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신명도
태산.
정상에 올라선 화운은 충만한 선기를 느끼며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저기 자리한 기암들과 푸르게 뒤덮인 산의 경치가 무척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 장관이나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화운은 한 차례 심호흡으로 태산의 기운을 한껏 받아들인 후 스승님께서 굳이 태산에 오르라고 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분명 바다와는 다른 뭔가가 있을 것이다.
정상에 서서 한참을 둘러보고 생각해봤으나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보이는 거라곤 하늘과 그 아래 드넓은 세상뿐이다.
세찬 바람과 눈부신 햇살도 있다.
‘산에 오르라 하였으니 하늘을 보라는 것일까?’
가부좌를 틀고 앉은 화운은 금세 의문 속으로 빠져들었다.
반 시진이 지나자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차갑고 적막한 어둠.
그 속에서 양기가 가라앉고 음기가 성하기 시작했다.
선기와 양기 그리고 음기의 유동을 지켜보다 무심열락으로 빠져들었다.
시간은 어둠과 함께 계속 흘렀다.
세찬 바람과 깊은 어둠 속에서 화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꺼풀을 두드리는 자극에 눈을 떴다.
멀리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뻗어가는 태산 자락과 쉴 새 없이 늘어선 산맥들, 넓게 깔린 벌판과 길게 흐르는 강줄기 그리고 다시 산자락들이 끝없이 겹쳐진 너머에 태양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
불현듯 떠오른 생각.
태양은 생각 보다 멀리 있다는 것이다.
아주 멀리.
세상의 끝자락 즈음에 자리하고 있다.
스승님께서 태산에 오르라고 한 이유.
혹여 저 먼 곳까지 내다보라는 뜻이지 않을까?
이 높은 태산에서조차 다 볼 수 없는 저 먼 곳까지 내다보라.
인지의 감각을 초월하는 눈.
마음의 깊이.
마음의 깊이는 곧 마음의 크기.
‘결국 내 그릇을 키워야······!’
이때 꼬리를 물듯이 불현듯 떠오른 음성.
- 신명도라 명명한 건 정신을 신의 그릇으로 만들어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신력이 신에 근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금을 통틀어 누구도 가보지 못한 경지이거늘 누가 감히 이렇게 저렇게 수련하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구룡제가 했던 말이다.
무극은 정신력이 궁극에 달하는 경지고, 이를 곧 신명도라고 했다.
하기야 앉아서 저 멀리 태양이 있는 곳까지 내다보고 인지하려면 신의 그릇이 되어야만 가능하겠다.
신의 그릇.
신의 권능에 근접한 정신력.
신명도.
무극에 이르러 시공안을 깨친다면 수백 년의 시공 너머를 내다볼 수 있느니라.
이어지고 이어지다 결국은 제천마존이 남긴 말로 돌아왔다.
시공안.
수백 년의 시공 너머까지 내다본다는 시공안.
어느 것 하나 선명하게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떠오르는 태양의 빛만큼이나 눈부시게 존재하지만 손에 잡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절대검력이 계속 강해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
검마는 태산으로 향했다.
화운이 뢰주의 바닷가에 없는 걸 확인했으니 태산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삼 년을 넘는 시간을 홀로 떠돌다 지친 마음 한구석에 스승으로써의 책임을 끝까지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화운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태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자락에 허름한 노점이 보였다.
언젠가 이곳을 지나가다 한 병의 술로 고단한 육신을 달래주었던 곳이다.
검마는 노점을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노점에서 누군가가 검마를 불렀다.
“홀로 자작하는 이를 못 본 척하는 건 주객의 도리가 아니외다.”
검마가 걸음을 멈추고 보니 아홉 마리의 용이 서로를 휘감고 있는 구룡포를 걸치고 있는 노인이 홀로 자작하고 있었다.
검마는 잠시 바라보다 구룡포의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앉으시오.”
노인이 권한 자리에는 빈잔이 놓여 있었다.
“천하를 차지한 삼존 중의 한분이 어찌 혼자인 거요?”
검마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구룡포 노인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웬 놈이 내 사지를 잘라버렸으니 혼자일 수밖에요. 드시오.”
구룡포의 노인, 구룡제가 검마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검마는 구룡제가 채워준 잔을 가져가 단숨에 비운 후 술병을 들고 구룡제의 잔에 따라주었다.
