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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으로 무림지존-110화 (110/207)

#110.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철봉황 북궁설이 사신이 되어 정무맹을 찾아온 건 인질로 사로잡은 무룡대를 두고 정무맹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천사련의 련주인 구룡제는 북궁설을 보내면서 정무맹과 맹주 조극산이 어떤 선택을 하던지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르겠다고 했다.

무룡대를 희생시킬 수 없는 정무맹이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북궁설 또한 같은 생각이어서 정무맹이 항복할 때 무엇을 요구하고 받아낼지 그것만 생각하고 왔었다.

더불어 정무맹의 수뇌부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는지, 상황에 따라 그거나 좀 알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신풍대주가 구하러 달려갔다는 거 하나만으로 맹주가 돌변했다.

신풍대주라면 반드시 구해올 거라는 절대적 믿음까지 내비치면서.

북궁설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여 적충을 내세워 정무맹의 허락을 얻은 다음 신풍대를 방문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사람 무안하게.”

나이가 오 년 정도 연상인 북궁설이 편하게 말했다.

백리연과 선우유성 그리고 남궁현은 천사련 철봉황의 갑작스런 방문에 제법 놀란 모습이었다.

“다들 그러고 있지만 말고 와서 인사들 하시게.”

군사 영호풍이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해 끼어들었다.

그제야 백리연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백리세가의 백리연이에요.”

“역시 백봉이었군. 여자인 내가 봐도 홀딱 반할 미모야. 대단해!”

북궁설이 찬탄했다.

백리연은 적의 칭찬이라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 대꾸하지 않았다.

‘아직 어리군.’

북궁설은 굳어있는 백리연의 모습만으로도 무인으로 완성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남궁검가의 남궁현입니다.”

남궁현이 절도 있는 모습으로 인사했다.

“남궁검가의 창천은 변하지 않는다던데 소가주를 보니 알겠어. 기본이 아주 좋아 보여.”

“감사합니다.”

남궁현이 헤벌쭉 웃으며 꾸뻑 인사하자 북궁설은 그저 웃어주었다.

‘이건 너무 가벼워.’

말과는 달리 속으로는 박한 평가를 내린 북궁설은 마지막으로 선우유성을 바라봤다.

“선우유성입니다.”

살이 빠진 선우유성의 외모는 인상적이다.

잘생긴 데다 무척 사내다워 보인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도 제법이다.

그런데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선우세가의 앞날이 무서워질 것 같네. 구룡성도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북궁설의 칭찬에 선우유성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모습에 북궁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자, 인사는 이쯤이면 됐고. 철봉황께서 보고 싶다고 해서 모셨습니다만, 보다시피 이곳엔 앉을 만한 곳도 없습니다.”

영호풍이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는 뜻을 내비쳤다.

북궁설도 그러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한심한 모습들을 보니 강직한 무인의 성품인 그녀로서는 보는 것조차 마음에 안 들었다.

만일 자신의 아랫사람들이었다면 정신 바짝 차리도록 흠씬 두들겨 패거나 쫓아버렸을 것이다.

신풍대주에 대해 알아보려고 왔다는 사실조차 잠깐이나마 잊어버릴 정도로 짜증이 나려고 했다.

그래서 적충에게 맡기고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본련은 애먹이는 신풍대에 어떤 분들이 있는지 궁금해서 와봤어요. 돌아가는 대로 신풍대에 대해 더 바짝 경계하라고 해야겠어요.”

북궁설은 의미 없는 그저 입에 발린 말을 했다.

그리고 적충을 남기고 먼저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돌연 백리연이 치고 들어오듯 말했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잘못 본 건가요?”

“······?”

북궁설이 의아하여 바라봤다.

“철봉황께선 우릴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북궁설은 정곡을 찔렸다.

백리연이 잠깐의 공기를 감지할 줄은 몰랐다.

‘제법 날카로운 건가? 아니면 눈치가 비상한 건가?’

북궁설은 백리연을 살피듯 빤히 바라봤다.

백리연도 지지 않겠다는 듯 정면으로 직시했다.

두 여인이 마치 기세 싸움을 벌이는 것 같아 공기가 팽팽해졌다

‘좋아, 얼마나 야무진지 볼까?’

북궁설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비웃음을 지은 것이다.

“한심해 하면 안 돼?”

노골적인 말에 백리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주먹을 꽉 쥘 정도로 분했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지?”

더욱 몰아붙이는 북궁설.

보다 못한 영호풍이 끼어들었다.

“아무리 사신이라 하나 이건 경우가 아닙니다. 그만 하시지요.”

“맞아요. 경우가 아니지요. 아무리 한심해도 그렇다고 하는 건 결례지요. 그래서 그냥 가려고 했잖아요.”

“알겠습니다. 그만 하시고 가시지요.”

영호풍을 따라 북궁설이 신풍대 숙소에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대주님이 무서워서 뭐 하나라도 알아볼까 하고 와놓고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거들먹거리는 건 진짜 경우가 아니랍니다.”

북궁설이 홱 돌아봤다.

