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미친 늙은이
사황과의 충돌.
화운은 마지막 순간에 검을 내려 버렸다.
그 순간 들이닥친 사황의 전륜멸천파에 전신이 가루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시간이 되돌아와 멀리 기암괴봉이 보였다.
마지막 순간에 검을 내려버린 건 사황의 분노를 더 자극하지 않고, 그냥 받아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부아가 치밀었다.
이백 년을 살았다는 늙은이가 그까짓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할 리가 없다.
다시 되돌리면 그만이라는 걸 알기에 그냥 자신의 감정을 터트려 버린 것이다.
화운은 이제 갓 스물을 넘은 나이였다.
자신의 미래와 행복을 위해서이지만 결과적으로 천하 모두를 위해 좌충우돌 동분서주했다.
그런데 이백 년이나 살아온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했다.
천마는 둘이 함께 상대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같은 입장이고, 같은 상황이고, 같은 처지인데 자신만 안달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화운은 허공으로 솟구쳤다.
기암괴봉 위의 사황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한참 올라간 화운은 검을 뽑아 냅다 절대검력을 펼쳤다.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던 사황이 인상을 쓰며 막았다.
하지만 화운의 신경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쾅쾅쾅쾅쾅쾅쾅!
화산에서 못 다한 충돌이 다시 벌어졌다.
정확히는 화운이 신경질을 부린 것이고, 사황은 얼떨결에 막아야 했다.
화운은 절대검력을 쉬지 않고 펼쳤다.
이제는 가장 강한 파괴력을 자랑하게 된 절대검력인데도 사황이 잘도 막았다.
화운이 전력에 가까운 절대검력을 발휘했는데도 사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좋아! 이것도 막아보십시오!”
화운은 그가 닿을 수 있는 천지간의 기운을 있는 대로 끌어 모았다.
그와 동시에 중단전과 하단전의 공력을 모조리 뽑아내 절대검력에 담았다.
그리고 천지간을 가르는 일식일초의 검격을 휘두름과 동시에 자신의 공력에 폭자결을 운용해 버렸다.
상상만 하고 있던 것을 펼쳐버린 것이다.
이것저것 따지고 계산하고 조심하지 않을 정도로 신경질이 나 있었던 것이다.
콰-앙!
천지간이 터져나가는 것 같은 굉음이 폭발하더니 기암괴봉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뿌연 흙먼지가 천지사방을 휩쓸었다.
이때 화운은 생각보다 훨씬 강한 위력임에도 기뻐할 새도 없이 줄행랑을 놓았다. 그나마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잽싸게 사라졌다.
화운이 사라진 순간 기암괴봉이 있던 자리에서 거센 바람이 흙먼지를 휘감아 허공으로 용솟음쳤다.
그러자 드러난 광경.
기암괴봉이 무너진 자리에 사황만이 우뚝 서 있었다.
광인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잔뜩 풀어헤쳐진 상태로 화운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이······· 육시를 낼 놈 같으니!”
***
“주화입마라도 든 것인지 미친 늙은이가 조사대를 참혹하게 죽이고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미친 늙은이?”
화운의 보고에 맹주 조극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미친 늙은이 입니다. 자기를 과시한다고 그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고, 성질난다고 예사로 사람을 죽여 대니 필시 주화입마에 든 게 확실해 보입니다.”
“상대하지 못하겠더냐?”
“사실대로 말씀드릴까요?”
“모든 보고는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뢰가 깨질 것이다.”
“맹주님을 비롯하여 맹의 누구도 그 노인을 상대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쪽 방향엔 신경 끄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무엄하구나. 네가 그 나이 대에서 발군이라는 건 인정한다만 감히 본 맹주를 평가한단 말이냐?”
“뒷짐 지고 선 채로 암석으로 된 봉우리를 무너트린 늙은이입니다.”
“······!”
“무슨 거대한 기의 유동 같은 걸 느낄 새도 없었습니다.”
화운은 예전에 사황이 했던 걸 떠올리며 말해주었다.
맹주 정도의 무위라면 기암괴봉을 무너트릴 수 있을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강환들을 마구 퍼부어야 할 터였다.
“제가 맹주님의 무위를 어찌 알겠습니까만, 어느 정도일 것 같다는 느낌 정도는 있습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 노인은 대적불가입니다.”
화운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까지 꾸벅 숙이자 조극산은 인상만 쓸 뿐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알겠다. 그쪽은 지켜보기만 하겠다.”
“아뇨, 그것도 하지 마십시오. 절대 사람을 보내지 마십시오. 혹여 그 늙은이가 이쪽으로 오기라도 하면 난리가 날 겁니다.”
“그러니까 이쪽으로 오는지 감시라도 해야 할 거 아니냐?”
