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직접 물어보고 확인해 보겠습니다
비대한 몸집의 중년인이 객청으로 들어섰다.
제법 높은 콧대에 검은 수염, 이마 위쪽으로 하얀 천을 감아 쓰고 있는 이족 출신의 중년인.
마풍람의 실무 담당자인 모살라다.
그런데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모살라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묵빛의 장검을 탁자 위에 올려둔 채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는 바로 화운이었다.
“번거로운 걸 싫어해서 담 좀 넘었소.”
화운이 말했다.
모살라는 탐욕이 넘치던 눈길을 묵검에서 거두며 태연히 다가갔다.
“어떻게 왔느냐 보다 무슨 용무로 왔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지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한 모살라는 탁자 한쪽에서 화섭자를 가져가 사방의 초에 불을 붙였다.
화운은 모살라가 불을 붙인 향초에서 독향이 퍼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내버려두었다.
모살라는 자신이 들어왔던 출입문을 닫은 후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움직임은 느리기 짝이 없어 화운의 앞에 도착했을 땐 독향이 충분히 퍼진 후였다.
“방금 불을 밝힌 초는 향이 난다고 해서 향초라 불리는 건데 지금 손님이 맡고 있는 향은 독향이오. 반각만 더 지나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해야 할 건데, 어쩌시려오? 아, 물론 해독제가 있고 원한다면 거래를 통해 줄 수도 있소만.”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바라보듯 하며 히죽 웃는 모살라.
화운은 그런 모살라를 빤히 바라보다 툭 내뱉었다.
“내가 독에 대해 면역이 강해서 소용없을 거요. 그 보다 사람을 찾고 있소.”
“뭐 그렇다면야 용무나 들어야지 별 수 없겠구려.”
고개를 끄덕인 모살라가 의자를 끌어와 앉으려다 돌연 화운을 향해 집어던진 후 몸을 날려 기습했다.
콰직!
의자가 박살이 나고, 탁자 위를 단숨에 뛰어넘은 모살라의 쭉 뻗은 손에 초승달처럼 날이 휘어진 소도가 쥐어져 있었다.
의자를 부순 화운의 주먹이 펴지더니 소도를 쥔 모살라의 손목을 쳐냈다.
그리고는 모살라의 얼굴을 후려쳤다.
퍼억!
모살라가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끙!
모살라는 벽에 부딪쳤던 머리를 흔들며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 생각해봤다.
화운은 의자에 앉은 그대로 자신을 날려버렸다.
자신이 감당 못할 고수라는 뜻이다.
모살라는 잽싸게 화운의 앞으로 달려가 머리를 조아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화운은 피식 웃었다.
모살라는 살기 위해 바짝 엎드릴 줄 아는 자였다.
자기 나름의 생존법인 모양이다.
“아홉 살 조카를 찾고 있다. 그 아이를 납치해 간 무리가 난주로 향한 것까지 알아냈다. 자, 난주는 니들의 땅이니 잘 알아낼 수 있을 거라 믿겠다.”
“한 시진만 주십시오.”
“좋아. 기다려주지.”
화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살라가 잽싸게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번에도 상문귀부터 데려오려나?’
화운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모살라가 돌아온 건 한 식경 만이었다.
그리고 그는 화운의 예상대로 상문귀를 데려왔다.
상문귀는 장신의 이족으로 기다란 검을 차고 있었다.
“저 자입니다. 보통 놈이 아니라 소인의 능력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자입니다. 저 검을 보십시오. 초검마님께 헌상하기에 딱이지 않습니까?”
“그렇군.”
상문귀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화운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상문귀가 검자루를 잡았다.
순간 화운이 탁자를 넘어 상문귀 앞으로 바람처럼 나타났다.
“헉?”
다급성을 토하는 상문귀.
그는 검을 뽑지도 못하고 머리통을 맞았다.
빡!
상문귀가 픽 고꾸라졌다.
“······!”
