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다시 마인들의 땅, 그곳으로
대륙전장.
“응! 무영투 아니시오? 정말 오랜만이외다.”
장주 화경천이 무영투를 알아봤다.
무영투는 화경천이 아는 체를 하자 한손으로 뒷짐을 지며 인사를 받았다.
“장주께서는 늙지를 않는 것 같소이다. 숨겨둔 불로주라도 있으면 같이 마십시다.”
“그런 게 있다면야 진즉 무영투께서 계신 곳에 사람을 보냈을 거외다. 자, 자. 일단 다들 앉으십시다.”
화경천이 웃으며 권했다.
무영투는 화운을 힐끔 쳐다봤다.
딴에는 ‘나도 이 정도 대우 받는 사람이야’ 라고 으쓱거려봤으나 화운의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화운은 대륙시가 무영투에게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둘이 아는 사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밖에.
‘쳇! 좀 놀라고 그러면 어디가 덧나냐!’
무영투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화경천과 검마, 무영투, 화운 그리고 신풍대 세 사람과 화수련까지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화수련의 부모는 대륙전장의 업무를 보느라 자리하지 못했다.
잠시 후 내원의 시비들이 차를 내왔고 모두들 정신을 맑게 해준다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이때 화제는 자연 천종천마교였다.
검마의 혈손이 천종천마교에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무척 커서 확인해 봐야 하고, 그곳에 무영자가 갇혀 있어 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때 화경천이 크게 놀라며 무영투를 돌아봤다.
화경천과 인연이 있었던 이는 무영투의 스승인 무영자였다.
무영자가 천하를 떠돌면서 수집한 온갖 진귀한 보물들을 가지고 대륙전장을 찾았었는데, 화경천은 한꺼번에 그 많은 거금을 지불할 수 없다면서 대륙시를 제안했고, 한 번에 거금을 쓸 일이 없었던 무영자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무영투가 찾아왔다.
스승이 남긴 대륙시의 주인이라며.
화경천은 무영투가 무영자의 제자임을 알고는 강탈한 것이 아니라 양도받은 것이니 무영투가 대륙시의 새 주인임을 확인해 주었다.
무영투는 워낙 바람 같은 삶을 좋아해서 거금을 쓸 일이 없었고, 또 스승께서 남긴 유품을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어 고이 간직하고만 있었다.
무영자와 무영투 두 사제와 대륙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화운과 신풍대는 새삼스런 눈으로 무영투를 바라봤다.
막대한 거금을 맘껏 쓸 수 있음에도 집 한 채 구하지 않고 천하를 떠돌고 있으니 무영투야 말로 진정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대륙전장이 운영하는 천하 각지의 지부와 운영업체를 찾아가면 얼마든지 돈을 융통할 수 있고, 먹고 자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해결해 줄 터인데도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리 하지 않으셨더군요.”
화경천의 말이었다.
그에 다들 더 놀랍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무영투는 ‘뭐 이정도 쯤이야.’ 하는 표정을 짓다가 품에서 대륙시를 꺼내 탁자 위로 올렸다.
“흠, 대륙시 자체의 가치는 금으로 열 냥쯤일 거요. 하지만 이놈이 상징하고 있는 건 수억만 금이오. 왜냐, 천하 최고 거부인 대륙전장의 주인이 믿음으로 준 것이기 때문이오.”
무영투의 말에 모두들 경탄하는 얼굴로 무영투와 화경천을 번갈아봤다.
무영투는 그 시선들을 조금 만끽하다 히죽 웃으며 말했다.
“방금 한 말은 스승님께서 하신 말씀이고, 난 그냥 스승님의 유품이라 함부로 사용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오. 뭐, 살다보면 어찌 돈이 필요하지 않을까, 급하면 만만해 보이는 곳의 담을 넘으면 해결되오.”
“스승님을 대하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히 귀감이 되는 일일 것이외다.”
화경천이 껄껄 웃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한참 이어지고 있을 때 화경천이 손녀를 불렀다.
“수련아.”
“예, 할아버지.”
“넌 가서 여기 영웅들께서 묵을 수 있도록 별채를 청소하고 저녁식사준비를 하라고 이르거라. 그리고 중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너도 거처로 돌아가 있거라.”
“네. 언니, 오라버니, 이따가 봐요.”
화수련은 백리연과 화운에게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제 중한 이야기를 할 차례가 되자 모두들 자세부터 바로했다.
“자! 이제 이야기를 해봅시다. 우선 본장이 검마 대협의 손자분의 행방을 찾으면서 알게 된 부분부터 설명하리다.”
화경천은 화운에게 간략하게 이야기 했던 부분을 더 세세하게 들려주었다.
오랫동안 상황 설명이 이어진 후 화운이 무영자에 대해 말했다.
무영자는 천종천마교의 중지인 북명전 지하 감옥에 갇혀있다는 것이었다.
화운은 화경천에게 붓과 종이를 부탁한 후 자신이 봤던 천종천마교의 전각 배치도를 그렸다.
꽤 상세한 그림이라 화경천과 무영투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화운에게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고, 천종천마교로 가서 천마와 싸워본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검마와 신풍대원들은 별반 놀라지 않았다.
