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전쟁, 그거 하죠 뭐
짙은 밤.
화운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천마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낸 것과 막막한 것은 다른 법이다.
무영투와 함께 무영자를 구하는 건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하면 되는 일이다.
천마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낸 이상 그와 맞닥트리는 걸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천마가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혹은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그걸 알아보고 조사하는 건 막막하기만 했다.
무영자를 구한 후 무작정 찾아가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진짜 그래볼까?”
“뭐를요?”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화운은 놀라지 않고 돌아섰다.
어둠속에서 백리연이 다가오고 있었다.
달빛이 스며드는 창가로 다가오자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자다가 나온 얼굴이 아니었다.
“여태 안 잔 겁니까?”
“누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려서요.”
“걱정을 끼쳐드렸군요.”
“맞아요. 걱정이 되고 있어요.”
“미안합니다.”
“아뇨. 그게 아니에요.”
“······!”
“전 이런 걱정이라도 할 수 있어서 좋아요.”
백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말을 얼굴을 맞대고 하자니 부끄럼이 치밀었다.
그래도 작정하고 나왔으니 시선을 피하고서라도 할 말은 하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화 소협이 대단하게만 보여서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는 제가 정말 싫었어요. 물론 지금도 도와주지 못하는 건 같아요. 하지만 적어도 화 소협이 짊어진 무게를 조금은 알 것 같고, 무얼 걱정하고 고민하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아요.”
화운은 백리연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그녀를 따라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밤하늘에 만월이 되어가고 있는 달이 멋스럽게 떠 있었다.
“제가 걱정해 줄게요. 제가······.”
백리연이 말을 멈추고 화운을 돌아봤다.
화운 역시 돌아보자 백리연이 두 손을 뻗어 화운의 가슴 속에서 한 짐 덜어내는 흉내를 한 후 손을 거둬들여 자신의 가슴에 담는 시늉을 했다.
“이만큼 덜어냈으니까, 이만큼 덜 걱정하세요.”
진지하게 말하던 백리연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우스운지 머쓱하게 웃고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럴게요. 그렇게 할게요.”
화운이 말했다.
백리연은 자꾸만 낯이 화끈거려 대꾸하지 못했다.
화운은 살짝 당황하는 백리연의 모습이 무척 예뻐 보여 한참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공기마저 어색해질 때쯤 되자 화제를 돌렸다.
“그때도 저렇게 달이 밝았던 것 같아요.”
“그때가 언제인데요?”
“제가 백리 소저의 모습에 넋을 잃어버렸을 때요.”
“네?”
백리연이 놀란 얼굴로 돌아봤다.
놀란 중에도 궁금증이 한가득인 얼굴이었다.
대체 언제 자신을 보았다는 것인지?
“경천보패가 궁금하여 부숴본 적이 있다는 말은 했었지요?”
“예.”
“그때 제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 보였어요.”
“······!”
“만월의 달빛을 받으며 아름다운 여인이 검무를 추고 있었거든요.”
화운의 말이 끝난 순간 백리연의 두 눈이 한껏 커졌다.
“너무 아름다워서 백리 소저의 검무를 넋 놓고 보곤 했어요.”
“그때······ 제천마존의 비동 근처에서요?”
“예. 죄송합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도저히 눈을 돌릴 수가 없었어요.”
백리연은 왠지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아름다웠다는 말이 자꾸만 귓가에 남았다.
“보기 좋았다니 다행이에요.”
“보기 좋은 정도가 아니라 환상을 보는 것처럼 정말 아름다웠어요. 저렇게 밝은 달빛 아래에 마치 달의 여신이 강림한 것 같았어요.”
백리연은 화운의 찬사가 거듭되자 기쁘면서도 너무 부끄러웠다.
그래서 더는 견디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그래서 그렇게 제 검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군요.”
“예. 손짓하나 얼굴 표정 하나하나까지 제 머리와 가슴에 깊은 각인으로 남을 정도로 정말 많이 봤거든요.”
“네에, 그랬군요.”
백리연은 예전부터 조금 궁금했던 의문이 풀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나는 기억 못하는 나를 많이 알고 있겠구나.’
백리연은 살짝 걱정이 되었다.
지금의 자신이 기억 못하는 자신이 혹시 밉상인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남궁현만 해도 모두가 죽은 일로 살인귀처럼 굴며 화운에게 대들고 그랬다질 않은가.
