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유마정
새하얀 빛의 기둥이 내리꽂히고 있는 수백 장 깊이의 지하.
화운은 자신이 뚫고 들어온 곳을 통해 쏟아지고 있는 빛의 기둥을 온몸으로 받으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서 있는 곳.
지하광장이라는 말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어쩌면 또 다른 지하세계라는 말이 더 그럴싸할 정도로 광활한 지하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땅속에 이토록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화운은 잠시 놀란 얼굴로 사방을 둘러봤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세상이라 수목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둠의 묵빛과 죽음의 잿빛만이 가득한 세상.
암석과 흙으로만 이루어진 땅이 광활하다는 이름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새하얀 빛무리를 일으키고 있는 존재가 있다.
“천마······.”
그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화운은 다시금 이를 악물고 분노를 일으켰다.
수만의 아이들을 제물로 내몬 자.
“죽이겠다.”
화운은 성큼성큼 걸었다.
천마를 향해 거센 살기를 폭발적으로 일으키며 곧장 걸어갔다.
수백 장 떨어진 거리를 살기충천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화운.
인간이기를 거부한 존재를 반드시 멸하겠다는 살의로 충만했다.
새하얀 빛무리를 일으키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천마.
그는 돌로 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우물 위에 둥실 떠 있었다.
그리고 우물에서부터 사악하기 짝이 없는 마기가 흘러나와 천마의 육신을 휘감고 있었다.
“죽인다!”
천마를 발견한 화운은 거침없이 달렸다.
성난 맹수처럼 질주하면서 일반적인 검환보다 파괴력이 훨씬 더 강한 검멸을 무더기로 발휘했다.
새파란 광채를 뿌리며 천마를 향해 빗발치듯 쏘아져가는 빛의 고리.
쾅쾅쾅쾅쾅쾅쾅쾅쾅!
놀랍게도 천마는 앉은 자세 그대로 검멸을 받았다.
천마의 강함이야 이미 겪어본 적이 있는 화운이기에 놀라지 않았다.
검을 휘둘러 지하에 가득한 지기를 끌어 모아 일시에 쏘아보냈다.
칼날 같은 지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쳐도 천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꽈과과과과광!
굉음이 지하를 뒤흔들고.
번쩍!
공간을 송두리째 가르고 날아가는 절대검력!
다시 한 번 지하를 뒤흔드는 굉음을 일으켰을 뿐 천마의 시선조차 돌리지 못했다.
자신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음에도 화운은 물러나지 않고 계속 질주했다.
다시 한 번 검멸의 검환을 무더기로 날리고, 절대검력을 발휘한 다음 공공무영비 십단공 무풍무영을 발휘했다.
쾅쾅쾅쾅쾅쾅쾅!
지하세계가 송두리째 무너질 것 같은 굉음이 잇달아 터지는 가운데 수십 장 간격을 건너 띈 화운이 천마의 머리 위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천-마-!”
악에 받친 듯 일성을 터트리는 화운.
낙뢰처럼 내리꽂히며 일검파천의 기세로 찍어 내리는 묵빛의 검신에 검멸의 검환이 잔뜩 일으켜져 있었다.
일백여 개의 검환이 개개가 아니라 한꺼번에 발휘되는 것이니 그 파괴력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터.
콰-앙!
거대한 격돌이었다.
그 여파만으로도 암석 천지인 지하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마구 터져나갔다.
화운은 강력한 반탄력에 수십 장을 튕겨버렸지만, 더욱 강렬한 눈빛으로 천마를 응시했다.
천마는 두 다리로 서 있었다.
화운이 발휘한 방금의 공격만큼은 그도 무시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화운은 자신의 공격이 천마를 직격하기 직전 예전에 봤던 그 거대한 거인의 손이 튀어나와 막는 것을 보았다.
더 강할지는 몰라도 그도 사람이다.
화운 자신의 검력이 아직 천마에 미치지 못할지 몰라도 아예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럼 된 거다.
미친 듯이 싸울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이 분노를 폭발시킬 순 있을 테니까.
화운은 걸었다.
천마를 향해.
“인간이 먹는 걸 처먹고, 인간이 하는 말을 하고, 인간들 속에서 살고 있다면 너 역시 인간일 터. 인간으로 태어난 새끼가 어찌 그리 잔인한 것이냐!”
“······!”
“십만의 아이들!”
새하얀 피부에 반듯한 이목구비가 오만하게 자릴 잡고 있는 흑발의 젊은 사내, 천마는 이제야 화운의 격분을 알아차렸는지 묘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자여, 본좌가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냐?”
“······?”
“본좌는 미천한 인간들의 질서를 초월하여 신들의 법도에 들어선 지 이미 오래다.”
“······!”
화운은 황당했다.
