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 천마신위
멸제를 처리한 천마가 손을 거둬들였다.
자신의 손짓조차 방해할 만한 이가 없다는 듯 여유가 넘쳤다.
그렇게 손을 거둬들인 천마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아수라광장에 마련된 단상.
그곳엔 숨 막히는 공포가 짓누르고 있었다.
멸제를 따라 단상에 자리한 자들.
교를 움직이는 높은 자리의 인사들이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버러지 같은 것들! 감히 본좌를 기망하다니!”
천마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천천히 허공으로 올라가는 천마의 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자들은 보지 못했으나 화운은 천마의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천마의 손이 가슴 앞에서 멈추는가 싶더니 아래로 쓱 움직였다.
순간 화운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쿠-웅!
거대한 유성이 단상 위로 떨어진 것 같았다.
단상이 있던 자리에 반경 십여 장은 될 것 같은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버렸다.
그리고 그곳에 짓이겨진 시체들이 잔뜩 널브러졌다.
백룡포의 마존, 광명좌사와 북명우사, 세 명의 원로호법들과 다섯 명의 무상들.
삼십육대마와 칠십이살마들의 태반까지, 교의 주요인사라는 자들이 모조리 어육처럼 짓이겨져 즉사해 버렸다.
단단한 몸뚱이를 자랑하던 마경도 피 터진 육편일 뿐이었다.
“마, 말도 안 돼!”
화운이 중얼거렸다.
천마의 엄벌이 가해진 순간 잽싸게 튀어 화를 면했지만, 살았다는 안도감 따위는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단상 위에 있던 고수들을 일격에 짓이겨 버린 가경할 힘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랐다.
거기다 화운은 분명히 보았다.
허공이 열리며 거대한 손이 지상을 직격하는 광경을.
악마의 손!
공력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악마의 손 같았다.
검붉은 빛이 감도는 살갗에 세 치는 되어 보이는 손톱.
누가 봐도 악마의 손이었다.
“일, 일융무애가 이토록 초라하다니······! 저건 사람이 아니야!”
화운의 옆에서 한 사람이 놀라 중얼거렸다.
무불통이었다.
천마가 엄벌을 내린 순간 화운이 무불통의 팔을 붙잡아 함께 피했다.
화운이 돌아보니 무불통은 넋 나간 얼굴로 주저앉아 천마만 쳐다보고 있었다.
화운은 무불통이 한 말을 듣고는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일융무애? 그것이 당신이 말한 진법이오?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고수를 상대할 수 있게 해준다는?”
“맞아. 그게 일융무애야. 근데······ 근데······ 멸제는 써보지도 못하고 죽었어. 아니 써도 마찬가지야! 결과가 달라질 턱이 없어! 저걸 무슨 수로······!”
무불통은 자신이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지도 모를 정도로 넋이 나갔다.
천마의 무력이 그가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평생의 집착이 쓸모없게 되어서 그가 받은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무불통은 허탈감에 절망했다.
누가 더 강하고, 누가 교주 자리에 앉을지는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일융무애의 효용을 증명하는 것뿐이었다.
그 때문에 마교까지 온 것인데, 천마의 등장과 함께 반평생의 집착이 먼지가 되어버렸다.
사실 무불통의 연구가 쓸모없지는 않았다.
일융무애(一融無碍).
하나로 합치면 거리낄 것이 없다는 이름처럼 대기의 기운을 끌어들여 하단전의 공력과 합일하여 더욱 강력한 파괴력을 이끌어내는 진법이다.
더 놀라운 건 시전자의 몸에 직접 그리는 진법이라 무공처럼 불시에 펼칠 수도 있어 대단한 묘용을 발휘한다.
‘멸제에게 그 진법을 주었는데, 그는 써보지도 못하고 당했다고? 게다가 썼어도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화운도 허탈감이 치밀었다.
천마에 대한 두려움이 일순간 사라져 버릴 정도였다.
허망한 눈으로 무불통을 바라보던 화운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천마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눈동자가 보이진 않았으나 그의 시선은 분명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화운은 천마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그를 향해 섰다.
‘천마······ 오라면 가버릴 것이고, 가라면 더 빨리 갈 거다.’
화운은 천마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혼자 뭐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항거불가인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화운은 그것에 사로잡혔다.
천마는 싸울 생각이 없는 화운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화운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처음 모습을 보일 때 그랬던 것처럼 멀리 동남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것이냐!”
내력이 실린 천마의 음성이 항거할 수 없는 위엄과 함께 거침없이 뻗었다.
그러자 저 멀리 동남 방향에 있는 산 정상에서 뇌성 같은 일갈과 함께 빠른 속도로 쏘아져 오는 인영이 있었다.