구룡제는 잔이 차자마자 곧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확실히 벗이랑 함께 마시니 좋구려.”
“내가 벗이오?”
“한 잔을 함께 마셨으니 이제 술벗이잖소.”
구룡제가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검마는 그도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비웠다. 그리고 구룡제의 잔을 채워주었다.
“혹여 사지를 잘라버렸다는 놈이 태산에 있다더이까?”
“그렇다는구려. 아마도······ 내 술벗의 제자인 모양이오.”
“내가 누군지 안단 말이오?”
“검마.”
“과분한 별호지만 맞소.”
“스스로 그리 말했다고 하던데 과분하다?”
“귀찮은 일을 멀리 하고자 뻔뻔하기로 한 거요.”
“재밌구려.”
“술이나 더 마십시다.”
“제자를 지키려고 날 취하게 만들 셈이오?”
“그 녀석이 태산에 온 건 수련 때문이오. 하루아침에 깨달을 성질의 것이 아니니 내일 함께 가보도록 합시다.”
태연하게 말한 검마는 주방 쪽을 돌아보며 빈 술병을 들고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노점 주인이 술병을 들고 잽싸게 달려왔다.
검마는 구룡제의 잔과 자신의 잔에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자신의 잔을 단숨에 비웠다.
“부럽구려. 아쉽고.”
구룡제는 검마의 말이 의아했다.
“부러운 건 뭐고, 뭐가 아쉬운 것이오?”
“무학에 매진할 수 있는 삶이 부럽고, 그런 삶을 살지 못해 이 자리에서 겨룸을 청할 능력조차 되지 못한 게 아쉽소.”
검마가 천하를 떠도는 사정에 대해 대략 알고 있던 구룡제는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하여 검마의 말 속에 약간의 호승심과 쓸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구룡제는 자신의 잔을 비운 후 검마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아들놈이 하나 있소. 나름 강하게 키워놓았는데, 오 년 전 쯤에 한 번, 한 달 전쯤에 또 한 번. 그렇게 두 번이나 그쪽 제자에게 당한 모양이오. 이번엔 아예 단전이 망가졌더이다.”
“······!”
“그 일로 온 게 아니니 그리 걱정할 건 없고, 대체 어떻게 가르친 것이오?”
이번엔 검마가 술잔을 비웠다.
“나도 내가 뭘 어떻게 가르쳐준 것인지 모르겠소.”
“······!”
“사실이니 그렇게 고까운 표정은 짓지 마시오.”
“자세히 들어봅시다.”
“아무래도 술이 더 필요할 것 같소.”
검마의 말에 구룡제는 노점 주인을 불러 술병을 몇 병 더 가져오라고 했다.
두 사람은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술을 주문했다.
어둠이 짙게 깔릴 때까지 두 사람이 비운 술병만 서른 개가 넘었다.
노점 주인은 안주는 하나도 시키지 않으면서 술만으로도 매상을 톡톡히 올려준 늙은 주당들이라며 놀라워했다.
다음 날 아침.
노점 주인은 아침 일찍부터 해장국을 끓여야 했다.
늙은 주당들이 눈을 뜨자마자 해장국을 찾아서다.
해장국이라고 해봐야 기름기 가득한 닭국물이 전부였지만, 두 늙은 주당들은 그것도 개운하다며 벌컥벌컥 마셨다.
“이건 얼만가?”
검마가 물었다.
전날 마셨던 술은 구룡제가 계산을 치렀기에 닭국물은 자신이 계산하려는 것이다.
“그냥 가십시오. 간밤에 매상을 많이 올려주셔서 이것까지 받기가 좀 그렇습니다.”
노점 주인이 웃으며 사양했다.
“마음만 받겠네.”
검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철전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길가에 나가 있는 구룡제에게로 다가갔다.
“이제 감세.”
“아무래도······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군.”
“······!”
검마가 의아하여 쳐다보니 구룡제가 태산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마가 구룡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멀리서 화운이 터벅터벅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와 있는 걸 알고 오는 걸까, 아니면 우연히 내려온 것일까?”
검마가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 같으면 후자라고 여기겠지만, 검마는 그렇지가 않았다.