하지만 천마라면 저 정도 오만을 떨 만하다는 생각이 언뜻 떠올랐다.
하지만 곧 자신이 천마의 기세에 눌려 고분고분해진 것인가 하는 기분이 들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개소리! 넌 호가호위하고 있는 마신 아수라의 개일 뿐이다!”
화운이 강하게 욕하자 천마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화운은 그 얼굴을 보며 코웃음 쳤다.
“봐라. 그게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 신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감정이 바로 분노다!”
천마의 천둥 같은 일갈과 함께 예전에 겪어봤던 거대한 악마의 손이 튀어나와 화운을 향해 뻗어왔다.
워낙 커서 흡사 집채만 한 해일이 덮쳐오는 것 같았다.
“피하지 않는다!”
각오를 내뱉은 화운은 정신을 집중하여 지금 발휘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절대검력을 발휘하여 검을 휘둘렀다.
공간을 단숨에 가르고 날아간 검력이 악마의 손을 강타했다.
굉음이 터지며 날카로운 파장이 사방으로 폭사했다.
하지만 거대한 악마의 손은 잠깐 멈칫했을 뿐 다시 밀려왔다.
화운은 검멸을 발휘하여 백여 개의 검환을 한꺼번에 날린 다음 즉시 몸을 날렸다.
쾅쾅쾅쾅쾅쾅쾅!
백여 번의 폭발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묵빛의 검신에 새파란 검환을 잔뜩 일으킨 화운이 허공에서 불쑥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쿠-앙!
지하 전체가 흔들리는 굉음이 폭발했다.
화운은 그 한복판에서 악마의 손을 살폈다.
절반쯤 날아간 악마의 손이 차츰 회복하고 있었다. 소멸시키지는 못했으나 상대할 수 있다는 게 확인된 셈이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이 더 있다.
손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대한 악마의 손이 하나 더 나타났다.
이전의 손도 완전히 회복했다.
그렇게 두 개의 손이 화운을 향해 몰아쳤다.
속도도 빨라졌다.
“그래! 누가 죽는지 보자!”
그 자리에서 번쩍 사라진 화운이 허공에서 튀어나와 검멸을 잔뜩 일으킨 검을 새로 나타난 악마의 손을 향해 휘둘렀다.
쿠앙!
악마의 손이 절반쯤 날아갔다.
순간 다른 악마의 손이 화운을 후려쳤으나 금강부동을 발휘한 화운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화아아아악!
허공에서 나타난 화운은 검멸을 잔뜩 발휘한 채 천마의 머리 위에서 내리꽂히듯 덮쳤다.
천마는 무방비인 것처럼 화운을 향해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검멸을 잔뜩 발휘한 검이 천마의 머리를 직격하려는 순간.
콰앙!
천마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강렬한 기운이 화운을 강타하여 천장까지 날려버렸다.
쿵!
천장에 부딪친 등짝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파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 화운.
바로 이때 거대한 악마의 손이 화운을 덮쳤다.
콰앙!
굉음과 함께 돌덩이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러나 화운은 없었다.
그 긴박한 순간 금강부동을 펼쳐 빠져나간 것이다.
하지만 천마의 공격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돌연 천마에게서 거대한 기의 유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기운이 지하세계를 꽉 채우고도 계속 불어났다.
콰콰콰콰콰콰!
천장의 암벽에 금이 쩍쩍 가더니 돌덩이들이 마구 떨어졌다.
거인이 몸을 일으키는 것처럼 거대한 기의 유동이 천장을 부수고 위로 솟구쳤다.
지상에서 까마득한 깊이였는데, 그 두꺼운 대지가 모래알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화운은 머리위로 검을 휘둘러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덩이들을 부수고 쳐냈다.
그러는 사이에 인간세상이 멸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천종천마교를 받치고 있던 대지가 갈라지고 찢어지다 어느 순간 폭발했다.
콰-앙!
화산이 터지듯 천종천마교 중심부에 분화구처럼 거대한 수직갱도가 생겨버렸다.
그 폭발이 지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수많은 건물들이 와르르 무너졌고, 사람들의 비명과 아우성이 사방에서 울려댔다.
뿌연 흙먼지가 천지간을 뒤덮은 가운데 화운은 지상으로 솟구쳤다.
천마는 허공에 둥실 떠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운은 쑥대밭이 되어버린 천종천마교의 전경을 놀란 얼굴로 둘러보며 천마를 향해 허공으로 솟아올라갔다.
천종천마교는 성곽도시였다.
그런데 지금 천마탑이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거의 절반에 가까운 땅이, 대지가 송두리째 터져 날아가 버렸다.
도시 하나가 절반쯤 사라져 버린 것이다.
“넌 이 정도 공간에서 싸울 자격이 있다.”
