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56화 (56/207)

#056. 무영투 그리고 혈존

하남성 개봉.

변두리 허름한 객잔.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화운과 백리연, 선우유성 그리고 남궁현이다.

“그러니까 무영투 영감님이 임무 때문에 개봉으로 간다고 했단 말이지요?”

화운이 백리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백리연이 임시로 신풍대주직을 맡았기에 그나마 아는 것이 많았다.

“예.”

“평소엔 무슨 임무를 맡았습니까?”

“두 가지였어요. 사방으로 흩어진 정파의 고수들을 사황천의 눈을 피해 정무맹으로 데려오는 임무랑 맹의 군자금을 확보하는 임무였어요.”

“군자금이요?”

“예. 옥화산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분이 찾아오셨어요. 그때 소림사에서 대환단 내놓으라고 압박하시자 그런 건 모른다고 하시면서 맹주님께 군자금 이야기를 하셨어요. 군자금을 책임져 줄 테니 맹에 합류시켜 달라고.”

“날 만나려고 찾아간 모양이군요.”

“예. 저희 신풍대를 찾아와서 대주님이 복귀하는 대로 알려달라고 하셨어요.”

“대충 알겠습니다. 대륙시를 이용해서 군자금을 충당했을 겁니다. 그럼 개봉에 온 이유는 둘 중 하나라는 것이고, 이곳에도 대륙전장의 지부가 있을까요?”

“대륙전장의 본장이 이곳에 있어요.”

“그렇다면 그곳에 있을 확률이 높겠군요. 먼저 거기부터 찾아보지요.”

“그럼 밤까지 숨어 있어야 할 곳이 필요하겠군요.”

“아뇨, 지금 바로 가지요.”

“위험해요. 개봉도 사황천의 무리들이 바글거리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게다가 대륙전장 같은 곳을 사황천이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어요.”

“가서 살펴보면 알겠지요.”

화운이 일어섰다.

백리연은 염려스런 얼굴로 일어섰고, 남궁현은 사나운 얼굴로 일어섰다. 그리고 선우유성은 그냥 따라서 일어났다.

“어느 쪽입니까?”

대륙전장의 위치를 물었다.

그러나 셋 중 누구도 알지 못해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유명한 곳일 테니까, 물어보지 뭐.”

화운이 먼저 움직였다.

***

어두운 지하 석실.

음산한 목소리가 친근한 척하고 있었다.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 어디다 숨겼는지만 알려주면 풀어준다니까.”

무영투는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말해봐. 그럼 원하는 대로 해줄게. 고통 없이 죽여 달라면 죽여줄 거고, 풀어달라면 풀어줄게. 벌써 열흘째야, 내 윗분께서도 기다릴 만큼 기다리셨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대환단이 있는 곳만 말해.”

고통조차 지쳐가던 무영투에겐 달콤한 유혹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좀 자고 싶었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무영투의 눈꺼풀이 닫혔다.

순간 불같은 통증이 갈비뼈 사이를 파고들었다.

숨넘어갈 듯한 통증에 무영투가 눈을 부릅떴다.

“이러면 아프잖아! 영감은 몸이 아프고, 난 맘이 아파. 그러니 그냥 말해주면 좀 좋아? 내가 누구야, 독효잖아. 약속만큼은 철저히 지킨다. 그러니 말해. 대환단 어딨어?”

“대환단은······.”

지금껏 꾹 입을 다물고 있던 무영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 대환단은?”

“내가······.”

“응, 영감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잘못 봐? 뭘?”

“그러니까 대환단은······.”

“그래, 그래 대환단 어딨어?”

“니놈 뒤에······ 있다.”

“······!”

멍청한 표정을 짓던 독효가 얼굴을 확 찌푸렸다.

“이 영감탱이가 진짜 끝장을 보고 싶은 거야? 썅! 그 작은 몸뚱이 안에 창자가 얼마나 들어있는지 끄집어내야 말할 거야?”

“너······.”

“시끄러 그 주둥이 확 찢어버리기 전에!”

“주둥이 찢고······ 배를 갈라 버려.”

무영투가 힘겹게 말한 순간이다.

독효의 목뒤, 양쪽 어깨뼈 사이 그리고 허리 한복판의 척추가 거의 동시에 뜨끔했다.

“······!”

독효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말을 하려고 해도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독효는 심장이 덜컥 주저앉았다.

순간 거부할 수 없는 힘이 그의 육신을 끌고 가 벽에 처박았다.

쓰악!

주둥이가 베어 지며 피가 튀었고, 가슴에서 아랫배까지 길게 베어지며 뭔가가 뜨거운 김과 함께 쏟아졌다.

독효의 전신이 덜덜덜 떨렸다.

하지만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영투조차 그에게서 눈길을 돌려버렸다.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화운이 물었다.

“네놈을······ 여기서 보게······.”

“쓸데없는 말로 힘 빼지 마십시오. 꽤 심각한데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의원한테 데려가 봤자 소용없을 것 같은데······.”

