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정말 모르겠다
화운과 신풍대는 방장대사를 비롯한 소림 전체의 환영을 받았다.
화운은 맹주님이 보내서 왔고, 다른 임무가 있어서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말한 후 소림사를 빠져나왔다.
“저기······.”
소림에서 멀어지자 선우유성이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다.
화운은 눈길 한번 주고는 가던 걸음을 계속 옮겼다.
“너랑 나 사이에 할 말이 있으면 하면 되지 뭘 그렇게 어려워하고 그러냐?”
“형이 너무 달라져 보이니까 그렇지.”
“뭐가?”
“너무 강해.”
“뭐?”
“강해도 너무 강해졌다고? 아무리 검마 대협께 배웠다고 해도 이해가 안 돼. 너무 강해.”
“제 생각에도 너무 비상식적입니다. 태양존자를 그렇게 간단히 처치하는 걸 보니 천하제일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남궁현도 끼어들어 한 마디 했다.
아직까지도 놀람이 가시지 않았다는 표정이었다.
장강에서야 장강수로왕, 사천독왕이랑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 그들이 화운과 싸우는 걸 꺼려하나 보다며 애써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태양존자를 쓰러트리는 광경은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어쩌면 천하제일을 논할 정도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올랐었다.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백리연도 한 마디 했다.
화운은 걸음을 멈추고 세 사람을 둘러봤다.
모두들 궁금증이 한가득인 얼굴들이었다.
선우유성은 거기에 걱정까지 하고 있었다.
“너는 어째 네 앞가림도 잘못하면서 내 걱정을 하고 그러냐? 어려서도 그러더니 그게 버릇이 되었냐?”
“형이니까 그렇지. 형도 내 걱정하잖아.”
“나야 형이니까 그런 거고.”
“저기······.”
남궁현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왜?”
화운이 돌아보며 물었다.
“저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뭘?”
“그야 당연히 대주 형님이시죠. 아, 걱정 됩니다. 정말 걱정 됩니다. 너무 강해서······ 여튼 걱정됩니다.”
놀란 중에도 농을 부리듯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남궁현이다.
가만 살펴보니 걱정 되는 게 아니라 궁금하니까 뭐든 빨리 알려달라는 기색이 뚜렷했다.
그런데 백리연도 가세했다.
“저도 걱정돼요.”
“무슨 걱정을······?”
“우리랑 딴 세상 사람이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닌가 하고요.”
“예?”
“그만큼 이해가 안 된다는 뜻이에요. 화 소협의 무위는 너무 놀라워요. 너무 강해서 어느 날부터는 함께 있는 것조차 못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어요. 강한 만큼 큰일을 하셔야 할 테니까요.”
백리연의 표정은 화운이 부담을 느낄 정도로 무척 진지해 보였다.
화운은 백리연, 남궁현 그리고 선우유성을 차례로 둘러본 후 다시 걸었다.
“일단 좀 씻는 게 좋겠어.”
세 사람은 서로를 돌아봤다.
다들 여기저기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옷은 물론이고 손과 얼굴에도 묻어 있었다.
큰 싸움을 벌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세 사람은 화운의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무공의 고수가 되면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다. 그중의 하나가 개울이나 강을 찾는 것이다.
화운은 대기를 살펴 물의 기운이 많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숭산에서 흘러내려온 계곡이 나왔다.
물도 제법 많았다.
“얼굴 좀 씻고, 옷은 대륙전장에 부탁해서 갈아입을 수 있도록 할 테니까 피가 너무 많은 부분만 대충 씻어내.”
화운의 말에 세 사람은 말 잘 듣는 아이들처럼 가죽신을 물가에 벗어놓은 다음 계곡물에 들어가 손과 얼굴부터 씻기 시작했다.
화운은 세 사람과 달리 피가 많이 묻어있지 않았음에도 함께 들어가 손과 얼굴을 씻었다.
한여름인데도 계곡이라서 물이 무척 시원했다.
네 사람은 그 시원함이 좋아 다 씻은 다음엔 큰 바위에 앉아 발을 담갔다.
“좋구나! 이게 얼마만의 여유냐!”
화운이 큰 바위에 벌러덩 누우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편해 보여 세 사람도 다른 큰 바위들을 찾아 발만 담근 채 누웠다.
“백리 소저 말대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어서 다는 말해주지 못해.”
화운은 하늘을 떠가는 하얀 구름을 바라보며 그렇게 입을 열었다.
“내가 강해진 건 스승님께 제대로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천마존의 비동에서 기연을 얻어서야.”