“여기가 북명전이라면 무영자 대협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겠구려.”
“아닙니다. 어르신을 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랑 무영투 영감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야말로 속전속결! 빠르게 치고 들어가서 어르신을 구한 후 도망치면 되니까요. 문제는 스승님의 일입니다.”
천종천마교의 심처에서 사람을 구해내는 일이거늘 너무나 쉽게 말하는 화운의 모습에 화경천은 놀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화운이 나중에 말한 검마의 일이 더 어렵다는 것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마인들의 입을 열어서 정보를 캐내야 하니 어려울 수밖에.”
“맞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주관하는 이들이 분명 따로 있을 겁니다. 마인들의 입을 열고 열어서 그들의 존재를 알아내야 하고, 또 그렇게 알아낸 자들을 잡아서 십 년 전의 일을 캐내야 하니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화운은 천마에 대해 알아보는 건 뒤로 미뤘다.
검마의 손자와 무영자를 구하는 일이 우선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다들 상황의 어려움을 알기에 무겁게 침묵했다.
검마는 화운이 그려놓은 천종천마교의 배치도만 뚫어져라 내려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승님.”
화운이 나직하게 불렀다.
그러자 고개를 돌려 화운을 응시했다.
“중요한 건 정확한 정보입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아내기만 한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만 알아낸다면 시간을 얼마든지 되돌릴 수 있으니 무리하게 쳐들어가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천종천마교의 마인들을 모조리 죽여서라도 반드시 찾고야 말겠다고 작심하고 있던 검마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참을 무겁게 침묵하던 검마는 차츰 냉정을 찾았다.
“너에게 맡기마.”
그렇게 말하고는 허리를 세우고 눈을 감아버리는 검마.
아무리 냉정해지려고 해도 십 년 만에 찾아낸 단서에 자꾸만 마음이 급해졌다.
때마침 화운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당장 천종천마교를 향해 달려갔을 것이다.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화운이 힘주어 말했으나 검마는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이었다.
지금은 최대한 냉정해지고 냉철해지는 게 우선이라 화운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자, 무영자 대협을 구하는 게 어렵지 않다고 하니 검마 대협의 일을 우선적으로 알아보는 게 낫겠구려.”
화경천이 무거워졌던 분위기를 흐트러트리며 말했다.
사실 무영투는 스승의 일을 뒤로 미루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제자로써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도 검마의 일을 우선시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스승을 구해내면 벌집을 건드려놓은 듯 난리가 날 터인데 그런 상황에서 검마의 일을 알아보는 건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다.
“우선 난주로 가겠습니다. 거기서부터 아이들을 끌어 모으는 일을 전담으로 하는 자들을 찾겠습니다. 무영자 어르신을 구하는 일은 상황을 봐서 적절하다 싶은 때에 진행하겠습니다.”
화운의 말에 누구도 다른 의견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천종천마교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화운이었고, 직접 가보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이 지도도 그렇고 뭔가 아는 바가 있는 모양이군?”
화경천이 궁금했던 바를 물었다.
화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천종천마교는 워낙 경계해야 할 곳이라 맹에도 적잖은 정보가 있습니다. 그 정보들 덕분에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도 알 것 같습니다.”
적당히 말을 만들어서 대답하는 화운의 머릿속에 네 사람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모살라, 상문귀, 환요 그리고 초검마.
화운은 천종천마교의 포교당인 마풍람을 가장 먼저 찾아갈 생각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일찍 마친 화운은 검마와 무영투 그리고 신풍대원 세 사람과 함께 천종천마교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올랐다.
워낙 먼 길이라 화경천이 마차를 제공하겠다고 하자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대륙전장을 나선 마차는 북서로 방향을 잡았다.
섬서 남부를 가로지른 다음 곧장 감숙으로 들어가는 노선이었다.
마차 안에는 화경천이 신경 써서 준비해 준 육포와 건량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필요할 때 쓰라며 다섯 개의 전낭에 금전도 가득 채워주었다.
화운은 이동하다 가까운 곳에 도시가 있으면 반드시 그리로 가서 객잔을 찾아 식사를 했고, 잠도 객잔에서 잤다.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이동함으로써 검마와 무영투의 조급증을 가라앉히고자 애쓴 것이다.
한차례 무영투가 너무 느리게 가는 거 아니냐고 투덜거렸으나 두 사람이 조급하지 않도록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는 화운의 말을 듣고는 그 역시 차분해지려고 노력했다.
마차를 타고 간다고 해서 쉬지 않고 이동하는 건 아니었다.
이두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에게도 충분한 휴식을 주어야 했기에 반시진에 한 번씩은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신풍대 세 사람은 수련을 했다.
처음 삼 일은 대륙전장으로 향할 때처럼 경신을 수련했다.
그리고 화운이 예견한 대로 남궁현은 자신만의 질풍섬을 펼치게 되었다.
질풍섬 본연의 모습 그대로 익힌 선우유성과 자신만의 질풍섬으로 변형하여 익힌 남궁현 그리고 비연보에 운해비룡의 자유로움을 접목시킨 백리연.