성난 기색이 역력했다.

“왜요? 자존심이 상합니까?”

백리연의 말이 더욱 날카롭게 찔렀다.

“백리 대원 그만 하는 게 좋겠네. 철봉황께서도 그만 하시지요.”

영호풍이 중간에서 막아섰다.

그러자 북궁설이 영호풍을 밀치고 성큼 다가갔다.

순간 남궁현과 선우유성이 검자루를 쥐며 무섭게 돌변했다.

북궁설과 백리연이 부딪친 순간 검을 뽑아 휘두르며 폭풍같이 몰아칠 기세였다.

지금까지와는 백팔십도 다르게 철봉황이라는 존재 따위는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더 놀라운 건 백리연과 북궁설이 대치하게 되자 남궁현이 북궁설을 향해 자세를 잡았고, 선우유성은 북궁설 뒤쪽의 적충을 향해 자세를 잡았다는 것이다.

짧은 순간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잘 맞물린 아귀처럼 척척 상대를 맡은 것이다. 오랫동안 전장에서 동고동락해 온 이들에게서나 볼만 한 호흡이었다.

놀라운 건 그 뿐이 아니다.

선우유성의 기세가 자신을 향한 것에 분노한 적충이 살기를 더욱 강렬하게 쏟아냈는데, 그에 맞선 선우유성의 기도가 더욱 강렬하게 변해가더니 점차 압도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뭐야! 저 녀석, 적충보다 더 강하잖아!’

북궁설은 걸음을 멈출 정도로 깜짝 놀랐다.

처음엔 길들여진 맹수처럼 굴더니, 지금은 거친 그야말로 야생의 성난 맹수들 같았다.

그것도 적충을 능가하는 이빨을 드러냈다.

어떤 면으로는 자신의 동생인 북궁무결에 못지않은 날카로운 이빨이었다.

북궁설은 그런 남궁현과 선우유성에게 놀란 가슴을 애써 억눌렀다.

‘신풍대! 이게 진면목이라는 건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북궁설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 백리연을 응시했다.

“백봉.”

“말 하세요.”

“내가 틀렸다. 사과한다.”

“······?”

“······!”

백리연은 물론이고 남궁현과 선우유성까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적충의 기도가 씻은 듯이 거둬졌다.

애초 싸울 의도가 없었다는 걸 알아챈 남궁현과 선우유성은 검자루를 놓으며 머쓱해했다.

북궁설은 그 모습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니들은 싸울 때와 평소의 모습이 너무 다르구나.”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백리연이 말했다.

“맞아. 잘못된 건 아니지. 나와는 너무나 다른 것일 뿐이지.”

북궁설이 진심으로 인정한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더니 모두를 당황하게 만드는 말을 불쑥 꺼내놓았다.

“좋아. 니 말대로 신풍대주에 대해 궁금해서 와 봤다.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냐. 어떤 사람이기에 그렇게 대단할 수가 있는 거지?”

***

정무맹 맹주부.

맹주 조극산은 비천각의 보고를 받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신풍대주가 삼일 후 쯤 돌아올 거라는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전령이 오는데 걸린 시간을 감안하면 내일이나 모레 쯤 오겠습니다.”

“아이들은 어떻답니까?”

화산파 장로 이심환이 물었다.

“다친 아이들이 몇몇 있지만, 심각하게 다치진 않았다는군요.”

“다행이외다.”

“제가 뭐랬습니까. 신풍대주가 갔으니 맘 편하게 기다리자고 했지요?”

“믿긴 했지만, 그렇다고 맘을 놓을 수 있겠소이까. 여튼 무사하다니 참으로 다행이오. 그리고 맹주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인 모양이오.”

“예. 사실일 겁니다. 그 녀석은 아닌 체 하고 있지만, 금강부동을 나름대로 익히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화운이 인질들을 무사히 구해올 수 있을 거라고 절대적인 믿음을 보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금강부동.

공간을 여의하는 금강부동을 가볍지 않은 수준으로 익히고 있을 것이 분명해보였기에 상대가 육지에 천하십이흉이라 하더라도 무사히 구해올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허허! 이걸 다행이라 여겨야할지.”

이심환이 선뜻 판단이 서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녀석이라 다행인 겁니다. 자기 딴에는 우릴 이용해서 금강부동을 폭 넓게 파악하려 하고 또 그렇게 강해진 힘으로 제 몫을 챙기겠다고 동분서주하는 모양입니다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게 다 천하를 위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과가 그러니 혼란스럽군요.”

“쉽게 생각하십시오. 천하를 위하는 것도 결국은 자신을 위하는 것의 연장일 뿐인 겁니다.”

“······?”

“어찌 천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부처가 되라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거늘, 이 대협께선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 대협이라면 천하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겠지요. 허나 천하를 위해 화산파를 희생하라고 하면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마 어려우실 겁니다.”

“그렇군요. 이제야 맹주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감사하외다.”

