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무해곡의 비사
출렁다리를 건너보니 커다란 굴이 나왔다.
‘왜 산굴이······!’
무해곡이니 산에 있겠지.
그렇다고 산굴 속에 있을 필요는 없잖아.
굴을 보기 전까진 기분이 좋았다. 운명에 이끌리듯 연리향을 만났고, 그 아이가 무해곡에 사니 일이 술술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동굴인지.
갑자기 기분이 확 상한다.
“얼른 가자! 할아버지 기다리셔!”
할아버지를 부르며 앞서 뛰어가던 향아가 동굴 안에서 멈춰 손을 흔들었다.
어두컴컴한 곳이라 털이 시커먼 묵비는 노란 눈만 보였다.
‘쟤 말투도 슬슬 거슬려.’
화운은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는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왠지 내키지 않는 걸음이었다.
제천마존의 비동에서 워낙 오랫동안 지내서다.
시간을 되돌리고, 되돌리고, 또 되돌리고 그랬던 시간들을 모조리 합쳐 보면 일백 년은 우습게 넘을 것이다.
강해지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버티고 버틴 그야말로 인고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답답한 동굴 속에서 지냈으니 동굴을 보자마자 기분이 확 상할 수밖에.
‘좋게 생각하자. 동굴이 뭔 죄냐, 사람이 죄지. 동굴이 날 가둔 것도 아니잖아. 나 스스로 그랬던 거지.’
화운은 애써 기분을 풀어가며 향아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고 나자 오히려 밝아졌다.
저 멀리 환하게 밝은 출구도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화운의 기준으로 보면 무척 짧은 동굴이었다.
“향아는 멋진 곳에 살고 있구나.”
화운의 기분이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다.
“응.”
칭찬은 아이를 신나게 하는 법.
“할아버지! 할아버지! 손님이야! 손님! 착한 오빠가 왔어!”
기분이 더욱 좋아진 향아가 신나게 뛰어갔다.
“그래, 착하다는 말을 계속 해다오.”
화운은 피식 웃으며 뒤를 따라갔다.
잠시 후 동굴의 출구 앞에 선 화운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동굴이 끝나고 보이는 산촌 부락의 전경.
어디서 흘러온 것인지 커다란 냇가가 있고, 그 냇가를 건너지른 돌다리 그리고 냇가 너머에 옹기종기 지어진 삼십여 채의 초가들.
결코 작지 않은 규모였고, 곳곳에 자라 있는 붉은 노송까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지만 화운이 놀란 건 그 같은 풍경 때문이 아니었다.
거대한 기운이 부락을 휘감고 있었다.
동굴의 출구가 그 경계였다.
기운에 민감한 화운은 도도히 흐르는 기운이 마을을 휘감아 세상 밖과는 전혀 다른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부락에 심심찮게 보이는 붉은 노송만 봐도 알 수 있다.
애뇌산 근방의 수림에서는 볼 수가 없었던 수목이다.
부락의 환경과 바깥의 환경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누군지 모르지만 이런 진을 설치할 정도면 기관진식의 대가라 해도 무방하겠다.’
화운은 무해곡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커진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놀랍군!’
화운이 탄성을 터트렸다.
진식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부터 달라졌다.
밀림의 후텁지근한 공기도 아니고 협곡의 음랭한 공기도 아니다.
선선하면서도 포근함이 느껴지는 그런 공기였다.
“오빠! 여기야! 여기!”
돌다리 너머에서 향아가 손을 흔들어대며 소리쳤다.
화운은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돌다리를 건넜다.
향아가 워낙 신나게 손을 흔들어서이기도 했지만, 향아가 외쳐댄 소리에 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호의로 방문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화운이 돌다리를 건넜을 땐 이십여 명이 모여들었고, 향아 가까이 다가갔을 땐 다시 세 명이 다가왔다.
그중 검은 수염을 기른 노인이 인상적이었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한데 턱 바로 아래에서 가지런히 보이도록 다듬어놓은 수염은 젊음의 상징처럼 새까맸고, 진한 잿빛의 의복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우중충하다기보다는 어둠을 지배하는 패자와 같은 느낌이었다.
‘고수다!’
화운은 노인을 보자마자 알아봤다.
최소 칠대문파 장문인 수준의 고수라는 걸.
다른 마을 사람들은 노인만큼 대단하지는 않았으나 천하로 나가면 모두가 고수 대접을 받을 정도는 되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아낙마저 칠대문파의 일대제자들 보다 훨씬 더 강할 정도였다.
