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전장의 절대법칙
“신풍대주라는 놈이 누구냐?”
낭왕이 물었다.
적엽명과 무당명검을 번갈아보다 둘의 복장이 화산과 무당의 것임을 알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놈부터 상대할 것이니 이리 썩 나서라!”
자신들을 앞에 두고 화운을 찾으니 적엽명이 발끈했다.
화를 못 참는 성격은 아니나 생사의 격전을 벌여할 적에게 기세가 눌려선 안 되는 법.
“구룡제가 어느 놈이시오? 그놈부터 상대할 것이니 이리 썩 나서십시오.”
아무리 사파라 하나 구룡제는 모두 다가 인정하는 사파 최강의 고수.
함부로 굴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에 반말과 존대가 섞인 묘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죽고 싶은 것이냐!”
낭왕이 소리쳤다.
“우리가 목숨에 연연할 사람들로 보이시오?”
“······?”
“우릴 사로잡아 정사대전을 끝내려는 모양인데 당신들 크게 착각하고 있어. 우린 절대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거든.”
적엽명이 크게 말하며 검을 뽑았다.
기세당당한 그 모습을 따라 무룡대원들이 일제히 병기를 뽑았다.
숫자는 일백여 명.
육백이 넘는 숫자가 몰려온 천사련의 입장에서 보면 가소로운 숫자다.
그러나 무룡대는 기죽지 않았다.
적엽명 등이 전날부터 단단히 각오를 다져놓은 덕분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싸움의 결과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다.
우문산이 말한 천사련의 규모가 사실이라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니까.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은 건 반나절 거리에 있다는 지원군 때문이다.
무룡대가 버티는 사이에 지원군이 천사련의 배후를 기습한다면 승산이 높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 버텨야 한다.
‘한 식경(30분) 정도만 버텨내면 이길 수 있어!’
적엽명은 시간을 염두에 두고 낭왕을 응시했다.
검을 뽑았으니 이제 싸움의 시작이다.
낭왕이 구환도를 들었다.
입가에 조롱의 미소를 지은 채.
“생쥐 한두 놈쯤 주둥이를 찢어버린다고 달라질 게 없다. 쳐라!”
나왕이 구환도를 쳐들고 소리치자 전방과 좌우 양쪽에서 함성이 일어나며 육백에 달하는 숫자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 실제 전장의 공기는 확연히 달랐다.
무룡대는 전장의 분위기에 눌렸다.
세 방향에서 울려대는 함성과 파도처럼 밀려드는 살기에 당황하고 말았다.
“애송아! 노부가 바로 천하낭왕이시다!”
낭왕이 적엽명을 덮쳤다.
강기를 잔뜩 일으킨 구환도가 광풍을 몰고 들이치자 적엽명의 눈이 크게 불거졌다.
차기 매화검주가 될 것인지 아니면 화산파의 장문인이 될 것인지 그의 선택만 남았을 정도로 매화검에 대한 조예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화산파 모두의 신뢰를 듬뿍 받고 있는 적엽명이었으나 후기지수의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었다.
낭왕이 보유한 일갑자 즉 육십 년에 달하는 공력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쾅!
적엽명이 낭왕의 공세를 정면으로 막았다.
노을빛 강기를 발휘하여 막긴 했으나 힘에서 밀려 두 걸음이나 물러나고 말았다.
바로 이때 좌우 양쪽에서 천사련의 무인들이 방책을 뛰어넘으며 난입하였다.
“크악!”
“끄아아악!”
방책 아래에 숨어 있던 무룡대원들이 무차별적으로 찌르고 베어버리자 방책을 뛰어넘는 족족 피를 쏟으며 나뒹굴었다.
“방책 아래 매복이다!”
천사련의 무인들이 방책을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덩치가 큰 자들과 내력이 상당한 자들이 온몸으로 부딪쳐대고 검기를 날려대자 방책들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급조하여 세운 것이라 한계가 명확했다.
그러나 나름 효과는 보아서 이십여 명이나 숫자를 줄였다.
“어디서 한눈을 팔아!”
낭왕이 외쳤다.
그의 기세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적엽명은 감히 정면으로 막지 못하고 매화검의 현묘함으로 응수했다.
미종보를 펼쳐 낭왕의 구환도를 피하고, 노을빛 검기를 일으킨 검으로 사각을 파고들어 불쑥 찌르고 그어댔다.
“이런 썅!”
낭왕이 소리치며 더욱 사납게 구환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미종보의 움직임이 워낙 종잡을 수 없는 데다 매화검의 현묘함이 천하에 일절이라 알려질 정도로 빠르면서도 변화막측하니 쉽사리 승부를 끝낼 수가 없었다.
이때 무당명검이 커다란 도끼를 휘둘러대는 흑마갱주와 격돌했고, 복호검후는 혈악주를, 청성의 도룡과 점창의 분광은 잔월교주와 도탑주를 각각 상대하였다.
