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79화 (79/207)

#079. 검마를 다시 만나다

요가랍과 모사성은 이화태양종의 단둘뿐인 호법이다.

호법은 종주와 이화태양종을 최후까지 지키는 존재이기에 천하무림에 나올 일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러나 정사지간이면서도 마(魔)라 불리는 검수가 있다는 소문 정도는 듣고 있었다.

“검마! 듣던 대로 광오하구나. 감히 이화태양종의 일에 끼어들려 하다니.”

“뼈라도 온전히 남기고 싶거든 썩 물러가라!”

요가랍과 모사성은 종주의 명을 우선시 하고자 치미는 분노를 다시 한번 참았다.

그러나 검마는 이 둘을 그냥 놓아줄 수가 없었다.

“그 아이를 내려놓아라. 아니면 죽는다.”

검을 비껴들고 선 검마의 모습은 담담해 보였다.

그러나 눈빛은 달랐다.

지독한 살의가 불길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모사성이 옆구리에 끼고 있는 아이.

얼핏 봐도 아직 소녀에 머물러 있는 아이다.

이화태양종의 늙은이들이 어린 소녀를 저런 모습으로 데려갈 일이 무에 있을까.

유괴다.

본 순간 알아차렸다.

아들 내외를 죽이고 손자를 데려간 흉수.

그자와 같은 짓을 벌이고 있는 유괴범들이다.

참을 수 없다.

쓰앙!

검이 대기를 갈랐다.

어찌나 빠르게 그었는지 파공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모사성이 화들짝 놀라 훌쩍 몸을 날렸고, 그와 동시에 요가랍이 이화태양종의 호법들에게만 전해지는 초극이화장을 펼치며 달려들었다.

시뻘건 장력이 화염처럼 뿜어져 왔으나 검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사성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번쩍!

사혼구검의 제 일초 사혼섬.

검마는 검강의 경지에 오른 이후로는 거의 펼쳐본 적이 없는 극쾌의 검초를 펼쳤다.

그만큼 어린 소녀를 구하고 싶었다.

찰나를 가르는 사혼섬의 검초가 어찌나 빠른지 모사성 같은 고수조차 팔이 잘릴 것 같아 옆구리에 끼고 있던 소녀를 놓아버리고 다시 한번 몸을 날렸다.

바로 이때 요가랍이 발휘한 초극이화장이 검마에게 작렬했다.

콰릉!

튕기듯 밀려난 검마.

모사성이 소녀를 놓아버리고 물러나는 광경을 확인하자마자 빙글 돌아 시뻘건 화염 같은 장력을 막았으나 약간 늦은 감이 있어 충격을 받았다.

이화태양종의 두 호법을 상대하는 상황에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부상을 당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검마의 눈길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소녀에게로 향했다.

혈도를 제압당해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으나 자신을 쳐다보는 눈을 보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겁먹지 말거라. 반드시 집으로 돌려보내 주마.”

온화하고 자상한 표정을 잊은 지 오래인 검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충분히 부드러웠고, 눈빛은 따스했다.

그 덕분에 소녀는 조금은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살다 보면 때로는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 나이 먹고도 이와 같은 실수를 한 걸 보니 그만 관속에 처박힐 때가 되었나 보다.”

요가랍이 기세등등 말을 내뱉었다.

모사성은 소녀를 놓아버린 것 때문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할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검마는 그런 둘을 향해 돌아서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약속하지. 이 아이는 결코 데려가지 못할 거라는 걸.”

자신의 손자는 여태 구하지 못하고 있으나 자신의 눈에 들어온 아이만큼은 반드시 지키고 싶은 검마다. 그래서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이 결연한 의지로 불탔다.

양쪽 다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공존이 불가한 세불양립 상태다.

“죽여주마!”

먼저 움직인 건 자존심을 구겼던 모사성이다.

그의 분노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게 만들었다.

지독한 불길 같은 시뻘건 장력이 모사성의 두 손에서 뿜어졌다.

검마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벼락같이 검을 그어 올렸다.

둘의 공세가 정면으로 격돌하기 직전 요가랍이 움직였다.

누가 우세를 보이든 격돌의 순간을 치고 들어가 검마에게 강력한 초극이화장을 작렬시킬 생각인 것이다.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노림수다.

쾅!

모사성의 장력이 터졌다.

검마의 상체가 휘청거렸다.

그 틈을 비집고 요가랍의 쌍장이 불쑥 들이닥쳤다.

휘청거리던 몸을 빙글 돌려 사혼구검의 삼초식 사혼격을 펼치는 검마.

원을 그리며 뻗어나간 검격이 시뻘건 장력과 요가랍의 몸뚱이를 한꺼번에 그었다.

검신에 이글거리는 시퍼런 검강이 검이 미치는 간격을 한 자나 벌려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망할!”

깜짝 놀란 요가랍이 초극이화장의 장력을 탄의 묘리로 쏟아낸 후 뒤로 몸을 날렸다.

