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소나찰 사연홍
천종천마교 멸천부.
빠드드득!
멸천부 심처 중의 한 곳에서 이가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리 분한지 이가 부서져라 갈고 있었다.
“감히 날!”
사나운 음성은 분명 여인의 것이었다.
살의가 느껴질 정도로 분노에 찬.
“감히 나 사연홍에게 손을 대?”
여인이 스스로를 사연홍이라고 했다.
천종천마교 멸천부에서 사연홍이라는 이름을 가진 연인은 단 한 사람뿐이다.
소나찰 사연홍.
멸제의 두 번째 양녀로 이 공녀라고 불리는 여인.
웃고 있는 얼굴 뒤에 나찰의 살심이 감추어져 있어 소나찰(笑羅刹)이라는 별호로도 유명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게끔 만들고야 말겠어!”
사연홍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강시당으로 가겠다!”
밖에 대기 중이던 그녀의 호위들이 잽싸게 이동할 대열을 갖추었다.
빠드드득!
밖으로 나서는 사연홍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
삼십육대마의 일원이자 대마전주인 패도마.
염마전주는 화운을 데리고 그를 찾아갔다.
화운의 말을 듣고 보니 혼자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화운을 데리고 찾아가는 게 훨씬 더 빠르고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패도마는 대단한 마기의 소유자였다.
어지간한 마인들은 눈빛만으로도 눌러버릴 정도였다.
“배포가 남다르군.”
“처지가 그만큼 궁해섭니다. 바쁘신 분이실 테고, 제게 이런 자리가 언제 또 주어질지 모르니 지금 제 입장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들어보지.”
“검마의 제자이자 정무맹 신풍대 대주였던 게 접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갈 데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천하가 사황의 발아래 짓밟히는 바람에 전부 다 잃었습니다. 그래서 사황천과 싸우고 싶어 이곳으로 왔습니다.”
“흠······.”
패도마는 의자에 기대앉은 채 화운을 두고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
“어디로 말입니까?”
물은 건 염마전주다.
“명부전.”
패도마의 대답에 염마전주는 눈을 크게 뜨며 속으로 탄성을 터트렸다.
‘책임 회피! 난 마운의 말을 듣고서야 생각해 냈는데······.’
천종천마교라 해서 무공만 강하면 다 되는 게 아니다.
눈치껏 줄을 잘 서야 하고, 눈치껏 그 줄을 자르고 다른 줄로 갈아탈 줄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눈치가 빨라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패도마는 판단력이 무척 빠른 것 같았다.
염마전주는 패도마를 새삼 다시 보았다.
명부전.
십이무상들의 거처.
일반 마인들이 볼 수 있는 최고위층이 바로 십이무상이라고 보면 된다.
이따금씩이라도 모습을 드러내 고위층의 권위를 보여주는 게 십이무상들이니까.
무상 철뢰.
패도마가 패도적인 마기의 소유자라면 무상 철뢰는 마(魔) 그 자체가 된 마인 같았다.
공력을 일부러 일으키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데도 마기가 뭉클뭉클 흘러나왔다.
“처음부터 정체를 밝히지 않은 이유는?”
무상 철뢰가 물었다.
화운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대답을 꺼냈다.
“강함을 숭상하고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곳에서 과거에 몸담았던 곳을 문제 삼을 줄은 몰랐습니다. 더군다나 이제는 패망해 버린 곳인데 말입니다.”
“패망이라······ 그런 말 아나? 천하를 모조리 도륙해 버리기 전에는 정파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
“처음 듣습니다. 정파의 뿌리가 곳곳에 남아 있다고 보신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이곳에서 보자면 저 역시 그런 뿌리 중의 하나일 수도 있고.”
“잘 아는군.”
“그럼 그렇다고 치고 말씀드리죠. 사황과 사황천에 복수를 하고 싶어 이곳에 왔습니다. 또한 스승님의 오랜 복수를 도와드리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절 받아주신다면 생각하시는 것보다 배는 더 큰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본교에도 강한 자는 차고 넘치지.”
“강하다는 건 누구의 기준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입니다.”
화운의 말에 무상 철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패도마가 버럭 소리쳤다.
“입 조심하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혈존을 죽일 정도면 내 앞에서 오만을 떨 자격이 있겠지.”
무상 철뢰가 말했다.
패도마가 소리치다 말고 놀라 쳐다봤다.
“하남을 휩쓸었던 그 혈존 말입니까?”