낭왕과는 달리 흑마갱주 등은 공력으로 칠대문파의 후기지수들을 압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수련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실전경험이 있어서 칠대문파의 절학으로 중무장한 후기지수들을 연신 몰아붙였다.
문제는 적엽명과 무당명검 등이 포진한 일선 뒤쪽 중앙이었다.
좌우 양쪽에서 방책들을 무너트리고 물밀듯이 밀려든 것이다.
적엽명 등이 뒤로 물러날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인 데다 낭왕 등이 막연하게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강하여 그들을 밀치고 물러나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바로 이때가 화운이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남궁현, 선우유성!”
“옛! 대주님!”
“넵!”
“너희들이 어디에 있든 내 눈이 두 사람을 지켜볼 거야. 그러니 뒤는 나에게 맡기고 전방의 적들을 맘껏 쓸어버려! 가! 돌격해!”
“가자! 신풍대가 나가신다! 우와아아아아!”
“으하아아아아아!”
남궁현과 선우유성이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두 사람이 전장으로 뛰어들자 전황이 확 달라졌다.
전날 빽빽한 숲을 돌진하며 검을 휘둘러대던 수련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양쪽에서 밀물처럼 밀려드는 적들을 측면에서 일직선으로 관통하며 무작위로 베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저놈들을 막아라! 죽여 버려!”
천사련의 무인들이 남궁현과 선우유성에게로 방향을 틀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병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왼팔에 착용하고 있던 이무기 비늘방패가 철벽처럼 발휘되었다.
게다가 기쾌한 움직임으로 적진을 관통하며 팔다리 몸통 가리지 않고 베어버리는 남궁현의 속도는 천사련의 일반 무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빨랐다.
반면 선우유성은 느렸다.
하지만 일검을 휘두를 때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거나 몸통이 위아래로 분리되는 끔찍한 상황이 쉴 새 없이 이어지자 달려드는 자들보다 물러나는 자들이 더 많았다.
남궁현과 선우유성의 가세로 전황이 달라지자 무룡대원들도 힘을 냈다.
“물러나지 마라!”
“싸우자! 여기서 물러나면 끝이다!”
전장의 절대적 법칙 하나는 압도적인 전력이 이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절대적 법칙 하나는 광기가 전장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남궁검가의 남궁현이 바로 나다! 죽어라!”
적진을 돌파한 남궁현이 크게 외친 후 다시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선우세가를 얕잡아보지 마라!”
선우유성은 느렸다.
하지만 끔찍한 죽음을 내리며 전장의 사신처럼 적진을 휘저었다.
빠르든 느리든 두 사람의 검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바로 이때 어둠이 전장에 들어섰다.
고수가 모든 것을 뒤엎는다는 전장의 또 다른 절대적 법칙을 일깨워주기 위해.
전방에서 허공을 날아온 검은 안개가 피 튀기는 전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흑야의 환사로군.”
화운이 바로 알아보았다.
“백리 소저.”
“예.”
백리연이 환사에게 시선을 집중하며 대답했다.
“제가 가르쳐 준 검을 기억합니까?”
어찌 잊을까.
화운이 뒤에서 직접 손을 잡고 가르쳐 준 것을.
백리세가의 난화십이검이면서도 난화십이검이 아니었다.
“운연검(雲蓮劍).”
“예?”
“운연검이라고 이름 지었어요.”
“좋습니다. 운연검을 믿고 저 환사를 날려버리십시오!”
화운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이름 운과 백리연의 이름 연이 만난 검법명이라는 걸.
전장이다.
마음을 못 알아준다고 서운할 틈이 없다.
백리연은 곧장 몸을 날려 전장으로 달려갔다.
물을 차고 날아오르는 제비처럼 천사련 무인의 머리통을 밟고 솟구친 백리연이 환사를 곧장 덮쳤다.
그러자 검은 안개 속에서 한 줄기 시커먼 기운이 일직선으로 뻗어왔다.
백리연은 방패를 내밀어 비껴 쳐낸 후 신형을 빙글 돌리며 검은 안개 속으로 곧장 뛰어들었다.
이어서 운연검이 세찬 검세를 발휘했다.
화운이 가르쳐준 운연검은 무당검성에게서 전해진 건곤무상의 오묘한 가르침을 따르고 있어 사이한 기운에 특히 강했다.
물론 이제 첫 발을 디딘 백리연에게서 그와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순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환사의 환술에 당하지 않고 대항할 힘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백리연이 현란한 검초를 쏟아내자 사방팔방의 검은 안개가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듯 세차게 요동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화운은 이따금씩 검을 휘둘렀다.
그때마자 남궁현과 선우유성의 사각을 노리던 자들의 팔다리가 잘렸다.
남궁현과 선우유성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화운이 말했던 것처럼 자신들이 지켜지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래서 더욱 공격적으로 날뛸 수 있었다.
