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천마가 하면 나도 할 수 있어
“거기 객잔에 있는 십이흉들! 먼저 좀 봅시다!”
화운이 내뱉은 말은 시비고 도발이었다.
어떻게 응할지는 천하십이흉들의 선택이지 낭왕이 감히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었다.
쾅!
객잔 문짝이 날아갔다.
그리고 철탑거왕이 쿵쿵거리며 걸어 나왔다.
바로 뒤로 혈선이 허공을 미끄러지듯 나타났고, 화운이 처음 보는 네 명의 노인과 한 명의 미부인이 차례로 모습을 보였다.
칼집까지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으로 된 칼을 가진 백발의 노인이 바로 금도신 여홍락이었고, 음산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검은수염의 노인은 귀신도 부린다고 알려진 귀왕자였다.
시뻘건 혈륜을 든 노인이 혈륜탈이고, 두 눈이 시푸른 기운을 넘실거리고 있는 노인이 바로 청살귀였다.
흰 얼굴에 붉은 입술, 촉촉하게 젖은 눈길엔 묘하게 일렁이는 기운.
중년의 미부인이 바로 독심사갈 남가설이다.
육십을 훌쩍 뛰어 넘은 나이임에도 삼십 대의 젊음과 요염함을 유지하기 위해 열흘에 한 번씩은 사내의 정기를 빨아먹고 산다는 악녀.
그녀의 소녀환희공은 부처의 가운데 토막도 일으켜 세울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천하십이흉!
일인단신으로 천하를 유린하던 전세대 사파의 거흉들.
열두 명의 거흉들 중 다섯이 죽고 이제 일곱이 남았다. 그리고 그 일곱이 지금 한 명의 빠짐없이 화운의 앞에 나타났다.
“네놈이 정말 태양존자를 죽인 것이냐?”
금도신 여홍락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며 물었다.
금도가 뽑히면 반드시 피바다가 펼쳐진다고 알려져 있다.
쿵!
화운은 대답하지 않고 진각을 밟았다.
그러자 땅이 울리는 굉음과 함께 좀 전에 화운이 내려서면서 파헤쳐졌던 땅에서 돌멩이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화운의 손가락이 세 개를 연달아 튕겼다.
쾌액! 쾌액! 쾌액!
강기를 휘감은 돌멩이들이 빛줄기처럼 쏘아갔다.
깜짝 놀란 금도신이 금도를 뽑아 휘둘러 막았다.
쾅! 쾅! 쾅!
황금칼의 흉명이 거짓은 아니라는 걸 증명 하듯 금도신 여홍락이 전부 막아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한 발짝 물러나고 말았다.
그 모습에 나머지 거흉들이 눈을 치뜨며 화운을 경계했다.
“내가 당신들 앞에 있는데 태양존자를 죽였는지가 중요하오?”
“맞아! 태양존자 따위야 죽던가 말던가. 내 눈앞에 이토록 멋진 사내가 있는데 무얼 망설이겠어?”
음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사내의 정욕을 폭발시키기에 넘치도록 충분해 보이는 독심사갈 남가설이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도록 갈라진 치마를 펄럭거리며 다가왔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허벅지 안쪽의 사타구니가 보일 듯 말 듯 아찔했다.
게다가 뜨거운 여름날이라 남가설의 복장은 지나치게 가벼워 젖가슴의 태반이 드러나 보였다.
“멋진 사내 옆에는 나처럼 매력적인 여자가 있어야 하는 법이에요. 오호호홋!”
웃으며 다가오는 남가설.
어떻게 한 것인지 걸음마다 보라는 듯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날카롭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고막을 울려 정신을 어지럽게 하고, 유혹적인 몸짓이 마음을 송두리째 잡아 흔들어놓는다.
결국 남가설의 눈을 직시한 사내는 소녀환희공의 섭혼술에 혼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특히 혈기왕성한 젊은 사내일수록 헤어나기 힘들다.
화운의 눈이 소녀환희공을 극성으로 발휘하고 있는 남가설의 눈과 마주쳤다.
‘됐어, 넌 이제 내 거야! 네놈의 젊음을 모조리 뽑아먹어 주마! 오호호호호!’
남가설의 입가에 요염한 미소가 그려진 순간.
화운의 왼손이 천천히 움직여 남가설을 향했다.
“조심해라!”
혈선이 소리쳤다.
화운의 중단전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의 유동을 가장 먼저 느낀 것이다.
남가설이 흠칫 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뒤쪽에 있던 혈륜탈이 시뻘건 혈륜을 날렸고, 그와 동시에 금도신 여홍락과 귀왕자 그리고 청살귀가 섬전처럼 화운을 향해 쇄도했다.
촤아아악!
대기를 가른 혈륜이 핏빛의 살기를 몰고 남가설을 스쳐지나간 순간이었다.