“사황이 천하에 군림했을 때요. 다 죽고 현이가 살인귀처럼 변했다고 했었잖아요. 그때 전 어땠나요?”
화운은 백리연을 빤히 응시했다.
백리연이 살짝 걱정하는 게 보였다.
그래서 차마 장난을 하지는 못하고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해주었다.
“그때도 멋지고 아름다웠습니다. 두 녀석들에게 강한 누나가 되어 잘 이끌고 있었어요. 그리고 단발이었어요.”
“단발이요?”
“예. 얼굴의 턱선까지만 내려올 정도로 짧게 잘랐는데, 또 다른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것 같더군요.”
“상상이 안 가요.”
“저도 첨 봤을 땐 좀 놀랐어요. 미안한 마음도 컸고.”
그때 백리연의 얼굴엔 검상이 있었다.
살아남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듯 제법 기다란 상처였다.
무척 안쓰럽고 미안했었다.
“얼굴에 검상이 있었어요. 맹을 탈출할 때 당한 상처라고 했어요.”
“얼굴에······ 보기 흉했나요?”
백리연이 자신의 뺨을 매만지며 물었다.
화운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전혀 흉하지 않았어요. 무슨 여전사 같았어요. 시련과 운명에 굴하지 않고 맞서는······.”
백리연은 잠시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곧 입을 샐쭉 내밀었다.
“피이! 여자한테 전사가 뭐예요? 거칠어 보였다는 거잖아요.”
“아!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뭐 흉하지 않게 봐줘서 고마워요.”
빙그레 웃는 백리연.
그녀는 곧 속으로 흠칫 놀랐다.
늘 냉담한 척만 하던 자신에게 이렇게 여성스러운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다.
백리연은 낯이 화끈거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잠깐 달만 쳐다봤다.
화운도 백리연을 따라 달을 바라봤다.
둥글게 채워지고 있는 달이 두 사람에게 밝은 빛을 비춰주고 있었다.
“달이 참 밝아요.”
“예.”
“우리들의 내일도 저렇게 밝았으면 좋겠어요.”
“그럴 거예요. 제가 꼭 그렇게 만들 겁니다.”
“예. 꼭 그렇게 만들어주세요. 저도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하겠어요.”
화운과 백리연은 밝은 미래를 꿈꾸며 달을 쳐다봤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달은 더욱 밝게 비추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사신단에게 북궁설이 찾아왔다.
“오늘 돌아갈 거지요?”
“그럴 거네. 여러모로 고마웠네.”
남궁검가주가 대표로 고마움을 전했다.
“고맙긴요, 첫날 하루 종일 굶게 해서 죄송한데.”
“그게 어디 자네 탓이던가.”
“기분이 많이 상하셨겠지만, 털어버리세요. 태양존자랑 좀 오래 알던 사이라 꽤 심란했던 모양입니다.”
화운에게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화운이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다.
“그건 벌써 잊었으니 개의치 말게. 그것 보다 하나만 물어보세.”
“예. 뭡니까?”
“천종천마교를 정사가 먼저 쳐버리자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이유라던가, 고충이라던가, 뭐 그런 게 혹여 있는 것인가?”
남궁검가주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에 북궁설은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북궁설이 워낙 당차고 직선적이고 그러다보니 정치적인 일처럼 머리 쓰는 쪽으로는 다소 우둔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북궁설은 남궁검가주가 자신에게서 뭐라도 알아내려고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파분들은 머리를 너무 많이 굴려서 제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는 걸 아세요?”
“그런가?”
“천종천마교를 먼저 치자고 하는 이유야 있지요. 고충 같은 건 없고요.”
“그 이유가 뭔가?”
“앉아서 기다리다 당하느니 찾아가서 싸우는 걸 택한 거겠지요.”
“그렇게 간단하단 말인가? 단지 그 이유뿐이라고?”
“목숨이 걸린 일인데, 그것도 수만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간단할 수밖에요.”
“······?”
남궁검가주는 물론이고 다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많은 목숨이 걸린 일이니 마땅히 고민하고 궁리하여 최선의 자구책을 찾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런 표정을 읽은 북궁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천종천마교가 둥지를 박차고 나오면 사파고 정파고 간에 싸울 수밖에 없지요?”
“그러하네.”
“그들이 나온다는 건 준비가 끝났다는 거겠지요?”
“그렇겠지.”
