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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으로 무림지존-116화 (116/207)

#116. 졸렬한 수작

화운을 발견한 낭왕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구환도를 휘두르던 오른손이 잘려 버렸기에 더 이상 낭왕일 수가 없다는 절망이 그를 냉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개잡놈의 새끼! 죽어라!”

악을 쓰며 왼손에 있는 대로 공력을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낭왕을 접견자로 보낸 이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그의 의도대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변수가 있었다.

콰앙!

낭왕은 화운에게 닿지도 못하고 날아갔다.

“이 영감탱이가 어디서 족발을 뻗고 지랄이야! 아무리 분해도 사신단한테 그러면 안 된다는 거 몰라? 정 분하면 사신단이 돌아갈 때 공격하든가 해!”

북궁설이다.

북궁설이 철봉황의 위엄을 보이며 낭왕을 일격에 날려 버렸다.

낭왕의 수하들은 서슬 퍼런 북궁설의 위엄에 찍 소리도 못하고 저만큼 나가떨어진 낭왕만 추슬렀다.

“이거 놔라!”

낭왕이 수하들을 뿌리치며 일어나더니 살기등등하여 다가왔다.

“이 찢어죽일 년이!”

낭왕은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어차피 죽어도 그만, 이판사판이었다.

그는 수하의 칼을 빼앗아들고는 북궁설을 향해 와락 달려들었다.

부아아악!

비록 왼손으로 펼치는 것이지만, 낭왕이라 불리던 자의 무위가 어디 간 것이 아니어서 붉은 강기가 사납게 맺혔다.

“닥치고 꺼져!”

북궁설이 마주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화아아악!

검에서 새하얀 열기가 넘실거렸다.

백열의 강기다.

정무맹의 사신단과 낭왕의 수하들 그리고 멀찍이서 구경하던 천사련의 무인들과 거리의 사람들까지.

모두가 보았다.

백열의 강기를 일으킨 북궁설의 검이 붉은 강기로 넘실거리는 낭왕의 칼을 밀고 들어가 가슴팍에 작렬하는 광경을.

“끄악!”

낭왕이 단말마를 남기고 다시 날아갔다.

그리고 일어나지 못했다.

“인질극을 벌여놓고도 팔이 잘린 주제에 어디서 지랄을 해! 정파 앞에서 추하게 굴지 마! 짜증나니까!”

북궁설은 확실히 다혈질적인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날뛸 정도는 아니었다.

북궁설은 천사련 내의 반발을 내다보고 낭왕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웃어 주었다. 그러니 누구도 낭왕을 감싸고돌지 못할 것이다.

천사련은 인질극을 벌이고도 팔이 잘린 자를 감싸줄 정도로 물러터진 곳이 아니니까.

낭왕의 수하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북궁설이 아니라 주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뭣들 하는 거야! 사신단 안 모실 거야!”

북궁설이 호통을 쳤다.

그제야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접견을 나온 본분을 다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누군가가 기획하고 낭왕이 이용당한 사신단 접견은 철봉황의 위엄만 드높이는 꼴로 끝이 났다.

천사련 백운각.

사신단은 천사련 내의 귀빈각으로 안내되었다.

사신단이 더 이상의 일 없이 백운각에 들어가자 북궁설은 인사를 한 후 보고를 위해 떠났다.

“낭왕의 팔을 잘랐더냐?”

남궁검가주가 물었다.

화운은 인질들을 구했다고만 했지 그 과정까지 상세하게 보고하지는 않았었다.

금강부동에 푹 빠져 있던 수뇌부들도 묻지 않았고.

“예.”

“다른 방법은 없었고?”

“본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화운이 파악한 바로는 육지의 수장들 중 낭왕이 가장 성격이 더러웠다.

그를 압도적으로 제압해 버린다면 다른 이들은 함부로 날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화운의 판단이 결과적으로는 옳았다.

다만 그 여파가 엉뚱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누군가 낭왕을 일부러 내보낸 듯싶어서 하는 말이다.”

“제 생각에도 구룡제나 적성대도황 둘 중 한 사람이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담판이 쉽지 않겠어.”

“숙부님.”

“응?”

“천종천마교의 등장은 우리한테만 떨어진 불이 아닙니다.”

“······!”

“우리가 도움을 받고자 온 것이 아니니 저자세를 보일 필요도 없고, 양보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네 말이 맞다. 같은 입장이지. 하지만 저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사파는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우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낭왕을 내보낸 자의 정확한 저의는 알 수가 없으나 호의적이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숙부님께서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담판이 결렬 되어도 상관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천마가 모습을 보인 이상 천사련도 천종천마교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그건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천사련과 본맹이 근본적으로 다른 게 있다.”