기연이라는 말에 세 사람이 고개를 들고 바라봤다.
“혹시 그 비동을 무너트렸다는 자가?”
“그래, 나야.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들어가 봐야 사람들 목숨을 빼앗는 기관들만 잔뜩 있거든. 그래서 더 들어가지 못하도록 무너트렸어. 너희들도 나 때문에 산 줄 알어.”
“그랬군요. 그 사람이 대주였었어.”
남궁현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선우유성과 백리연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유성이한테 먹였던 영약들을 나도 많이 먹었어. 그리고 제천마존이 숨겨놓은 무공들도 얻었고.”
“무슨 무공을 얻었습니까?”
남궁현이 얼른 물었다.
“지금 맹주님과 여러 어른들이 함께 모여 있는 건 내가 얻었던 무공을 공개했기 때문이야. 나중에 맹주님께서 공표하시게 되면 자연 알게 될 테니까 그때까진 묻지 마.”
화운은 자신이 겪었던, 아직도 겪고 있는 전부를 말하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이 강해진 것에 대한 설명이 되도록만 적당히 꾸며서 이야기했다.
다들 완전히 납득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영약들과 제천마존의 비동에서 기연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화운이 강해진 이유가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되었기에 하늘을 쳐다보며 누웠다.
“대단하네요. 그런 걸 다 공개하다니.”
백리연이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같으면 공개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남궁현이 솔직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천사련을 몰아내려면 한 사람이라도 더 강해져야 하니까 공개한 거겠지. 나라도 형처럼 공개했을 것 같아.”
“그래, 넌 순딩이처럼 착하니까.”
선우유성의 말을 남궁현이 핀잔하듯 받았다.
“착해서가 아니라 그게 맞는 거야.”
선우유성이 반박했다.
그러자 남궁현이 상체를 세웠다.
“멍청아. 한 사람이라도 더 강해져서 천사련을 몰아내는 게 좋다는 걸 누가 모르겠어? 알면서도 왜 칠대문파와 오대세가에서는 절학들을 공개하지 않는 건데?”
“그건······!”
“천하의 안녕 못지않게 각파와 각개인의 자산도 중요한 거야. 사람인 이상 자신의 것을 지키고 싶은 건 당연한 거라고.”
선우유성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화운만 쳐다봤다.
왜 공개한 거냐는 표정이었다.
화운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으나 그런 선우유성의 시선을 느꼈다.
“현이 말이 맞아. 그게 정상이야. 나 역시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왜?”
“괴물이 나타났거든.”
“예에?”
너무 엉뚱한 말 같아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선우유성.
백리연과 남궁현도 비슷한 얼굴로 화운을 돌아봤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극비 중의 극비다. 맹주부에 계시는 분들만 알고 있으니까, 정식으로 공표하기 전에는 실수로라도 말해서는 안 돼.”
“절대 말하지 않을 게.”
“입에 자물쇠를 채우겠습니다!”
“저 역시.”
선우유성, 남궁현 그리고 백리연이 차례로 말했다.
그러자 화운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 그대로 말했다.
“사황이 나타났어.”
“에?”
“사황이 누군데?”
“백여 년 전 사황혈천의 그 사황이야.”
“······!”
화운의 설명에 세 사람의 얼굴이 놀람으로 잔뜩 굳어버렸다.
“놀랍지? 황당하지? 근데 그게 사실이야. 천사련과 싸워야하겠지만, 더 큰 적은 사황이야. 그래서 맹주부에 어른들이 그렇게 처박혀 있는 거다. 세상 참 힘들게 돌아가지? 하늘은 왜 이렇게 사람 힘들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그냥 좀 때가 되면 사황이나 천마 같은 사람은 알아서 지옥으로 던져 버리면 좀 좋아.”
사황에 이어 천마까지 들먹이자 세 사람의 안색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운의 중얼거림은 계속 됐다.
“그들이 하늘의 말을 더럽게도 안 따르는 역천의 존재라서 그러는 건가? 하늘도 손닿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린 걸까? 역천, 역천······! 시간을 뒤트는 건 역천이다. 하여 역천의 존재인 그들에게는 이 땅에 남을 힘을 실어줄 뿐이다!”
화운이 갑자기 상체를 일으키고 앉았다.
혼자 중얼거리다 보니 무당검성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다.
“시간을 뒤트는 것 자체가 역천이라면 그 짓을 해댄 난 뭐지? 나도 역천의 존재인 건가? 그렇게 되어버린 걸까?”
