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100화 (100/207)

#100. 한 사람을 더 불러주십시오

모산 중턱에 자리 잡은 모산파.

모씨 성을 가진 형제가 득도하면서부터 모산이라 불렸고, 그들의 깨달음을 이어받은 도인들이 모여 모산파를 세웠다고 한다.

민간세상에서 잡귀들을 쫓는 축귀의식이나 하는 문파로 전락한 지 아주 오래되었음에도 남아 있는 건물들의 규모를 보면 과거 얼마나 성세를 구가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무척 조용하군요.”

“사람이 없으니 조용할 수밖에.”

모산파 경내를 지나는 동안 사람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아 물은 것인데, 노인의 대답을 들으니 궁금증만 더 커졌다.

“다들 어딜 간 모양입니다.”

“그런 모양이야.”

“어딜 갔는데요?”

“모르지. 하늘로 올라갔는지, 땅으로 사라졌는지 여튼 십 년 전부터 돌아오지 않고 있어.”

“······!”

“서쪽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고 가더니 그쪽에 눌러앉은 것인지. 에잇! 다시 생각해도 기분 나쁘네.”

노인이 옷자락을 세차게 펄럭이며 화를 드러냈다.

하지만 잠깐 뿐이었다.

“어르신은 여기서 어떤 분이십니까? 장문인이거나 아니면 장로이신지요?”

“그런 거 없어.”

“예?”

“어쩌다 보니 다섯이서 본파의 명맥을 잇고 있었는데 다들 고만고만해서 사형제로만 지냈어. 근데 대사형이 말하길 서쪽 기운이 요상하니 가봐야 할 것 같다면서 누군가는 본산에 남아야 하니 나보고 남으래. 내가 제일 꼼꼼한 성격이라 청소를 잘한다나? 하! 그때 싫다고 했어야 했는데. 대체 왜? 왜? 왜 오지 않을까? 초혼제도 벌여봤어. 안 와. 안 왔다고. 죽었으면 혼이 반응해서 와야 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 그게 무슨 뜻이겠나? 살아 있다는 뜻이거든. 근데 십 년이 지나도 안 와. 에잉 썩을 것들!”

화운의 물음에 대답한 후 자신의 답답한 속내를 쏟아낸 노인이 화난다며 나무를 걷어찼다.

그러다 발이 아파 털썩 앉아 아픈 발을 감싸 쥐고 비벼댔다.

“십 년이 넘는 동안 이 넓은 곳을 혼자서 청소했어. 하루도 빠짐없이.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화운을 향해 그렇게 묻더니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가 걷어찬 것 때문에 떨어진 푸른 잎사귀들을 일일이 주웠다.

“어제는 대종각, 오늘은 범천문, 내일은 산문까지. 이렇게 청소하면 뭐하냐고, 지들은 오지도 않을 거면서!”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린 노인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화운은 세 사람과 함께 노인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산문까지 이르는 길도 그렇고 여기 경내도 지저분한 곳이 없거늘 십 년이 넘게 혼자 청소한 것이란 말인가?’

노인이 신경질 낼 만했다.

더불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각(閣)이라 부를 만한 전각도 세 채나 되었고, 그 아래 큼지막한 건물들이 여러 채였다.

도저히 혼자 관리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상청궁으로 가자. 몇 년 만에 온 귀한 손님이고 또 평범한 손님은 아닌 것 같으니 뭐 조사들께서도 이해하시겠지.”

어느새 노인의 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좀 전에 화를 낼 때는 언제고 지금은 즐거워하고 있다.

화운은 노인이 오랫동안 혼자 지내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예.’ 하고 대답한 후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노인은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는 계단을 몇 번이나 오르고 서야 멈추었다.

“여기야.”

지은 지 오래되어 그윽한 풍취를 느끼게 하는 거각이었다.

특이한 건 기둥마다 부적들이 붙어 있다는 것이었다.

화운은 세 사람과 함께 노인을 따라 들어갔다.

옥황상제와 그를 받드는 신선들의 그림이 화려한 색체로 그려져 있었고 수많은 위패들이 모셔져 있었다.

노인은 향부터 피워 올리더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화운과 세 사람은 각자 자리에 앉아 둘러보았다.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는 걸까요? 무척 시원한 곳이네요.”

백리연이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선선한 바람이 느껴졌다. 때로는 귀밑머리를 스쳐 가기도 했다.

그런데 화운이 고개를 저었다.

“바람이 아닙니다.”

“예?”

