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127화 (127/207)

#127. 흑귀

성난 파도처럼 몰려오는 소리.

흑귀들이 벌떼처럼 몰려오고 있는 소리다.

화운은 예전에 흑귀들의 땅에 들어섰을 때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무척 많은 숫자였다.

그래서 문제다.

그 많은 숫자 속에서 어떻게 손자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아이인지 어른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달라져버린 얼굴이거늘.

화운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검마를 쳐다봤다.

검마는 우두커니 서서는 흑귀들이 몰려오는 소리를 듣기만 했다.

화운은 그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서서는 흑귀들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사방의 동혈에서 바닥의 구멍을 통해 잿빛의 흑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화운과 검마를 발견하자마자 석 달 열흘을 굶은 것처럼 몰려왔다.

그 숫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에서 수백으로 불어났다.

두 번 호흡하기도 전에 금세 일천을 넘어섰지만, 끊임없이 쏟아졌다.

사방의 벽과 바닥을 새까맣게 채우며 몰려오는 흑귀들.

화운은 사방을 경계했고, 검마는 손을 뻗었다.

가장 선두에서 달려오던 흑귀가 땅을 박차고 검마를 덮쳤다.

그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하지만 검마의 손은 어렵지 않게 흑귀의 한쪽 팔을 움켜잡았다.

이때 다른 흑귀들도 앞다퉈 달려들었다.

그러나 화운이 발휘한 기운이 몰아쳐 모조리 밀어냈다.

물결이 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지듯 몰려온 흑귀들이 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밀쳐났다.

검마는 손에 잡았던 흑귀를 멀리 던졌다.

흑귀가 다치지 않도록 내력으로 속도를 조절해서 던져준 것이다.

그리고는 다른 흑귀에게 손을 뻗으며 다가갔다.

화운은 검마가 또 다른 흑귀를 살필 수 있도록 밀쳐내고 있던 기운을 조절해 주었다.

흑귀 셋이 동시에 검마에게로 달려들었으나 둘은 도로 밀쳐났고 하나만 검마의 손에 붙잡혔다.

잠시 살펴본 검마는 다시 안전하게 던져주고는 또 다른 흑귀를 살폈다.

화운은 그가 하나씩 살필 수 있도록 기운을 조절했다.

그렇게 수십 명의 흑귀를 살펴본 후였다.

“명아! 어디에 있는 것이냐?”

검마의 입에서 무겁게 억눌린 신음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격한 감정을 힘껏 누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보고 있는 화운은 가슴이 아파 미칠 것만 같았다.

눈앞에 있어도 손자를 찾을 수 없는 슬픔.

얼굴과 몸이 알아보지도 못하게 변해 버린 흑귀들을 바라보는 검마의 심정.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비통할 것이다.

검마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하염없는 눈길로 사방의 흑귀들을 응시하였다.

잿빛의 지하괴물 같은 몰골로 변해 버린 아이들의 모습에서 과거의 옛 모습을 찾아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검마의 손자는 십 년이나 지났다.

저 흑귀들 중 가장 앞쪽에 있다 해도 알아볼 수 없다.

그 영특했던 손자의 얼굴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자부했는데,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이야.

검마는 버틸 수가 없었다.

십여 년의 고뇌와 고단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심정.

가슴속에서부터 철저히 무너졌다.

“운아······.”

잠깐 사이에 십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얼굴로 간신히 화운을 불렀다.

“예.”

화운이 대답하자 검마는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흑귀들을 응시하며 힘없이 말했다.

“다시 시작하거든 내게 알려주지 말거라.”

“스승님······.”

“너무 힘들구나.”

지켜보는 자신도 이토록 가슴이 아픈데 당사자인 검마는 오죽하겠는가.

화운은 대꾸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까웠다.

“가거라. 그만 쉬고 싶다.”

“스승님?”

화운이 놀라 소리쳤다.

“내 손자와 함께 묻어다오.”

화운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검마를 바라보던 화운은 그 자리에서 넙죽 절을 올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홉 번에 걸쳐 공손히 절을 올린 화운은 검마를 향해 두 손을 모아 말했다.

“스승님, 제자 물러가겠습니다.”

“고맙다.”

화운은 검마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은 후 돌아섰다.

그리고 들어왔던 입구를 향해 가면서 흑귀들을 밀쳐내고 있던 기운을 거둬들였다.

흑귀들이 검마를 향해 앞다퉈 몰려갔다.

“허허허! 그래, 명아. 할애비 여기에 있느니라.”

검마가 두 팔을 벌려 흑귀들을 안았다.

순식간에 수백의 흑귀들이 검마의 모습을 뒤덮었다.