“탈마를 하지 않았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종천마교 동남쪽 하늘 위로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사황이었다.
피처럼 붉은 적룡포.
활활 타오르듯 새빨간 머리카락.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 세상을 짓밟을 것처럼 여겨지는 존재감.
사황의 등장에 화운이 깜짝 놀라 허공을 쳐다봤다.
‘헉! 저 괴물이 여길 왜 와! 천마 하나만으로도 후들거려 죽겠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
이쯤 되면 고개를 떨구고 최대한 존재감을 감추고 사황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숨어야 했다.
하지만 화운은 그러지 않았다.
되레 반발심 같은 기분이 치밀어 올라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사황과 천마의 대면을 쳐다봤다.
“탈마했기를 바랐다.”
사황이 말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천마가 탈마를 했다면 상대하기가 손쉬울 테니까.
흑발의 사내, 천마가 사황을 응시했다.
천마에게 있어 사황은 자신과 대화를 나눌 만한 위치에 있는 존재였다.
무당검성 역시 그러한 존재였으나 지금은 그가 가고 없으니 사황이 유일했다.
“탈마의 끝에는 두 가지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
“입도(入道)와 입마(入魔). 본좌는 입마를 선택했지.”
천마의 말에 사황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탈마지경은 마(魔)를 버리고 도가의 조화를 좇는 것이거늘 어찌 입마가 기다린단 말이냐!”
사황이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했다.
“틀렸다. 탈마지경이 마(魔)를 벗어던지는 건 맞지만, 도가의 조화를 좇지는 않는다. 정확히는 도가의 조화와 마도의 혼돈을 동시에 좇는다는 게 맞다. 조화와 혼돈은 음과 양이 그렇듯이 둘이면서도 하나니까.”
“그래서 마신의 마력을 얻었느냐?”
중요한 건 입도냐, 입마냐가 아니다.
영육(靈肉)의 경계를 넘어 입신했느냐가 중요하다.
입신(入神)!
신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
신의 경계로 넘어선 순간, 무공은 유명무실해지고 신력만 남는다.
신력은 악귀와 같은 영적인 존재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 인간들의 땅에 미치는 힘이 미약해진다는 뜻이다.
물론 사황이나 천마 정도 되는 고수들의 무력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 본좌는 마신의 힘을 얻었다.”
천마가 대답했다.
순간 사황의 입매가 비틀어 올라갔다.
웃는 것이다.
입신하여 마신의 힘을 얻었으니 천마의 절대무공은 그 힘을 잃었다.
사황은 뒷짐을 졌다.
여유를 되찾았다.
천종천마교 수만의 교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마를 넘어설 수 있게 되었으니 이보다 흡족할 순 없다.
그런데 이때 천마가 뜻밖의 말을 했다.
“천마지존공과 마신의 혼돈을 융합한 힘이 어떠한 것인지 궁금했었는데, 사황 그대라면 명확히 알 수 있겠지.”
그 말에 사황의 웃음이 뚝 그쳤다.
“융합을 했다고?”
“자네가 아는 걸 나라고 모를까.”
신의 경계에 들어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천마 자신도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천마지존공과 마신의 혼돈을 융합했다는 뜻이다.
사황의 미간이 살짝 패였다.
자신도 알면 그도 알거라는 그 간단한 이치를 어찌 간과한 것인지 자신의 허술함에 기가 막힐 일이다.
‘검성의 죽음에 너무 들떴던 건가?’
사황이 그렇게 한숨을 내쉴 때였다.
이때 천마의 시선이 움직였다.
지상의 화운을 향해서였다.
사황의 시선 역시 화운에게로 향했다.
검은 가면을 쓰고 있지만 화운임을 어찌 몰라볼까.
“역시 법보가 왔음을 알고 있었군.”
사황이 중얼거렸다.
“모를 수가 없지. 수천 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거늘.”
“그게 무슨 소리야! 제자리라니?”
“시간을 뒤트는 건 마신 아수라의 권능이다.”
“······!”
사황의 눈빛이 놀람으로 물든 순간 지상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다.
한 사람은 천마의 그림자인 혼마였고, 또 한 사람은 묵빛의 장포만을 두른 노인이었다.
그 둘이 화운을 기습한 것이다.
화운은 묵빛 장포의 노인이 누군지 몰랐으나 그가 바로 명왕이었다.
먼저 명왕이 권격을 뻗었다.
막대한 힘이 권의 형상으로 날아왔다.
천마파천권이었다.
쾅!
화운이 검을 뽑아 막았다.
검멸의 새파란 강환이 검신에 이글거렸다.
“귀(鬼)! 혼(魂)! 박(搏)!”
혼마가 몸을 날리며 양손의 십지를 엮어가며 술법을 펼쳤다.
