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사황의 분노
정무맹에서 스물일곱 명이 출발했다.
화운까지 포함한 숫자였다.
우문검가주를 비롯한 일부는 정무맹에 남았다.
누군가는 맹을 당분간 이끌어야 했고, 누군가는 비천각의 정보대를 빠르게 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섬서성 화산으로 가는 길은 호북성 동부를 수직으로 가로질러야 해서 꽤 먼 길이었다.
호북성에 진입하자마자 천사련의 동태를 살폈던 비천각의 세작들에 의해 화운의 말대로 붉은 머리에 붉은 수염을 한 노인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 날 천사련의 고수들이 대거 련을 나섰다는 보고를 받았다.
화운의 말이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정무맹의 고수들은 화산으로 계속 이동하였고, 비천각의 세작들은 천사련의 행보를 계속 감시했다.
고수들이 대거 빠져나간 정무맹을 천사련의 고수들이 덮친다면 그날부로 끝장이었다.
혹시라도 천사련의 고수들이 정무맹으로 향하다면 맹의 모든 무인들이 빠르게 철수를 해야 했기에 비천각의 이목은 온통 천사련의 고수들에게 집중되었다.
다행히 천사련을 출발한 사파의 고수들은 곧장 북상하여 정무맹과 점점 멀어졌다.
거기까지 보고를 받은 정무맹의 고수들은 각파로 전언을 보냈다.
각파의 고수들을 화산으로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화산으로 사파의 고수들이 대거 모일 거라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렇게 긴박하고 발 빠르게 움직인 결과 정무맹의 고수들은 천사련이 화산에 도착하기 하루 앞서 도착할 수 있었고, 다음 날 사황이 이끄는 천사련의 고수들이 도착하자 사황의 배분을 고려하여 화산의 대표 검객이라고 할 수 있는 매화검주가 화운과 함께 산 아래까지 마중을 나갔다.
사황혈천!
사황의 존재감은 그 말로도 다 설명하지 못한다.
피처럼 붉은 적룡포와 활활 타오르듯 새빨간 머리카락, 대춧빛 얼굴에 머리카락처럼 붉은 수염.
거기에 위엄이 넘치다 못해 두렵게 만드는 강렬한 눈빛.
어지간한 고수들조차 숨이 멎는 것 같아 꼼짝도 못하게 만든다.
“어서 오십시오. 화산의 매화검주입니다.”
매화검주가 정중히 인사했다.
전신을 짓누르는 사황의 기도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사황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준 게 다였다.
“얼마나 모였느냐?”
사황의 시선이 화운에게 향했다.
“화산에 있는 분들까지 하면 서른이 조금 넘습니다. 이삼일 후면 천하각지에서 수십 명이 더 모일 거라고 하니 그때 출발하면 될 겁니다.”
“늦다.”
“저도 조급합니다만, 한 사람이라도 더 가야 합니다. 아시잖습니까.”
“이 정도로 얼마나 도움이 된다고.”
“이렇게 모인 분들 중의 누군가가 마지막 숨통을 끊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렇게 죽을 천마였으면 진즉 죽었다.”
“영감님이랑 제가 그렇게 만들면 되잖습니까.”
“발칙한 놈! 누가 영감님이냐!”
사황이 버럭 소리쳤다.
순간 온 세상을 짓밟아 버릴 것 같은 무지막지한 살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제가 사황님, 사황님 하며 굽실거리길 바라십니까? 천마한테도 아수라의 개라고 한 접니다. 바랄 걸 바라십시오.”
사황의 엄청난 살기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구는 화운.
거기에 천마한테 아수라의 개라고 했다는 말에 매화검주는 물론이고 구룡제와 적성대도황 그리고 태양존자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아수라의 개 맞다.”
사황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예.”
가볍게 웃어준 화운은 그제야 구룡제 등을 바라봤다.
“신풍대주 화운입니다.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운이 정중히 예를 차리고 보니 태양존자의 얼굴이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다.
태양존자는 하남에서 소림을 노리다가 구룡제의 친서를 받고 회군하여 호북에서 합류하였는데, 사황을 인정할 수 없다며 달려들었다가 일격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화운의 정체를 알게 된 구룡제 등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크게 놀랐다.
화운이 자신들 못지않다는 걸 알아봤기 때문이다.
‘사황이 저 아이를 인정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겠군.’
‘사황에 천마 이제 저 아이까지······ 기가 막힐 일이군.’
속내를 감추고 담담히 고개만 끄덕이는 구룡제와 적성대도황.
화운이 그들 뒤를 살펴보니 구룡팔도객과 적성십이군 그리고 이화태양종의 두 호법이 보였다.
이화태양종의 두 호법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건 곧 검마와 맞닥트리지 않았다는 것이고, 화운이 미리 보낸 무영투가 검마의 발걸음을 대륙전장으로 바꿔놓았다는 걸 의미했다.
