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절대검력의 시작
바다를 배웠다.
포용한다는 게 뭔지 깨달았다.
그건 받아주는 게 아니다. 열어주는 것이다.
나에게로 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걸 깨닫고 나자 이후는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진척되었다.
육 년의 수련이다.
이전까지 합치면 십일 년이 넘는 수련이다.
그 기간만큼 절대검력이 강해졌다.
물론 아직 만족할 만한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이제 스승이 말한 인간을 압도하는 또 다른 존재를 배우러 갈 시간이다.
화운은 자신을 향해 놀라운 표정을 짓고 있는 두억을 비롯한 흑마갱의 무인들을 지나쳤다.
통일된 옷차림이 아니어서 그들이 흑마갱 소속이라는 건 알지 못했다.
풍기는 기도로 보아 사파라는 것만 알았다.
“작당질도 적당히 하면서 살아. 세상이 끝나도 나쁜 놈들은 결국 벌 받게 되어 있으니까.”
그들은 화운이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놀란 눈길만 주었다.
그러다 화운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잔뜩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봤냐, 봤어? 나만 본 거 아니지?”
“바다가······!”
“바다가 진짜······!”
“갈라졌어!”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바다를 바라봤다.
방금 전에 수백 장이나 갈라졌던 바다가 잠잠한 파도만 일으키고 있었다.
다들 헛것을 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때.
“검, 검이요.”
두억이 석 당주를 보며 놀란 눈을 부릅떴다.
“무슨 검?”
“묵검이요.”
“묵검?”
“검집이랑 검 손잡이까지 시커먼 색이었단 말입니다.”
“그게 뭐 어쨌······!”
“예. 석 당주님이 생각하는 그놈! 장강에서 날 뛰고 사라진 바로 그 놈!”
“신풍대주!”
“놀랄만한 무공에 묵검을 가진 젊은 놈이 또 있겠습니까? 그리고 놈이 하는 말을 들었잖습니까. 완전히 정파새끼 같은 말이었잖습니까.”
“맞아. 확인해 볼 필요는 있겠다. 가자.”
“쫓아가단 죽을 지도 모릅니다.”
“누가 그 새낄 쫓아간대?”
“그럼요?”
“구룡태자를 찾아가야지.”
“예? 그분은 왜요?”
“몇 년 만에 폐관하고 나온 구룡태자가 그랬다잖아. 신풍대주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 자에겐 막대한 포상을 해주겠다고.”
“그랬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얼른 가보자. 천하의 구룡태자가 선언한 건데, 대충 주겠냐?”
“근데 왜 찾을까요?”
“구룡태자는 사파의 후계자, 신풍대주는 정파의 돌격대장 왜 찾겠냐?”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저런 자를 이길 수 있을까요? 보셨잖습니까, 바다를 갈라 버린 거.”
“이길 수 있으니까 찾겠지. 몇 년 폐관했다고 하니까 뭐.”
“절대고수들은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른다던데 정말 그렇군요.”
“절대지경? 신풍대주가?”
“아닙니까?”
“몰라. 절대고수든 뭐든 우린 포상금만 챙기면 돼. 얼른 가자.”
석 당주는 두억을 비롯한 수하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허겁지겁 달려갔다.
***
화운은 태산으로 향했다.
검마가 말한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존재 중의 하나가 바로 태산이었기 때문이다.
검마는 다음엔 태산으로 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었다.
광동 최남단에서 산동 중심의 태산까지는 거의 대륙을 수직으로 가로지른다.
무척 먼 거리다.
하지만 공공무영비를 쉬지 않고 펼칠 수 있는 화운에게는 며칠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화운은 그냥 걸었다.
기분이 좋아서고 놀라워서다.
절대검력의 문턱을 제대로 넘어선 것 같아 기분이 좋았고, 걷는 걸음마다 바다에서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다양한 기운들이 느껴져 놀라웠다.
화운은 그 기운들에게 자신의 전신을 활짝 개방하며 느긋하게 걸었다.
그것이 감응의 시작이었다.
스승님의 말이 맞았다.
절대검력의 궁극은 존재하는 모든 기운이 절대검력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검에 주입한 내력이 많을수록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처럼 절대검력에 얼마나 많은 기운들을 이끌 수 있느냐에 따라 강력함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니 절대검력의 비결은 천지간의 기운에 더할 나위 없이 친숙해지고 제 몸처럼 동화되는 것이라 하겠다.
호풍환우(呼風喚雨)!
바람을 부르고 비를 일으킨다는 말로 신선들이 부린다는 선술이다.
그런데 지금의 화운이라면 못할 게 없다.
대기를 이루고 있는 기운들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움직이면 바람이다.
그 양과 속도에 따라 가느다란 미풍이 될 수도 있고, 질풍, 강풍, 폭풍이 될 것이다.
수(水)의 기운은 바다, 강, 호수 그리고 냇물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 숨 쉴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도 존재한다.
그 기운들을 뭉치다보면 물방울이 된다.