검마는 그대로 검을 휘둘러 요가랍이 발출한 장력을 갈라버리고는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물러나는 요가랍을 덮쳤다.

바로 이때 모사성이 측면에서 전광같이 짓쳐 들었다.

검마가 요가랍을 덮쳐가던 것을 멈추고 모사성을 향해 신형을 틀었다.

요가랍이 오른발로 강하게 땅을 찍어 물러나던 것을 멈추고 검마를 향해 다시 장력을 일으켰다.

순간 검마가 빠르게 빙글 돌았다.

그리고 측면에서 짓쳐오는 모사성을 내버려두고는 물러나다 말고 자신을 향해 장력을 일으키고 있는 요가랍을 향해 섬광의 검초를 폭발시켰다.

번쩍!

“······!”

섬광의 검초가 찰나를 갈라버린 순간 ‘퍼억!’ 하는 충격파가 검마의 등짝에서 터졌고 크게 휘청거리는 검마의 입에서 한 줄기 피화살이 뿜어졌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고통에 찬 신음.

“크윽!”

신음을 터트리는 요가랍의 어깨에서 피가 쏟아졌다.

어깨 바로 아래에서 한쪽 팔이 싹둑 잘려버렸다.

이대도강(李代桃?)! 육참골단(肉斬骨斷)!

검마는 두 호법들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도 없고 정상적인 싸움으로는 완벽히 물리칠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두 호법들이 그만큼 강했다.

그래서 자신의 살을 내주고 상대의 뼈를 취하는 고육책을 썼다.

하지만 아쉬운 결과다.

애초 노렸던 건 요가랍의 팔이 아니라 목이었으니까.

요가랍이 병장기를 사용하는 자였다면 아쉬운 대로 괜찮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가랍은 양손을 다 발휘할 줄 아는 장공의 고수였다.

두 손을 하나로 줄였을 뿐이니 이득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놈!”

요가랍의 팔이 잘린 것에 모사성이 광분하듯 달려들었다.

지독한 열기가 그의 쌍장에서 뿜어졌다.

검마가 검을 휘둘렀다.

콰앙!

굉음과 함께 검마가 휘청거리며 몇 걸음을 물러났다.

“머리통을 부숴 버리겠다!”

사납게 달려드는 모사성.

오른발로 땅을 크게 밟아 중심을 잡은 검마가 팔을 들고 검을 일직선으로 뻗어 흉신악살처럼 사납게 달려드는 모사성을 가리켰다.

“누가 그 따위 허세에 넘어갈 것 같으냐!”

모사성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초극이화장을 퍼부었다.

검마의 발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모사성을 가리키고 있던 검이 그 한 걸음만큼 일직선으로 쭉 뻗었다.

“흥!”

모사성이 코웃음 친 순간 그가 발휘한 초극이화장과 검마의 검극이 서로 맞부딪쳤다.

쾅!

모사성의 예상을 비웃듯 굉음이 터졌다.

그리고 날카로운 검끝이 불쑥 튀어나왔다.

푹!

“······!”

소스라치게 놀란 모사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니 검마의 검이 가슴을 깊이 찌르고 있는 게 보였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모사성은 몰랐다.

그저 그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은 검초가 사혼구검의 마지막 절초라는 걸.

사혼종극!

사혼구검의 끝이자 상대방의 끝을 알리는 검초였다.

“검마!”

뒤늦게 정신을 차린 요가랍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피를 많이 쏟아 창백해진 얼굴에 주체 할 수 없는 분노가 폭발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 남은 손에 남은 공력을 모조리 쏟아부으며 달려왔다.

덥석!

“검마 이놈! 함께 가자. 지옥으로!”

모사성이 자신의 가슴을 찌른 검날을 움켜잡으며 웃었다.

“······.”

검마는 무심해 보일 정도로 담담한 눈빛으로 모사성과 요가랍을 번갈아보더니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초극이화장에 정통으로 격중당한 상태에다 사혼종극을 펼치느라 공력의 태반을 소모해 버린 검마에게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혼마저 단련해야 익힐 수 있다는 연혼팔검.

연혼팔검은 감각의 검이다.

본능적으로 죽음을 찾아낸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과 가까워야 한다. 의식이 인식하기도 전에 검끝이 죽음을 찾아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극한일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 바로 연혼팔검이다.

검마가 눈을 번쩍 떴다.

순간 그의 눈앞에 막대한 기운의 유동이 일어났다.

콰앙!

초극이화장이 터지는 소리였다.

“감히 당신 따위가 검마 대협을 노려?”

검마는 흠칫 놀랐다.

한 사내가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처럼 나타난 것에 놀랐고, 그가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그 사내가 요가랍을 일격에 쳐 죽이는 광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빠각!

얼굴이 뭉개진 요가랍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날아갔다.