‘영감님, 잘하셨습니다.’
화운은 무영투에게 감사를 전했다.
무영투는 지금쯤 검마와 함께 대륙전장에 있을 것이다.
화수련을 찾고자 죽림원의 식객들이랑 백의대가 자리를 비워버린 틈에 대륙전장을 노리는 음산노괴 무리들은 무영투와 검마가 막았을 것이니 후한 대접을 받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르시지요.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식은땀만 줄기차게 흘리고 있는 매화검주를 대신하여 화운이 안내를 자처했고, 사황은 특유의 거침없는 걸음으로 화산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화산파 산문 앞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산파 장문인을 비롯하여 정무맹 맹주 조극산을 비롯한 고수들이었다.
멀리 사황이 보이기 시작하자 진짜 사황이 맞는지 소곤거리더니 가까이 다가오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구룡제와 적성대도황 그리고 태양존자가 사황의 뒤를 따르고 있는 광경에 설마하던 의심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화산 장문인입니다.”
“정무맹 맹주 조극산입니다.”
화산파 장문인이 예를 갖추고 나자 조극산이 뒤를 이었다.
사황은 그런 두 사람을 차례로 본 후 정파의 다른 고수들까지 천천히 둘러봤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모두를 휘감은 순간이었다.
그만큼 사황이 내뿜고 있는 존재감이 엄청났다.
모두를 둘러본 사황은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천마의 주위를 끌어줄 정도는 되어줄 이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느냐?”
사황이 화운을 돌아보며 물었다.
“천마가 마신 아수라를 이 땅에 강림시키려 한다는 것과 천하가 합심해야만 천마를 죽일 수 있다고 알려드렸습니다.”
“천마를 상대하는 건 네놈이랑 본좌 외에 누가 할 수 있겠느냐. 유마정이나 부수라고 해라. 그럼 천마의 집중이 조금은 흐트러지겠지.”
“아!”
사황의 말에 화운이 탄성을 터트렸다.
“직접 싸워놓고도 유마정을 부수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냐?”
“천마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만 하느라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천마의 힘은 천종천마교를 둘러싸고 있는 기문진과 유마정에서 흘러나오는 마기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 둘만 우선적으로 부술 수 있다면 어쩌면 네놈 말대로 될지도 모르겠다.”
사황은 꽤나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역시 이번 화운의 생각에 적잖이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파와 사파의 고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문진과 유마정 그리고 화운이 직접 싸워봤다는 말 때문이었다.
‘사황 같은 존재가 이런 자리에서 거짓을 말할 리는 없고 정말 천마랑 싸워봤단 말인가?’
적성대도황의 의문이었고.
‘허허! 어쩌면 정파의 미래가 될 재목일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 이상이지 않은가. 어찌도 이리 보는 눈이 없단 말인가?’
조극산의 자책이었다.
“사황이시라면 어딜 가시든 거리낌이 없으실 겁니다. 허나 태양과 달이 만천하를 비추듯 다른 사람들도 배려해 주시는 게 어떨지요?”
화산의 이심환이 나름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제아무리 사황이라고 하더라도 다들 말 한 마디 못하고 멀뚱히 서 있는 게 답답하여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하려던 차였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황에게서 성난 기세가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배려? 지금 배려라고 했느냐? 본좌가 누군지나 알고서 하는 말이냐!”
고수의 살기는 하수에게 치명적이다.
그건 극강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사황의 살기가 집중되자 이심환은 몸이 짓눌려 움직일 수도 없었고 심장이 갈가리 찢겨나갈 것만 같았다.
“어찌 화를 내는지는 모르나 고정을······!”
화산장문인이 부드럽게 말하며 나서자 사황의 살기가 그에게도 몰아쳤다.
두 눈을 부릅뜨며 당황하는 화산장문인.
그 모습에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물러서시게.”
이때 조극산이 서둘러 끼어들어 화산 제자들을 제지한 후 화급히 사황을 향해 포권했다.
“대사를 앞두고 있으니 노여움보다는 무림 선배로서의 자비를 베푸심이 어떻겠습니까?”
조극산의 요청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사황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정중히 요청한 것이니까.
하지만 이심환이 그랬듯이 조극산 역시 사황의 진짜 정체에 대해 모르고 있어 실수를 잇달아 범하고 있었다.
“배려에 자비까지?”
사황의 분노가 급속도로 커졌다.
천하를 짓밟아버릴 것 같은 무지막지한 분노가 조극산은 물론이고 정파 고수들 전체를 짓눌렀다.
“무림의 역사까지 왜곡한 놈들이 감히 무림 선배 운운을 해? 주둥이를 찢어놓아도 그렇게 말하는지 보자!”
사황의 전륜멸천대공이 정파의 고수들을 찢어발기려는 듯 더욱 살기등등해졌다.