화운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이리저리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만 하늘의 법도와 관련된 일이라 도통 알 수가 없다.
“아, 정말······ 정말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좀 이대로 쉬자.”
화운은 체념하듯 투덜거리며 다시 벌러덩 뒤로 누웠다.
흰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은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
개봉 외곽 도림객잔.
오십 대 중노인이 안으로 들어가자 병장기를 든 육십여 명이 반갑게 맞았다.
“알아보았느냐?”
“어린 계집년이 납치당한 게 맞습니다. 죽림원의 식객들이랑 백의대가 허겁지겁 장원을 떠난 건 그년을 구하기 위해서고.”
“허면 장원이 텅텅 비어 있는 게 사실이로군.”
황의노인 뇌공량이 눈빛을 빛냈다.
별호는 없다.
오래전부터 이름으로만 불렸다.
하지만 그들만의 세상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만의 위치를 확고히 자리 잡고 있는 그다.
이번 계획만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뇌공량이 설계하고 그가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천사련과 정무맹의 싸움으로 천하가 어수선한 틈을 노린 것이고, 어째 염라왕이 도우셨는지 전력이 만만치 않은 죽림원의 식객들과 백의대마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기습적으로 벌이게 되었지만, 천하의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할, 그리고 훗날 두고두고 회자될 대단한 약탈계획이었다.
뇌공량이 모두를 둘러보았다.
반월도, 적혈자, 청죽귀, 화골장, 흑갈, 잔풍괴 등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파무림에서 나름의 흉명을 과시하고 있는 자들이다.
뇌공량의 시선이 다시 움직여 한쪽으로 향했다.
거기엔 흑의장포를 걸치고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음산노괴다.
천사련에 섞여들지 못해서 그렇지 들어가기만 한다면 낭왕, 녹림왕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고수다. 일각에서는 그들보다 더 위일 거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그러니 죽림원의 식객들이랑 백의대가 자리를 비워버린 대륙전장 하나 털어먹는 건 일도 아니다.
“모든 일에는 때와 시기라는 게 있지. 텅텅 비어버린 대륙전장을 털어먹을 최적의 때와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평산채를 기다릴 것도 없이 지금 친다.”
뇌공량이 결정을 내렸다.
애초 계획은 녹림의 평산채와 함께 약탈하는 것이었다.
평산채 백오십 산적들이 소란을 피우는 사이에 자신들이 최대한 빠르게 대륙전장의 일족들을 사로잡는다는 계획이었다.
죽림원의 식객들 중 나름 한가락 하는 자들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쪽에는 음산노괴가 있으니 실패할 수가 없는 계획이었다.
그럼에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변했으니 애초의 계획을 버리고 지금 바로 쳐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가자!”
뇌공량을 선두로 한 육십여 명의 무리가 객잔에서 쏟아져 나와 도심 한복판의 대륙전장을 향해 몰려갔다.
대륙전장 정문 앞.
빠른 걸음으로 몰려가던 육십여 명의 도적들은 대륙전장의 정문을 오십여 보 앞두고 일제히 멈췄다.
그들이 보는 가운데 두 사람이 정문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돌아섰다.
일노일소.
한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아이.
그저 노인이라고 하기엔 기도가 범상치 않은 노인이고, 아이라고 하기엔 조금 성숙한 소녀였다.
“저, 저년이다. 저년이 대륙전장의 장주가 가장 아끼는 계집아이다. 틀림없어, 내가 본 적이 있어!”
뇌공량의 뒤쪽 무리들 중의 누군가가 화수련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잡아!”
“저년만 잡으면 끝이다!”
“잡아라! 잡아!”
노인의 기도가 심상치 않아 보여 뇌공량이 선뜻 결단을 내리기도 전에 대륙전장을 코앞에 두고 잔뜩 흥분하고 있던 도적들이 앞 다퉈 튀어나갔다.
백주 대낮에 육십여 명이나 되는 숫자가 날이 시퍼런 날붙이들을 뽑아들고는 개떼처럼 몰려오는 광경은 실로 살벌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게다가 한 명 한 명이 사파세계에서 나름 살벌한 흉명을 과시하는 자들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노인은 별반 놀라지도 않는 모습으로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성큼 한 걸음 움직여 계집아이의 앞을 막아서며 검자루를 잡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뇌공량이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힌 순간.
“사신한테 스스로 머리통을 집어넣는 꼴 하고는. 끌끌끌!”
“······!”
뇌공량의 옆에서 음산노괴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