔다.
***
“자정까지 술을 마시더니 해가 뜨고 한참 후에야 일어나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술을 마셨다고?”
“예. 알아보니 객잔 술이 동이 날 때까지 잔뜩 마신 모양입니다.”
“허! 이 판국에 술이나 퍼마셨다고? 육시를 낼 놈 같으니!”
“식사를 마친 후에는 동정호로 갔다고 합니다.”
“동정호엔 또 왜?”
“계집이랑 둘만 간 걸 보면 임무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구경삼아 간 모양입니다.”
“이 찢어죽일 놈 같으니! 지금 팔자 좋게 유람이나 할 때야!”
화운의 행보를 보고받은 사황은 화가 나서 펄쩍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