천종천마교도 지난 오 년 동안 천하정세를 나름 꼼꼼하게 살폈다.
하여 사황천에 어떤 고수들이 있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놀란 패도마의 물음에 무상 철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패도마는 더욱 놀란 얼굴로 화운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때까지 한쪽에서 듣고 있던 염마전주는 딱딱하게 굳었다.
마경을 능가하는 정도라고 알고 있을 땐 패도마도 있고 무상 철뢰도 있으니 한편으로는 별 문제가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혈존이라니?
혈존을 죽인 고수라면 이건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소리다.
자신뿐만 아니라 패도마와 어쩌면 무상 철뢰조차 껄끄러울 수도 있다.
“목적이 무엇이냐! 본교에 왜 침투한 것이냐!”
패도마가 사납게 외쳐 물었다.
그 역시 화운이 마경보다 강한 정도라고 알고 있을 땐 그저 이곳에 자릴 잡으려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혈존을 능가하는 고수일 줄이야.
패도마에게서 전신을 찢어발길 듯한 마기가 쏟아져 나오자 화운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복수라고! 그걸 믿으라는 것이냐!”
“입장을 바꿔보시죠.”
“무슨 입장?”
“패도마께서 저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친인들이 전부 죽어버린 처지에 끝도 보이지도 않는 싸움을 혼자 외롭게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훗날 손가락질 받는 한이 있더라도 제삼의 무력과 손을 잡겠습니까? 전 후자입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화운의 말은 일견 타당했다.
그럴듯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패도마조차 더는 화를 내지 못하고 무상 철뢰를 돌아봤다.
어차피 결정권자는 그였으니까.
무상 철뢰는 고심했다.
화운의 존재는 양날의 검이었다.
너무 날카로워 자신의 손조차 싹둑 베어버릴.
하지만 쥘 수만 있다면 물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 다툼의 판세를 단박에 뒤집어 버릴 수도 있는 막강한 검이 될 수도 있었다.
“자네의 거취는 나 혼자 결론 내릴 수 없는 일이네. 다른 무상들과 논의를 한 후에 결정할 것이니 일단 염마부에 가 있게. 내 허락이 있기 전에는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무상 철뢰가 말했다.
말투조차 달라졌다.
일단은 호의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느껴졌다.
화운은 이렇게 염마전에서 계속 대기하게 되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좀 더 빠르게 그의 거취가 논의 될 거라는 것이다.
‘하! 진짜! 무불통 만나기가 뭐 이렇게 힘들어! 그냥 북명전인가 하는 곳엘 확 쳐들어가 버릴까?’
화운이 지난밤부터 계속 고민하는 바다.
눈치 봐가면서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짜증이 나서다.
하지만 결국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서라! 그러다 천마한테 발각되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
천종천마교 광마종.
마인들 중에서도 유독 피를 탐하고 살인을 즐기는 미친 자들이 모여 있는 곳.
마경이 광마종에 복귀했을 때 모두들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광마종에는 구성원들을 분류하는 별칭이 두 개가 있다.
사혈일사(四血一邪)와 이마(二魔)다.
혈쇄, 혈우, 혈접, 혈검 그리고 사령이 사혈일사이고, 마경 과 광마가 이마다.
마경이 나타나자 그들은 소곤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늘 그랬듯이 마경을 도외시했다.
사혈일사가 마경을 받아주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마경 스스로가 굽히지 않은 결과였다.
강함을 숭상하는 마도라 하더라도 나이를 완전히 무시하진 않는다.
마경은 이제 이십 대 중반에 불과했고, 사혈일사는 막내인 혈접조차 사십대였다.
그러니 마경이 고개를 숙이고 막내이기를 감내했다면 함께 어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경은 그걸 거부했다.
누가 먼저 태어난 게 뭐가 그리 중하다고 머리를 숙이고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야 하느냐는 게 이유였다.
“감춰야 할 이야기면 어디 조용한 데서 해.”
마경이 빈 의자에 털썩 앉으며 머리를 뒤로 한껏 젖혀 나름의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이때 안쪽에 자리하고 있던 당당한 체구의 중년인이 사혈일사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모두들 밖으로 나갔다.
“뭣 좀 물어봐도 되겠느냐?”
당당한 체구에 평범한 얼굴, 평범한 눈빛을 가진 중년인, 광마가 마경에게 물었다.
“이미 묻고 있잖수.”