무영투의 상태는 일일이 설명 할 수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말 그대로 만신창이였으니까.

화운이 말을 맺지 못한 건 그래서다.

원한다면 고통 없이 보내드리겠다는 뜻이었다.

“내 발······ 왼쪽 신발을 벗겨.”

“······!”

갑자기 신발을 벗기라니?

화운은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무영투의 왼쪽 신발을 벗겼다.

그리고는 무영투를 쳐다봤다.

“발바닥······ 긁어.”

화운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발바닥을 시원하게 긁어주었다.

구역질 날 것만 같은 고약한 발냄새가 코를 마구 찔렀다.

무영투의 얼굴에는 시원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오른쪽······.”

“젠장!”

화운은 오른쪽 신발을 벗긴 다음 발바닥을 시원하게 긁어주었다.

“뭐······ 하냐?”

“······?”

화운이 쳐다봤다.

“엄지······ 발가락 사이에······.”

화운은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를 더듬거려 보았다.

뭔가가 있었다.

꺼내보니 밀랍으로 봉인한 엄지손톱 만 한 크기의 환약 같았다.

“대환단입니까?”

“그래, 먹여줘.”

화운은 밀랍을 벗긴 다음 안에 들어있는 대환단을 무영투의 입에 넣어주었다.

“운기······.”

힘겨운 무영투의 말에 화운은 그의 양 어깨를 꿰뚫고 있는 쇠사슬을 자른 다음 단숨에 뽑았다.

“크윽!”

무영투의 작은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화운은 잽싸게 받아 그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혀주었다.

무영투는 숨넘어갈 것 같은 고통을 억지로 참아내며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운기조식도 문파마다 다 다르고 종류도 많다.

무영투는 장소가 장소인 만큼 급한 불만 껐다.

속성으로 치료한 무영투는 한 식경만에 일어섰다.

한차례 비틀거리긴 했으나 걷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대환단의 약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무공은 쓰지 못한다. 나가려면 네놈이 업어야 할 게다.”

“그건 염려 말고요.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화운이 말하자 무영투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는 한쪽 벽에 처박혀 있는 독효에게로 다가갔다.

독효는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

전신을 학질 걸린 사람처럼 덜덜 떨면서도 용케 숨이 붙어 있었다.

“고통 없이 죽여주랴?”

독효의 눈빛이 급하게 변했다.

애원하는 눈빛이었다.

무영투는 씩 웃었다.

“싫어.”

독효의 눈빛이 절망으로 변한 순간.

“이 정도 가지고 그런 표정 지으면 내가 보낸 지난 열흘이 너무 허탈하지.”

무영투가 손을 뻗었다.

독효의 머리통을 붙잡더니 아래쪽으로 와락 꺾었다.

고개를 푹 숙이게 된 독효는 자신의 가슴과 아랫배가 쫙 갈라진 걸 두 눈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발밑으로 뜨겁게 쏟아진 것까지.

“죽을 때까지 감상한 소감은 염왕한테 해.”

그제야 무영투는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가 그리 급하냐? 나가서 해도 되겠구만.”

“급합니다, 급해요. 정말 급해서 그럽니다.”

“뭔데?”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공공무영비 말입니다. 지금보다 더 빨라지려면 어떻게······.”

“나보다 더 빠른 놈이 나한테 물으면 어째?”

“옛?”

“글찮아! 나보다 니놈이 더 빠르잖아!”

“그거야······ 그래도 영감님 무공이니까 뭔가 더 아는 게 있을 거 아닙니까?”

“공공문의 정통을 이은 게 너라며?”

“예?”

“마도의 땅으로 가셨다가 횡액을 당하신 삼대 공공문주께서 남기신 무공을 얻었다면서?”

“그, 그렇죠.”

이번 삶에는 그렇게 거짓말을 했었다는 걸 깜박한 화운은 살짝 당황했다.

“근데 뭘 물어?”

“아니······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요. 삼대문주님께서 미처 남기지 못했던 부분이 있을 수도 있구요.”

“근데 그건 왜?”

“사황한테서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화운의 대답에 무영투는 한참이나 황당한 놈을 다 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사황이 싸우는 걸 본 적이나 있냐?”

“예.”

“봤으면서도 그런 소릴 해?”

“······?”

“없어. 그런 인간한테서 경신만으로 피할 방법은 없어. 눈이 보는 공간이 죄다 그 인간의 간격일 텐데 뭘 피해? 괜히 힘 빼지 말고 무릎을 꿇던지 그냥 죽어야지.”

“······!”

“멍청한 놈아! 공공문의 경신공부가 제아무리 뛰어나도 그렇지. 절반은 신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괴물보다 뛰어나겠냐?”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다.

절정이든 초절정이든 지금 화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자는 없다.

그러니 극강의 무위라 하더라도 사황에게서 빠져나갈 자는 없다고 봐야한다.

화운이 이 생각을 아예 안 한 건 아니다.