“향아를 따라 온 건가?”
“예. 밀림에서 길을 헤매다 향아를 만나서 도움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화운은 정중히 포권하며 대답했다.
검은수염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화운에 대한 경계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화운의 강함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할아버지. 착한 손님이야. 향아가 묵비한테 잡아먹히는 줄 알고 깜짝 놀라서 구해주려고 했어.”
“그랬구나. 그렇다면 착한 사람이 맞겠다.”
대충 상황을 짐작한 검은 수염의 노인이 향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부락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검은 수염의 노인에게 허리를 조아리고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향아야,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조상님들께 인사부터 시켜야겠다. 그때까지 묵비랑 놀고 있거라.”
“무해동에 가려고요?”
“그래.”
“치이, 향아도 가고 싶은데.”
“몰래 갔던 것부터 혼나보겠느냐?”
“엑? 알았어?”
“말투.”
“알았어요?”
“거기 계신 큰할아버지께서 널 이쁘게 보셔서 용서하는 거다. 귀찮게 하면 안 되니 담부터 들어가지 말거라.”
“알았어요.”
시무룩하게 대답한 향아는 화운을 쓱 쳐다보며 말했다.
“나중에 향아랑 꼭 놀아줘야 해.”
“할아버지랑 큰할아버지께서 허락하시면 놀아줄게.”
화운의 대답에 다시 기분이 좋아진 향아가 묵비를 부르며 뛰어갔다.
“묵비야! 가자!”
황소만 한 덩치의 시커먼 맹수가 날렵하게 뛰어가는 광경은 보면 볼수록 놀라웠다.
“맹수에게 내력을 키워주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강시를 병기로 만든 지 오래인데 거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 그보다 복장을 보니 중원에서 온 모양이군.”
“예.”
“길을 헤맸다는 건 둘러댄 말 같고 여기가 어딘지 알고 온 겐가?”
“예.”
“역시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검은 수염의 노인은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돌아서며 말했다.
“따라오게.”
무해동으로 가는 것 같아 화운은 잠자코 따라갔다.
검은 수염의 노인은 이후로 한 마디도 않고 부락의 중앙으로 향했다.
화운은 뒤를 따라가며 살펴보았다.
끝없이 솟구친 절벽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고, 절벽 곳곳엔 큼지막한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부락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기진과 관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들어가세.”
검은 수염의 노인이 걸음을 멈춘 곳은 부락 한복판에 있는 아담한 크기의 정자였다.
“무해동으로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자네 같으면 외지인을 함부로 안내하겠는가?”
“아, 그렇군요.”
화운은 곧바로 수긍하며 검은 수염의 노인을 따라 정자 안으로 들어가 맞은편에 앉았다.
“어느 문파의 제자이기에 이토록 대단할까?”
검은 수염의 노인이 경계의 눈빛으로 말했다.
“아! 화운이라고 합니다. 선우세가가 제게 외가가 됩니다.”
화운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공손히 자신을 소개했다.
“연검천이라고 하네. 선우세가가 외가라면 그쪽의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닐 텐데, 대단하군.”
“본가 역시 무가는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기연을 얻어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떤 기연인지 궁금할 정도군.”
“말씀드리지 못하니 송구합니다.”
“자신의 것은 감추고 싶은 법이니 송구할 것까지는 없네.”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한 사람이 정자 안으로 들어섰다.
진즉부터 인기척을 느끼고 있던 화운은 슬쩍 쳐다보기만 했다.
평범해 보이는 중노인이었다.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주전자와 찻잔 두 개를 내려놓고 물러갔다.
연검천은 찻주전자를 들어 두 개의 잔에 차를 따른 후 하나는 화운을 향해 밀어주었다.
“감사합니다.”
화운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후후 불며 몇 모금 마신다음 내려놓았다.
‘어렵군.’
서로를 탐색하는 자리였다.
무해곡이라는 걸 알고 도움을 받기 위해 왔으나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밝혀야 할지.
무해곡 사람들은 믿을 만한 사람들인지.
지금 이 자리를 빌어 결정하고 알아내야만 한다.
제천마존의 비동에서 비슷한 일들을 겪어보았다.
검마와 담판을 지어보았고, 무영투를 속여도 보았다.
황보장을 두들긴 자리에서 우문검가주와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고, 천종천마교에서는 눈치 깨나 살펴보기도 했다.
정무맹 신풍대주 자리를 받아들일 때는 지금과 무척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맹주와 담판을 벌여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다다.