화운은 돌아보지 않고 걸으며 검을 뽑아 휘둘렀다.

콰콰콰콰쾅!

강환들이 휘몰아쳐 천장을 부쉈다.

쿠구구구궁!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화운은 이를 악물고 광장 밖으로 나갔다.

석문을 닫아버린 화운은 지하계단을 통해 위로 향했다.

한 층을 올라가기도 전에 위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지하광장 천장을 무너뜨린 소란에 놀란 자들이 원인을 파악하려 몰려오는 소리였다.

“대체 뭔 일이냐?”

“아래 누가 오는데?”

“뭐냐 넌? 아래 뭔 일이······!”

몰려오던 자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화운이 검을 휘둘러 베어버린 것이다.

화운은 계속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이윽고 강시당 지하일층에 도착한 화운은 활짝 열려 있는 철문 안쪽의 대전으로 들어섰다.

예전에 사연홍의 명령을 받은 고루마군과 광마종 마인들의 합격을 받아 그들을 모조리 박살을 내버렸던 바로 그곳이었다.

화운의 등장에 안쪽 깊은 곳에 앉아 있던 노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막 관 속에서 일어선 것 같은 깡마르고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의 노인.

바로 고루마군이었다.

화운은 그를 향해 똑바로 다가갔다.

“흑귀들을 만든 이유가 뭐지?”

화운이 물었다.

그 물음 하나만으로 화운이 적이라는 걸 알아챈 고루마군은 품에서 골적을 꺼내들었다.

“뭐하는 놈이기에 본당까지 스며든 것이냐?”

고루마군은 아직 북명전의 일을 전해 듣지 못한 상태였다.

멸제의 사건 이후로 강시당에 유배당하다시피 해서였다.

멸제의 반란에도 고루마군이 살아남아 있는 건 적극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고루마군이 아니면 강시들과 흑귀들을 관리할 만한 이가 없어서였다.

“하나하나 낱낱이 말해야 할 거야. 아니면 살면서 맛보지 못한 끔찍한 고통을 당하게 될 테니까.”

화운이 계속 다가갔다.

“어리석은 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입매를 비틀어 비웃은 고루마군이 새하얀 뼈로 만들어진 골적을 입으로 가져가 불었다.

대전 양쪽에 철립을 깊이 눌러쓴 자들 수십 명이 쭉 늘어서 있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흉측한 기운이 느껴지는 존재들.

핏빛 혈의를 입은 혈라강시 삼십 구와 흑의를 입은 금강마인 이십 구였다.

고루마군이 골적을 불자 혈라강시 삼십 구가 화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화운은 고루마군을 향해 똑바로 다가가며 검을 휘둘렀다.

쓰칵! 쓰칵!

섬뜩한 소리와 함께 혈라강시들이 모조리 둘로 쪼개져 쓰러졌다.

대전엔 끔찍한 광경과 썩은 내가 진동했다.

“흥!”

고루마군이 코웃음을 치며 다시 골적을 불었다.

그러자 이십 구의 금강마인들이 화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혈라강시들 보다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혈라강시를 죽였다고 기고만장하지 마라! 검강 따위로는 금강마인을 결코 죽일 수 없으니까!”

고루마군이 기세등등 소리친 순간.

화운의 검이 눈부신 섬광을 뿌려댔다.

섬광이 작렬할 때마다 고루마군이 자신한 금강마인들이 혈라강시들처럼 맥없이 쪼개지고 갈라졌다.

“······!”

고루마군의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화운의 젊은 모습에 강해봤자 강기나 발휘할 것이라 여겼었는데, 조급하고 잘못된 판단이었다.

고루마군은 황급히 한쪽 벽의 석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골적을 불었다.

붉은 그림자 세 개가 불쑥 튀어나왔다.

거대한 동체를 가진 맹수들이었다.

흡사 거죽을 벗겨놓은 것 같은 붉은 살덩이의 맹수 세 마리가 십여 장을 한 번에 도약하며 덮쳐왔다.

쩍 벌린 아가리로 화운의 머리통을 한입에 씹어버리려고 했다.

화운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고루마군이 지옥마수라 명명한 괴물들조차 일검에 몸체가 분리되어 버렸다.

고루마군은 그제야 화운의 엄청난 무위에 두려움을 느꼈다.

“누, 누구시오?”

“흑귀들을 만든 이유가 뭐냐?”

화운은 물으면서 계속 다가갔다.

당황하고 있던 고루마군은 갑자기 의자를 걷어차고 쌍장을 거푸 뿌린 후 한쪽 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가 비밀통로에 도착하기도 전에 돌연 그의 눈앞으로 화운이 불쑥 나타나 그의 목을 움켜잡았다.