그래도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인세에 보기 드문 경신술을 이론으로나마 알고 있지 않을까.

공간을 넘나든다는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이나 어둠 속의 향기처럼 종잡을 수 없다는 암향부동(暗香不動) 같은 전설 속의 경신술 말이다.

“그런 건 없어. 있어도 사황 같은 괴물들이나 익힐 수 있지 그냥 인간인 우리한테는 허락되지 않는 신공들일 거다.”

“아, 젠장 괜히 왔네.”

화운은 허탈한 기분이었다.

무영투에게 기대를 했는데,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 했다.

사황이라는 존재감에 짓눌려 마음만 급해졌나 보다.

“일단 나가자.”

무영투가 앞장섰다.

걷다가 휘청거리다가를 반복했다.

화운은 심각한 얼굴로 터벅터벅 걸으며 무영투의 뒤를 따라 지하석실을 빠져나갔다.

열흘 만에 눈부신 햇살을 본 무영투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잠시 후 어느 정도 빛에 적응하게 되자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무 많은데?”

“그러게요. 많네요.”

화운이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 앞에는 사황천의 무리들이 개떼처럼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지붕위에 은신해 있던 백리연과 선우유성 그리고 남궁현이 화운의 옆으로 뛰어내렸다.

세 사람은 뒤쪽의 무영투에게 눈인사만 했다.

적들이 잔뜩 몰려와 있어 인사나 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선우유성이 화운에게 물었다.

너무 늦어서 포위당했다는 뜻이 담긴 물음이었다.

“영감님 발바닥 긁어주느라고.”

“······?”

선우유성이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휘둥그레 쳐다봤다.

백리연과 남궁현도 한 번씩 돌아봤다.

화운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적들을 둘러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인답게 어쩌고 지랄하던 놈이 사황의 졸개가 됐냐?”

화운이 비웃었다.

그의 앞에는 새하얀 백발이 인상적인 구룡태자 북궁무결이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단짝이라던 신풍대도 사도강과 흑야의 주인 환사도 보였다.

하지만 북궁무결은 묵묵부답하며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 머리부터 발까지 온통 피처럼 붉은 색 일색인 노인이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다.

좌우로는 다섯 명의 흑의인을 대동한 채.

“혈존(血尊)이다. 전대의 괴물인데 사황을 따라서 저승에서 기어 나온 모양이야.”

“무영자(無影者)도 본존 앞에서는 끽 소리도 못 냈는데, 본존의 무서움이 정말 많이 잊혀지긴 했나보군.”

혈존이 모두를 내려다보는 태도로 말했다.

무영투는 자신의 사부인 무영자를 언급하는 혈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치 말이 맞아. 정말 무서운 인간이야. 저치가 펼치는 장공은 혈천멸살강기(血天滅殺?氣)라는 건데 사파삼대장공에 들어갈 정도로 무시무시한 살공이다. 저치 잡으려고 출사했던 소림 백팔나한이 모조리 죽은 적이 있을 정도로 무섭다더라.”

“백팔나한에 무당오검까지 함께였느니라.”

혈존이 정정해주었다.

“그거나 저거나.”

무영투가 빈정거린 순간.

“죽여라!”

혈존이 명했다.

그러자 그의 양쪽에 있던 다섯 명의 흑사자들이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무영투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화운이 검을 뽑아 그은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검신에서 삼 장 길이로 넘실거린 새파란 검강이 흑사자들을 한꺼번에 후려치자 한 명의 예외 없이 나가떨어졌다.

“뭣들하느냐! 저놈을 죽이지 않고!”

혈존이 뒤를 향해 말했다.

그에 북궁무결과 사도강 그리고 환사가 앞으로 나섰다.

가장 먼저 북궁무결의 백검이 새하얀 강기를 벼락같이 폭발시켰다.

번쩍!

새하얀 섬광이 장내를 두 쪽으로 갈랐다.

뒤이어 사도강의 대도가 일도양단의 기세로 벼락같은 일도를 펼쳤고, 마지막으로 환사의 시커먼 기운이 천지간을 꿰뚫었다.

콰콰쾅! 콰앙!

격돌의 여파만으로 주위의 담벼락이 날아가고 건물들이 폭삭 주저앉았다.

그리고 맥없이 나가떨어진 건 세 사람이다.

화운의 무위가 압도적이라 세 사람의 무위로는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이놈!”

혈존이 격분을 터트렸다.

화운을 향해 신형을 날리는 그의 쌍장이 붉은 혈강을 폭사했다.

그에 뒤질세라 북궁무결과 사도강 그리고 환사 역시 파상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감히! 모조리 팔다리를 뽑아 버릴 테다!’

혈존은 자신이 질 수도 있다는 경계심 따위는 눈곱만큼도 가지지 않았다.

화운의 무위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사황의 무위가 저 정도라면 얼마나 좋아!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속으로 투덜거린 화운은 이미 검멸을 발휘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