화운이 무공을 수련할 때 얼마나 지독하게 집중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녀석의 기감이 여기까지 인지했단 말인가?”
구룡제가 감탄인지 의문인지 모를 얼굴로 물었다.
지금의 구룡제는 화운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 얼굴도 명확하지 않은 거리임에도 화운일 거라고 확신했다.
다가오는 화운이 강한 기도를 과시하지 않고 있음에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놀라운 존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어보면 알겠지.”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검마와 놀란 눈으로 지켜보는 구룡제.
화운은 그런 두 사람 앞으로 터벅터벅 다가왔다.
전체적으로 살이 빠진 모습이지만, 얼굴 표정만은 밝아보였다.
검마가 화운의 곁을 떠나던 삼 년 전쯤엔 둘 다 얼굴들이 좋지 않았다.
화운은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련에 집중하느라 메말라 보였고, 검마는 손자를 생각하며 다시 먼 길을 가야겠다고 마음먹던 차라 어두웠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떠나실 때보다 얼굴이 좋아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너무 늦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늦고 빠름이 의미 없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화운의 말에 검마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화운이 구룡제를 돌아보며 포권했다.
“신풍대주 화운이 구룡제를 뵙니다.”
“날 아는 것이냐?”
“밤새 저에 대해 들으셨잖습니까.”
“······!”
검마가 다 이야기해주었다.
화운이 어떻게 강해진 것인지.
검마는 화운이 수련을 마치면 시간을 되돌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굳이 비밀로 하지 않았다.
실로 믿기지 않는 기이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천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고 화운이 천사련으로 가서 구룡제를 만났다는 이야기도 했다.
검마가 구룡제에 관한 이야기까지 한 건 화운에게 바다와 태산으로 가라고 한 이유가 거기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다.
신명도.
신의 그릇.
그건 구룡제가 화운에게 했던 말이다.
그리고 검마는 화운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신명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검마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바다의 포용과 태산의 안계만이 인간 세상에서 가장 신에 근접한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구룡제는 화운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간밤에 여기로 왔었던 것이냐? 내가 왜 몰랐지?”
“아뇨, 술시중 들게 될까봐 오지 않았습니다.”
“술시중 들까봐 예까지 오지도 않았다면서 우리가 술 마시는 건 어떻게 알고?”
“바람이 술기운과 두 분이 함께 있는 걸 알려주더군요.”
화운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순간 검마가 눈을 크게 떴다.
“여기까지 내다본 것이구나!”
“그러라고 태산에 보내신 거잖습니까.”
그러라고 보낸 건 맞다.
하지만 이토록 빠른 진척을 보일 줄은 몰랐다.
“시간을 되돌린 것이냐?”
“아닙니다. 그랬다면 스승님의 기억에 저와 함께 바닷가에 있었던 기억이 없겠지요.”
“아! 그렇겠구나!”
화운이 시간을 되돌려서 태산에서의 수련 시간을 늘린 것이라면 다시 시작하면서 바다에 가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다.
“태산에 온지 이제 한 달입니다. 생각하시는 것처럼 태산 정상에서 여기까지 내다보고 그런 능력은 얻지 못했습니다. 다만 집중하다보면 천지간의 기운들이 전해주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저와 인연이 있는 분들이라 그런지 두 분이 와 계신다는 걸 바로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니 검마는 대충 상황을 이해한 것 같았다.
화운은 구룡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저랑 손을 섞는 건 무의미하다는 걸 아시지요?”
구룡제는 뭐라고 해야 할 지 혼란스러웠다.
절대자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인 구룡제는 검마의 강직한 성향을 꿰뚫어보았다.
하지만 검마의 말이 너무 황당무계하여 반신반의하던 상태였다.
그의 일생에 이토록 혼란스러운 경우는 처음이었다.
“네 이야기를 밝힌 건 네가 혼자서 짊어질 짐이 아닌 것 같아서다. 나머지 이야기는 함께 하도록 하자.”
검마가 끼어들었다.
화운에게 그렇게 말한 검마는 구룡제를 돌아봤다.
그런데 구룡제가 고개를 저으며 검마의 말을 막았다.
“이야기는 자네에게 들은 것만으로 충분하네.”
만년거암처럼 담대한 눈빛의 구룡제.
천하를 짓누를 것 같은 절대자의 위엄을 내뿜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