“누, 누구냐! 누가 감히 태양존자께서 내리신 명을 방해하는 것이냐!”

“태양존자? 아! 다 끝났다면서 자폭해 버린 늙은이!”

크게 조소를 내뱉은 사내는 다름 아닌 화운이었다.

화운은 태양존자와 싸운 적이 있었고, 이제 막 흉내 내는 정도에 불과한 이기어검으로 태양존자의 가슴을 꿰뚫어버렸었다.

화운과 신풍대에 의해 이화태양종의 태반이 몰살해 버리자 태양존자는 스스로 자신의 육신을 터트리는 강수까지 두었었다.

물론 화운이 시간을 돌리기 직전의 삶일 때의 이야기였다.

“이놈! 누가 자폭을 했단 말이냐!”

모사성이 소리쳤다.

순간 검마가 검을 단숨에 뽑아버렸다.

핏!

검날을 움켜잡았던 모사성의 손가락들이 일제히 잘려버렸고, 검이 뽑힌 가슴팍에서는 피가 튀었다.

“이, 이것들이 감히······!”

크게 휘청이며 악을 쓰려던 모사성의 머리통이 둥실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굴렀다.

검마가 검으로 베어버린 것이다.

화운은 그 광경을 힐끔 본 후 검마를 향해 섰다.

“여기에 계셨던 겁니까? 어디 멀리 가셨을 줄 알았습니다.”

화운이 머쓱하게 웃으며 반가움을 드러냈다.

그런데 화운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게 된 검마의 눈이 성난 빛으로 가득 차올랐다.

“네놈이로구나! 네놈이었어!”

“예?”

검마는 화운을 알아봤다.

자신을 지나쳐가며 제천마존의 비동을 무너트린 얼굴을 어찌 잊을까.

검마의 얼굴이 극도로 차가워지자 뒤늦게 그 상황을 깨달은 화운이 다급히 말했다.

“배운검, 비응삼십이검, 사혼구검까지 익히고, 연혼팔검은 훗날 원혼들로 검이 무거워질 때 배우기로 한 화운입니다.”

“······!”

검마의 얼굴이 놀람과 당혹으로 물들었다.

“잠시만 화를 누그러트리고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허면 전부 이해하시게 될 겁니다.”

검마는 헤매고 있었다.

갈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혹은 가야할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정확히는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다.

갈수록 빨라지는 것 같은 세월이라는 무게 앞에.

흉수를 찾고 손자를 돌려받고자 천하를 떠돈 게 벌써 십 년이 넘는다.

마음은 황폐해지고 육신은 노쇠해졌다.

마지막 희망으로 찾아갔던 제천마존의 비동이 결정적이었다.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게 비동이 무너지자 그의 마음도 무너져 버렸다.

몸과 마음이 무너졌어도 손자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까지 무너진 건 아니어서 여기까지 왔다.

마음이 갈가리 찢어지고, 육신이 썩어 문드러져도 결코 멈출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본 게 두 늙은이들에게 납치되고 있던 소녀였다.

검마는 대노했고, 육신을 던져서라도 구해야 했다.

소녀는 또 다른 자신의 손자와 마찬가지였으니까.

납치되어 가는 소녀의 모습에 손자의 모습이 겹쳐져 손자처럼 여겨졌으니까.

그래서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수법까지 써가며 구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나타난 게 화운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제천마존의 비동을 무너트려버린 얼굴이었다.

그런데 어찌 자신이 익혔던 검법들을 모조리 꿰차고 있단 말인가?

놈의 말대로 잠시만, 아주 잠시만 화를 누그러트리고 들어보니 실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니?

사황이라니? 천마라니?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되어서 자제분의 원흉을 찾는 일에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화운이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검마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분노는 사라지고 혼란과 답답함만이 남았다.

길어지는 답답함 속에 가만히 화운을 응시하고 있자니, 화운이 겪고 있다는 일들에 대해 하나하나 뜯어보게 되었다.

놀랐을 것이나 신났을 것이다.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영약들을 복용하고 자신에게 검을 배웠을 땐 천하를 가진 듯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황이 등장하면서부터 모든 게 바뀌었을 터.

천마의 존재함을 알았을 땐 망망대해에 위태롭게 떠 있는 조각배에 혼자 내던져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검마는 화운을 다시 보았다.

“고달프구나. 너의 삶도.”

“······!”

화운이 고개를 들고 보니 화를 완전히 거둔 검마의 얼굴이 보였다.

무표정해 보일 정도로 담담한 얼굴이었다.

허나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에 감돌고 있는 감정은 측은지심이었다.

한동안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도 했던 사이이거늘 무심함 뒤에 숨겨진 감정을 어찌 못 읽을까.

화운은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검마의 눈길에 가슴속에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선우세가의 숙모 이옥영에게서나 느껴보았던 따스함이었다.

화운은 자신도 모르게 넙죽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제 일도 스승님의 일도 모두 함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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