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89화 (89/207)

#089. 미끼들의 반란

어둠이 물러갔다.

간만에 두 발 뻗고 푹 잔 백리연과 선우유성 그리고 남궁현은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왔다.

화운은 그때까지 모닥불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밤새 그러고 있었어요?”

백리연이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운기를 해서 괜찮습니다.”

운기행공을 하고 나면 육신의 피로는 어느 정도 해소가 된다.

그래도 자신들 때문에 밤새 이러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니 이미 예상했었으면서도 미안한 마음이다.

화운은 미안해하는 백리연을 향해 일부러 웃어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이라고 해봐야 육포랑 건량뿐이지만, 내가 준비해 둘 테니 세 사람은 몸도 풀 겸 한 바퀴 돌고 와.”

“옛!”

씩씩하게 대답하는 남궁현을 필두로 하여 세 사람은 산속을 뛰기 시작했다.

화운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아섰다.

몇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적엽명과 무당명검, 복호검후 등이었다.

혼자가 안 되니 친구들과 힘을 합치겠다는 모습이라 헛웃음만 나왔다.

무룡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다섯 명이 화운을 향해 곧장 다가갔다.

화운은 팔짱을 끼며 그들을 기다렸다.

함께 오면서도 표정과 분위기가 제각각이었다.

무당명검과 복호검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차갑고 도도하고 날카로웠다.

점창의 분광과 청성의 도룡은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화산기룡 적엽명은 오만한 걸음에 기세가 등등했다.

이윽고 그들 다섯이 화운의 앞에서 멈추었다.

“우리끼리 이야기 해봤는데, 이젠 알아야겠어.”

자기들끼리 이야기해봤으니 따르라는 뜻이다.

“뭘?”

“벌써 며칠이 지났다. 내 판단으로는 장사를 크게 우회했으니 귀주성과 인접한 곳일 것 같은데, 아닌가?”

“맞아.”

“이번 임무, 뭐냐. 말해라.”

적엽명이 짧은 말로 압박했다.

화운은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주먹에 날려 버렸을 것인데, 천종천마교에 다녀온 이후로 정확히는 사황과 천마를 한꺼번에 대한 이후로 이렇게 하찮은 일로는 힘을 과시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렇게 몰려온 걸 보니 말하지 않으면 무력이라도 쓰겠다는 것 같군.”

“못할 것 같아? 누가 그딴 소문에 위축되어 하라는 대로 따르기만 할 것 같아?”

아무래도 작정하고 온 모양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달리 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화운은 팔짱을 풀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 패려면 어느 부위가 좋을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적엽명의 어깨 너머로 낯선 이가 등장하는 광경이 보였다.

망태와 호미 그리고 낫.

약초꾼인 모양이었다.

“비켜봐.”

화운이 말했다.

“뭐?”

적엽명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날 찾아온 손님이 있으니까 비키라고.”

그제야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적엽명이 돌아섰다.

“신풍대주이십니까?”

약초꾼이 화운을 향해 물었다.

“맞습니다.”

“비천각에서 전하라는 전갈이 있습니다.”

“따라 오십시오.”

화운은 약초꾼을 한쪽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마친 약초꾼은 화운과 헤어져 무룡대원들이 있는 쪽으로 갔고, 화운은 그의 모습을 조금 지켜보다 적엽명 등에게로 돌아왔다.

“비천각에서 뭘 알려준 거냐?”

“다들 한 자리에 모이면 알려주지.”

“아니, 우리가 먼저 들어야겠어. 말해.”

적엽명은 이 자리에서 화운이 주도권을 쥐지 못하도록 담판을 짓고 싶었다.

그래서 강하게 압박했다.

화운이 그런 잔꾀를 어찌 모를까.

“그렇게도 이번 임무를 도맡고 싶나?”

“신풍대는 겨우 넷이고, 무룡대는 일백이다. 어느 쪽이 임무를 주관해야 할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 일이다.”

“흠······.”

화운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곧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들 모이는 자리에서 이번 임무를 무룡대에 인계해 주지.”

화운이 수락은 했지만 다들 모이는 자리라고 하니 왠지 미심쩍었다.

하지만 주위를 살펴보면 조금만 언성을 높여도 다들 들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허튼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적엽명은 그렇게 엄포한 후 무룡대를 한 자리로 불러 모았다.

그러는 사이에 백리연을 비롯한 세 사람도 돌아왔다.

화운은 그들에게 손짓하여 한쪽에 자릴 잡으라고 지시했다.

“신풍대가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하기 힘들어 본대에 임무를 인계하기로 했다.”

적엽명이 그렇게 말한 후 옆으로 물러났다.

미리 말해둠으로써 화운이 말을 바꾸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화운은 피식 웃으며 모두의 앞에 섰다.

