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화운, 압도적인 신위
쿵쿵쿵쿵!
철탑거왕이 빠른 속도로 달렸다.
십오 장(45m).
꽤 먼 거리다.
빠르게 달리던 철탑거왕이 땅을 박차고 솟구쳤다. 그리고 그 거리를 단박에 뛰어넘어 지상으로 내리 꽂혔다.
한낮의 유성처럼.
쿠-웅!
땅거죽이 파문처럼 터져나가며 크고 작은 흙덩이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무지막지한 등장에 전장의 싸움이 멈춰 버렸다.
“그것도 싸움이라고 하는 것이냐! 버러지들 같으니!”
철탑거왕이 싸잡아 비웃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부악!
대기를 꿰뚫으며 막대한 힘이 적엽명을 향해 와락 들이닥쳤다.
잔뜩 경계하고 있던 적엽명이 검강을 일으켜 막았다.
쾅!
전신을 으스러트리는 막대한 충격.
“크윽!”
적엽명이 일격조차 버티지 못하고 저만큼 튕겨 버렸다.
간신히 중심을 잡아보지만 몸 내부를 뒤흔들어 버린 충격에 핏물을 울컥 내뿜고 말았다,
“쯧쯧! 구룡제를 찾던 기백은 어디로 간 것이냐.”
혈선이 비웃으며 적엽명을 지나쳐 갔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화운이었다.
화운만 막으면 이곳에서 철탑거왕을 상대할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뭐냐! 벌써 끝난 거냐! 버러지답게 꿈틀거리기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철탑거왕이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부왁!
이를 악문 적엽명이 미종보를 펼쳐 철탑거왕의 권격 아래를 간발의 차이로 스쳐지나가며 검을 그었다.
쓰-캉!
분명 옆구리를 베었는데, 불똥이 튀지 않았을 뿐 무쇠를 그은 것 같았다.
거령철갑신!
금강불괴를 지향하는 외가기공술중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절학이다.
“간지럽구나!”
철탑거왕이 벼락같이 돌았다.
부악!
요란한 파공음을 터트리며 철퇴 같은 주먹이 날아들었다.
적엽명이 다시 미종보를 펼쳐 피한 순간 철탑거왕의 거구가 땅을 박차고 와락 돌진했다.
퍼억!
적엽명은 미종보를 펼치던 그대로 거대한 바윗덩이에 부딪친 것처럼 날아갔다.
피화살을 뿜어대는 걸 보니 의식은 잃지 않았으나 이미 전투불가인 상황.
철탑거왕은 아예 끝장을 보겠다는 듯 손을 불쑥 뻗었다.
바로 이때.
청성의 도룡이 몸을 날려 날아가는 적엽명을 낚아챘고, 무당명검과 복호검후 그리고 점창의 분광이 철탑거왕을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귀찮다!”
철탑거왕이 손을 뻗은 채 풍차처럼 빠르게 회전했다.
그러자 경악스럽게도 충격음이 연달아 터지며 세 사람이 맥없이 튕겨 버렸다.
실로 압도적인 무공의 격차였다.
“하루살이도 못되는 것들이로다! 크하하하!”
철탑거왕이 크게 웃어댄 순간이다.
“네놈 상대는 노부다!”
혈선이 외쳤다.
그의 정면으로 화운이 쏘아져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뚝 멈춘 혈선이 검을 뽑았다.
검게 물든 검날이 요사스런 빛을 뿌렸다.
새하얀 광태를 드러낸 두 눈은 화운에게 꽂혔고, 소름끼치도록 음산한 귀기가 검은 기운으로 화해 전신에서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귀접월락검(鬼接月樂劍).
귀접을 통해 혼귀의 기운을 빨아들인다.
사정을 하지 않고 음기를 흡기만 하다 보니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심각한 균열이 올 수밖에 없다.
악마의 잔혹함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내 육신에 임한 너희에게 생육과 생혈을 하사하노니, 귀는 강림하고 혼은 현혹하라!”
시커먼 귀기가 응어리진 한처럼 섬뜩한 기세를 뿜으며 뭉클뭉클 흘러나왔다.
철탑거왕보다 훨씬 강하다고 알려진 혈선이다.
일백 무룡대의 사기는 이미 바닥까지 곤두박질 쳤다.
그런데 혈선을 향해 정면으로 쏘아져간 화운이 검을 휘두른 순간 무룡대의 눈에는 기적이 보였다.
콰앙!
새파란 강기를 머금은 검처럼 보였다.
그런데 결과는 경악스러웠다.
굉음이 터짐과 동시에 혈선이 쪼개진 장작처럼 날아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건 이후에 벌어졌다.
화운의 검에서 고리모양의 청광 십여 개가 줄지어 날아간 것이다.
검강이냐, 아니면 검환?
그 정체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고리모양의 청광 십여 개가 혈선을 강타했다.
쾅쾅쾅쾅쾅쾅쾅쾅!
혈선은 누더기가 되어 아름드리 거목에 부딪쳐 축 늘어졌다.