이런 자리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내놓을 것만 내놓고 감춰야 할 건 상대가 불신하지 않는 한도에서 철저히 감춰야 하니까.
“참 놀라운 곳입니다. 진으로 자연환경을 이토록 광범위하게 바꿔놓다니요.”
“대단해 보이는가?”
주위를 둘러보며 듣기 좋으라고 경탄하던 화운은 연검천이 묻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져 그를 돌아봤다.
“대단해 보입니다.”
“우리에게는 아픔인데, 대단해 보이는군.”
“······!”
“저 진은 세상의 눈을 속이기 위해 만든 것이네. 이곳에 있는 고수들의 기도가 바깥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지. 이십여 장 가까이 있지 않으면 상대의 진면목을 알아차리기 어렵다네.”
“세상의 눈을 속일 이유가 있습니까?”
“역시 모르고 있군.”
“무슨 말씀이신지······!”
“무해조사께서 은거하셨다는 꾸며진 역사로 알고 있지?”
“거짓입니까?”
“무해조사께선 천하의 공격을 받았네. 어느 날 밤 복면을 한 자들 수백 명이 장원을 급습했는데, 그들이 펼치는 무공을 어찌 못 알아볼까. 혈육들을 전부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으셨지만, 대륙을 가로지르며 이곳에 숨을 때까지 공격이 끊이질 않았지.”
“······!”
충격적인 강호비사에 화운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이렇게 외진 곳에 자릴 잡은 것이었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토록 외진 곳에 자리를 잡을 정도로 특별한 것이 뭐가 있겠는가.
천하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천하의 눈을 속이기 위해 진식을 펼쳐놓은 것이고.
‘하아! 이러면 도움을 받긴 글러먹은 건데!’
천하의 공격을 받아 이런 외진 곳에 숨어살게 되었는데 천하를 위해 가르침을 줄 리가 없잖은가.
화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옛분들은 대체 뭣 때문에 그분을 공격한 거야! 설마 자신들의 무공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화운은 궁금했다.
“이유가 뭐랍니까? 제가 알기론 그때 무해노인께 도움을 받은 곳도 많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뭘 했답니까?”
연검천이 묻는 화운을 빤히 응시했다.
마치 더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자신들의 무공을 들여다봐서 그랬답니까?”
화운이 재차 물었다.
연검천은 고민을 끝내고 대답했다.
“그 이유가 가장 클 것이고, 무해조사께서 일으킨 무학의 새로운 시류가 싫었던 것이겠지.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을 받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당시의 기득권 세력이 워낙 강해서 조사께 도움을 받았던 자들은 모른 척 방관했었고.”
“허! 온고지신이라고 했는데, 옛것을 갈고닦아 새로운 것을 깨닫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지. 자신의 것만 지키려들면 무슨 발전이 있다고! 그리고 은혜를 저버리는 파렴치한 자들 같으니!”
화운이 자신의 일처럼 화를 냈다.
답답하고 화가 난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한심한 이유로 무학의 천재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은혜를 입고도 수수방관 한 자들의 철면피함이.
연검천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화운이 감정적으로 동조해 주었다고 하여 오랫동안 이어져 온 한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제가 밉겠습니다?”
“자네라면 어떨 것 같나?”
연검천의 반문에 화운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았다.
“밉고, 귀찮고, 꺼져주었으면······ 그러길 바라십니까?”
“그래 줄 텐가?”
화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연검천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때의 사람과 지금의 사람은 다른 법입니다. 그리고 못난 놈에겐 한 번 더 기회를 주라는 말도 있습니다.”
“······!”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니 주군을 뵙게 해주겠네.”
한참 만에 연검천이 화운을 무해동으로 안내해주기로 결정하며 한 말이었다.
화운은 무해노인의 후인을 만난다는 호기심과 설렘을 안고 연검천의 뒤를 따랐다.
무해동.
부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절벽에 커다란 동굴이 있었는데 그 입구 위쪽에 힘찬 필체로 그렇게 새겨져 있었다.
‘향아가 무해동이라고 말해서 동굴인 건 알았다만, 꼭 동굴이어야 했냐.’
화운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연검천을 따라 무해동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 안으로 들어가자 광장이라 부를 만한 널찍한 공간이 나왔고, 석실도 몇 개 보였다.
연검천은 화운을 가장 안쪽의 석실로 데려갔다.
무해곡의 방대한 지식을 대변 하듯 온갖 서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곳이었는데, 화운은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네놈이 여긴 어쩐 일이냐!”
석실을 울려대는 목소리.
화운은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