“그게 무엇인지요?”

“천사련은, 특히 구룡성과 적성대도문은 귀주와 광동이라 천종천마교와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본맹은 사천에 아미와 청성이, 섬서에 화산과 종남이, 하남에 소림이, 호북에 무당이 자리하고 있다. 백 년 전 천마대겁 당시에 천마는 섬서를 가장 먼저 들린 후 하남을 거쳐 호북으로 내려왔다. 같은 불덩이라고는 하지만 먼저 맞는 건 본맹이라는 뜻이다.”

“아, 그렇군요.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조금은 천하 정세를 들여다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먼 모양입니다.”

화운이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했다.

남궁검가주는 가볍게 웃었다.

“네 나이 대에는 다 알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머리가 비상한 천재들은 앉아서 천하를 꿰뚫어볼 게다만, 인간적인 멋이 없질 않으냐. 이건 우리끼리만 하는 말이다만, 덕이 저 친구가 괜찮아 보이는 것도 다 조금 모자라기 때문이란다.”

남궁검가주가 말한 덕이는 선우세가주 선우덕을 일컫는다.

“친구의 모자람을 인간적인 멋으로 치장해 줘서 고맙네.”

저쪽 탁자에서 남궁현, 선우유성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선우세가주가 불쑥 핀잔을 던졌다.

“귀는 밝은 모양이다.”

남궁검가주가 씩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동안 맹주부에서 많이 보았겠지만, 어른들이라고 특별한 건 없다. 생각이 짧거나 이기적이거나 여튼 뭐 모자란 점투성이였을 게다. 그렇다고 실망하고 무시해선 안 된다. 모자라기 때문에 함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친구가 되고 동료가 되어서 도와주고 채워주고 그러는 것이지.”

“예. 함부로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만, 모든 걸 혼자 하려고 하지 말았으면 한다. 부서지고 망가지더라도 함께해야 서로 의지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있는 법이다.”

“예.”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을까만, 명색이 숙부라고 이 말을 해주고 싶어서 말 많은 노인네 흉내 좀 내봤다.”

금강부동에 푹 빠져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와중에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숙부로써, 정파 무인의 선배로써 그리고 앞서 살고 있는 어른으로써의 관심과 걱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늘 새기고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려무나.”

남궁검가주는 화운이 자신의 염려를 알아들은 듯하자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게 남궁검가주와의 대화를 마친 화운은 실내를 둘러봤다.

백리연 만이 혼자 창가에 서 있었다.

화운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밖에 볼 만 한 게 있습니까?”

“아뇨, 그냥 생각 좀 하느라······.”

“아, 제가 방해를 했군요.”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막 생각을 끝내던 참이에요.”

백리연이 돌아보며 웃었다.

그런데 어쩐지 어색하게 보였다.

화운은 모른 척 마주 웃어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혼자 있는 게 왠지 쓸쓸해 보여 다가왔으나 막상 옆에 서고 보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침묵조차 어색해질까 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철봉황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대주님.”

“예?”

“싫어요. 그분 이야기는 지금 하고 싶지 않습니다.”

백리연은 냉담하게 말하고는 대청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뭔가를 잘못했구나!”

하지만 그 뭔가가 뭔지 몰라서 화운은 눈만 끔벅거렸다.

***

미시정(오후2시-3시)이 지나 신시초(오후3시-4시)가 되었다.

사신단은 여전히 백운각에 머물렀다.

거기까지는 하등 이상할 게 없다.

문제는 회담 일정을 조율할 담당자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아울러 점심 식사조차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고의로 그런 것이라면 참으로 저열하고 유치한 수작이다.

반 시진 전부터 백운각 입구를 지키고 있는 천사련의 무인들에게 담당자를 불러달라고 두 번이나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기다리라는 것뿐이었다.

사신단은 도리가 없어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저녁이 되어도 그리고 다음 날 아침식사 시간을 훌쩍 넘겨도 식사는커녕 찾아온 이 하나 없었다.

사신단은 북궁설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오지 않았다.

중간에 누군가가 차단하고 묵살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여 사신단은 한자리에 모여 대책을 강구했다.

그러나 막상 머리를 맞대보아도 딱히 방법이 없어 다들 고심에 빠지거나 천사련의 졸렬함을 비웃기만 했다.

‘나 때문일 거야!’

화운은 사신단을 궁지로 몰려는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협상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경우도 있다지만, 지금의 처사는 도가 지나쳤기 때문이다.

‘내가 자신의 자식을 두들겨 팬 것 때문에 화가 난 걸까?’

구룡제 북궁도.