“그들이 준비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랑 그러기 전에 먼저 공격하는 거랑 어느 쪽이 더 최선일까요?”
남궁검가주는 대답을 못했다.
먼저 공격하는 게 백 번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요.”
“······?”
“두 영감님들은 결과에 크게 관심이 없어요.”
“응?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살 만큼 살았는데 뭘 더 바라겠어요. 죽기 전에 신나게 싸워볼 천마가 있다니까 온천하가 들고 일어나 수천 년 동안 길이길이 전해질 역사적인 대전쟁이나 벌여보자는 거지요.”
“그게 사실인가? 정녕······!”
“놀랄 정도로 실망했나 보네. 그래서 사정연합을 파기하실래요? 아니면 천종천마교를 먼저 치는 걸 반대할 겁니까?”
“그럴 수 있다면 반대하고 싶네.”
“사파와 정파 연합이 깨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세요?”
“설마 본맹을 쳐들어오겠다는 건가?”
“태양존자가 살아 있다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분이 없는 이상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천하제패니 군림이니 하는 건 늘 태양존자 그분만 떠들어댄 거구요. 지금의 두 분은 정파 쪽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어요. 당신들에게 어울리는 적수가 없다는 거지요. 지금이야 신풍대주가 상대가 되겠지만, 연배 차이가 너무 커서 함께 이름을 올리는 것 자체가 싫을 겁니다.”
“허면······?”
“맞아요. 사파와 정파의 연합결성이 이뤄지지 않으면 천사련만 천마교로 몰려갈 겁니다.”
북궁설의 말에 남궁검가주는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청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때 화운이 말했다.
“그래서 사황과 천마의 무공에 대해 묻지 않았군요. 알아보고 이것저것 준비하고 그러는 거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일 테니까. 이거 참······ 자존심 강한 고약한 노인네들 때문에 온천하가 다 움직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맞아. 정파는 어차피 따라올 수밖에 없어.”
화운은 북궁설의 말을 이해했다.
정파가 참전하지 않으면 천사련은 천종천마교에 박살이 날 거다.
그럼 정파만으로 그들과 싸워야 한다.
천마가 있는 천종천마교와의 전쟁!
천사련 다음으로 정파가 박살이 날 게 뻔하다. 각개격파를 당하게 되는 셈이다.
혹여 천사련이 이겨도 문제다.
천하의 안녕이 걸린 그토록 심대한 싸움에 사파만 참전했다는 게 알려진다면 정파의 입지는 극도로 좁아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정파는 존재해도 유명무실한 존재가 될 것이고, 그야말로 사파천하가 될 것이다.
“전쟁, 그거 하죠 뭐.”
화운이 남궁검가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정파에겐 선택지가 없다. 그렇다면 고민하고 우려할 게 아니라 적극 나서는 게 나을 것이다.
“두렵더라도 피하지 말아야 하는 건 저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남궁검가주는 이어진 화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무맹 아니 정파 전체 역시 피해서는 안 되는 전쟁인 것이다.
“그래. 그런 모양이다.”
남궁검가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천종천마교를 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매듭지어졌다.
“자, 그럼 가보실까요?”
북궁설이 손뼉을 쳐 분위기를 일신시키며 말했다.
“직접 배웅해 주려고요?”
“어. 본련의 정문까지 만이라도 배웅해 줄게. 너랑 헤어지는 게 참 아쉽다.”
북궁설이 화운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화운도 마주 웃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정문까지만이라도 시비 거는 놈들은 없겠네요.”
“시비는 무슨, 어제 그 난리를 쳐놨는데, 목숨이 두 개라면 모를까, 누가 너한테 시비를 걸겠냐?”
“아, 그런가?”
생각해 보니 그렇다.
천사련의 최강자인 구룡제를 상대로 그토록 놀라운 무위를 보여주었거늘 누가 감히 시비를 걸겠는가.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자, 천사련에 남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
남궁검가주가 모두를 보며 물었다.
당연히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남궁검가주는 북궁설을 향해 섰다.
“철봉황, 정문까지 안내를 부탁하겠네.”
“기꺼이 그렇게 하겠어요. 자, 가시지요.”
북궁설이 웃으며 앞장을 섰다.
화운을 비롯한 사신단은 이렇게 천사련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가게 되었다.
물론 맹에 복귀하는 즉시 또 다른 여정이 화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종천마교와 천마.
그들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