“꿇어라! 남궁현님이 나가신다! 푸하하하하!”
“선우세가를 물로 보지 말라고!”
선우유성은 오랜 설움을 폭발시키듯 성난 들소처럼 직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전장은 천사련과 무룡대조차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이 싸움의 주도자는 화운이었으니까.
이전 삶을 통해 낭왕 등의 강함 정도를 잘 알고 있던 화운이 어떤 싸움으로 전개될지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슬슬 천하십이흉이라는 노괴들이 나설 때가 되었는데······.”
화운은 전장 너머를 응시했다.
거인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거구의 노인과 선풍도골의 노인.
둘 다 쉽사리 만나기 어려운 강한 기도의 소유자들이었다.
“왜 일곱이 아니고 둘뿐일까?”
비천각의 부각주가 보낸 자에게 듣기로는 천사십이흉 일곱이 나섰다고 했다.
헌데 지금 전장 너머에 있는 자는 둘뿐이다.
화운은 그 이유를 금방 알아차렸다.
“그렇군. 맹의 지원군을 급습하려고 갔군.”
저들은 자신을 너무 쉽게 봤다.
저들 둘이면 자신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긴 모양이다. 예상 밖으로 고전하게 되더라도 시간 정도는 끌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도 안 되면 무룡대를 인질로 삼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을 테고.
어느 쪽이든 자신들이 질 수가 없는 싸움이라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계산은 처음부터 틀렸다.
화운에 대한 판단부터가 잘못되었으니까.
화운이 검을 휘둘렀다.
공간 속으로 파고든 검력이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튀어나와 무룡대원의 목을 베어버리려던 자의 팔을 잘라놓았다.
그리고 다시 사라졌다가 점창의 분광을 몰아붙이는 도탑주의 측면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기겁한 도탑주가 부리나케 뒤로 물러났다.
쓰-읏!
옷자락을 가르고 사라지는 검기.
느닷없이 튀어나왔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검기에 가슴이 서늘해진 도탑주는 이게 무슨 조화인지 몰라 당황한 눈만 두리번거렸다.
점창의 분광조차 누가 자신을 도와준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어리둥절하였다.
“저놈, 저놈이었어······!”
혈선이 당황하여 두 눈을 치떴다.
처음엔 자신이 잘못 본 것인 줄 알았다.
거리가 먼 데다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이들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가 않아서다.
그러다 가장 먼저 끝장을 볼 것 같은 도탑주의 싸움을 지켜보던 중 분명히 보았다.
공간을 열고 튀어나오는 검기를.
더 놀라운 건 환술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탑주의 옷자락이 날카롭게 베어져 나풀거렸으니까.
혈선은 전장을 다시 살폈다.
그리고 곧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천사련의 무인들 중 쓰러진 숫자가 일백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무룡대 쪽은 단 한 사람도 쓰러진 자가 없었다.
“이 무슨······!”
혈선의 눈이 더욱 커졌다.
지금 막 공간 속에서 튀어나온 검기가 무룡대원의 옆구리를 갈라버리려는 천사련 무인의 목을 잘라놓았기 때문이다.
혈선은 황급히 화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후방에서 전장을 두루 주시하며 빠르게 검을 휘둘러대고 있는 게 보였다.
“저놈을 막아야 해. 철탑.”
“제 차례입니까?”
“그래. 화산과 무당의 아이들을 먼저 잡아. 피떡으로 만들어도 좋으니 죽이지만 마. 그리고 저놈. 이상한 사술을 부리고 있으니 경계를 풀지 말고.”
“대형께서 직접 나서는데 저놈이 나한테 신경 쓸 겨를이나 있겠소?”
“그래도 모르는 일이니까, 경계 늦추지 마.”
“염려 놓고, 얼른 갑시다.”
“그래, 가자.”
“아그들아 죽었다고 복창해라. 으흐흐흐!”
철탑거왕이 괴소를 흘리며 성큼성큼 걸었다.
쿵! 쿵! 쿵! 쿵!
그의 걸음마다 땅이 울렸다.
지면이 푹푹 빠질 정도로 걸음부터가 남달랐다.
반면 뒷짐을 진 혈선은 유유자적 물 흐르듯 이동했다.
걸음을 내디디는 것조차 보이지가 않은데 철탑거왕이 걷는 속도에 맞춰 이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천하십이흉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혈선과 가장 포악하다는 철탑거왕이 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때 전장을 두루 주시하던 화운의 눈길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드디어 나서시는가. 하지만 후회하게 될 거요. 다른 다섯을 더 기다리지 않았던 것을. 물론 함께하여도 결과는 같을 것이지만.”
자신감 넘치는 화운의 검이 새파란 광휘를 일으켰다.
검멸.
일백 개의 검환이 검신에 잔뜩 맺히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