화운이 돌아보기도 전에 모살라가 냅다 엎드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름이 뭐지?”
“모살라입니다.”
“좋아, 모살라.”
“옛!”
“다시 반 시진 주지.”
고개를 번쩍 쳐든 모살라가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
“끄응!”
상문귀가 머리통을 흔들며 일어섰다.
“거기 꿇어.”
화운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제 환요가 나타날 차례로군.’
반 시진 후.
화운의 예상이 틀렸다.
모살라가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환요와 초검마였다.
화운에게 섭백미령안을 시전한 환요는 머리통을 두들겨 맞았다.
이때 화운이 섭백미령안에 걸리지 않았다는 걸 알아챈 초검마가 검을 휘둘렀으나 화운이 환요를 후려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초검마는 다시 검을 휘두르려다 돌처럼 굳었다.
탁자 위에 있던 검이 저절로 뽑혀 나와 두 사람 사이에 둥둥 떠서는 초검마를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늙은이가 수장인 것 같아서 체면을 봐주는 거야.”
이전에 겪었을 때 느낀 것이지만, 초검마는 독하지 않은 사람이다. 강한 자 앞에서는 이 악물지 않고 묻는 대로 고분고분한 성격이다.
그렇게 독하지 못하고 모질지 못하니 삼십육대마의 일인이면서도 이런 한직으로 밀려났을 테지만.
화운의 말에 초검마는 슬그머니 검을 집어넣었다.
그 모습에 모살라가 화운의 앞으로 전광석화처럼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홉 살 조카를 찾고 있다. 그 아이를 납치해 간 무리가 난주로 향한 것까지 알아냈는데, 그 후로는 오리무중이다. 자, 난주는 당신들의 앞마당이니 잘 알아낼 수 있을 거라 믿겠다.”
“그 정도 정보만으로는 절대 찾지 못합니다. 난주 인근에서만 하루에도 서너 명씩 실종되곤 합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이구요.”
초검마가 대답했다.
“조카가 납치 된 건 작년이었어. 알아보니 당시에 꽤 많은 아이들이 사라졌더군. 조카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면서 알게 된 건 그놈들이 꽤 조직적이라는 거야.”
“사람을 납치하는 놈들이 아무렇게 하겠습니까. 다들 점조직처럼 운영해서 꼬리가 잡히지 않게 하지요.”
“다들?”
“사람 장사하는 놈들이 난주에만 세 곳이 있습니다. 비살둔, 흑서담, 암영총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의 위치가 어딥니까?”
화운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필요한 정보를 얻은 화운이 사라지고 난 후.
“괜찮을까요?”
환요가 물었다.
초검마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환요를 바라봤다.
“우리한테 불똥이 튈까봐 걱정이 되는가?”
“예.”
“우리가 발설했다는 걸 자네가 고해 바칠 건가?”
“아뇨!”
환요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초검마가 상문귀를 돌아봤다.
“자네가 고할 텐가?”
상문귀는 대답대신 검을 뽑았다.
“아, 미안. 그런 짓을 할 바에야 스스로 목을 그어버릴 자네이지.”
그제야 상문귀가 검을 집어넣었다.
초검마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모살라에게 향했다.
어쩐지 차가워 보이는 눈빛이라 모살라는 본능적으로 바짝 엎드렸다.
“충성을······.”
“넌 너의 목숨에 충성을 다하는 놈이잖아.”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발설했다는 게 알려지면 내가 죽이지 않아도 너는 물론이고 우리 다 죽어. 무슨 말인지 알아?”
“예. 소인이 사는 길은 함구하는 것뿐입니다.”
모살라가 더욱 바짝 엎드렸다.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초검마가 환요를 돌아봤다.
“우리가 입을 다물면 누가 알겠어? 안 그래?”
“아까 그 사내가 알고 있잖아요.”
환요가 걱정스런 얼굴로 대꾸했다.
초검마는 피식 웃었다.
