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구룡제, 그리고 적성대도황
마라뇌불!
핏빛 가사(승복)를 걸친 노인.
목에는 일반적인 염주가 아니라 해골염주를 걸고 있었다.
서역 뇌불사 출신으로 스스로 구룡제를 찾아와 천하제패를 이루도록 헌신할 테니 훗날 자신이 서역을 발아래 둘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수 년 전 천사련을 창설한 게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
“감히 그 따위 짓을 하고도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것이냐!”
정무맹의 사신단과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으름장부터 놓는 마라뇌불.
남궁검가주는 그런 마라뇌불을 빤히 응시하다가 퉁명한 태도로 대꾸했다.
“찾아온 손님을 쫄쫄 굶겨가며 마냥 기다리게 만든 게 노인장의 작품이었소? 대접 잘 받았으니 이제 돌아가겠다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남궁검가주는 마라뇌불의 신분을 눈치 채고 있었으면서도 그저 노인장이라고 칭했다.
졸렬한 대접에 최소한의 경멸로 응수한 것이다.
“그깟 하루 굶은 것 때문에 이토록 큰 소란을 일으킨단 말이냐! 이는 필시 본련을 우습게보고 능멸한 것이니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 사신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이오?”
“니놈들을 죽여서 어디에 쓴단 말이냐! 전부 팔 하나씩 잘라 놓고 가거라!”
“뭐 싼 놈이 화낸다고 딱 그 짝이군! 가당치도 않은 일이니 더는 면상을 마주할 필요도 없을 것 같소. 협상이고 나발이고 우린 돌아갈 것이니 문이나 열어주시오.”
“닥쳐라! 누가 곱게 보내준다더냐!”
“좋소! 계속 그렇게 나오겠다면 한 번 더 소리쳐주겠소. 이번엔 천사련의 수뇌부는 사황과 천마에 대처할 생각은 않고 우리들을 죽여 입막음이나 하려 한다고 말이오.”
“입만 벙긋해봐라. 머리통을 뽑아버리겠다!”
그렇게 팽팽한 기세싸움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이때 남궁검가주의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던 화운이 한 걸음 움직였다.
옆으로 한 걸음 이동하니 남궁검가주에 가려져 있던 것이 사라지고, 마라뇌불이 화운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두 걸음을 격하고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
“······!”
화운은 한 걸음 이동 후 바라보기만 했다.
공력을 일으켜 마라뇌불을 압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시선만 던져준 것이다.
하지만 그 시선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 지랄 마라. 죽는다.
화운이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마라뇌불은 그렇게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심어?’
마라뇌불은 눈을 치떴다.
뜻만으로도 상대에게 직접 말을 전한다는 심어.
그 전설상의 경지가 떠올라 놀람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정말 죽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놈이 신풍대주로구나!’
화운의 정체를 파악한 마라뇌불이 한 걸음 물러나며 눈알을 굴릴 때였다.
“당신들, 날 제거하기로 계획했군.”
“······!”
“우릴 맘껏 욕보이더니 이젠 이곳을 아주 물샐 틈 없이 에워싸고 있네. 얼마나 동원했지? 일천은 되나?”
“······!”
마라뇌불은 놀란 눈으로 쳐다보며 계속 한 걸음씩 물러났다.
“우리가 이 정도 예상도 안 하고 왔을 것 같아?”
마라뇌불이 걸음을 멈췄다.
“훗날 걸리적거릴 게 분명해 보이는 날 죽인 후에 협상이든 뭐든 할 생각이었겠지만, 날 우습게 봤어.”
시비가 붙었다.
큰 싸움이 벌어졌고, 죽었다.
정무맹의 사신단도, 천사련의 수많은 무인들도.
그렇게 밀어붙이고 우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사파가 하는 짓이 다 그렇듯이.
“허튼 짓 마라. 모조리 죽을 것이다!”
마라뇌불이 소리쳤다.
“해봐! 난 천사련을 몽땅 쓸어버릴 테니까. 우선 늙은이 당신부터!”
“죽여라!”
화운의 말이 끝난 순간 마라뇌불이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엎드려!”
화운의 외침이 터졌고.
사신단이 땅바닥에 엎드렸다.
순간 굵은 쇠로 만들어진 화살들이 담벼락을 뚫고 쏟아졌다.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덕분에 사신단 중 화살에 당한 사람은 없었다.
“헉?”
다급성을 지르며 장력을 뿌리는 마라뇌불.
그의 눈앞에서 허공을 가르며 검격이 튀어나왔다.
쾅!
마라뇌불이 장력으로 검격을 후려쳤으나 막대한 힘에 의해 뒤로 세 걸음을 튕겨버렸다.
“······!”
휘청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으며 우뚝 멈춘 마라뇌불.
그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바로 뒤에 화운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 하나만 까딱하면 목이 떨어질 거리였다.
“늙은이, 정말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구룡팔도객과 적성십이군을 동원해주기라도 한 모양이지?”
