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71화 (71/207)

#071. 천마

천종천마교 아수라광장.

천마탑 동쪽 광장으로 한복판엔 거대한 아수라 석상이 세워져 있다.

수만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넓다.

해가 떠오른 시각부터 천종천마교의 교도들이 꾸역꾸역 몰려들더니 어느새 빈 곳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들어찼다.

그리고 그렇게 운집한 교도들과 천마탑 사이에 커다란 단상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위에 교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자리하고 있었다.

광명좌사와 북명우사, 세 명의 원로호법들과 다섯 명의 무상들이 보였다.

그들 뒤쪽 열에는 삼십육대마와 칠십이살마들의 태반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가장 앞쪽 정중앙에는 황금빛 용포를 걸친 멸제와 새하얀 백룡포의 노인, 마존이 의자를 나란히 두고 앉아 있었다.

천마의 첫 번째 제자의 제자인 명왕과 그를 따르고자 하는 이들을 제외한 교의 주요 인사들이 모조리 나와 있었다.

백 년래 최대 규모였다.

“죄인은 아직이냐?”

단상 위에서 오늘의 행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던 혈극마가 소리쳤다.

단상 아래에서 혈극마의 눈치를 보던 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설마 뭔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단상 한쪽 끝에는 마경이 서 있었다.

화운의 목을 치기 위해 사람 몸뚱이만큼 커다란 칼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쯤은 끌려나왔어야 할 화운이 나타나지 않으니 괜스레 초조해졌다.

그의 머릿속에 화운이 그만큼 대단한 존재감을 심어놓은 것이다.

이윽고 북명전을 갔다 온 북명사자 중의 하나가 단상위로 올랐다.

“죄인이 탈출한 것 같습니다.”

“뭔 헛소리냐!”

“북명사신과 사자들이 전부 죽어 있습니다.”

“뭔 일을 이 따위로 하는 거야!”

혈극마가 폭갈을 터트릴 때였다.

혈극마의 뒤쪽에서 태산거악 같은 기운이 크게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혈극마가 부리나케 돌아서자 멸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죄인을 잡아······!”

멸제가 손을 들어 혈극마의 말을 막았다.

혈극마가 공손한 자세로 한 걸음 물러나자 멸제는 그를 지나쳐 단상 끝으로 가서 섰다.

수만 쌍의 시선이 멸제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 어떤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으나 광장 전체가 침묵으로 짓눌렸다.

멸제는 그런 위치에 있었고, 그만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멸제는 그저 서 있었다.

붉은 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눈으로 단상 아래 수만을 내려다보았다.

일반교도들과 무공을 익힌 군마들.

모두가 굳게 입을 다문 채 멸제만을 쳐다봤다.

그렇게 숨죽인 듯 고요한 가운데 멸제가 입을 열었다.

“담장 안에 처박힌 맹수는 맹수가 아니다. 그러니 한낱 쥐새끼조차 본교를 우습게 보는 것이다.”

내력이 실린 목소리가 널리 파동쳤다.

오늘의 행사가 어떤 의미인지 사전에 알고 있던 군마들을 중심으로 뜨거운 열기가 파문처럼 번졌다.

그들은 힘을 가졌으며 쓰고 싶어 했다.

천하로 달려 나가 뜨거운 피를 맘껏 맛보고 싶었다.

그 같은 열기를 확인한 멸제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천둥처럼 말했다.

“천마탑을 열어라!”

멸제의 호령이 천종천마교의 온 하늘을 뒤흔들었다.

그러자 단상 아래로부터 뜨거운 함성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마도일세! 천마앙복!”

“마도일세! 천마앙복!”

군마들의 함성이었다.

군마들의 요구였다.

군마들의 오랜 열망이었다.

그렇게 군마들의 함성이 뜨겁게 울리는 가운데 거무튀튀한 돌로 지어진 천마탑이 기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긍!

함성이 일제히 그쳤다.

수만의 시선이 천마탑으로 향했다.

일층의 출입을 막고 있던 석문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러면 안 되는 거잖습니까. 저건 교의 율법에 어긋나는 짓입니다.”

패도마가 분한 얼굴로 말했다.

무상 철뢰는 굳은 표정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한달음에 달려가 호통이라도 치고 싶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이다. 명왕이 나서주지 않는 한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멸제는······ 본교의 율법 위에 서버렸다.”

무상 철뢰는 침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패도마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멸제와 손잡기를 거부한 자들.

패도마와 무상 철뢰를 비롯한 몇몇은 그저 광장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무불통은 어디에 있는 거야?’

무불통을 찾아다니던 화운은 혹시나 싶어 단상 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웬걸 외부인인 무불통이 그들 맨 뒤쪽 열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키가 워낙 작아서 대충 살폈다간 못 보고 넘어갈 뻔했다.

‘뭐야, 저기에 왜 끼여 있어?’

화운은 의아한 얼굴로 단상 뒤쪽으로 움직였다.

검은 가면을 쓰고 북명사자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누구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때 황금빛 용포의 멸제가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화운은 그의 기도와 복장을 보고는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흠······ 저 노인이 멸제였군. 그렇다면 백룡포를 걸친 노인이 마존이겠고.’