“염마전에 있다는 자, 정무맹의 신풍대주였던 자 말이다.”
광마가 화운을 언급하자 마경이 뒤로 젖혔던 고개를 바로 했다.
“무슨 일이요?”
“그 자를 묻어야 한다.”
“······!”
마경은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물어봤다.
“신풍대주였던 앨 죽이겠다고 했소?”
“그래.”
“쟤들 데리고?”
“부족할까?”
“거기에 내가 껴도 안 되오. 관두쇼. 이 넓은 광마종에 혼자 있고 싶진 않소.”
마경이 다시 머리를 뒤로 젖혔다.
광마가 그런 마경을 빤히 응시하다 말했다.
“객잔의 일 들었다.”
“그럼 잘 아실 거 아뇨.”
“강시당에서 처리할 거다.”
“강시당? 고루마군이랑 함께 한단 말이오?”
“그래. 필요하면 금강마인들도 동원할 거다.”
“금강마인뿐만 아니라 강시당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투입하자고 하시오. 그럼 일 할쯤은 확률이 올라갈 거요.”
“네가 함께 가 준다면 거기에 일 할이 더 올라가겠지.”
“개떼처럼 싸우는 건 내 방식이 아니오.”
“당한 걸 갚아줄 기회인데 마다하겠다는 것이냐?”
“한 대 맞았다고 우르르 몰려가 밟아대는 건 갚아주는 게 아니오. 혼자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지.”
“멍청한 놈!”
광마가 살짝 신경질을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누구요? 이번 일을 사주한 자가.”
“소나찰.”
“그년이 왜?”
“남장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그 객잔에 있었던 모양이다.”
“아!”
마경이 젖혔던 고개를 바로하며 뭔가를 깨달은 듯 탄성을 질렀다.
“그년이었군!”
“말 함부로 하지 마라. 널 제외한 광마종은 멸제께 고개를 숙이기로 하였다.”
“병신 같은······!”
마경이 욕설을 내뱉은 순간 광마의 기운이 사납게 요동쳤다.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지!”
“결국은 권력의 개가 되기로 한 거요? 내가, 이 마경이 꼬박꼬박 예우해 준 건 그쪽만큼은 그러지 않을 것 같아서였는데······.”
“너무 오래 고인 탓에 썩어 문드러진 본교다. 네놈처럼 홀로 미쳐 날뛰는 것보다는 권력의 개가 되어서라도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에 일조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멸제는 아니오.”
“명왕은 본교를 잊어버린 것처럼 두문불출이고, 마존은 본교 전체를 아우르기엔 모자라다.”
“그래도 멸제는······.”
“썩은 물은 정화가 안 되니 다 퍼내야 한다.”
“핑계는······ 잘 해보시오.”
마경은 다시 고개를 뒤로 젖혀버렸다.
***
“여기가 염마전의 숙소니까 편하게 쉬시게.”
염마전주가 화운에게 반공대를 했다.
무상 철뢰가 그렇게 대해주거늘 한참 아래인 염마전주가 어찌 편하게 말을 놓을 수 있겠는가.
“예.”
화운은 가볍게 대답한 후 숙소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무척 거북스런 기운이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화운이 돌아보니 지금 막 관 속에서 일어선 것 같은 깡마르고 시체처럼 창백한 노인이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다가왔다.
“고루마군!”
염마전주가 놀라 부르짖었다.
‘고루마군?’
화운이 처음 들어보는 별호에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노인이 두 사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따라 오너라.”
고루마군이 화운을 향해 말했다.
“명부전의 무상 철뢰께서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염마전주가 재빨리 나섰다.
고루마군이 염마전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머리에 쓴 흑백의 태극관모 아래로 퀭한 눈이 염마전주를 쏘아봤다.
염마전주는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흑지에 침입한 이유를 물어야 하니 감히 나서지 마라.”
“흑지 말입니까!”
염마전주가 놀라 부르짖었다.
고루마군은 무심히 고개를 돌려 화운에게 말했다.
“따라 오너라.”
화운은 고루마군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곧 걸음을 옮겼다.
“그럽시다.”
화운이 걷자 고루마군은 천천히 돌아서서 앞장을 섰다.
그렇게 두 사람이 멀어지자 염마전주는 패도마를 찾아 대마전을 향해 뛰었다.
하지만 곧 멈춰 서더니 고루마군과 화운이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흑지에 침입을 했는데, 왜 북명전이 아니고 강시당이 나선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