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120화 (120/207)

#120. 싸워봤으니까요

“천사련은 천마와 천종천마교를 먼저 쳐버리자고 한다.”

“예에?”

경악스러운 일이다.

천종천마교를 치는 거야 천사련과 정무맹이 손을 잡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천마를 치는 건 다른 일이다.

천마를 누가 상대한단 말인가?

자신과 구룡제, 적성대도황 그리고 정무맹의 맹주를 포함한 원로고수들?

화운이 느낀 천마의 강함은 측정불가다.

그때 겪었던 것만으로도 자신은 물론이고 사황조차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황은 도시의 경계인 성곽 자체가 거대한 진법이라고 했다. 그 안에서만큼은 자신도 사황도 천마의 힘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맞지만 틀리기도 했다.

그 진법 밖에서도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성곽을 부술 생각도 하지 않고 시간을 되돌리라고 했을 거다.

그리고는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천마를 상대할 방도를 찾아 무해곡에 처박힌 게 사황이다.

다시 말해 사황조차 꽁지를 만 거다.

그런 천마를 치러 가자고 한다.

구룡제와 적성대도황이.

그들은 사황에게조차 상대가 되지 못해 철저히 무릎을 꿇었었다.

“어림없습니다. 가 봐야 전부 죽습니다. 천마는 사황조차 상대가 되지 못하는 괴물입니다. 온천하가 다 달려들어도 모조리 밟혀죽을 겁니다. 그게 천마라는 괴물입니다. 절대 안 될 말입니다.”

화운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하자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는 것이냐? 천마를 안다는 것이냐? 사황이 천마와 싸운 적이 있단 말이냐?”

“에?”

남궁검가주가 불쑥 묻자 화운은 흠칫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실수한 것이다.

하도 천마와 천종천마교를 먼저 쳐버리자는 말이 하도 놀랍고 황당하여 속내를 거르지 않고 내뱉어버렸다.

“아니 안다기 보다는······.”

“말 돌리지 말고 아는 걸 다 말해보거라. 우리에게까지 감출 게 뭐가 있다는 것이냐?”

남궁검가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선우세가주는 남궁검가주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던지 그다지 놀라거나 하지 않았고, 신풍대 세 사람은 또 뭘로 놀라게 하려는 거냐는 표정들이었다.

‘이걸 어떻게 넘기지?’

화운은 머리를 빠르게 굴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럴 땐 만나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들먹이는 게 유용했다.

“사황이 절 찾아왔었습니다.”

화운이 말하기 시작하자 남궁검가주가 손을 들어 막았다.

화운이 말을 멈추고 왜 그러시냐는 얼굴로 쳐다보자 남궁검가주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운아.”

“예.”

“난 널 믿는다만, 지금껏 네가 했던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예?”

“제천마존의 비동에서 기연을 만나 강해지고 검마 선배께 검학을 배우고. 그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널 보거라. 네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무공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순간에 찾아온다는 깨달음도 수많은 시간을 공들인 끝에 찾아오는 법이다.”

“······.”

“금강부동은 까마득한 과거 천마가 소림에서 직접 가져간 것이다. 나한당주님께 여쭤봤었다. 소림에 기록이 남아 있다더구나. 그게 어찌 제천마존의 비동에서 나올까? 물론 제천마존이 손에 넣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어쩐지 공교롭다는 생각이 든다.”

남궁검가주의 목소리가 나직하면서도 단호하게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당황하여 굳은 얼굴로 화운만 쳐다봤다.

“넌 사황이 천마에 대해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고 했었지? 깨어날 때가 되었다고.”

“예.”

“너만큼 강한 고수가 그 말만 듣고 천마를 이토록 두려워한다는 게 이해되는 일이냐?”

“두려워한다고요?”

“그래, 넌 천마를 두려워하고 있다. 방금 네 표정이 그렇다고 알려주더구나.”

화운의 얼굴이 멍청하게 변했다.

‘내가 두려워해?’

화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스스로를 돌아봤다.

정말 천마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

사황과 천마.

그러고 보니 사황은 두려워한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그닥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도 지켜야 할 무해곡의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 뒤로 이기는 하지만 여튼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천마는 좀 다르다.

그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조차 꺼렸다.

천종천마교 쪽으로는 갈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영투에게 무풍무영을 알려주고는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게 되면 찾아오라고 했다.

혹시라도 천마와 맞닥트렸을 때 그를 지켜줄 자신이 없어서다.

“하아······!”

화운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곧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남궁검가주를 응시했다.