구룡팔도객과 적성십이군은 구룡제와 적성대도황의 그림자 같은 고수들이다.
그들이 합격을 하면 죽이지 못할 자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
“멍청한 늙은이, 당신이 죽어도 그들은 투입되지 않아. 왜냐고? 투입해봤자 다 죽을 거거든, 나한테.”
“······!”
“잘 생각해봐. 더 이상의 공격이 없는 게 이상하지 않아? 늙은이가 이렇게 허술하게 계획을 세웠을 리는 없잖아.”
마라뇌불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화운은 얼굴 표정을 볼 수는 없으나 마라뇌불의 흔들리는 기운을 감지했다.
“역시 그렇군.”
화운이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련의 담당자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꼬박 하루를 굶기고 있을 때 화운은 곰곰이 생각해봤다.
구룡제와 적성대도황의 입장에서 자신을 죽이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무작정 공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천사련의 수많은 수하들이 보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큰 싸움이 벌어질 미끼를 던져주고, 일이 터지면 그들이 직접 나서는 것이다.
마라뇌불이 찾아와서 엄포를 놓을 때 확신했다.
미끼라고.
자신을 낚기 위한 미끼로 마라뇌불을 던져준 것이라고.
“당신은 생각했어야 했어. 구룡제와 적성대도황 쯤 되면 상대가 아무리 고수라도 한참 어린 자라면 그자를 죽이고자 가벼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움직이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해. 천사련 내에서 중요한 누군가가. 마치 당신처럼 말이야. 당신이 내게서 살아서 빠져나갔어도 죽었을 거야. 구룡팔도객과 적성십이군에게. 다시 말해 지금 이곳에서 죽었어야 하는 건 나나 사신단이 아니라 늙은이였어. 내가 살려준 거고. 어때, 고맙지?”
빈정거리는 화운의 말에 마라뇌불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래살고 싶으면 절대의 반열에 오른 고수들한테는 잔머리 굴리지 마. 안 통하니까. 알아들었으면 꺼져.”
화운은 마라뇌불을 내버려두고 고개를 돌렸다.
멀리 구룡제와 적성대도황이 있을 곳으로 짐작되는 오층 전각을 향해서다.
이제 담벼락이 부서지고 마라뇌불이 살아 있다는 것을 그들도 알았을 테니 당장은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쪽에서 움직여주는 게 도리일 터.
화운은 공공무영비를 펼쳐 허공으로 부상했다.
사신단과 사방을 에워싼 천사련의 무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층 높이까지 둥실 떠오른 화운은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들어 뻗었다.
그러자 새파란 광채를 발하는 백여 개의 검환이 일시에 날아갔다.
검멸을 펼친 것이다.
화운이 날린 것이 검환이라는 것을 알아본 천사련 무인들의 심장이 덜컥 주저앉은 순간 멀리 오층전각에서 같은 숫자의 붉은 도환이 쏟아져 나왔다.
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
천사련의 하늘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폭음이 일백여 번에 걸쳐 터졌다.
그리고 격돌의 후폭풍인 충격파가 오층전각 쪽으로 휘몰아쳤다.
화운이 날린 검멸은 일반적인 검환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게 여실히 증명된 순간이었다.
쿠콰콰콰쾅!
오층전각 앞에서 굉음이 터졌다.
구룡제나 적성대도황 둘 중의 한 사람이 발휘한 강기의 막이 충격파를 차단한 것이었다.
절대의 무경에 오른 고수들이 어떤 대결을 펼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실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상대를 인정하는 건 흠이 아닐 겁니다!”
화운이 외쳐 말했다.
오층전각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두 분이 날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인정합니다. 두 분께서도 제가 마음만 먹으면 죽기 전에 천사련을 쓸어버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하십시오. 회담이든 담판이든 서로를 인정한 후에 시작해야겠습니다.”
화운은 그들도 자신의 강함을 알 거라고 생각했다.
이쪽의 싸움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을 터, 게다가 방금 선보인 검멸은 그들의 예상을 뒤엎기에 충분했을 테니까.
하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화운은 마지막 수를 꺼냈다.
“사황을 만났습니다. 싸움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고 미친 듯이 달아나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말이다.
일백 발의 검환을 한꺼번에 날리는 고수가 싸울 엄도조차 내지 못하고 달아날 정도면 사황은 얼마나 강하다는 것일까?
귀가 있어 듣고, 뇌가 있어 생각을 할 줄 아는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너라.”
오층전각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그들도 궁금할 것이다.
사황이라는 존재가.
그리고 얼마나 강한 것인지.
화운은 피식 웃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이때까지 마라뇌불은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화운은 그를 향해 말했다.,
“늙은이가 안내하시오.”
***
거대한 대전 끝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구룡성의 주인이라는 걸 과시하듯 아홉 마리의 용이 서로를 휘감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구룡포를 걸치고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었으나 깨끗한 피부에 이목구비마저 반듯한 것이 젊었을 적에 미남 소리 깨나 들었을 게 분명했다.