천마가 말했다.
그 말에 화운이 성난 눈길을 돌렸다.
“넌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화운이 먼저 달려들었다.
천마를 향해 쏘아가던 화운이 허공 속으로 파고들듯 사라지더니 천마의 코앞에서 튀어나와 검멸이 잔뜩 발휘된 새파랗게 빛나는 검을 휘둘렀다.
콰앙!
천마의 몸에서 새하얀 광채가 뿜어졌다.
화운은 검멸을 극성으로 발휘하고도 맥없이 튕겨버렸다.
천마의 강함을 뼈저리게 느낀 화운이 어찌 상대해야할지 인상을 쓰고 있는 사이에 허공에 악마의 손들이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악마의 다리도 나타났고, 이어서 손을 잇는 팔이 그리고 팔과 다리를 이어주는 몸체까지 형상을 갖추었다.
거무튀튀한 갑옷과 용의 비늘처럼 보이는 단단한 각질.
전설의 신화가 그려진 벽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마신의 몸이었다.
그러나 머리는 없었다.
“신들의 권능은 파괴에서 태어나고, 공허 속으로 사라지는 법이지.”
신의 힘은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모든 게 다 파괴되어 없어지면 그제야 소멸하여 사라진다는 말이다.
“지랄 마! 그건 악마새끼들이나 짖어대는 개소리일 뿐이다!”
화운이 버럭 외치며 다시 쏘아갔다.
머리만 없는 악마의 형상을 향해 온몸이 부서져라 돌진한 화운은 검멸을 다시 한 번 발휘하여 세차게 휘둘렀다.
그에 맞서 악마의 형상 역시 손을 휘둘렀다.
이전에 손만 나타나 움직일 때와는 확연히 다를 만큼 빨랐다.
뇌성벽력 같은 굉음이 쉬지 않고 터졌다.
화운은 금강부동과 검멸을 동시에 펼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파상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하단전의 공력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미친 듯이 공격했다.
하단전이 바닥을 드러내면 중단전의 공력을 썼다.
그 사이에 하단전의 공력을 채웠고, 중단전이 바닥을 보이면 다시 하단전의 공력을 사용했다.
무한 반복이었다.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공력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식경이 반 시진이 되고, 반 시진이 한 시진이 되었다.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넘어갈 때까지 화운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검멸의 파상공격을, 건곤무상의 일격을 그리고 금강부동을 이용한 검격까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무공을 모조리 발휘했다.
그렇게 마음껏 퍼붓다보니 그의 무공이 스스로 정리가 되었다.
불필요한 동작이 정리되어 사라지고, 검초가 보다 더 간결해지고, 공력의 낭비조차 없어졌다.
그렇게 전무후무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천마의 육신에는 이렇다 할 타격조차 주지 못했다.
악마의 손만 상대할 땐 일격에 절반쯤 날려버렸었는데, 지금은 그 마저도 못했다.
악마의 형상이 완벽에 가까워지면서 더욱 강력해졌다는 뜻일 것이다.
화운은 금강부동을 발휘하여 훌쩍 물러났다.
그리고 검을 사선으로 치켜들었다.
시선은 악마의 형상을 보고 있지만 그의 의식은 그 뒤의 천마를 향했다.
“아직 인지의 감각을 초월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너머로 집중할 순 있다!”
화운은 고도로 집중력을 발휘했다.
천마를 향한 집중.
전신의 모든 것이 천마라는 한 점으로 쏠리자 악마의 형상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보이는 거라곤 오로지 천마뿐.
‘지금이다!’
화운은 자신의 모든 집중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번-쩍!
화운이 발휘할 수 있는 최강의 검력!
그 절대의 검력이 공간을 위아래로 분리하며 섬광처럼 쏘아갔다.
콰앙!
악마 형상의 다리가 터졌다.
절대의 검력은 악마의 다리를 가르고 천마의 본신으로 들이쳤다.
쾅!
굉음이 터졌다.
새하얀 빛을 잔뜩 머금은 손이 절대의 검력을 막았다.
천마지존수!
화운은 그 손을 보자마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절대무적은 아니었어.”
중얼거리는 화운의 양쪽에서 악마의 두 손이 손뼉을 치듯 들이닥쳤다.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한 탓에 잠깐 동안 무방비 상태인 화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그대로 자신의 심장을 터트렸다.
그런데 바로 이때, 천마에게서 엄청난 마기가 폭발적으로 기동했다.
“쿠웅!”
천지간을 뒤흔드는 굉음이 화운의 귀청을 강타한 찰나 천마가 화운의 코앞으로 이동하여 손을 뻗고 있었다.
천마군림보!
대대로 천마였던 존재들이 마도를 군림하고 천하를 짓밟았던 바로 그 마도지존의 걸음이었다.