천사련을 이끄는 두 절대자 중의 하나이기 전에 북궁무결의 아비이기도 하니까 화가 났을 수도 있다.

수하들의 눈이 있어서 대놓고 공격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 유치하고 졸렬한 수작을 벌인 걸까?

화운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너무 화가 나요.”

백리연이 말했다.

화가 난 건 다들 마찬가지라 특별히 동감을 표하지 않았다.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어요. 그냥 돌아가요.”

백리연이 극단적인 선택을 이야기 했다.

남궁검가주는 그럴 수 없었다.

“자네 마음은 알겠네만.”

“그렇게 하지요.”

화운이 끼어들었다.

남궁검가주가 ‘너까지 왜 이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화운은 백리연을 힐끔 보며 말했다.

“백리 소저의 말이 맞습니다.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한두 끼라면 바쁘게 회의를 하느라 까먹었을 수도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꼬박 하루가 지났습니다. 이건 고의가 분명합니다. 뭔가 수를 쓰지 않는다면 이대로 쫄쫄 굶어가며 한도 끝도 없이 기다려야 할 겁니다.”

화운의 말이 맞다.

이대로는 한도 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저들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이쪽을 맘껏 농락하고 있었다.

“정녕 이대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을까?”

남궁검가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굳어진 얼굴만큼이나 고민이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숙부님.”

화운이 넌지시 불렀다.

“······?”

남궁검가주가 쳐다봤다.

방법이 있기를 바란다는 표정을 내보이고 있었다. 어른으로써 사신단의 책임자로써 체면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체면보다는 회담이 더 중요했다.

“제가 정사대전을 겪으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뭐냐?”

“사파인들은 강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하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강하게 대한단 말이냐?”

“우리가 받은 만큼 돌려주고 본맹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돌려줘?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천마의 등장, 천사련의 일반 무인들도 알고 있을까요?”

“어디서 새어 나가지 않은 이상 모를 거다. 큰 세력일수록 수하들의 혼란과 동요에 민감한 법이니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걸 터트리는 겁니다.”

“······!”

일다경 후.

백운각 창문을 통해 우렁찬 고함이 온 천사련을 뒤흔들었다.

“정파무림연합맹에서 사신으로 온 남궁검가의 남궁모요!”

사신단의 책임자인 남궁검가주가 내력을 가득 실어 천둥 같이 외치기 시작했다.

“대략 열흘 전, 천종천마교에 천마가 모습을 드러내 반란을 일으켰던 멸제를 일격에 쳐 죽인 일이 있었소. 본맹은 그때 모습을 보인 천마가 백 년 전 천마대겁의 그 천마라고 보고 있소. 뿐만 아니라 한 달 전쯤엔 백 년 전 사황혈천의 사황도 등장하였소. 그들이 생각하기엔 본맹은 물론이고 천사련 역시 짓밟아 없애버려야 할 하찮고 비루한 존재들일 것이오!”

거기서 잠깐 호흡을 가다듬은 남궁검가주는 마저 외쳤다.

“하여 본맹은 귀련과 공동의 대책을 강구하고자 본가주를 대표로 뽑아 사신단을 보냈거늘, 귀맹에서는 담당자를 보내주기는커녕 하루를 꼬박 굶기기나 하고 있으니, 그 졸렬함에 뭐라 할 말이 없어 지금 즉시 돌아가고자 하니 문이나 열어주시오!”

천마대겁!

그리고 천마의 등장!

사황혈천!

그리고 사황의 등장!

백운각에서 터져나간 외침이 천사련을 송두리째 뒤흔들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바깥의 반응에 이목을 집중한 사신단은 당장 백운각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천사련의 무인들이 당황하여 나누는 대화만으로도 상당한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는 걸 직감했다.

기감을 백운각의 담장 바깥으로 널리 퍼트린 화운은 보다 정확한 상황을 파악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충격이 큰 모양입니다.”

“그럴 게다. 사황과 천마는 그런 존재들이니까.”

“정말 잘한 짓인지 모르겠네.”

남궁검가주가 화운의 말에 응하자 선우세가주가 걱정을 토로했다.

걱정이긴 남궁검가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쫄쫄 굶어가면서 언제까지고 기다릴 순 없었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까지 이용하는 행태에 화가 나기도 했고.

“하는 수 없었잖은가. 이왕 이렇게 된 거 강하게 나가보세. 잘못 돼봐야 회담이 틀어지기밖에 더 하겠나.”

남궁검가주는 마음을 굳혔다.

선우세가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주었다.

그렇게 일다경이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드디어 오는군요.”

화운이 말했다.

사신단 모두가 바깥으로 이목을 집중했다.

그러자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분노로 싸늘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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