마존은 멸제의 날이라고 인정해서인지 그저 앉아만 있을 뿐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고 있었다.

화운은 멸제를 다시 살펴보며 그의 기도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대단했다.

마경이 무릎을 꿇을 정도로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멸제라고 해서 엄청날 줄 알았는데, 뭐 별거 아니구만. 나도 마음만 먹으면 저까짓 기도는 얼마든지 과시할 수 있어!’

화운은 상대의 무공을 가늠하는 기준이 사황으로 바뀌었다.

사황 정도 되는 고수는 피해야 할 상대이고, 그 이하는 해볼 만한 상대다.

멸제는 나름 대단한 기도를 과시하고 있으나 사황처럼 숨 막힐 정도는 아니었다.

싸움의 결과는 부딪쳐 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지만, 멸제는 해볼 만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명왕도 있다던데, 셋이서 경쟁하는 사이라고 했으니 거기서 거기겠지.’

화운은 멸제와 마존 그리고 명왕을 싸잡아서 붙어볼 만한 상대로 대충 정리했다.

멸제 정도 되는 고수와 극한으로 치달을 때까지 싸워보지 못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보면 볼수록 만만해 보였다.

그렇게 단상 뒤로 돌아간 화운은 공공무영비를 발휘하여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도록 조용히 올라갔다.

‘햐! 드디어 만나는군!’

한 걸음 앞에 무불통이 있었다.

이제 선택만 남았다.

그를 붙잡고 냅다 도망칠 것인지 아니면 조용히 뒤로 데려간 다음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것인지.

‘보란 듯이 소란 한번 떨어주고 가는 게 좋겠지? 가기 전에 마경한테 한 방 먹이면 더 좋고.’

마경은 단상 위 저쪽에 서 있었다.

감히 누구의 목을 자르려고 큰 칼을 가지고 있었다.

‘저 새끼 저거 볼수록 패주고 싶어!’

대충 위치를 가늠해 보니 무불통을 낚아채고 가면서 한 방 먹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화운은 슬며시 한 걸음 내디딤과 동시에 손을 뻗었다.

슥 내밀어진 화운의 손이 무불통의 팔을 막 붙잡기 직전이었다.

단상 앞쪽에서 멸제가 돌아섰다.

“천마탑을 열어라!”

그의 외침과 동시에 단상위의 모든 사람들이 천마탑을 향해 빙글 돌아앉았다.

그 바람에 단상 위 맨 후미에 있던 화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상황이 되었다.

깜짝 놀란 화운은 얼떨결에 막 돌아서는 무불통의 어깨를 툭툭 친 다음 천마탑을 보라는 듯 가리켰다. 그리고는 자신도 태연히 돌아섰다.

‘젠장! 이게 뭐하는 짓이야!’

화운은 스스로에게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천마가 있는 천종천마교라는 장소 때문에 꽤나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근데 진짜 천마를 볼 수 있는 건가?’

화운은 바짝 숨을 죽였다.

그그그그긍!

천마탑 일층의 출입을 막고 있던 석문이 올라갔다.

석문이 사라진 자리로 짙은 음영이 시커먼 암흑처럼 드리워진 광경이 보였다

그리고 곧 한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음영의 경계에 서서 몸만 보일뿐 얼굴은 음영을 벗어나지 않았다.

“혼마(魂魔)! 천마교주께 십만의 교도가 존안을 뵙기를 청한다고 고하라!”

멸제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 실린 내력이 천마탑을 뒤흔들었다.

무공을 모르는 자들이 보기엔 멸제의 위엄에 천마탑이 뒤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수백 년 교의 율법이 이렇게 무너지다니, 좌우이사부터 시작해서 모조리 머리통을 잃게 생겼구나! 끌끌끌!”

천마의 그림자라는 혼마가 음산하게 웃었다.

그 웃음만으로도 내력이 약한 이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본교의 절대 가치는 강자존이다! 강자존이야 말로 본교의 그 어떤 율법보다 우선한다. 강자존의 율법에 따라 머리통을 잃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마도천하(魔道天下)! 군마영세(群魔永世)!”

멸제의 일갈이 세찼다.

마도천하에서 군마들은 영원할 것이라는 격렬한 일갈이 군마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마도천하! 군마영세!”

“마도천하! 군마영세!”

다시 한 번 함성이 터져 나왔다.

군마들은 이 기세로 천하로 달려 나가길 바랐다.

천하를 짓밟고 마도천하의 깃발을 만천하에 꽂기를 바랐다.

그렇게 군마들이 뜨겁게 타오르도록 선동한 멸제는 혼마를 향해 모두를 대변하듯 크게 말했다.

“교주님을 뵈어야겠다!”

“마도일세! 천마앙복!”

“마도일세! 천마앙복!”

멸제의 요구에 군마들이 함성으로 동참했다.

한계에 다다른 둑처럼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혼마는 가소롭다는 표정일 뿐이다.

“멍청한 놈들! 닥치고 꿇어라!”

혼마의 일갈이 터졌다.