쏘아져가던 혈륜과 남가설이 하나의 공간으로 합쳐지더니, 느닷없이 남가설의 몸이 둘로 갈라졌다.
남가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육신이 둘로 분리되어 쓰러졌다.
털썩!
“이 악독한 놈!”
금도신과 귀왕자가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와락 달려들었다.
여홍락의 번쩍번쩍 황금빛으로 빛나는 칼이 광풍 같은 기세를 일으키며 거미줄 같이 촘촘한 도초를 쏟아냈고, 귀왕자는 검은 연기처럼 보이는 음산한 기운으로 전신을 뒤덮은 채 쏘아져왔다.
극성으로 발휘된 참뢰황금도법과 흑살귀염공이었다.
뿐만 아니라 청살귀 역시 단창을 사납게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화운은 그들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중단전에서 쏟아져 나온 기운이 두 손을 통해 눈앞의 공간을 휘감았다.
공간을 이루는 대기와 순식간에 합일하여 화운의 의지에 따라 두 개의 공간이 겹쳐졌다.
“헉?”
“······!”
금도신 여홍락과 귀왕자가 경악했다.
화운을 코앞에 둔 순간 느닷없이 둘이 한 공간으로 겹쳐졌기 때문이다.
쿠다다당! 콰콰쾅!
참뢰황금도법과 흑살귀염공이 한 공간에서 부딪쳤다.
물러나고 멈추고 할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끄으으으!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이냐!”
살아남은 건 금도신 여홍락이다.
귀왕자의 육신은 갈가리 쪼개지고 갈라졌다.
여홍락은 핏덩이를 게워내고 있었지만, 사지육신은 멀쩡했다.
하지만 곧 그의 육신 역시 누더기가 되었다.
슉슉슉슉!
화운을 향해 마구 찌르고 후려치던 청살귀의 단창이 여홍락의 육신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청살귀가 기겁하여 멈추었을 땐 여홍락의 육신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된 후였다.
“막내야, 도망······.”
금도신 여홍락은 생애 마지막 말을 맺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나, 난······!”
청살귀가 당황하여 화운을 쳐다본 순간.
퍽!
청살귀의 육신이 어육처럼 짓이겨지며 혈선과 철탑거왕 그리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혈륜탈에게로 날아갔다.
남가설, 금도신 여홍락 그리고 귀왕자는 공간을 합치는 수법에 당했고, 청살귀가 당한 수법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으음······.”
혈선의 입에서 신음 같은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철탑거왕은 성난 맹수처럼 화운만 노려봤다.
혈륜탈은 이미 전의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화운은 혈선과 철탑거왕을 응시하며 말했다.
“마저 끝냅시다.”
“놈! 죽여 버리겠다!”
쿵! 쿵! 쿵! 쿵!
분노한 철탑거왕이 돌진했다.
그리고 곧 땅을 박차고 솟구쳤다가 지상으로 내리 꽂혔다.
쿠-웅!
대로의 땅거죽을 파문처럼 터트리며 내려선 철탑거왕이 무지막지한 권격을 휘둘렀다.
부왁!
대기가 찢겨나가며 섬뜩한 파공음을 터트렸다.
순간 화운의 의지를 따라 여러 개의 공간이 압축하듯 합쳐졌다.
철탑거왕이 휘두르는 권격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졌다.
흡사 보통 사람이 턱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처럼.
“어림없다!”
철탑거왕이 고함을 지른 순간 팔뚝의 힘줄이 터질 듯 불거지며 권격의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
그 모습에 화운이 눈을 크게 뜨며 오른 손을 뻗었다.
공간이 쪼개진다.
두 부가 갈라지듯 공간이 쪼개지며 철탑거왕의 육신을 둘로 가르려고 했다.
“끄윽!”
철탑거왕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이깟 환술에 당할 것 같으냐!”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외친 순간 철탑거왕의 육신이 공간이 쪼개지려는 것을 버텨내고 막아버렸다.
거령철갑신!
금강불괴를 지향하는 외가기공술중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절학이다.
이때만큼은 화운 역시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통하지 않는다! 금강부동이······! 내 수준이 아무리 어설프기로서니!’
이 순간 화운은 크게 놀라고 있었다.
“죽어라!”
철탑거왕이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부왁!
철퇴 같은 주먹이 화운의 몸을 부숴버리기 직전.
콰앙!
굉음과 함께 화운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화운이 왼손에 강기막을 발현하여 막은 것이다.
철탑거왕의 거구가 땅을 박차고 와락 돌진했다.
거령철갑신을 익힌 철탑거왕이 자신하는 궁극의 필살기.
육산포!
이른바 몸통박치기다.
콰앙!
화운의 좌수가 다시 한번 막았다.