태연히 앉아 있는 모습이 말을 할 준비가 되면 말하라며 얼마든지 기다려주겠다는 태도다.

시선을 돌려보니 선우세가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추궁이 아니라 너의 고민을 들어주겠다는 태도라 화운은 마음이 흔들렸다.

‘말해도 되려나?’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사실 말한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지만 말해줘서 좋을 것도 없다.

놀람과 부담만 안겨주는 것일 테니까.

그런데 지금 남궁검가주와 선우세가주는 그 놀람과 부담조차 들어주겠다는 모습이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면 함께 고민해 주겠다는 모습이라 마냥 속일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 든다.

‘그래, 말한다고 문제가 될 일도 없고, 혹여 문제가 생기면 상황을 봐서 다시 돌리던지 하지 뭐. 그리고 담부턴 남궁 숙부님을 더 조심해야겠다. 별 관심 없는 것처럼 보이시던데 내 말과 행동을 다 분석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화운은 결정을 내렸다.

자신의 일을 말하기로.

“예. 전 천마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어째서냐?”

“싸워봤으니까요.”

강한 충격과 경악이 모두를 뒤흔들었다.

남궁검가주조차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 정도까지는 예상 못하셨죠?”

“그래. 전혀.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게 천마와 싸워보았다는 것일 줄은······ 믿기지도 않는다.”

“그러실 겁니다. 천종천마교에 가봤고, 사황이랑 천마 그리고 저, 그렇게 셋이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결국 사황과 전 도망쳤구요.”

모두의 눈이 더욱 커질 정도로 큰 충격이 강타했다.

화운은 그런 모두를 둘러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믿기지 않을 겁니다.”

“말해다오. 알아야겠다. 우린 늘 한 식구였다는 말을 기억한다면 알려다오. 운이 네가 걷고 있는 길, 힘들어 보인다.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네가 힘들어한다는 거라도 알게 해 다오.”

선우세가주가 말했다.

화운은 그의 염려가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 웃을 수 있었다.

“제가 숙부님의 명을 어기고 제천마존의 비동에 갔다는 거야 다들 알고 계실 테고, 두 분 숙부님은 거기서부터 제게 뭔가 있었다고 생각하시죠?”

“그래.”

남궁검가주가 대답했다.

화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거기서부터 입니다. 거기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을 겪었거든요.”

화운은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제천마존의 비동에서 겪었던 자신의 일을.

그 일은 누가 들어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운이 무간지옥으로 떨어지는 통로 같은 곳에 빠져 용암의 바다를 건너 죽음에 이른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모두들 그저 침묵한 채 듣기만 했다.

화운이 다시 살아나고 돌덩이에 깔려죽고, 스스로를 백나찰이라 칭하던 백아연과 도살자에게 목이 잘리는 일을 반복 당한 이야기.

모두들 이게 무슨 해괴한 이야기냐는 얼굴로 화운만 쳐다봤다.

그러다 화운이 그 난관을 기회로 삼아 오히려 백아연의 검학을 사기 쳐 배우게 된 부분으로 이어지자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 일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화운은 계속 이야기했다.

무영투를 만나고 얼음으로 뒤덮인 수직동굴의 밑바닥까지 가게 된 이야기, 그 와중에 검마의 도움을 받고자 스스로 뛰어내린 이야기 그리고 그곳에서 남궁검가주를 처음 보게 된 이야기와 검마가 낭왕 등과 싸우게 되고 낭왕이 얼음 기둥을 부순 이야기까지.

화운이 하나하나 감추지 않고 이야기하였기에 무척 길었으나 워낙 충격적이고 기이한 일이라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다시 살아난 전 비동에 제천마존의 무공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기에 밖으로 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두 분 숙부님과 동생들이 함께 들어오는 걸 보았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수직동굴의 아래에는 남궁검가만 내려왔으니까요.”

화운은 선우유성을 응시했다.

그리고 말했다.

“유성이 넌 거기서 죽었다.”

화운은 선우유성의 죽음을 감추지 않았다.

화운이 마지막에 제천마존의 비동을 무너트려버린 근본적인 이유였기 때문이다.

경악하는 사람들.

특히 당황하는 선우유성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응시하며 화운은 아직도 한참 남아 있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창밖엔 어느새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반 시진 후.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 모두들 무겁게 침묵했다.

누구 한 사람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화운만 쳐다봤다.

한 사람이 겪은 일이라고 하기엔 파란만장하다 못해 너무나 기험했다.

그 비현실적이고 기괴한 이야기 속에 이 자리의 모두가 등장했고, 모두의 목숨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후! 너무 어렵다.”