그리고 모두를 둘러보며 차근차근 말했다.

“대략 이레 전, 백여 명의 젊은 무인들이 정무맹을 나왔다. 행선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칠대문파와 오대세가를 비롯한 천하 정파의 후기지수들이라는 걸 알아낸 천사련은 수많은 고수들을 급파했다. 그들을 한꺼번에 사로잡아 정사대전을 끝낼 생각을 한 거다.”

잠잠하던 호수에 커다란 돌덩이를 던진 것 같은 충격과 파문이 모두를 뒤흔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적엽명 등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무슨 임무이기에 일을 이 따위로 진행한 것이오?”

우문산이 따지듯 소리쳐 물었다.

그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운을 쳐다봤다.

“무슨 임무인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다들 보라는 듯이 맹을 나섰나?”

“그게 무슨······.”

“남궁현 대원!”

“옛!”

“그날 신풍대는 북문 밖으로 어떻게 이동했지?”

“장사 땅을 벗어나는 상인들 틈에 끼어 은밀하게 빠져나갔습니다.”

남궁현이 대답하자 화운은 들었냐는 얼굴로 우문산을 직시했다.

그리고 힘주어 말했다.

“중요한 임무이니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내 실수고, 그런 말이 없었다고 하여 그렇게 모두가 보라는 듯 움직인 너희들의 실수다. 그러니 따지지 마라.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꼴이니까.”

단호하게 말한 화운은 우문산에게서 시선을 떼 무룡대 전체를 둘러봤다.

이때 누군가가 소리쳐 물었다.

“맹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소?”

“알고 있다. 좀 전에 비천각의 전갈을 받았는데 맹에서 보낸 지원군이 반나절 거리에 있으니 거기에 합류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화운의 말에 무룡대원들의 표정이 펴졌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며 안도의 말을 주고받았다.

화운은 그들을 바라보다 적엽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 임무는 별거 없었다. 너희들이 하도 지랄을 해서 적당히 이 근방을 정찰하다 복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맹을 나서는 너희들의 모습 때문에 상황이 바뀌었다. 너희들을 잡으려고 천사련의 정예가 움직이고 있으니 어찌 내버려두겠느냐.”

“설마?”

“설마라니, 당연한 거 아닌가? 너희들을 잡겠다는 자들을 두고 도망치겠다는 것이냐! 아, 참! 이번 임무, 너희들에게 인계하겠다고 했지. 난 여기까지다.”

화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한쪽으로 물러나 버렸다.

그러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적엽명 등을 모두가 바라보게 되었다.

적엽명은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화운이 저렇게 말해버려 반나절 거리에 있다는 지원군에 합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작정하고 자신들을 잡으려고 하는 천사련의 정예와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적엽명이 그렇게 곤혹스러워할 때였다.

“말은 쉽게 하는군. 너는 싸울 생각이었다는 것처럼 말해놓고 임무를 대뜸 인계해 버리다니, 맹에 복귀해서도 할 말이 있을 터, 아주 약았다.”

무당명검이 툭 내뱉듯이 말했다.

그러자 화운이 그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소리쳤다.

“남궁현 대원!”

“옛!”

“우리가 처음 맡았던 임무 기억하나?”

“옛! 장강입니다!”

“그때 우리가 받은 임무가 뭐였지?”

“장강의 선단이 장강을 따라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갔을 때 누가 있었지?”

“장강수로왕 외에 사천독왕까지 있었습니다.”

“결과는?”

“대형선박 한 척과 중형선박 열셋 척을 장강 속으로 가라앉히고, 흑사채주, 교룡채주, 무하채주를 죽였습니다.”

“잘 기억하고 있군, 그때 네가 무하채주를 죽였던가?”

“아닙니다. 무하채주는 선우유성 대원이 죽였고, 백리연 대원이 교룡채주를 그리고 전 흑사채주를 죽였습니다.”

“그랬군. 그때 정말 수고했어. 선우유성 대원!”

“옛!”

“두 번째 임무 기억하나?”

“옛! 천사련이 대륙전장을 노린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그들을 지켜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이화태양종이 노린 것은 대륙전장이 아니라 소림사였으며 대주님 휘하 본대는 소림과 함께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잘 기억하고 있군.”

화운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이때 남궁현이 끼어들었다.

“그날 태양존자가 대주님께서 날린 이기어검에 가슴이 꿰뚫리는 광경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함께 싸우게 되어 항상 영광입니다!”

“고맙군.”

화운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이런 일에는 선우유성보다 남궁현이 눈치가 빨랐다.

화운은 남궁현의 마지막 말에 두 눈을 부릅뜰 정도로 놀라고 있는 무당명검과 적엽명 등을 쓸어보며 말했다.