“감사는 신풍대주에게 해야겠습니다. 신풍대주 덕분에 여기에 계신 모두가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도 그렇군요. 그래도 그 녀석에게 그런 고마움은 표현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아마도 그걸 대가로 뭔가를 얻어내려고 할 녀석이니까요.”

“그렇다면 전 앞으로도 냉담하게 대해야겠군요.”

“예. 그렇게 하십시오. 재밌잖습니까. 그 녀석 우리들 머리위에 있는 줄 알고 있지만, 어림없습니다. 젊은 여우가 온 산을 뛰어다닐 때 늙은 너구리는 정상에 앉아서 지켜보는 법이니까요.”

“참으로 재밌는 비유로군요.”

“재밌지요. 참으로 유쾌한 일이지요. 후학들이 온 산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

“허허허! 그럼 우린 오랫동안 이곳에서 지켜봐야겠소이다.”

“그럴까요? 껄껄껄!”

기분 좋게 웃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모두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

정무맹에서 하루 반 떨어진 곳.

화운은 땅바닥에 털썩 앉아 육포 조각을 먹고 있었다.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 육포조각을 먹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입에 집어넣고 씹고 있었다.

‘융합하는 건 천마가 앞서고 있어.’

상승의 깨달음을 요하는 일이니 누가 먼저 시작하고가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이제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상태고 천마는 얼마나 오랫동안 융합에 매달리고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를 염려하기 보단 우선 내 것에 집중하자.’

연혼팔검과 금강부동의 융합.

화운은 거기에 생각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어쩌면 천마와 화운의 가장 큰 차이는 그 의미를 알고 있고,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일 수도 있다.

인간의 무공과 신들의 권능.

두 사람이 융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공간을 알지 못하면 공간을 벨 수 없어. 결을 알아야 바람을 벨 수 있듯이 모든 것을 베어버릴 검력을 가지려면 그 모든 것을 알아야 해.’

금강부동이 말하는 공간을 명확히 이해하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검마가 음산노괴를 벨 때 보여준 그 영묘한 힘과 자신의 하단전과 중단전에 가득한 공력을 일시에 뽑아 검을 휘두를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모든 것을 베어버릴 미증유의 검력이지 않을까?

화운의 생각이 그렇게 깊어지고 있을 때였다.

“험험!”

헛기침 소리가 화운의 상념을 방해했다.

화운이 쳐다보니 백리명이 다가와 있었다.

“내가 방해를 한 건가?”

“아뇨, 아닙니다.”

화운은 무슨 일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리명은 옆으로 비켜서서는 화운이 무룡대 대원들을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다들 의기소침하고 있어. 우리가 이토록 무기력했나 싶을 거야.”

백리명의 말대로였다.

다들 실의에 빠져 대화도 없었다.

그냥 패배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인데 사로잡혀 인질이 되었으니 그 수치심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자네가 좀 도와주었으면 하네.”

“뭘 말입니까?”

“자네가 함께 있는 한 저들은 맹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저대로 일 거야. 어쩌면 맹에 복귀하고서도 계속 낙담할 수도 있고.”

“저더러 이곳에서 사라지라는 겁니까?”

“맹으로 먼저 복귀하게. 저들은 어떻게든 내가 일으켜서 데려가겠네.”

“저야 뭐 상관없습니다만, 하실 수 있겠습니까? 괜한 일을 하시는 건 아닐지.”

“오대세가를 경원시하는 사람들이네만, 천하정파는 저들이 있기에 안전하게 지탱이 된다네. 어떻게든 추스르도록 도와주어야지.”

언젠가 들었던 말이다.

화운은 기억을 더듬었다.

- 쟤들이 잘난 체 하는 게 꼴 보기 싫긴 하지만 쟤들만큼 정파다운 무인들도 드뭅니다.

- 이러니저러니 해도 무룡대가 정파의 근간이니까 최대한 지켜줘야 할 것 같아.

-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죽는 꼴도 보고 싶지는 않아요.

남궁현과 선우유성 그리고 백리연이 했던 말이다.

방금 백리명이 한 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대세가가 칠대문파를 바라보는 생각이 그와 같다는 뜻일 게다.

오만해서 싫지만, 그들이 정파의 근간이고 기둥이라는 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먼저 복귀할 테니 조심해서 오십시오.”

“고맙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럼 맹에서 뵙겠습니다.”

“그러세.”

화운은 웃어준 후 무룡대원들이 보도록 일부러 땅을 박차고 솟구쳐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무룡대원들이 어리둥절하여 백리명을 바라봤다.

“이런 젠장! 무공 좀 가르쳐 달랬더니 급한 볼일이 있다네. 그건 그렇고 다들 그렇게 맥 빠진 모습만 할 거야? 그렇게 낙심하면 뭐가 달라져?”

백리명이 큰 소리 치며 무룡대원들을 향해 다가갔다.

아이가 새로운 일을 배울 땐 아비에게 의지하지만, 아픔을 겪게 되면 어미에게 의지하는 법이다.

백리명은 어미와 같은 마음으로 무룡대를 보듬어 일으키고자 했다.

그것이 늘 웃고 다니는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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