여기저기 정신없이 구경하던 남궁현과 선우유성도 관심을 보이고 화운을 쳐다봤다.

“바깥에 부적들이 붙어 있는 걸 보셨습니까?”

“예.”

“아무래도 이 안에 살아 있지 않은 뭔가를 가둬놓은 것 같습니다.”

화운의 말에 백리연을 비롯한 세 사람은 머리털이 쭈뼛하여 얼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여느 도관처럼 신성한 풍경들뿐이었다.

“그게 뭔데요? 설마 귀신이요?”

남궁현이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그러나 화운이 대답하기도 전에 노인이 돌아왔다.

그런데 복장이 달라져 있었다.

머리에는 흑백의 태극이 그려진 도관을 쓰고 황금빛 장포를 두르고 있었다.

노인은 네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본산에도 귀인을 모시는 법도가 있었는데, 우리 대에까지 남아 있지 않다네. 중간에 누가 까먹은 것인지 여튼 뭘 어찌 해야 하는지 모르게 되었네. 그래도 복장은 갖추어 보았으니 무례하다 비꼬지는 말아주시게.”

노인이 말투까지 바꿔가며 일문을 이끄는 종사의 태도를 흉내 내며 말했다.

“귀하다는 말씀은 가당치 않습니다. 그보다 이곳에 우리 말고도 있는 모양입니다.”

“확실히 날 놀라게 하는군.”

노인이 희한한 물건을 보는 얼굴로 화운을 주시했다.

화운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마주보고만 있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몰랐다면 모를까, 궁금하겠지.”

중얼거리듯 운을 뗀 노인은 화운과 세 사람이 궁금해하는 정체 모를 바람 같은 기운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자네가 느낀 기운은 일종의 수목귀라네. 쉽게 말해 오래 산 나무가 죽으면서 육체를 벗어난 기운이지. 원래 죽으면 산기운에 스며들어 산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인데, 그걸 싫어하는 놈들이 종종 있다네. 강제로라도 돌려보낼까 하다가 여기저기 청소나 하라며 붙잡아둔 것이라네. 들어오면서 바깥에 부적 보았지? 그건 저승귀들의 접근을 막아놓은 것이고, 저 부적들은 수목귀들이 악귀로 변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네. 대충 설명이 되었는가?”

노인이 실내 곳곳에 붙어 있는 부적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화운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 혼자서 관리하기엔 모산파의 규모가 너무 컸다.

수목귀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 기운들의 움직임에 따라 대기가 유동하니 자잘한 먼지들은 물론이고 나뭇잎 정도까지는 능히 치울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해요.”

선우유성이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수목귀가 전혀 무섭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궁현도 정체를 알게 되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으나 백리연은 께름칙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잔뜩 웅크리고만 있었다.

“그러냐? 고맙구나.”

선우유성의 말에 노인이 벙글벙글 웃었다.

이때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화운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포권했다.

“죄송합니다. 인사가 너무 늦었습니다. 화운이라고 합니다. 정파무림연합맹 신풍대 대주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 친구들은 신풍대원으로 백리세가의 백리연 소저, 남궁검가의 남궁현, 선우세가의 선우유성입니다.”

“안녕하세요, 백리연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우유성이라고 합니다.”

“오호! 다들 놀라운 사람들이었군. 이곳에 십 년째 처박혀 있었어도 세 가문을 모르지 않다네. 정말 귀한 분들이었군. 아참, 이럴 게 아니라 차라도 대접해야 하는 것을!”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화운이 얼른 만류했다.

“괜찮습니다. 그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 잠시 들른 것이니 폐가 되지 않는다면 가르침을 청할까 합니다.”

“가르침? 난 누굴 가르쳐본 적이 없는데? 아, 난 초백이라고 하네.”

“모산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신들에 대해 여쭙고자 합니다.”

“신? 태상노군 말인가?”

“아닙니다. 마신 아수라에 대해 여쭙고자 이리 찾아왔습니다.”

“아수라?”

초백의 늙은 얼굴이 당혹으로 굳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마신에 대해 알고 싶다는 청년의 진의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교도인가?”

초백이 잔뜩 경계하며 물었다.

네 사람의 기도가 맑고 깨끗하다는 거야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나쁜 짓을 하는 건 기운이 아니라 사람인 법이었다.

“정파무림연합맹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헌데 왜······?”

“마도에서 마신 아수라의 힘을 이 땅에 발현시키려고 해서입니다.”

“······!”

초백은 무슨 얼토당토 않는 말이냐는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벌써 어느 정도는 시작되었습니다.”

