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다시 당문으로
사천 청성파.
화운이 돌아오자 곧장 대청으로 안내되었다.
청성파 장문인은 잠깐의 시간이라도 줄이기 위해 정문을 지키는 이들에게 신풍대주와 정무맹 소속의 문파에서 오는 사람들은 곧장 안으로 안내하도록 지시를 내려두었다.
화운이 대청에 들어서니 장로들과 궁리를 하고 있던 청성파 장문인이 반겨주었다.
“어서 오시게. 당문에서는 잘 되었는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사이잖습니까. 하여 이쪽의 상황을 다 알려주었습니다. 함께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선택했으면 좋겠다고 해두었으니 사방으로 사람들을 풀어 알아보겠지요.”
“잘했네. 당문은 워낙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라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면 더 크게 반발할 텐데 용케 잘 대처했구먼.”
납득시키지 못하겠으면 강압적으로 빼앗기라도 하라던 화산파 장문인과 조금 다른 말이었다.
같은 사천이다 보니 청성파 장문인이 당문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과정보다 결과가 좋아야지요. 그보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일단 앉게.”
“예.”
장로들에게도 일일이 눈인사를 한 화운은 자리에 앉은 다음 물었다.
“사천무림인들을 전부 합치면 숫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정사 구분 없이?”
“예.”
“대략 칠천 정도일 거네.”
“검기를 발휘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요?”
“글쎄······ 이백이나 될까 모르겠네.”
청성 장문인의 말에 화운의 얼굴이 무겁게 굳었다.
천종천마교 강시당의 혈라강시만 해도 검기를 발휘할 수 있어야 상대할 수 있고, 금강마인은 검강 이상의 무위로 상대해야 한다.
이전 삶일 때 강시당에서 사연홍이 검강 따위로는 금강마인을 결코 죽일 수 없다고 했으나 그 정도는 아니다. 다만 검강을 발휘하더라도 꽤나 애를 먹을 정도였다.
흑귀들의 몸을 차지한 마귀들이 얼마나 단단할지는 모르지만 혈라강시보다 약할 리가 없다.
흑귀와 혈라강시 둘 다 상대해 본 화운이기에 그 둘의 단단함이 비슷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흑귀들의 몸을 차지한 마귀들이 혈라강시보다 약할 리가 없을 것이다.
정말 아니길 바라지만 어쩌면 금강마인보다 더 단단할지도 모른다.
거기에 칠만이라는 숫자.
혈라강시가 칠만이어도 끔찍할 일인데 그보다 더 단단한 마귀들이 칠만이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끔찍했다.
“섬서무림이 합세하고 무당에서 지원을 오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검기를 발휘할 수 있는 숫자 말인가?”
“예.”
“정무맹에 나가 있는 숫자도 있고 각 파를 지킬 숫자는 남겨야 할 테니까······ 흠······ 정확히는 와봐야 알겠으나 많아야 일백일 거네.”
“그럼 전부 합쳐 삼백 이하라는 거군요.”
“그럴 거네.”
“삼백······.”
칠만의 마귀가 얼마나 엄청난 숫자인지 소름끼치도록 두려움이 엄습할 정도다.
애초 천마가 생각하고 있던 십만의 숫자.
천하를 지배할 숫자가 틀림없다.
“그 마귀들이 그토록 강하던가?”
청성의 장문인이 물었다.
화운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문인.”
“왜 그러나? 말 해보게.”
“저와 함께 당문에 가주셔야겠습니다.”
“당문에?”
“예. 그들과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화운이 워낙 강하게 말해서 청성 장문인은 선뜻 대답도 못하고 눈만 끔벅거렸다.
***
사천당문.
당화천은 근심이 컸다.
정무맹 신풍대주의 무위를 보니 천사련은 물론이고 그들과 손을 잡은 당문의 앞길도 순탄치 않아 보였다.
문주인 사천독왕은 북궁제와 적성대도황을 만나보고는 천하의 미래는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 될 거라며 기꺼이 천사련과 손을 잡았다.
그때 당시에 좀 더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다.
정파의 뿌리는 깊고도 깊어 언제라도 불세출의 고수가 탄생할 수 있는 법이거늘.
“흐음!”
당화천의 침음이 계속되었다.
곁에서 한참을 지켜보던 당옥기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너도 들었잖느냐. 그가 태양존자를 죽였다는 이야기를. 오늘 보니 사실인 것 같다.”
당화천은 자신의 코앞으로 순식간에 다가왔던 화운을 떠올렸다.
잔뜩 경계하고 있었음에도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살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게다가 검강을 발휘하고 거둬들이는 모습.