퍽!

화운의 왼손 손바닥이 고루마군의 아랫배를 후려쳤다.

고루마군은 정신이 다 아득해지는 고통과 함께 하단전이 부서졌다.

기겁한 고루마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화운은 그런 고루마군을 던져 버렸다.

퍼억!

입구의 철문 옆 벽에 처박힌 고루마군이 축 늘어졌다.

순식간에 고루마군 옆에 나타난 화운은 고루마군의 발목을 잡고는 질질 끌고 지하계단으로 향했다.

화운은 지하사층으로 갔다.

거기엔 미완성의 흑귀들이 술독 같은 항아리 속에 갇혀 있는 곳이었다.

화운이 철문을 열자 검마가 항아리에서 꺼내놓았던 흑귀들이 경계하다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화운에게서 몰아친 바람 같은 기운이 그들을 일정간격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밀쳤다.

“흑귀들을 만든 이유가 뭐냐?”

화운은 고루마군을 향해 물으며 발로 그의 가슴팍을 밟은 다음 한 쪽 팔을 잡아 뽑았다.

“끄아아악!”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대는 고루마군.

화운은 뽑아낸 팔을 흑귀들을 향해 던졌다.

흑귀들이 개떼처럼 달려들어 물고 뜯고 난리가 났다.

“저것들을 만든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천, 천마께서······.”

“천마가 시켰다는 건 알고 있다. 그가 왜 흑귀들을 필요로 하는지 그걸 묻는 거다.”

화운은 다른 쪽 팔을 뽑아 흑귀들에게 던져주었다.

흑귀들이 아귀처럼 달려들어 고루마군의 팔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비명을 질러대면서도 자신의 팔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광경을 본 고루마군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넌 죽는다. 내가 원하는 답을 말한다면 고통만큼은 느끼지 않게 해주겠다.”

“흑귀들은 태초부터 존재했던 귀물들이오. 지옥의 마귀들은 이 땅에 넘어오면 별 힘을 쓰지 못하지만 흑귀들의 몸을 차지하면 다르오. 금강마인 보다 수배는 더 단단하고 빠른 괴물들이 된다고 하오. 신들조차 흑귀들의 몸을 차지한 마귀들을 쉽게 어쩌지 못한다고 들었소.”

“······!”

지옥의 마귀들이 아니다.

정확히는 수라도의 수라들이다.

마신 아수라를 추종하는 그 괴물들을 인간들의 세상에 온전한 상태로 강림시키기 위해 흑귀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화운은 마신 아수라에 관한 전설을 떠올렸고, 천마의 생각을 들여다봤다.

천마는 아수라의 군단을 이 땅에 등장시키고자 한다.

천계에 쳐들어가려는지 인간들의 땅을 지배할 생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수라의 군단을 이 땅에 강림시키고자 하는 건 틀림없다.

그래서 그 오랫동안 아이들을 납치해와 흑귀들을 만든 것이다.

“숫자가 얼마나 되지?”

“칠만이오.”

경악할 일이다.

그 많은 숫자의 아이들이 희생되었다는 소리이질 않은가.

화운은 인간으로써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천마가 원하는 숫자는 십만인 것이냐?”

“맞소. 십만이오. 몇 년만 더 하면 그 숫자를 채울 수 있소.”

“이 짐승 같은 놈들!”

화운은 고루마군의 다리를 밟아 버린 후 그를 걷어차 흑귀들에게 날려버렸다.

“끄악! 약속이 틀리다!”

“닥치고 죽어라!”

화운은 격분하여 소리치고는 철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흑귀들이 고루마군에게 달려들었다.

고루마군의 겁에 질린 비명은 금세 멎었다.

“천마!”

화운은 분노를 짓씹으며 지하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갔다.

천마탑!

천종천마교 한복판에 어마어마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돌로 지어진 구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

십만마도의 지존이자 천종천마교의 교주인 천마가 기거하는 천마탑이다.

태양이 높게 뜬 대낮.

까마득한 하늘에서 새파란 빛의 고리가 천마탑을 향해 무수히 쏟아졌다.

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

천종천마교 땅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엄청난 폭격이 쉴 새 없이 벌어졌다.

신들이 내리는 신벌이라 할 만큼 강력하고 엄청난 폭격이었다.

천마탑은 천마지존의 위용이 무색하게 처참하게 박살이 났다.

잠시 후 새파란 빛의 고리가 폭격을 끝낸 순간 하늘에서 사람 하나가 뚝 떨어져 잔해만 남은 천마탑이 있던 자리를 꿰뚫고 지하로 사라졌다.

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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