선우유성이 갑자기 침묵을 깼다.

모두들 그를 돌아보자 선우유성은 화운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사황과 천마를 막기 위해서 형이 뭘 해야 하고 무슨 험한 일을 더 겪어야 할지 상상도 못하겠어. 그리고 그건 형이 선택할 일인 것 같아. 난 그냥 고맙다는 말만 할게.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선우유성이 천진한 아이처럼 밝게 웃었다.

그 웃음에 무겁게 굳어있던 분위기가 눈 녹듯 풀어졌다.

“절 구해준 건 두 번이나 되네요. 고마워요.”

백리연도 웃으며 말했다.

화운이 의아하여 쳐다봤다.

“두 번이라구요?”

“구룡태자에게서 한 번 그리고 장강에서 독에 다리가 중독되었을 때 한 번.”

“장강에서야 제가 지켜드리지 못한 거지요.”

“아뇨. 매 순간 다 지켜줄 순 없어요. 그리고 절 구하고자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잖아요.”

백리연의 얼굴 표정만으로도 그녀가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이 무척 밝았다.

활짝 피어난 꽃처럼 환한 미소로 화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화운이 자신의 다리 때문에 결국 죽음을 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백리연의 가슴은 진한 감동으로 요동쳤다.

“난 뭐 없어요? 제가 죽을 위기에 처해서 대주형님이 몸을 던져 막았다거나 뭐 그런 거요?”

남궁현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그러자 남궁검가주가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촐싹거리지 마라.”

“윽! 그냥 궁금해서 그런건데······.”

남궁현이 자라목처럼 움츠리면서도 화운에게 시선을 못 박듯 쳐다봤다.

화운은 피식 웃었다.

“넌 사황한테 두 분 가주님께서 돌아가시자 살인귀가 되었다고 했잖아. 별호가 뭐라더라 아, 묵령사신! 묵령사신 남궁현! 그때 꽤 유명했다. 성질이 어찌나 더러운지 그때 너 형한테 막 대들고 진짜 밉상이었다.”

“에······ 그런 거 말구요.”

남궁현은 좀 아름다운 이야기를 원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화운이 입을 다물고 웃고만 있자 남궁검가주가 남궁현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네놈이 애비를 그토록 생각하는 줄 몰랐다. 묵령사신 남궁현!”

남궁검가주는 아들이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애 아닙니다. 그리고 웃으시는 연유가 어찌 되시는지요?”

확실히 남궁검가주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피식피식 웃는 모양새였다.

“내 새끼가 기특해서 그런다. 묵령사신 남궁현!”

“예. 많이 기특하십시오.”

그렇게 공기가 많이 유쾌하게 달라졌을 때였다.

선우세가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힘들구나. 네가 너무 큰 짐을 짊어진 것 같다.”

모두가 웃음을 지우고 선우세가주의 말에 집중했다.

“아무래도 하늘이 네게 원하시는 게 있는 모양이다. 짐이라 생각 말고 너의 걸음 끝에 반드시 행복할 날이 있을 거라고 여기거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하나입니다.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 특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겁니다. 그러자면 사황과 천마를 죽여야겠지만. 여튼 그들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면 시간을 되돌릴 겁니다. 그래서 모두가 순탄할 수 있도록 정리한 다음 그들을 찾아갈 겁니다.”

화운이 자신의 각오이자 계획을 말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황과 천마를 상대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 너무나 막막했기 때문이다.

이때 잠깐 생각하던 남궁검가주가 조금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런 작심을 하고 있다면 넌 천마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아니 두렵더라도 피하지 말아야 한다.”

화운은 남궁검가주를 바라봤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어서다.

어차피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면 천마와 부딪쳐 그에 대해 더 많은 걸 알아내야 한다는 뜻일 게다.

“숙부님 말씀대로입니다. 아무래도 전 천마가 두려워 지금껏 그를 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면서 힘겨운 길을 가라고 해서 미안하구나.”

“진즉 이런 자리를 만들어 다 이야기 할 걸 그랬습니다. 이렇게 힘이 나는 걸.”

화운은 활짝 웃었다.

그리고 모두를 둘러본 후 말했다.

“맹으로 돌아가는 즉시 천종천마교로 떠나겠습니다. 가서 무영자 어르신도 구하고 대체 천마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그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그래, 그러거라. 정사연합이 천종천마교를 먼저 치려고 해도 준비하고 출정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게다.”

“그렇겠지요. 시간은······ 충분합니다.”

화운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를 꺼려하고 두려워하던 마음을 극복한 것이 분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