“누가 감시한단 말입니까? 비천각의 세작들을 약초꾼으로 위장해서 보낼 겁니까? 그러면 들통이 안 날 것 같습니까? 씨알도 안 먹힐 일입니다. 괜히 긁어서 부스럼 만드는 것보단 신경 끄는 게 나을 겁니다.”
“······.”
화운의 말에 조극산은 난감한 표정만 지었다.
“보고 내용은 이게 답니다. 제 생각도 말씀드렸으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조극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운은 터벅터벅 맹주전을 빠져나갔다.
‘그깟 분풀이 때문에 일을 망쳐? 미친 늙은이 같으니!’
화운은 사황을 욕하며 신풍대 숙소로 갔다.
앞마당에 퍼질러 앉아 햇볕을 쐬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어! 벌써 오십니까.”
남궁현이 먼저 돌아보고는 밝은 얼굴로 일어섰다.
함께 있던 선우유성도 평상시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보여주며 일어났다.
‘그래, 나한텐 니들이 있지.’
고개를 끄덕인 화운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딱!
무방비로 있던 남궁현이 꿀밤을 맞았다.
“왜요?”
아프다는 시늉을 하며 쳐다보는 남궁현.
“이 대주님께서 바쁘게 동분서주하고 계시는데 한가롭게 햇볕이나 쐬고 있어? 쬐끔 강해졌다 이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 앗!”
화운이 또다시 꿀밤을 먹였다.
화운이 작심하면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남궁현은 머리를 비비며 저만큼 달아났다.
화운은 선우유성에게로 돌아섰다.
“너도 일루와.”
“한 시진 내내 수련하고 잠깐 쉬는 중이었어. 막 놀고 그런 거 아냐! 진짜 아냐, 형!”
“그래?”
“이제 막 강해지는 거에 재미가 들렸는데 놀고 그럴 이유가 없잖아.”
“그런 거라면 됐어.”
화운이 손을 내렸다.
“제대로 묻지도 않고 이러는 게 어딨습니까?”
“그랬다면 미안하다.”
이전처럼 똑같이 행동해 본 화운은 피식 웃었다.
“미안하면 우리 요청 좀 들어주십시오.”
남궁현이 다가왔다.
“신풍대 식구 늘려달라고?”
“······!”
남궁현이 귀신이라도 본 표정을 지었다.
선우유성도 놀란 얼굴이었다.
“어떻게 알았대?”
“니들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니까 알지.”
“거짓말.”
“나처럼 고수가 되면 안력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게 돼. 집중하면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고 그 안의 알맹이를 직접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이걸 가리켜 투시안이라고 하지.”
거짓말이다.
하지만 화운의 표정이 워낙 진지한데다 장강임무에서 워낙 놀라운 무위를 보여주었기에 선우유성과 남궁현은 반신반의했다.
화운은 그런 둘을 보며 웃다가 뒤를 돌아봤다.
이때쯤 백리연이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나온 백리연에게서 기분 좋게 만드는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화운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돌아섰다.
다가오는 백리연이 보였다.
물기로 젖어있는 머리칼과 은근하게 풍겨오는 향기.
역시나 기분이 바로 좋아졌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누님, 조심하십시오.”
“······!”
화운도 백리연도 의아하여 남궁현을 돌아봤다.
“대주님이 투시안으로 누님의 알몸을 들여다본답니다!”
“······!”
깜짝 놀란 화운은 서둘러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백리연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가오며 모두가 놀랄 말을 했다.
“볼 만해요?”
“에?”
“······!”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기분 좋은 향기를 풍기며 다가온 백리연이 남궁현에게 꿀밤을 먹였다.
“너 남궁검가 소가주 맞아? 믿을 걸 믿어라. 설사 그럴 능력이 있다고 쳐. 대주님이 그런 짓이나 할 사람이야?”
할 말이 없어진 남궁현은 억울한 눈빛으로 머리만 비볐다.
백리연은 그런 남궁현을 두고 화운을 쳐다봤다.
“가셨던 일은 잘 되었어요?”
“아뇨, 잘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 좀 도와주십시오.”
“뭐든지 말만 하세요.”
백리연이 흔쾌히 대답하자 화운은 만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술 마시러가요.”
“예에? 이 대낮부터요?”
“대낮은 무슨, 해가 기운 지 한참이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뭐든 말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럼.”
“너희들도 따라와.”
“대주님이 사는 거라면야.”
“비싼 거 먹어도 되요?”
남궁현과 선우유성이 신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살 거니까 맘껏 먹고 마셔도 돼. 가자.”
화운은 세 사람을 데리고 정무맹 밖으로 나갔다.
지금은 화운이 신풍대와 함께 장강에서 수적들의 선단을 침몰시키고, 세 명의 채주들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장강수로왕과 사천독왕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복귀한 시점이었다.
정무맹이 창설되자마자 첫 번째로 들려온 승전보라 장사 거리가 무척 시끌벅적했다.