“이런 개 같은······!”
철탑거왕이 대노하여 소리친 순간.
찰나의 순간을 가르고 이동한 화운이 철탑거왕의 코앞에서 검을 휘둘렀다.
여전히 청광이 번뜩이는 검이다.
“죽어라!”
철탑거왕은 거령철갑신을 믿고 전력을 다해 정면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꽈앙!
“으악!”
비명은 철탑거왕이 내지른 것이었다.
그의 주먹이 너덜너덜해 보일 정도로 부서졌다.
충격을 받은 철탑거왕의 거구가 휘청거리는 순간.
화운이 휘두른 검면이 철탑거왕의 옆머리를 후려쳤다.
빠악!
휘청거리던 철탑거왕이 옆으로 픽 고꾸라졌다.
그리고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한차례 질풍 같았던 순간이 끝나자 주위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땅으로 내려선 화운은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낭왕을 비롯한 천사련의 고수들을 향해 말했다.
“더 할까?”
구환도를 든 낭왕의 팔이 아래로 떨어지듯 축 처졌다.
도탑주와 잔월교주 등도 전의를 잃고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바로 이때 환사가 백리연을 기습했다.
화운의 싸움에 넋 놓고 있던 백리연으로서는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십여 장 떨어진 곳에 있던 화운이 공간을 열고 튀어나온 것처럼 나타나 손을 뻗었다.
“컥?”
환사가 마치 화운의 손에 스스로 목을 들이민 형국이 되었다.
“하여간 얍삽해. 당신이 빨라서 북궁무결을 구해 간 줄 알아? 귀찮아서 그냥 둔 거야.”
화운의 말에 환사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이제야 알아본 것이다.
백리세가를 노리던 중 갑자기 나타나 북궁무결을 날려 버렸던 화운을.
화운은 목을 확 부러트려버릴까 고민 하는 척하다 던져 버렸다.
“천하십이흉 중 다섯은 저쪽으로 갔지? 얼른 가. 가서 철수하라고 해. 늦으면 내가 하나하나 찾아내서 모조리 죽일 거야. 알아들었으며 가.”
당황한 얼굴로 화운을 쳐다보던 환사는 특유의 신법을 발휘하여 잽싸게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화운은 낭왕을 향해 다가갔다.
“당신들만 온 걸 보니 태양존자가 셋 중 가장 약한 모양이지?”
“······?”
“구룡제랑 적성대도황 말이야. 태양존자가 비슷한 무위였다면 당신들만 보내지 않았을 거 아냐.”
“그렇소.”
낭왕이 대답했다.
“역시 그랬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화운은 낭왕 등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 하는 사람처럼 턱에 손을 괴고는 앞에서 왔다갔다 했다.
이 순간의 결정에 자신들의 목숨이 달렸다는 걸 알기에 낭왕 등은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구룡제랑 적성대도황한테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해주겠다고 약속하면 전부 살려주지.”
“약속하겠소.”
“낭왕의 자존심을 걸고?”
“자존심을 걸겠소.”
“좋아. 두 사람에게 가서 천종천마교한테 뒤를 털리고 싶지 않으면 그쪽도 신경 쓰라고 해.”
사황과 천마에 대해 말해봤자 믿지 않을 게 뻔하다.
그러니 마교에 뭔가 있는 것처럼 말하며 이들을 살려주면 경각심을 가질 것이다.
이독제독.
천사련으로써 천종천마교를 경계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일 테니까.
그리 되면 쉽사리 정무맹을 공격하지 않을 터, 화운과 정무맹의 수뇌진들은 금강부동에 더욱 몰입할 수 있다.
이것이 화운의 생각이었다.
화운이 천종천마교를 들먹이자 낭왕 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해? 얼른 가지 않고.”
화운의 말에 흠칫 정신을 차렸다.
“여기 덩치랑 저쪽에 있는 늙은이 그리고 죽은 자들도 전부 데려가.”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할까.
낭왕 등은 수하들을 부려 전장을 깨끗이 정리하고 떠났다.
그렇게 정리가 되자 화운은 적엽명 등에게로 다가갔다.
적엽명은 중상을 입어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운기를 안 했어?”
“너, 너 대체······.”
“나 어디 안 가니까 운기부터 해. 네가 운기를 해야 네 동료들도 몸을 돌볼 거 아니냐.”
그제야 적엽명이 무당명검 등을 돌아봤다.
그들 역시 철탑거왕에게 일격을 당해 얼굴이 핼쑥할 정도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우리 신풍대원들이 뭐라고 한 줄 알아? 밉상이긴 하지만 네놈들만큼 정파다운 이들도 드물고, 니들이 정파의 근간이란다. 그러니까 정파가 뿌리 채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거든 몸부터 추슬러라. 일어날 때까지 지켜줄 테니까.”
적엽명은 남궁현과 선우유성 그리고 백리연을 차례로 돌아봤다.