“고문을 하지 않고 내 체면을 봐준 게 무슨 뜻이겠나. 서로 입을 다물자는 암묵적 거래를 하자는 거네.”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염려 말게. 우리만 입을 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일은 사람 장사하는 놈들에게 닥칠 것이고.”
“설마 총단까지 찾아갈까요?”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초검마는 화운의 기도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눈빛을 빛냈다.
“어쩌면 말이야. 우리를 내친 자들한테 재밌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어.”
***
난주 북동부 외곽.
어둠에 묻힌 비살둔에 몇 사람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어둠의 사자 같았고, 죽음의 나찰 같았다.
말없이 치고 들어가 비살둔의 주인을 피떡으로 만들더니 그를 짊어지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이 같은 일은 흑서담과 암영총에서도 벌어졌다.
찰싹!
비살둔의 주인인 모사충은 뺨에 작렬한 통증에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이 잡혔다는 걸 깨달은 그는 주위부터 살폈다.
어두컴컴한 곳 한쪽에 작은 모닥불이 피워져 있다.
분명 동굴이다.
그리고 자신은 동굴 벽에 기대앉아 있는데 혈도가 짚였는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새끼 죽었네. 뭐 이렇게 빨리 죽어? 그 새끼도 죽을지 모르니까 배는 따지 마십시오.”
한쪽에서 섬뜩한 말이 들렸다.
모사충은 본능에 이끌려 그쪽을 돌아봤다.
그리고 두 눈을 있는 대로 치떴다.
한 사내가 차가운 바닥에 대자로 쓰러져 있었는데, 아랫배에 창자가 가득 드러나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친 모사충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복면인과 눈이 마주쳤다.
“또 한 놈 있으니까. 이 새끼까지만 배따자.”
복면인이 늙수그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아 있는 놈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면 어쩌고요?”
“몰라. 임무고 뭐고 배따는 재미라도 즐겨야겠어.”
재미난 장난을 치듯이 말한 복면인이 차가운 칼로 모사충의 상의를 잘라버리더니, 훤히 드러난 아랫배에 칼을 들이댔다.
그 섬뜩함에 모사충이 진저리를 치며 소리쳤다.
“뭐, 뭐든 말하겠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발! 뭐든 말하겠습니다! 뭐든!”
혈도가 짚여 몸이 움직이지 않자 더욱 기겁하여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지마. 너 아니어도 입 열 놈이 있어. 가만있자 저놈은 아랫배를 갈랐으니까, 넌 심장이 있는 가슴팍부터 아래로 쭉 갈라주마.”
복면인이 칼을 움직여 모사충의 목 바로 아래에 가져다댔다.
“히엑? 모, 모, 모, 모, 모, 모사충입니다! 비사둔의 둔주인 모사충이 접니다! 뭐든 말씀만 하시며 전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침상 아래에 모아둔 금자가 천 냥이 넘습니다! 그것도 전부 드리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그 새끼, 더럽게 시끄럽네. 목부터 따고 배를 갈라버릴까?”
복면인의 칼이 이번엔 목에 가 닿았다.
모사충은 심장이 벌렁거리고 가슴 속의 뭔가가 와락 주저앉아 미칠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목을 푹 찌를 것 같은 순간 구세주가 다가왔다.
“물어나 보죠.”
“남은 놈한테 물어봐.”
“이놈이 대답하면 그놈 배를 따면 되잖습니까.”
“아, 그래도 되는구나.”
복면인이 칼을 거둬들이고 한쪽으로 갔다.
모사충은 덜덜 떨리는 눈으로 구세주를 돌아봤다.
아직 어린 얼굴이 히죽 웃고 있었다.
“우릴 고용한 고객이 조카를 잃었대. 작년인가 납치 되었다는데 여기저기 알아보니 니들 짓인 것 같더라. 아니면 흑서담이나 암영총일 테고.”
“아닙니다! 저흰 절대 아닙니다!”
“내가 궁금한 건 납치한 아이들을 어디로 보냈냐는 거야.”