그 물방울들을 무수히 만들어 바람을 따라 뿌리면 비가 될 것이다.
어쩌면 신선들의 선술이라는 호풍환우도 이와 같은 이치이지 않을까?
화운은 그런 생각을 하며 태산을 향해 이동했다.
태산.
화운은 검마가 굳이 태산을 언급한 이유는 묻지 않았다.
직접 가보면 알 것이라 여겼고, 어쩌면 도가에서조차 신성시 하는 산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화운은 유독 충만한 선기를 느끼며 태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태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자락에 허름한 노점이 보였다.
태산을 끼고 다른 지역으로 돌아가는 노객들을 상대로 술과 음식들을 파는 모양이었다.
화운은 노점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 걸음을 멈췄다.
그의 전방에 여덟 명의 무장들이 딱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운은 그들이 길을 막고 있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들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철봉황을 따라 천사련으로 갔을 때 구룡제와 적성대도황을 만났던 대전에서 본 적이 있다.
당시엔 저들의 정체를 짐작도 하지 못했다.
천사련 수뇌부들 중의 일부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지금 저렇게 여덟 명만 따로 있는 걸 보니 짐작이 가는 이들이 있다.
구룡팔도객.
구룡제의 그림자 같은 고수들로 그들이 합격을 하면 죽이지 못할 자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
“저렇게 앞을 막고 있다는 건 싸우겠다는 뜻이고 죽이겠다는 뜻이겠군.”
중얼거린 화운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화운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여덟 명의 무장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소리조차 하나로 들릴 정도로 한 동작으로 칼을 뽑았다.
오랫동안 합격을 한 자들답게 일심동체의 수준에 올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오십 보.
화운이 다가오자 그들의 칼날에 선명한 도기를 넘어선 도강이 응집하였다.
삼십 보.
여덟 명이 일제히 칼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이번엔 동작이 제각각이었다.
합격을 위한 각자의 기수식인 모양이었다.
이십 보.
구룡팔도객의 공격범위에 들어섰다.
여덟 명의 무장들이 일제히 짓쳐오며 강기의 검격을 동시다발적으로 쏟아냈다.
바로 이때 화운이 검을 뽑아 그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였다.
하지만 검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 막대한 기력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전방을 일시에 쪼개고 쏘아갔다.
콰-앙!
귀청을 먹먹하게 만드는 굉음과 함께 구룡팔도객이 사라졌다.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가루처럼 터져버린 것이다.
검을 집어넣은 화운은 노점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표정은 썩 좋지가 않았다.
절대검력은 강했다.
너무 강해서 미처 힘 조절조차 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건 곧 완성경에 이르려면 한참 모자란다는 뜻이었다.
노점에는 홀로 그림처럼 앉아 자작하고 있는 미장부가 있었다.
화운은 그를 향해 다가갔다.
“오랜만이군.”
화운이 먼저 아는 체를 하며 미장부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미장부는 손에 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기품이 있다는 말이 절로 나올 것 같은 동작으로 한 모금 하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바닷가에 있었다지?”
“맞아.”
“더 강해진 걸 보니 사라졌던 육 년 동안 수련만 한 모양이지?”
“그것도 맞아.”
“왜?”
“뭐가 왜지?”
“날 일검에 날려버릴 실력이면 천하를 호령했어야지.”
자신이 당했던 일을 태연히 말한다는 건 그걸 만회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실지로 화운을 응시하는 미공자 북궁무결의 얼굴엔 내려다보는 자의 오만함이 가득했다.
자신을 능가한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겐 결코 보일 수 없는 태도였다.
구룡팔도객을 날려버린 광경을 보고도 자신만만인 걸 보면 그 역시 그동안 대단한 성취를 이뤘음이 분명했다.
“북궁무결.”
화운이 피식 웃으며 나지막하게 불렀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묘한 위엄이 느껴져 북궁무결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쳐다봤다.
“내 앞에 나타난 걸 보니 절세의 마공이라도 익혔고, 그게 꽤 자신이 있는 모양이야. 그치? 근데 말이야. 그걸로 충분하겠어?”
북궁무결의 얼굴에 떠오른 게 자신감이라면 화운의 얼굴에 떠오른 건 태연함이다.
둘 다 스스로의 무공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화운은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북궁무결이 빤히 들여다보인다는 것이다.
북궁무결의 단전에 가득한 피의 기운이.
십 년이 넘는 바다에서의 수련으로 천지간의 기운에 대한 감응력이 월등히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북궁무결은 흔들렸다.
너무나 태연하기 짝이 없는 화운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으니 싸우면 또 다시 과거의 패배를 반복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엄습해온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기엔 그가 폐관까지 하면서 익힌 금단의 무공이 너무 대단했다.
북명흡정공!
괴공이고, 사공이고, 금단의 마공이다.
격돌하는 상대의 공력을 흡수해버리기에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 무공이다.