후텁지근한 열기를 동반한 시커먼 마기가 폭풍처럼 터져 나와 광장을 휩쓸었다.

“크윽!”

“윽!”

여기저기서 고통에 신음하며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혼마의 성명절학인 혼돈멸혼(混沌滅魂)의 마기는 나약한 자들에겐 무소불위의 공포였다.

“감히!”

멸제가 분노했다.

그는 자신의 요구를 들은 체도 않고 있는 혼마의 행동에 주체할 수 없는 살의가 치솟았다.

바로 이때였다.

쿠구구구구궁!

천마탑에서 거대한 마찰음이 들렸다.

멸제를 비롯한 모두가 천마탑을 쳐다봤다.

최상층인 구층의 사방 돌벽이 바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멸제를 비롯한 수만의 시선들은 놀람과 당황 그리고 기대 가득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이윽고 사방의 돌벽이 수평으로 완전히 기울어지고 나자 지붕을 버티고 있는 커다란 돌기둥만 남았다.

돌기둥 중심에는 출입구처럼 네모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흑발의 젊은 사내였다.

멀리 동녘에 한참 떠오른 태양이 사내를 비추었다.

새하얀 피부에 반듯한 이목구비가 오만하게 자릴 잡고 있었다.

흑발의 사내는 수평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돌벽 끝으로 가서 섰다.

그러자 아수라광장에 모인 수만의 교도들이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거리가 멀었지만,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사내가 걸친 아홉 마리의 용이 수놓인 짙은 묵빛의 구룡포.

천마의 상징과도 같은 천마지존포였다.

“지, 지존이시여!”

“교주님이시다!”

“마도일세! 천마앙복!”

“마도일세! 천마앙복!”

수만의 교도들이 엎드렸다.

열광적으로 외치는 자들도 많았다.

허나 구층 천마탑 위의 천마는 그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동남쪽 허공만 응시했다.

이때 멸제가 북명우사를 돌아봤다.

천마의 외모가 너무 젊어서다.

“정녕 교주가 맞는 것인가? 혹여 따로 둔 제자가 아닌가?”

“제자를 두셨다면 광명전에 알리게 되어 있습니다. 좌사에게 그런 말을 듣지 못했다면 아닐 것입니다.”

“교주이기 전에 천마다. 율법 따위에 연연할 리가 없다.”

멸제는 천마지존포를 걸친 젊은 사내가 천마의 제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마의 그림자라는 혼마를 향해 서슬 푸른 기세를 날렸다.

“감히 천마교주님을 사칭하다니!”

멸제의 호통에 어느새 밖으로 나와 천마탑 구층의 젊은 사내를 향해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혼마가 고개만 돌려 사납게 인상을 썼다.

“주둥이 다물고 목이나 길게 내밀고 기다려라! 지존께서 모조리 뽑아버리실 테니까.”

“흥! 천마교주든 아니든 상관없다. 어차피 강자존이 지배하는 본교다. 천마 자리든 교주 자리든 힘으로 올라서겠다.”

멸제가 오연한 기도를 터트렸다.

수만의 교도들을 일시에 짓눌러 버릴 가공할 기도를 발휘하며 구층 천마탑 위의 사내를 응시했다.

그러나 흑발의 사내는 멸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놈!”

멸제가 분노를 터트리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천마다!”

화운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흑발의 사내를 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거리가 멀어 사내의 기도에 짓눌릴 리는 없다.

사내를 본 순간 그의 존재 자체에 기가 꺾인 것이다.

천마의 제자 따위일 리가 없다.

천마다. 천마교주, 절대천마, 천마조종.

바로 그다.

화운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천마를 쳐다봤다.

바로 뒤에 무불통이 있지만, 그를 데리고 도망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 정도로 천마의 존재감이 엄청났다.

‘사황도 미칠 노릇인데, 쟨 더 하잖아! 환장하겠네!’

화운이 두려움을 떨치고자 억지로 투덜거린 순간 멸제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멸제는 수만의 교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마와 마주섰다.

그리고 한손으로는 뒷짐을 진 채 오만하게 말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 멸제가 천마 위에 서겠다!”

광오한 선언이 터져 나온 순간 아수라광장이 일제히 숨죽였다.

멸제는 자신만만했고, 그럴 만한 충분한 힘이 있었다.

흑발의 천마가 멸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유리처럼 무심함을 초월한 눈빛이었다.

스윽!

천마는 말이 없었다.

그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멸제는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가 싶어 오만하게 지켜보았다.

이윽고 천마의 손이 멈추고 손가락 하나가 멸제를 가리키더니 곧장 아래로 움직였다.

바로 그 순간.

“커-억!”

허공이 쩍 갈라지며 붉은 핏물과 육편이 지상으로 쏟아졌다.

“뭐, 뭐야!”

화운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손가락질 한 번에 멸제가 둘로 갈라져 버린 것이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아수라가 현신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마,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진짜 저건 말도 안 돼!”

화운이 넋 나간 사람처럼 연방 중얼거릴 때다.

“천, 천마조종! 천마앙복!”

“천마조종! 천마앙복!”

아수라광장 전체가 일제히 부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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