“저, 저흰 절대······.”
모사충이 머뭇거리자 아직 어려보이는 청년이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걔 놔두고 얘 배 따세요.”
그리고는 복면인이 간 방향으로 가버렸다.
“봐라. 걔 배 따고 싶다고 했잖아.”
복면인이 칼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기겁한 모사충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냅다 소리 질렀다.
“저희가 납치했습니다! 삼 년에 한 번씩 아이들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있어서, 저흰 그저 그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십년 전쯤에도 니들이 했냐?”
저만큼 가던 청년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모사충은 멈춰선 청년과 청년을 지나쳐 오는 복면인의 칼을 번갈아보며 냅다 소리쳤다.
“예! 저희도 했고, 흑서담, 암영총 다 했습니다! 벌써 수십 년 째 해오고 있는 일입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누가 명령을 내렸는데?”
“고루마군! 고루마군입니다! 천종천마교의 고루마군이 직접 찾아와 내린 명령이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고루마군이랜다. 이제 고루마군 잡아서 배따면 될 테니까 이놈은 지금 배딴다.”
복면인이 이죽거리며 계속 다가왔다.
“그러십시오.”
청년도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가버렸다.
“살, 살려주신다고······.”
모사충은 겁에 질린 눈으로 복면인을 쳐다보며 덜덜 떨었다.
“니가 그런 거지. 우린 살려준다고 한 적 없다.”
모사충의 말을 자르고 그의 앞에서 쪼그려 앉은 복면인이 칼을 불쑥 뻗었다.
“끄아아아아악!”
칼이 닿기도 전에 모사충이 비명을 질렀다.
동굴 밖으로 나온 청년은 남궁현이었다.
그리고 동굴 밖에는 화운 등이 불을 피워놓고 모여앉아 있었다.
“이번에도 고루마군이라고 합니다.”
“들었다.”
아이들을 납치한 자들의 배후가 밝혀졌다.
그래서 다들 표정이 심각하게 무거웠다.
고루마군은 천종천마교의 강시당 당주였기 때문이다.
천종천마교에서 교의 고수로 키우기 위해 납치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강시당이라면 그게 아닐 공산이 컸다.
정말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아직 확실치는 않으니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화운이 검마를 향해 말했다.
검마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말은 하지 않고 있으나 그의 속은 철저하게 주저앉기 직전이었다.
이때 동굴에서 복면인이 걸어 나오며 복면을 벗었다.
무영투였다.
“내가 그랬지. 겁에 질리면 돼지 내장인지 사람 내장인지 구별 못할 거라고.”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한 무영투는 키득거리며 다가왔다.
이때 화운이 일어나 검을 뽑아 휘둘렀다.
쿠궁!
강환이 날아가 동굴을 무너트려버렸다.
“고루마군을 잡으려면 강시당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서 직접 물어보고 확인해보겠습니다.”
화운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시간을 돌리기 전 강시당에 들어갔을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화운을 죽이려던 소나찰 사연홍 때문에 혈전을 벌였던 그날의 기억.
화운은 그때 봤던 고루마군을 떠올리며 폭풍 같은 살기를 터트렸다.
“만약 아이들에게 잔인한 짓을 한 거라면 살아 있음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
이를 갈아붙이는 화운의 머릿속에 강시당에서 상대했던 강시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 싸웠던 강시들은 성체였다.
아이처럼 작은 몸은 없었다.
“······!”
작은 몸!
화운은 아이인지 어른인지 모를 잿빛 피부의 괴인들을 생각해냈다.
사람을 산채로 뜯어먹는다는 흑귀.
천종천마교의 금지 중의 한 곳에 바글거린다는 바로 그 흑귀들이었다.
‘설마 흑귀로 만든 것일까? 왜? 대체 흑귀가 왜 필요한 거지?’
놀람과 의문으로 화운의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졌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게 있었다.
분노!
고루마군에 대한 분노만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