금단의 마공이라 배척받은 이유는 상대의 공력을 흡수할 때 피까지 흡수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때 버티지 못한 자는 전신의 피를 전부 빼앗기고 고통스럽게 목내이(미이라)가 되어 죽는다.
화운은 그러한 수법까지는 알지 못했다.
북궁무결의 하단전에 가득한 피 기운 가득한 공력을 감지하여 뭔가 마공이라 불릴 만한 걸 익혔다는 걸 느꼈다.
“널 잡기 위해 오 년이 넘도록 짐승처럼 살았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북궁무결이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화운이 피식 웃었다.
오 년이라는 말 때문이다.
둘이 마지막으로 싸웠던 이후로 자신은 그보다 배는 더 많은 시간을, 아니다. 세 배는 더 많은 시간이다.
검성에게 건곤무상을 배웠던 오 년의 시간도 있으니까.
그러한 사실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어서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북궁무결을 자극했나 보다.
그의 전신에서 강렬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웃음은 나만 지을 수 있다!”
북궁무결이 손을 뻗으며 외쳤다.
연기처럼 스멀거리는 검은 기운을 휘감은 손이 화운의 코앞으로 뻗었다.
화운은 앉은 채 마주 손을 내밀었다.
퍼억!
두 사람의 손바닥이 부딪쳤다.
순간 북궁무결의 손에서 강력한 흡인지력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반탄강기를 일으킨 화운의 손에서 강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널 목내이로 만들어주마!”
“아!”
화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북궁무결이 익힌 무공의 실체를 파악한 것이다.
“그래도 예전엔 나름 멋대가리가 있었는데, 이젠 도둑질이나 하는 얌생이가 되었구나. 쯧쯧쯧!”
“닥쳐라! 목내이가 되어서도 그렇게 나불댈 수 있는지 보자.”
북궁무결이 더욱 강하게 북명흡정공을 발휘했다.
화운이 일으킨 강기를 모조리 흡수한 북명흡정공이 화운의 본신 공력까지 빨아들이기 시작하자 북궁무결의 얼굴에서 혹시나 하던 경계심마저 날아갔다.
하지만 바로 이때.
북궁무결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명흡정공이 화운의 공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는 건 두 사람의 기운이 닿았다는 걸 뜻하고 그건 곧 화운이 북명흡정공의 기운과 감응할 수 있다는 것임을.
북명흡정공을 최고조로 발휘하는 북궁무결과 그 북명흡정공과 감응을 시작한 화운.
북궁무결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건 반각이 지나기 전이었다.
화운의 공력이 물밀 듯이 빨려오던 것이 갑자기 멈춘 것이다.
“왜, 이상하냐?”
화운이 물었다.
“······!”
북궁무결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화운의 모습에서 이상하다 못해 뭔가 심각하게 잘못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흐음, 이런 기운도 있구나.”
북궁무결의 눈이 더욱 커졌다.
“감응이라는 건 이해하고 반응한다는 것이지만, 감응력이 되려면 하나가 되어 이끌 수 있어야 하지.”
화운의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북궁무결의 북명흡정공의 공력이 화운 쪽으로 움직였다.
북궁무결이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북명흡정공의 공력 스스로가 뭔가에 이끌리듯 스스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
당황한 북궁무결이 북명흡정공의 심법을 더욱 강하게 운행했다.
그러자 북명흡정공의 공력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건 잠깐에 불과했고 돌아오던 북명흡정공의 공력이 중간에 우뚝 멈췄다.
“확실히 지금의 감응력만으로 심법을 이길 순 없겠다. 니 몸이고 니 기운이니까 말이야.”
화운이 중얼거리며 왼손을 들었다.
‘뭐, 뭐야! 이런 상태에서 다른 공격을 하겠다고? 말도 안 돼!’
전력을 다하느라 공력을 따로 일으킬 수 없는 북궁무결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화운은 아무렇지도 않게 왼손을 들었고 공력을 발휘했다.
쾅!
파직!
수십 장 밖 나무까지 날아가 등짝을 부딪치고 축 늘어진 북궁무결.
화운이 손짓하자 거대한 기가 기동하여 그를 끌고 왔다.
이윽고 화운의 발치에 널브러진 북궁무결.
퍽!
아랫배를 강타한 화운의 발길질에 하단전이 부서진 북궁무결의 얼굴이 고통과 절망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너 하나 어떻게 한다고 세상 달라지는 거 하나도 없더라.”
북궁무결로서는 의미를 알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오 년 만에 이루어진 회심의 복수전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철봉황, 니 누나는 잘 있냐?”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넋이 나간 북궁무결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구룡제랑 니 누난 무척 닮았더라. 전형적인 무골들 같았어.”
정말 오랜만에 아는 사람을 만나 대화를 더 나누고 싶은 화운이었으나 북궁무결의 지금 상태로는 대화마저 힘들었다.
“바다를 배웠더니 너까지도 포용하고 싶어지고 막 그런다. 그래서 살려준 거니까 운 좋은 줄이나 알아라.”
화운은 그 말을 끝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태산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