체형은 크지 않았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가깝다.
하지만 그저 앉아만 있음에도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기도가 그의 앞에 양쪽으로 도열하고 있는 수십 명의 고수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런 절대적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절대자.
구룡제 북궁도!
바로 그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역시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었으나 적룡포로도 다 감추지 못할 정도로 체구가 당당하니 컸다.
길고 거대한 대도를 자신의 옆 바닥에 박아서 세워놓고 있었는데, 그 칼만 봐도 적성대도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노인이 분명한데도 강직한 성향을 드러낸 사내다운 얼굴을 유지 하고 있었고, 구룡제에 전혀 밀리지 않는 태산 같은 기도를 무럭무럭 피워 올리고 있었다.
신광이 번뜩이는 눈으로는 눈앞의 모든 것을 꿰뚫어볼 것만 같았다.
남궁검가주를 필두로 한 사신단은 마라뇌불를 따라 그 두 사람을 향해 대전을 가로질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양쪽에 도열하고 있는 수십 명의 고수들이 살기 가득한 기세를 좌우 양쪽에서 내뿜고 있었지만, 누구도 압박을 받지 않았다.
남궁검가주 바로 뒤에 선우세가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화운에게서 흘러나온 기운이 수십 명이 쏟아내고 있는 살기를 거뜬히 막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두 절대자의 이십여 보 앞에서 걸음을 멈춘 마라뇌불이 공손한 자세로 읍했다.
“정무맹의 사신단입니다.”
마라뇌불의 보고에 구룡제가 손을 한 번 옆으로 살짝 내저었다.
마라뇌불은 공손히 옆으로 물러갔다.
“정도무림연합맹 맹주님을 대신하여 천하사파연합의 두 수장을 뵙니다.”
남궁검가주가 사신단을 대표하여 포권하며 인사했다.
정중한 태도이나 머리를 조아리지는 않았다.
순간 마라뇌불이 사납게 일갈했다.
“무엄하다! 제대로 예의를 갖추라!”
“무림 후배의 신분으로는 예의를 다하여야 맞겠으나 맹주님을 대신한 신분이라 고개를 숙일 수는 없으니 상좌의 두 분께서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궁검가주가 당당히 대꾸하자 마라뇌불이 다시 성을 내려고 했다.
그러자 구룡제가 다시 한 번 손을 내저었다.
마라뇌불은 공손히 허리를 조아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남궁검가주는 구룡제와 적성대도황을 번갈아봤다.
그리고 사신단의 대표로써 용무를 입 밖으로 꺼냈다.
“사전에 보고가 있었을 것입니다. 본맹은 천마와 사황에 대해 귀련과 공동으로 대처하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구룡제와 적성대도황은 남궁검가주를 빤히 응시했다.
무슨 말이든 있어야 다음으로 넘어갈 것인데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눈으로 무심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남궁검가주는 외유내강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평소엔 농담도 잘하고 강호 선배들을 대할 땐 늘 웃는 얼굴로 예의를 다하곤 했다.
그러나 공적인 자리에서는 무쇠처럼 단단한 면모를 보여주곤 했다.
지금도 그렇다.
천하의 구룡제와 적성대도황이 일언반구도 없이 내려다보고만 있음에도 전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당당히 기다렸다.
“당대 남궁가주는 아직 미완성이군.”
한참 만에 구룡제가 말했다.
자신 앞에서 당당한 남궁검가주의 태도가 못마땅했던지 아직 완성되지 못한 무위를 가지고 한 마디 했다.
“완성이 되면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남궁검가주가 말을 받았다.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하여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남궁검가의 창궁무애검법은 완성으로 이르는 길이 굉장히 더딘 편이다.
검학은 물론이고, 단단한 육체와 정순한 공력까지 그야말로 삼위일체를 유지하면서 차근차근 나아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완성에 이르는 길은 느리지만, 완성에 이르고 나면 끝없는 창궁을 마음껏 누빌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검력을 발휘한다.
하여 정파 무림 역사를 보면 검왕이나 검신의 칭호를 받은 남궁검가의 선대가 무척 많다.
그러한 남궁검가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순 없었던지 구룡제도 더 이상은 무학에 대해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협상은 담당자들이 알아서 하도록.”
구룡제가 마라뇌불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마라뇌불은 구룡제를 향해 허리를 조아리고는 다시 앞으로 나와 남궁검가주에게 말했다.
“따라 와라.”
남궁검가주는 별 말없이 구룡제와 적성대도황을 향해 읍하고는 마라뇌불을 따라갔다.
선우세가주와 신풍대원들 역시 줄지어 따라갔다.
화운만 홀로 남아 구룡제와 적성대도황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적성대도황은 처음부터 그때까지 시종일관 화운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남궁검가주를 비롯한 사신단이 실무합의를 위해 대전에서 물러가자 화운을 향해 오랫동안 참았던 입을 뗐다.
“말해봐라. 너도 늙은 육신을 던져버리고 젊은 육체로 갈아입은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