그런데 이번엔 꿈쩍도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
철탑거왕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 순간.
화운이 그 자리에서 솟구치더니 벼락같은 발차기로 철탑거왕의 옆머리를 돌려찼다.
쾅!
거인 같은 철탑거왕의 육신이 그 자리에서 땅바닥으로 홱 고꾸라졌다.
머리통을 땅바닥에 강하게 처박은 철탑거왕은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절대적이 아니야······.”
혼자 중얼거리는 화운.
만족스런 얼굴이 아니었다.
이때 혈선이 요사스런 빛을 뿌리는 검을 휘두르며 쇄도했다.
하지만 곧 화운에게서 시퍼런 섬광이 폭발적으로 발휘되었다.
쾅!
혈선이 쪼개진 장작처럼 날아가 객잔 벽을 부수고 안으로 처박혔다.
화운의 오른손에는 검이 들려있었다.
‘두 개의 공간을 합치고, 공간을 분리하고······. 더 강한 힘으로 여의한다면, 더 광범위한 공간을 여의할 수만 있다면 금강신에 못지않은 신위를 발휘할 수도 있겠지.’
금강부동!
금강부동은 결국 공간여의다.
공간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 더 자유자재로 여의할 수 있게 된다면 마신 아수라에 능히 대적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하고 정무맹의 맹주를 비롯한 고수들이 분석하고 파악한 것을 토대로 실행해 본 것이 바로 공간을 합치고, 분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화운의 얼굴은 만족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철탑거왕을 상대할 때부터 뭔가 복잡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확실히 인간들의 무공보다는 대단해. 공간을 뜻대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신위를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절대적인 것이 아니야.’
철탑거왕처럼 공간의 기동을 버텨내는 자도 있을 것이다.
공간을 여의할 줄 아는 상대를 만나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어쩌지 못할 수도 있다.
금강신들과 마신 아수라의 싸움이 그랬다.
아수라가 금강신들을 압도하긴 했으나 그들을 죽이진 못했다.
금강신들도 아수라를 어쩌지 못했고.
양쪽 다 공간을 넘나들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어쩌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 역시 금강부동으로는 천마를 죽일 수 없다는 뜻이다.
‘천마가 천마지존공과 마신의 혼돈을 융합한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거야. 마신의 혼돈만으로는 안 되니까 천마지존공을 융합한 거야.’
화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림 천년의 전설이라는 금강부동에 현혹되어 이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생각하지 못했다가 철탑거왕을 상대하고서야 겨우 생각해 냈다.
자신이 천재도 아니고, 무에 대한 재능이 빼어난 것도 아니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았다면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인데,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모산파에서 신마대전을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절실했기에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화운은 하늘을 쳐다봤다.
맑은 하늘이다.
흰 구름만 수 조각 떠다니는.
그날 본 신마의 전쟁 때도 그랬다.
저토록 맑은 하늘에서······!
‘빛의 기둥!’
빛의 기둥이 아수라의 몸을 박살을 내버렸었다.
금강신들이 잡지 못한 마신 아수라의 육신에 공간을 꿰뚫고 직격해버린 것이다.
‘그래, 그거야. 공간을 베고 부숴 버려야 해!’
간단한 이치다.
공간을 베고 부숴 버리면 그 안의 아수라도 베어지고 부서진다.
제아무리 공간을 일그러트려 놓아도 모조리 베고 부숴 버리면 그만이다.
천마든 아수라든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 시주, 빈승이 남긴 금강부동은 불자로서 보고 느낀 것에 불과하오. 불법에 귀의할 것이 아니라면 굳이 빈승의 뒤를 따를 필요는 없을 것이오.
육조 혜능선사가 해준 말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땐 무인으로서의 금강부동을 만들라는 말로 이해했다.
그게 아니다.
혜능선사는 금강부동에 얽매이지 말라고 한 것이었다.
금강부동으로는 마신 아수라를 막을 순 없으니까.
“모든 걸 베어버릴 검력!”
화운의 머릿속에 검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력의 유동 없이 음산노괴를 베어버리던 모습이었다.
화운이 인지할 수 없는 영묘한 힘으로 검과 하나가 되어 음산노괴의 공격을 통찰하고 베어버렸다.
“인지의 감각을 초월하는 검과 금강부동! 나도 천마처럼 융합을 하는 거다!”
화운은 스스로의 생각에 고무되었다.
그의 머릿속에 자신의 검이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고 있었다.
“천마가 하면 나도 할 수 있어.”
화운은 당차게 웃었다.
그리고 걸었다.
낭왕을 비롯한 천사련 육지의 수장들은 어느새 객잔 안으로 몰려 들어간 후였다.
인질들 뒤에 숨기라도 할 모양이다.
상관없다.
검을 내려든 채 그들이 있는 객잔을 향해 웃으며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