그러한 때에 신풍대가 거리로 나왔으나 바로 알아보는 이들은 없었다.
다들 장사 땅은 처음이었고, 세가의 후기지수들이 일반사람들 앞에 얼굴을 보일 일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백리연의 미모에 시선을 빼앗긴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네 사람이 객잔을 찾아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그들을 알아본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
“왜?”
“백리 아가씨다!”
“백리 아가씨가 누군데?”
“내가 말했잖나. 작년에 강서 땅에 간 적이 있는데 백봉 백리 아가씨를 멀리서 본 적이 있다고.”
“백봉이라고? 어디?”
“저기 저분. 저분이 틀림없어. 캬! 그때보다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아! 아주 활짝 피었구나! 수수한 옷차림조차 아가씨의 미모를 가리지 못하는군!”
“이 친구야, 그럼 저 네 사람이 신풍대라는 거잖아! 저들 중에 한 사람이 신풍대주일 거고!”
“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그제야 백리연에게서 세 사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신풍대라고?”
“그럼 저 남자가 신풍대주일까?”
“어디, 누구?”
“백봉 바로 옆에 말이야.”
“저 사람이라고?”
“신풍대 중 젤 나이가 많다고 했잖아.”
“맞아, 나도 그렇게 들었어. 잘생기긴 했지만 좀 평범한 쪽에 가깝다더군.”
“나이가 많긴, 이제 스물도 될까 말까할 것 같은데, 하, 저 나이에 수로왕과 독왕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면 신룡이구먼, 신룡이야!”
“신룡은 무슨, 신룡을 아무데나 갖다 붙이면 안 되지.”
“그럼 어디다 갖다 붙여?”
“칠대문파의 신룡들이 들으면 기가 막혀 웃을 걸세.”
“칠대문파의 신룡?”
“화산기룡, 무당명검, 복호검후, 점청분광 그 정도는 되어야 신룡이지.”
“맞아, 칠대문파의 후기지수들이 있었지.”
칠대문파 후기지수들을 들먹이는 말에 또 다른 이가 동감을 표했다.
“그들이 수로왕이랑 독왕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럴 거네. 아마도 사파들의 무위가 부풀려진 모양이야.”
대화가 칠대문파에 대한 막연한 믿음으로 흘러갔다.
칠대문파가 오랫동안 정파의 중심이다 보니 사람들의 인식 속에 무너지지 않을 기둥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거리 여기저기서 남궁검가주의 소가주인 남궁현과 백봉 백리연을 알아본 사람들이 늘어난 때문에 네 사람이 신풍대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거리가 북적거리게 되었다.
그에 부담을 느낀 화운은 가장 먼저 발견한 객잔으로 들어갔고, 객잔 밖에 몰려온 사람들이 돌아가기는커녕 계속 몰려들자 객잔주인에게 객방을 달라고 한 후 이층 객방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아무래도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신풍대원들이 객방으로 모습을 감추었으나 그들이 그 객잔에 있다는 걸 본 이들이 거리에 가득했고 그중 일부는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
각종 점포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시장.
어디서 잡일이나 할 것 같은 허름한 복장을 한 사내가 바쁜 걸음으로 시장 한복판에 있는 푸줏간 안으로 쏙 들어갔다.
푸줏간 안에는 땅 속 깊이 판 지하가 있었고,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커다란 돌덩이 같은 얼음들이 공기를 차갑게 하여 한쪽에 걸려 있는 큼지막한 고깃덩이들의 부패를 막고 있었다.
“식사시간은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노기가 실린 음성이 음산하게 울렸다.
“신풍대가 나타났습니다.”
“어디에?”
사내가 지하 입구에서 보고하자 장소를 묻는 늙수그레한 목소리에서 노기가 사라졌다.
“서풍로에 있는 침향객잔입니다.”
“객잔?”
“술과 음식들을 시킨 후 객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내의 말이 끝난 순간 안쪽 어둠 속에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가에 핏물이 내비친 노인의 얼굴은 무척 음산해 보였다.
천사련의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비살문의 부문주 곡불환이었다.
“이 시간부터 술을 마신다고?”
“혹여 저희들을 끌어들일 미끼가 아닐지······.”
“흠, 그럴 수도 있고, 어린놈들이라 장강에서의 일로 지들끼리 흥청망청 한바탕 놀려는 것일 수도 있지.”
“어떻게 할까요?”
“가서 점소이 갈아치우고 살펴봐. 얼마나 마시는지. 혹시라도 어두워질 때까지 마시면 목을 따버리게 애들 비상대기 시키고.”
“존명.”
사내가 물러가자 곡불환은 혀를 날름거려 입가의 핏물을 핥았다.
“간만에 제대로 된 피맛 좀 볼 수 있겠군.”
무척이나 음산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