그러자 혼돈멸혼(混沌滅魂)의 마기가 바람처럼 휘몰아쳐 화운의 육신을 속박하려고 들었다.
하지만 풍검을 익히느라 결을 볼 줄 아는 화운은 검을 뻗어 자신의 육신을 속박하려드는 귀혼박의 결을 가차 없이 갈라 버렸다.
펏펏펏펏펏!
혼마의 술법이 무위로 돌아간 순간.
“천마파천권! 멸천! 붕!”
명왕이 천마파천권의 절초를 발휘했다.
화운은 그간의 답답함을 터트리듯 공공무영비를 발휘하여 벼락같이 달려들며 검멸을 잔뜩 발휘한 검을 일도양단의 기세로 그었다.
쾅!
두 사람 사이에 막대한 강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그 힘에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튕기듯 밀려난 순간.
돌연 허공에서 거대한 악마의 발이 나타나 화운을 짓밟았다.
“헉?”
깜짝 놀란 화운을 중심으로 막대한 기의 파동이 일어났다.
쿠웅!
대지가 움푹 꺼졌다.
모래사장에 밟아 놓은 발자국처럼 아수라광장의 한복판이 푹 꺼졌다.
절체절명의 순간 금강부동신법을 펼쳐 위기를 벗어난 화운은 간담이 다 서늘해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대한 악마의 손이 화운을 와락 움켜잡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이 딱 들어맞는 연환공격이었다.
“크윽!”
전신이 부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에 화운은 호신강기를 잔뜩 일으킨 다음 폭자결을 운용했다.
콰앙!
아찔한 폭발이 일어났다.
하지만 거대한 악마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에 화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순간.
“날 잊은 건 아니겠지!”
사황의 일갈과 동시에 강력한 기운이 휘몰아쳐 화운을 움켜잡은 악마의 손을 후려쳤다.
꽈앙!
거대한 악마의 손이 흔들렸다.
정확히는 악마의 손을 발휘하고 있는 기운이 타격을 받은 것이다.
이 순간을 놓칠세라 화운이 호신강기를 잔뜩 일으켜 폭자결을 운용했다.
콰앙!
거대한 악마의 손이 부서질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한 번만 더 하면 돼!’
화운이 눈빛을 빛낸 순간이었다.
허공에 또 하나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강력한 기운을 폭출하고 있는 사황을 공격했다.
꽈앙!
사황의 몸이 크게 흔들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터졌다.
힘의 격차가 뚜렷했다.
사황의 눈초리가 사납게 꿈틀댔다.
“본좌의 힘을 보여주지. 전륜멸천파!”
내력의 결정체인 강기를 강환 이상의 힘으로 중첩하고 중첩하여 거대한 강기의 파도를 만들어낸 것이 전륜멸천파다.
백사장에 지어진 모래성을 일거에 휩쓸어버리는 파도처럼 보이는 모든 걸 부숴 버린다.
그 가공할 힘을 가진 거대한 멸천의 파도가 천마가 발휘한 악마의 손을 향해 몰아쳤다.
콰콰콰콰쾅!
그야말로 공전절후의 대격돌이 벌어졌다.
두 사람의 발아래 지상이 쑥대밭이 되었다.
건물들은 폭삭 주저앉고 대지는 움푹 꺼져 버렸다. 순식간에 도시 하나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악마의 손은 사라지지 않았다.
절반쯤 날아가 버렸으나 차츰 회복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사황이 화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도시의 경계인 성곽 자체가 거대한 진법이다. 이 안에서만큼은 너도 나도 천마의 힘을 감당할 수 없다.”
“······?”
“되돌려라!”
화운의 눈이 커졌다.
지상을 내려다보니 거대한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네 개의 전각과 그 전각들을 잇고 있는 성곽을 따라 막대한 기의 유동이 느껴졌다.
“늦었다!”
천마가 외쳤다.
화운을 움켜잡고 있던 악마의 손이 가공할 힘을 발휘했다.
사황을 공격했던 또 다른 악마의 손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 손마저 합류한다면 버틸 수 없다.
화운에게 있는 법보를 단숨에 박살을 내버릴 생각인 게 분명했다.
일각의 회귀.
그 시점엔 천마와 화운이 이곳에 함께 있었다. 천마의 시야가 닿는 곳에 경천보패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젠장!’
천마는 경천보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호신기공을 발휘하여 경천보패를 보호하고 있던 화운은 더는 버틸 재간이 없어 자신의 심장을 터트렸다.
퍽!
죽음이 시간을 되돌렸다.
사황을 만나 마지막으로 경천보패가 발동했던 시점에서 정확이 일각 전으로.
번쩍 정신을 차린 화운은 부리나케 전방을 쳐다봤다.
멀리 사황을 만났던 기암괴봉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