무당명검과 복호검후 등도 세 사람을 쳐다봤다.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던 남궁현이 나불거리듯 말했다.
“잘난 체 하는 게 꼴 보기 싫지만, 쟤들만큼 정파다운 무인들도 드물다고 그랬지. 언제 밉상이라고 그랬습니까.”
“그게 그거지.”
“그게 어떻게 그겁니까. 잘난 체하는 꼴만 싫다는 거랑 아예 밉상인 건데. 완전히 다르죠.”
남궁현과 화운의 대화에 적엽명 등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각파의 어른들에게 인정받던 것과는 또 다른 기쁨 같은 뿌듯한 감정이었다.
“신세 좀 지겠다.”
적엽명이 말하고는 가부좌를 틀고는 눈을 감았다.
내상을 다스리기 위해 운기조식을 시작한 것이다.
무당명검과 복호검후 등도 자리에 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화운은 무룡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여긴 우리 신풍대가 지킬 테니까 다친 사람들은 치료를 하고 멀쩡한 사람들은 사냥을 해서라도 먹을 것 좀 준비해.”
화운의 말에 무룡대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신풍대 세 사람은 적엽명 등을 지키는 위치를 잡고 섰다.
그렇게 한바탕 혈풍은 한순간에 끝나 버렸다.
***
적엽명의 내상이 가장 심각했다.
적어도 열흘 정도는 꼼짝 말고 치료를 하는 게 안전할 정도였다.
철탑거왕에게 일격을 당했던 무당명검 등은 완전치는 않았으나 다시 전투를 벌일 수 있을 정도는 회복했다.
무룡대원들이 사냥을 잔뜩 해 와서 먹을 고기는 풍족했다.
여기저기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 먹었다.
소금은 화운이 조달해 왔다.
직접 소금을 나눠주고 다친 데는 괜찮냐고 물어주고 그랬으나 모두들 화운을 대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워낙 경악스러운 신위를 보여줘서다.
적엽명 만이 오히려 이전보다 더 편하게 대했다.
몸도 마음도 극한으로 부서지다보니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이다.
정저지와.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자신이 아는 천하는 진짜 천하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상대를 인정하면 시기질투 할 필요도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자신은 자신인 것이다.
화산의 제자로서 화산의 가르침을 따르면 되는 것이다.
그 끝에 뭐가 있든 그것이야 말로 온전히 자신의 몫인 것이다. 그러니 주위와 비교할 필요도 없고, 경쟁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
시기질투는 정말 쓰잘데기 없는 감정의 소모인 것이다.
“사숙께서도 자네의 본 실력을 아는 모양이군?”
이심환이 화운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의아해했던가.
이제는 그 이유를 알겠다.
“대충은.”
“대충?”
“이 대협과 싸울 일이 없는데 어떻게 다 아시겠어? 대충 눈치만 채셨겠지.”
“그도 그렇군.”
화운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새삼스런 눈으로 적엽명을 보았다.
‘난 놈이라 그런 가, 빨리도 자신을 다스리는군.’
몸만 나으면 금방 새로운 걸음을 내디딜 것이 확연히 보였다.
더 강해질 것이다.
무공도 정신력도.
그때부터는 화산의 대제자 다운 행보를 시작할 것이니 선우유성의 말대로 정파의 근간이랄 수 있을 것이다.
무당명검을 돌아봤다.
아직은 혼란한 모습이다.
경쟁자라 여기는지 간간히 백리연을 힐끔 거리는 복호검후도 혼란을 추스르지 못했다.
점창의 분광과 청성의 도룡도 남궁현과 선우유성을 살펴보곤 했다.
다들 놀랐을 것이다.
신풍대 세 사람의 무위에.
항상 자신들의 아래라 여겼을 것인데 지금은 자신들보다 강한 것 같으니까.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건 어렵지 않네. 하지만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는 건 정말 어려운 법이네.”
적엽명이 말했다.
화운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무당명검 등은 신풍대를 인정하지 못해 시기질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모자람을 받아들이지 못해 여전히 혼란한 상태라는 걸.
그렇다면 다행이다.
적어도 남을 인정하지 않는 아주 형편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니까.
신풍대와 무룡대.
조합이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화운은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내가 받은 임무가 있다.”
“역시 그랬었군.”
“신풍대와 무룡대는 이곳에서 날 기다려 주었으면 해. 며칠이나 걸릴 지 예상 불가이니 열흘을 기다린 후에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맹으로 복귀하게.”
“위험한 임무인가 보군.”
“조금.”
“알았네. 그렇게 하지. 언제 떠날 참인가?”
“내일 이른 아침에.”
“알겠네.”
적엽명은 임무에 대해 자세히 묻지 않았다.
맹주님 이하 맹의 원로들께서 믿고 임무를 준 것일 터, 자신이 끼어들 일이 아닌 것 같아서다.
‘만류귀종 무해일연! 이제 무해곡을 찾아갈 차례다.’
큰 기대가 되어서인가?
화운은 왠지 가슴이 뛰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