‘너한텐 죽지 않아!’
퍽!
심장이 터졌으니 남은 건 죽음 뿐.
그런데 시간이 되돌아가지 않았다.
예상 밖의 상황에 화운이 두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심장부근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러나 심장이 터지지 않았다.
화운을 향해 뻗고 있는 천마의 손에서 튀어나온 한 가닥 빛줄기가 심장을 터트리려던 화운의 기운을 몸 밖으로 튕겨버린 것이다.
“쿨럭!”
화운은 핏물을 토했다.
정신이 다 아득해지려는 순간 천마에게서 휘몰아친 마기가 화운을 움켜잡았다.
화운은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경천보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법보의 일각 속에 영원히 갇혀 있고 싶은 것이냐!”
천마가 말했다.
“······!”
화운은 흠칫 굳었다.
지금 경천보패를 부수면 일각 전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일각 전에는 천마와 한창 싸우는 중이었다.
천마의 경신술을 보니 벗어나지 못한다.
경천보패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죽고, 죽고 또 죽어 무한의 일각 속에 갇히는 수밖에 없다.
“너의 발버둥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 보여주마.”
천마가 발아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화운은 천마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봤다.
천마가 뚫어놓은 까마득한 깊이의 수직갱도.
그 수직갱도 아래에서 수만에 달하는 흑귀들이 절벽을 새까맣게 채우고 지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마신 아수라의 종들아! 이 땅은 이제 너희들의 땅이다! 살을 취하고 피를 마셔라! 그 모두가 너희의 것이다!”
천마의 말이 끝난 순간 까마득한 아래 우물에서 새까만 덩어리 같은 기운들이 벌떼처럼 쏟아져 나와 지상으로 기어오르고 있는 흑귀들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그 작은 몸뚱이들이 뒤틀리고 커지더니 지옥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온갖 마귀들로 변했다.
사람의 형상을 한 마귀, 맹수의 모습에 더 가까운 마귀, 날개가 달린 마귀들과 지옥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혐오스런 모습의 마귀들까지.
수라도의 마귀들이 흑귀들의 몸을 매개체로 삼아 인간들의 세상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귀들은 더욱 빠른 속도로 지상으로 기어올랐다.
날개가 달린 마귀들은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서 날아올랐다.
흑귀들의 몸을 차지하느라 지하로 떨어지던 것들은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경신술을 발휘하는 고수들처럼 허공을 박차고 벽으로 달라붙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그렇게 수만에 달하는 숫자가 지상으로 쏟아져 나오는 광경은 실로 끔찍스러웠다.
화운은 두려움에 찬 눈으로 지켜봤다.
저 많은 숫자가 인간들의 세상으로 몰려나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하고 두려웠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매 순간 저것들을 풀어놓을 것이다. 네가 무한반복 속에서 안도하는 동안 저것들은 천종천마교의 십만교도들을 잡아먹고 난주로 갈 것이다.”
“······!”
난주는 큰 도시다.
적어도 십오만에 달하는 인간들이 있다.
정과 사 그리고 마의 구분을 떠나 인간이다.
그 수많은 목숨이 무한반복 속에서 산채로 잡아먹히는 것을 화운은 감당할 수 없다.
“모든 건 본좌의 뜻 대로다. 시간을 되돌린다 하여도 막을 수 없다.”
절대적 선언이었다.
화운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진저리를 쳤다.
“저 아이들을 사천성으로 보내겠다. 그곳엔 아미, 청성, 당문이 있을 것이다. 열흘 후에 보낼 것이니 섬서에서 화산과 종남까지 동원해서 막아봐라. 신들의 법도에 들어선 본좌를 마신의 개로 모욕한 죄, 사천에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천마의 말이 끝난 순간 화운이 날아갔다.
화운을 붙잡고 있던 마기가 가차 없이 날려버린 것이다.
천마는 화운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고개를 내려 자신의 앞자락을 손으로 만졌다.
새하얀 옷자락이 날카롭게 베어져 나풀거렸다.
화운이 마지막으로 펼친 절대검력이 남긴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마의 입가에 만족의 미소가 떠올랐다.
“신마저 우습게 보는 너이니 절망 속에서도 본좌를 상대할 방도를 찾겠지. 그렇게 강해지고 또 강해져라. 사황과 너 둘 다 궁극에 올라 다시 찾아와라. 본좌와 너희 둘과의 격돌만이 태초의 폭발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 그 힘만이······ 태초의 그 폭발만이 유마정을 부수고 온전한 마신 아수라의 강림을 이룰 수 있을 테니까.”
천마가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화운을 내버려둔 이유였고, 경천보패를 회수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나 멀리 까마득한 곳까지 날아가 버린 화운은 그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