“무룡대는 가라. 천사련의 정예는 우리 신풍대가 맡겠다.”

화운은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그리고 신풍대원들과 함께 자리를 떠버렸다.

더는 왈가왈부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적엽명과 무당명검 등은 화운의 뒷모습만 쳐다봤다.

“졌군.”

무당명검이 중얼거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남궁검가의 소가주가 한 말이다.

거짓은 있을 수 없다.

사실일 수밖에 없다.

“이기어검으로 태양존자를 꿰뚫었다니······ 우리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모두의 심경을 대변하듯 말한 무당명검이 적엽명을 돌아봤다.

“대주가 말리지 않겠다면 이 싸움에 끼고 싶다.”

“······!”

보고 싶은 것이다.

이기어검을 발휘한다는 화운의 무공을.

복호검후도, 점창의 분광도 그리고 청성의 도룡도 적엽명을 응시했다.

또래에서 발군이라는 건 자질이 뛰어나서 일 수도 있으나 게으르지 않고 포기하지 않아서이기도 한 법.

모두들 보고 싶어졌다.

화운이 어떻게 싸우는지.

그 열의가 두 눈에 가득 차 있다.

적엽명이 그제야 피식 웃으며 허리를 폈다.

그 같은 광경에 우문산이 다급히 소리쳤다.

“무룡대는 돌아갑시다. 흑천, 낭혈, 도탑을 비롯한 천사련의 육지, 여섯 세력들과 한때 천하십이흉이라 불리던 사파의 거흉들이 모조리 몰려온다는데 무슨 임무란 말이오! 당장 맹의 지원군과 합류하여 돌아가야 하오!”

우문산의 외침에 다들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사련의 삼천육지 중 육지가 전부 나섰다면 물러나는 게 맞다.

제아무리 칠대문파와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이라 하더라도 흑야환사, 낭왕, 도탑주 등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잊혀진 이름이지만, 천하십이흉!

전대의 사파거두들로 천하백대고수에 들어가던 무시무시한 흉인들이다.

그러니 무룡대원들이 들썩거릴 수밖에.

“아직 모르겠나?”

적엽명이 소리쳤다.

그러자 모두들 들썩거리던 것을 멈추고 바라봤다.

“저 잘난 신풍대주가 우릴 미끼로 쓴 거다.”

모두들 또 다른 충격으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맹으로 돌아가는 즉시 우릴 미끼로 쓴 사실을 고변하겠어! 두고 봐, 썅!”

우문산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적엽명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다. 참고 싶지 않다. 그래서 싸울 생각이다. 우리는 한낱 미끼로 쓰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저 잘난 신풍대주한테 보여주겠다.”

“그게 무슨 말이오! 싸우겠다니!”

“이곳에서 이틀을 머물겠다고 했으니 그때쯤이면 천사련과 맞닥트리게 될 거다. 그러니 그때까지 이곳에 방책을 만들어 감히 우리를 잡겠다는 천사련의 무리들을 상대할 비책을 세운다.”

“대주!”

우문산이 목에 핏대를 세웠으나 적엽명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한때 자네가 병법에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네. 난 그쪽에 문외한이니 전투준비는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적엽명이 청성의 도룡에게 말했다.

“좋네. 대단치는 않지만 머리를 쥐어짜 우리들이 가진 힘을 극대화할 방편을 만들어보겠네.”

“좋아. 다음은 정찰을 책임져 줄 사람이 필요하네.”

“그건 내가 맡지.”

무당명검이 나섰다.

“좋네. 필요한 인원은 얼마든지 차출하게.”

“내 사제들이면 충분하네. 어려서부터 무당산을 뛰어다니며 함께 놀았던 녀석들이니까.”

“자네가 사제들이랑 함께 놀았다고? 믿을 수가 없군!”

적엽명의 놀림에 무당명검이 홱 돌아서 가버렸다.

적엽명은 피식 웃으며 복호검후와 점창의 분광을 돌아봤다.

“우린 또 필요한 게 뭔지 궁리해 보세.”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일사불란하게 정리가 되자 적엽명이 고개를 돌려 멀어지고 있는 화운을 바라봤다.

“앞서가는 자를 시기질투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이제는 알 것 같아.”

적엽명의 얼굴엔 오만과 시샘이 사라지고 싸움에 임하기 직전의 각오만이 가득했다.

화산의 장로인 한매검 이심환과 다른 칠대문파의 장로들이 각파에서 애지중지하는 제자들을 화운에게 맡긴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처음엔 오만하게 구느라 섞이지 못하겠지만, 함께 다니다보면 틀림없이 깨닫는 바가 있을 거라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바람과 기대가 맞아 떨어졌다.

칠대문파는 결국 칠대문파인 것이다.

다만 그들이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는 것이 문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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