그냥 위협만 주려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해버리려고 들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콰앙!
화운이 발휘한 기운이 사황의 전륜멸천대공의 살기를 측면에서 밀쳐냈다.
밀쳐낸 방향으로 충격파가 폭발적으로 뻗어나가며 화산의 산문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이놈! 죽고 싶은 것이냐!”
사황의 분노가 서릿발보다 더 차가워졌다.
분노가 극에 달한 모습!
이때 화운이 크게 외쳤다.
“사황께선 무해곡주로서 무해노인의 후인이십니다. 과거 천하는 무해노인을 배척한 것도 모자라 그분을 공격까지 하였고, 그 일로 무해노인의 혈족들이 참화를 당하였습니다. 천하는 무해곡에 엎드려 빌어야 할 것입니다.”
“닥치지 못할까!”
화운을 향한 사황의 분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운 역시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터진 일 차라리 제대로 터트려 버릴 생각이었다.
“엎드려 빌어도 모자랄 판국인데, 배려에 자비 그리고 선배운운까지 들으니 화가 난 거잖습니까!”
“그래도 이놈이!”
“천하는 무해곡에 죽을죄를 지은 게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까마득한 선대가 한 일로 그냥 목을 내어줄 수는 없는 일, 그냥 여기서 한바탕 하죠! 어차피 복수하려고 그만큼 힘을 키웠던 거잖습니까! 오 년의 세월, 그렇게나 천하를 피로 물들여놓고도 성에 차지 않으신다면 어쩌겠습니까! 다시 한바탕 해야지요!”
화운이 검성을 만나 오 년 동안 검을 배우고 있을 때 사황은 천하를 피로 짓밟았다.
그 때의 일을 들먹이며 아득바득 대든 화운이 전신의 공력을 일으켰다.
결코 사황에 밀리지 않는 엄청난 기운이었다.
이제야 화운의 진실한 무위를 어느 정도나마 엿보게 된 사람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황이 단단히 격노한 상황이라 그런 것에 관심을 보일 여유 따위는 없었다.
“오 년! 지금 오 년이라고 했느냐! 네놈들이 수백 년 동안 호사를 누리고 사는 동안 우린 그 척박한 땅에서 숨죽이고 살았다!”
“알겠습니다. 오 년 동안 그렇게나 많이 죽이고도 모자라신다니 다시 한번 하시지요. 물론 우리도 그냥 죽어드리지는 못합니다. 선대의 일이 안타깝고 미안하다고 하여 후대가 죽어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고 당신이 숙모님이 피해 계시던 섬을 날려 버렸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도 복수 좀 해야겠습니다. 하죠, 해!”
“그래, 네놈부터 죽여줄 테니까 발버둥 쳐봐라!”
기하급수적으로 커진 두 사람의 분노가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곪은 상처 한 번 터트리고 말자고 생각했던 화운도 이옥영의 일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화가 폭발했다. 게다가 한 번 화가 폭발하니 그동안 사황 때문에 두려워하던 시절들이 떠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참고 싶지가 않았다.
콰-앙!
절대검력과 전륜멸천파가 정면으로 격돌했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이 장(6m).
극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다보니 찰나 간 격돌한 폭발력이 어마어마했다.
절대검력과 전륜멸천파의 파편들이 사방을 휩쓸며 숲이고 사람이고 가리지 않고 덮쳤다.
“감히!”
진노한 사황이 극성의 전륜멸천파를 펼쳤다.
검붉은 빛을 뿌리고 있는 거대한 강기의 파도.
순수함에 가깝도록 정제된 전륜멸천대공이 강환 이상의 힘으로 중첩하고 중첩한 강기의 파도에 폭발할 것 같은 사황의 살기까지 가세하여 화운에게로 몰아쳤다.
화운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지금 그가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절대검력을 발휘했다.
화운의 기감이 닿는 천지간의 기운들이 찰나의 순간 하나의 검력이 되어 사황을 향해 폭풍처럼 몰아쳤다.
번-쩍!
전륜멸천파의 검붉은 빛과 절대검력의 새파란 광채가 산산이 부서졌다.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격돌이었다.
폭발음조차 사방으로 뻗어가는 격돌의 충격파에 갈가리 찢겨버릴 정도였다.
거대한 유성이 폭격한 듯 화산의 일대 지형이 완전히 변해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격돌이었다.
구룡제나 적성대도황 그리고 조극산 같은 절대의 고수들조차 안색을 굳히며 자리를 피해야 했다.
콰콰콰콰쾅!!
뒤늦게 시작된 엄청난 폭발음과 간신히 폭발의 여파를 피한 고수들은 말문이 막힌 채 두 사람만을 멍하니 쳐다봤다.
“시건방진 놈!”
아직 가라앉지 않은 사황의 분노가 전륜멸천파의 파도에 실려 무자비하게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