“허······!”

“못 믿으십니까?”

“어떻게 시작되었다던가?”

화운은 차분히 알려줄 필요성을 느꼈다.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후 살짝 살을 붙여 다시 이야기했다.

“첩보에 의하면 근래에 마교 내에서 당대 천마에 반하는 내홍이 일어났고 거기서 천마가 마신 아수라의 힘 중 일부를 드러냈다고 하는데, 천마의 손짓 발짓을 따라 허공에서 거대한 거인의 손과 발이 튀어나와 역도들을 무참히 죽였다고 합니다. 하여 본맹에서는 그 힘을 가진 천마를 상대하고자 마신 아수라에 대해 소상히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멸제의 반역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 더 지나야 한다.

하지만 그 반역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과 결과는 화운의 말대로 일 것이 분명했다.

혹여 초백이 그냥 이곳에 틀어박히기만 한 사람이 아니어서 천하정세를 꿰차고 있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불신을 스스로 사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초백의 고개가 끄덕여지고 있었다.

천하정세에 대해 깜깜할 뿐더러 오랫동안 모산에 처박혀 지낸 그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면 수긍할 만했다.

남궁검가와 선우세가 그리고 백리세가의 젊은이들이 모산까지 어이하여 찾아왔겠나?

오랫동안 잊히고 있던 모산파이거늘.

“늙으면 없던 의심병도 생긴다고 하네. 이해하게.”

“아닙니다. 마신에 관한 일이거늘 마땅히 의심하셔야지요.”

“이해해 주는구먼. 그래, 아수라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알아냈나?”

“마신 아수라가 천신과 싸우게 된 배경과 그가 수라도에서 얻은 천신에 대항할 힘에 대해 들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되돌릴 힘과 언제든 수라도를 벗어나 천계에 오를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하더군요.”

“오호!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야기로군. 맞는 것 같아.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랑 같은 것 같아. 가만, 그 이야기 외에 또 있었는데······ 뭐였더라······.”

초백은 눈까지 감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 기억에 마신의 혼돈이 들어있지 않을까.

혹은 마신의 약점이나 상대할 비책 같은 건 아닐까.

화운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윽고 초백이 눈을 떴다.

“모르겠군. 기억이 안 나.”

“혹여 기록 같은 건 없습니까?”

“나야 모르지. 그 많은 책들 중에 그런 책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나?”

“서고를 볼 수 있겠습니까?”

“그건 안 되네.”

“어르신, 부탁드리겠습니다.”

“서고야말로 본파의 역사이거늘 외부인에게 함부로 열람을 허용할 수는 없네.”

초백의 반응은 단호했다.

이해는 했다.

일반적인 반응이기도 하고.

알지만 그래도 실망스럽다.

‘천마를 막아보고자 하는 일인데······.’

사황을 막고 천마를 상대해야 하는 일이라 온천하가 합심해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거부하고 회피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억지를 부려서도 안 되겠지.’

화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니지, 아니야! 모산파를 훌러덩 뒤집어엎어서라도 찾아 읽어봐야 해. 그리고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화운은 강한 유혹에 사로잡혔다.

자기 혼자만 좋겠다고 하는 일도 아니고 천하를 지키고자 하는 일이다.

잘못된 일은 시간을 되돌려 다시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더군다나 모산파에 사람이라고는 초백 한 사람뿐이고, 자신의 힘이라면 얼마든지 강제할 수 있다.

화운은 대의를 위한다는 명목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한쪽에서 듣고만 있던 백리연이 슬쩍 끼어들면서 물었다.

“아까 말씀하신 것을 보니 초혼제를 할 줄 아시는 것 같은데, 어르신의 스승님을 모셔서 여쭙는 건 어떨까요?”

“어?”

초백이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곧 옳다구나 하며 벌떡 일어섰다.

“맞다.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사형제들도 돌아오지 않는데 본문을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승님께 여쭤보면 되는 것을!”

초백의 얼굴이 희희낙락으로 변해가고 있을 때였다.

화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중히 말했다.

“한 사람을 더 불러주십시오.”

“누구 말인가?”

“육조 혜능선사.”

“응?”

“소림사의 육조 혜능선사의 혼을 불러주십시오.”

백리연의 말을 듣는 순간 화운의 뇌리를 강타한 생각이었다.

초혼제로 정말 혼을 불러낼 수 있다면 육조 혜능선사께 금강부동을 배울 수도 있겠다는.

그래서 지금 이 순간 화운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이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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