오 장에 이를 정도로까지 검강을 발휘하는 사람은 없다. 그 정도 능력이면 대개가 검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검강을 보여주었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머리 위로 채찍처럼 휘두르던 광경.
당화천은 그 모습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내력을 발휘하는 경지가 상상 이상으로 뛰어나다는 걸.
“그럼 그만한 무위에도 그런 말만 하고 물러났다는 건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거겠군요?”
“거짓인 것 같지는 않더구나.”
“그럼 문주님의 허락을 기다릴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
당화천은 당옥기를 돌아봤다.
이제 스물이 넘은 당옥기는 성격이 차분하고 냉철하여 차기 당문의 문주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당옥기는 결코 문주가 될 수 없었다.
현 문주의 장자가 아니어서이고, 몸이 병약하여 당문의 문주가 익혀야 할 독공을 익힐 수가 없어서다.
“문주님의 허락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냐?”
“예.”
“그는 정파고 우리완 적대 관계다.”
“생존에는 정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숙부님께서 염려하실 정도로 대단한 고수가 생존이라는 말을 꺼냈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요.”
“그토록 심각한 상황이라면 어찌 그렇게 말만 던져주고 가버린단 말이냐?”
“본문을 강압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래도······.”
당화천이 미심쩍은 얼굴로 말할 때였다.
“신풍대주가 다시 왔습니다. 청성 문주랑 함께입니다.”
밖에서 들려온 보고에 당화천은 당옥기를 바라봤고 당옥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다시 달려온 모양입니다.”
당화천은 당옥기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정문으로 향하는 중에 당옥기가 슬쩍 말했다.
“문주님이 안 계실수록 숙부님께서 대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이윽고, 정문으로 나가보니 화운과 청성파 장문인이 보였다.
청성파 장문인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오랜만에 뵈오.”
“같이 오신 걸 보니 그 일 때문일 터, 들어가서 이야기 하십시다.”
청성파 장문인이 인사를 건네 오자 당화천이 대충 포권하며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화운을 처음 봤을 때의 적대감 가득하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화운은 그 모습에 당문에서 자신이 한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알고는 조금은 안도하며 청성 장문인과 함께 당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객청에 도착하자마자 화운은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너무 급작스러울 거라 생각합니다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문 없이는 방도가 없어 다시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을 높게 쳐주니 고마운 일입니다. 허나 가타부타 함께하자고 하면 누가 쉽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칠만이라는 숫자가 몰려온다면 사천만으로는 어렵습니다.”
당옥기가 차분한 음색으로 말했다.
화운은 달라진 당문의 반응 뒤에 당옥기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말투만큼 차분한 성격에 머리가 비상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사람을 상대로 함부로 거짓을 꾸몄다간 금방 들통이 날 것이다.
“천마는 사천 땅을 완전히 짓밟으려 합니다. 그가 보낸 칠만의 숫자, 그들은 그저 그런 마인이 아니라 금강마인만큼 단단한 몸뚱이를 가진 괴물들입니다.”
“마치 직접 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예. 직접 봤습니다.”
화운의 대답에 당옥기는 물론이고 당화천까지 놀람을 금치 못했다.
화운은 자신의 상의를 들춰 상처를 보여줬다.
“천마에게서 도망친 게 아니라 그가 놓아줬습니다. 열흘 후 칠만의 마귀들을 사천으로 보낼 것이니 맘껏 막아보라고 하더군요.”
“금강마인이 어떤 존재인지는 아는 건가?”
당화천이 물었다.
“혈라강시와 금강마인을 상대해 봤습니다. 혈라강시는 검기, 금강마인은 검강으로 상대할 수 있습니다.”
화운의 말에 당화천은 입을 다물었고 당옥기가 날카롭게 찌르듯 끼어들었다.
“그건 숫자가 비슷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검기로 혈라강시를 단번에 죽이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검강으로 금강마인을 가르지 못하구요. 게다가 검강을 발휘할 수 있는 숫자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섬서와 무당파에서 지원군을 보내줘도 겨우 몇십에 불과할 겁니다.”
당옥기의 말을 듣고 보니 더욱 암울해진다.
당화천과 청성 장문인은 적대적 관계였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서로를 보며 암담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화운도 더욱 더 가슴이 무거워졌다.
자신이 미친 듯이 무공을 발휘하더라도 혼자서 막는 데엔 한계가 있다. 게다가 천마가 나타나거나 자신을 막을 방도를 함께 보낸다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화 대주님.”
당옥기가 화운을 불렀다.
“예?”
“금강마인 칠만이면 천하를 지배할 숫자입니다. 정말 금강마인에 필적할 존재들이 칠만 맞습니까?”