세 사람은 경신공에도 상당한 진척을 이루었다.
경신공 수련을 마친 세 사람은 다시 검학을 수련했다.
그때가 되자 검마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네가 가르친 것이냐?”
“원래 익히고 있던 것들을 각자에 맞게 조금씩 손봐주는 정도입니다.”
검마의 물음에 화운이 대답했다.
검마는 세 사람이 검을 수련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 남궁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저 녀석은 마음이 급해지고 있다. 남궁검가의 검은 자유로운 게 강점이다. 자유롭다는 건 곧 손끝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걸 뜻하는데, 저 녀석의 손끝엔 천종천마교로 빨리 가고 싶어 하는 내 마음처럼 여유가 없구나.”
화운은 남궁현이 수련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한참을 살펴보고서야 검마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저 녀석도 스승님을 만나게 된 게 복이군요.”
화운은 남궁현에게로 다가갔다.
가면서 남궁현이 무엇 때문에 여유롭지 못하는지 생각해 봤다.
그 이유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남궁현이 잠깐 검을 멈출 때 선우유성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화운은 남궁현의 앞에서 멈췄다.
남궁현이 검을 거둬들이며 쳐다봤다.
“구룡제가 남궁숙부님의 검이 미완성이라고 했을 때 숙부님께서 뭐라고 하셨느냐?”
“완성이 되면 찾아뵙겠다고 했잖습니까.”
남궁현이 그걸 왜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숙부님의 말씀에 뭔가 느껴지는 게 없었냐?”
“잘 모르겠습니다.”
“숙부님은 남궁검가의 검을 완성하면 구룡제조차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하고 계신 거다. 그렇게 대단한 검학을 익히고 있으니 구룡제의 조롱 같은 말에도 개의치 않아 하신 거다. 넌 어떠냐?”
“······?”
“너도 남궁검가의 검학을 익혔으면서 뭐가 그리 걱정이어서 조급해하느냐는 거다.”
“······!”
남궁현은 화운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선우유성을 보고 있자니 이러다 추월당하는 건 아닌지, 이러다 선우유성의 뒤만 쫓게 되는 건 아닌지 염려한 자신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남궁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한심하죠?”
“우린 아직 배우는 중이다.”
“저야 그렇지만, 대주 형님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난 자주 보고도 너의 마음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검마 스승님께서 곧바로 알아차리셨다. 상대의 검에 담긴 마음을 느끼려면 아직 멀었다는 뜻이겠지.”
남궁현의 상태를 단번에 지적한 검마의 말에 화운도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 때문에 검학의 세계는 참으로 깊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현아.”
“예.”
“넌 남궁검가의 핏줄답게 참 잘하고 있다. 유성이나 날 신경 쓰지 마라. 특히 날 비교 대상으로는 절대 삼지 마라. 내가 비정상적인 거니까.”
“형님.”
“그래, 말해라.”
“지금 하신 말씀 매번 제게 해주십시오.”
시간을 되돌리게 되면 매번 자신에게 지금 한 말을 해달라는 것이다.
지금 한 말이 그만큼 큰 도움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 그렇게 하마.”
“감사합니다.”
남궁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화운은 그런 남궁현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시간을 되돌리면 지금 배우고 익힌 것들이 다 소용없어질 것인데, 어찌 이리 열심인 것이냐?”
검마가 물었다.
빤히 바라보며 묻는 것이 아무래도 깨나 궁금한 모양이다.
“시간이 고통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
“매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게 되면 그 삶에 함께하고 있는 모든 친인들의 존재 자체가 의미가 없어질 겁니다. 그럼 전 대충 막 살게 될 거고, 존재 자체가 의미가 없는 이들과 삶을 공유할 턱이 없겠지요. 그저 홀로 외로운 시간만 보내다 내가 어느 삶에 있는지, 살고나 있는 것인지 생각만 복잡해질 거고 그러다 보면 살아 있는 시간이 늘 고통스러울 겁니다.”
“복잡하구나.”
“간단히 말해 전 모두와 함께 살고 싶지, 그저 아무렇게나 살아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운명에 순응할 것인가, 개척할 것인가. 그 고민과 비슷하구나.”
“예. 전 대충 순응하는 것보다는 힘들더라도 발버둥 치는 게 더 좋습니다.”
“흠······. 발버둥 친다는 말이 이렇게 좋게 들릴지는 몰랐다. 나 역시 이제 발버둥 칠 곳을 찾았으니 때가 되면 그리 해야겠다.”
“발버둥······ 잘 하실 수 있을 겁니다.”
화운은 무례하게 느껴져 말을 바꿨지만, 검마는 그 말이 썩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검마에게는 이미 시간이 고통이었고, 삶은 고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발버둥이라도 쳐야만 한다.
‘천마라······.’
섬서를 가로질러 감숙 땅에 발을 디디면 난주까지는 하루하고 반나절 거리다.
화운을 비롯한 일행들이 탄 마차는 며칠 후 감숙 땅에 들어섰고, 이틀 후 오전에 난주에 들어섰다.
대륙전장에서 출발한지 열흘 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