당옥기의 물음에 당화천과 청성 장문인이 화운의 입에 집중했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표정이었다.
“흑귀라는 존재를 압니까?”
화운이 물었다.
혹시나 하고 물은 것인데 의외로 당옥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흑지의 흑귀를 말하는 것이라면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흑귀가 무엇이냐?”
당화천이 당옥기를 보며 물었다.
화운의 말을 듣기 전에 흑귀의 정체에 대해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얼른 물어본 것이다.
“제가 천마와 천종천마교에 대해 관심이 많아 여기저기서 알아보고 연구도 하곤 했었습니다. 천종천마교에는 흑지라는 금지구역이 있는데 흑귀는 그곳에 기거하는 사람이지만 사람이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알려지기로 산 사람을 뜯어 먹는다고 합니다.”
“강시 같은 것이냐?”
“강시는 이지가 없지만 흑귀는 어린아이 정도의 지능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궁금했던 건 흑귀의 존재 자체입니다. 알아보니 흑귀들은 천종천마교가 생기기 전부터 그 땅에 존재했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당옥기는 화운을 쳐다봤다.
“혹여 흑귀에 대해 아는 바가 있습니까?”
“강시당의 고루마군이 흑귀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기존의 흑귀와 같은 흑귀들을.”
그렇게 서두를 연 화운은 고루마군이 흑귀들을 만들기 위해 천하 곳곳에서 아이들을 납치한 일을 이야기했다.
그걸 조사하기 위해 강시당에 들어갔다가 흑귀에 대해 알게 되었고, 천마와 맞닥트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슬쩍 꿰맞추었다.
화운의 이야기가 끝난 후 당옥기가 탄성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럼 십만을 계획했던 그 흑귀들이 금강마인처럼 단단한 몸뚱이를 가졌다는 거군요?”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 말도 안 되는 일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화운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당화천과 청성 장문인은 또 뭐가 있냐는 얼굴로 쳐다봤지만, 당옥기는 눈빛을 반짝 빛냈다.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흑귀들의 몸뚱이는 단단하기가 혈라강시와 비슷한 정도거든요.”
“맞습니다. 혈라강시 정도 입니다. 제가 금강마인을 언급한 건 흑귀들이 혈라강시 정도로 단단했기 때문입니다.”
화운은 천마가 뭔가를 발동시켰고 그로인해 시커먼 원귀 같은 기운들이 흑귀들의 몸을 차지하여 마귀나 마물 같은 괴물들로 변한 광경을 이야기해주었다.
당화천은 이 무슨 허무맹랑한 이야기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당옥기는 달랐다.
뭔가가 이해되었다는 것처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귀들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었군요. 제가 알기로 흑귀들은 신들의 시대 때부터 그 땅에 존재했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흑귀들이 무슨 역할을 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는데 이제야 알겠습니다. 흑귀들은 신들이 이 땅에 온전한 모습으로 강림하기 위해 필요한 매개체였던 겁니다.”
오랜 숙제를 풀어낸 표정을 짓는 당옥기.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사실이란 말이냐?”
당화천이 불신 가득한 얼굴로 물었고, 청성 장문인도 비슷한 얼굴로 당옥기를 쳐다봤다.
당옥기는 가볍게 웃었다.
“제가 화 대주 속마음을 들여다 본 게 아닌데 사실 여부까지야 어찌 알겠습니까만, 흑귀에 대한 이야기들은 제가 조사했던 부분들과 아귀가 들어맞고 있습니다.”
당화천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당황스런 얼굴로 당옥기와 화운을 번갈아봤다.
청성 장문인은 한참 전부터 말문이 완전히 닫혀 버렸다.
이때 화운은 흑귀들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는 당옥기에게서 일말의 희망을 보았다.
그래서 불쑥 물었다.
“흑귀들에 대해 연구를 꽤 많이 한 것 같은데, 그들의 약점이나 상대할 비책 같은 것도 알고 있습니까?”
“아뇨. 인간의 힘으로 신들을 어떻게 막습니까?”
당옥기의 말에 모두들 실망의 빛을 드러냈다.
“하지만 화 대주님의 말을 들어보면 그것들은 신도 아니고 마신도 아닙니다. 칠만이나 되는 숫자의 신들이 존재할 리도 없고요.”
“······!”
“······?”
“그것들은 마신이 아니라 마신들의 개, 마신들의 종일 겁니다. 뭐, 따지고 보면 인간도 신들의 종이랄 수 있으니 싸우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당옥기의 말에 당화천과 청성 장문인이 화색이 도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나 당옥기가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말을 곧바로 이었다.
“다만 문제는 칠만이라는 숫자입니다. 칠만······ 너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