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합비대혈전(1)
안휘성 합비 남궁검가 정문 앞.
화운은 여전히 혼자였다.
하지만 지켜보는 눈은 많았다.
남궁검가에 대한 신망이 두텁거나 동경하는 합비의 사람들과 화운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는 사황천 끄나풀들의 시선들.
화운은 그 시선들을 받으며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식사 때가 되면 객잔으로 가서 음식을 받아 다시 밖으로 나와 자신의 자리에서 먹었다. 다 먹고 나면 빈 그릇을 가져가 객잔에 반납하고.
저녁이 되면 모닥불 하나 피워놓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것이 그의 하루 일과였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가 의자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운기라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사황천의 무리들이 달려들었으나 모조리 시체가 되어 쓰러지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난 어느 날 아침이었다.
남궁검가의 정문까지 쭉 뻗은 대로 끝에 세 사람이 나타났다.
푸른빛이 시원해 보이는 청의무복을 입고 있는 이남일녀.
화운은 그들이 나타난 순간 의자에서 일어나 탁자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역시 살아 있어 주었구나!’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세 사람.
그들을 지켜보던 화운은 자신도 모르게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어찌 이리도 더딘지.
조급함을 버려야 한다는 도가의 공부를 오 년이나 했음에도 사람의 정이라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그렇게 양쪽에서 서로를 향해 다가가자 더디다 느끼고 있던 마음과는 달리 금세 얼굴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화운은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무슨 냉혹한 검객인 양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남궁현과 단발머리에 뺨엔 상처까지 생긴 백리연.
그나마 선우유성만이 예전의 순한 기질 그대로였다.
“형······.”
“그래, 살아 있어 주었구나.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선우유성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이다.
“정말 미안해?”
남궁현이 물었다.
성난 기색이다.
“정말 미안하냐고?”
“그래, 미안하다.”
화운이 대답한 순간 남궁현이 선우유성을 쏘아봤다.
“들었냐! 미안하댄다! 왜 미안하겠냐? 미안한 짓을 했으니까 미안하겠지. 내 분명히 말했다. 넌 끼어들지 마!”
말이 끝난 순간 남궁현의 검이 뽑혔다.
벼락같이.
검의 궤적엔 화운의 목이 걸렸다.
하지만 목에 닿기 전에 화운이 들어 올린 검자루가 밑에서부터 밀어 올려버렸다.
쓰악!
허공에 파공음을 터트리며 빙글 돌아온 검날이 이번엔 반대쪽 어깨에서부터 가슴팍을 길게 그었다.
아니 그렇게 그어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화운이 치켜든 검집 끝이 검날을 아래에서 받쳐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남궁검가의 검법은 호쾌한 중에도 장중하다.
남궁현은 거기에 살기를 보태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복잡다단한 검초를 퍼부어도 화운이 내밀고 내뻗는 검집이 철벽처럼 막았다.
수십 합이 삽시에 지나갔으나 옷자락 하나 건들지 못했다.
“쫌! 죽으라고!”
남궁현이 버럭 외치며 검에 내력을 쏟아 부었다.
선명한 강기가 푸른빛을 날름거렸다.
“현아, 그만해!”
선우유성이 소리친 순간 남궁현이 검을 휘둘렀다.
초식이 아닌 검강을 발휘하여 화운을 공격한 것이다.
쾅!
화운은 그저 서 있었지만, 튕겨 버린 건 남궁현의 검이다.
화운의 앞에 투명한 강기의 막이 발휘되어 있었던 것이다.
“쫌! 쫌! 죽어! 죽기 싫으면 무슨 말이라도 하던가! 오 년이야! 오 년! 대체 어디서 뭘 한 거야! 어! 뭘 하느라 이제야 나타난 거냐고!”
“수련했다.”
화운이 나직이 대답했다.
순간 세 사람이 다 벙찐 표정을 지었다.
화운은 남궁현이 자신을 원망하는 이유를 이제는 짐작했기에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사황을 만났다. 난 죽기 직전이었고, 그때 검성께서 구해주셨다.”
수련했다는 화운의 대답에 막 폭발하려던 남궁현이 분기를 가라앉혔다.
“그래서!”
“사황이 얼마나 더 강해졌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검성께서는 등선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 그래서 내게 무공을 가르치셨다. 난 몰랐다. 이토록 긴 시간이 지나게 될 것이라곤. 고작 한두 달 지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미안하다.”
“으아아아악!”
남궁현이 검강을 발휘한 검으로 땅을 후려쳤다.
쾅! 쾅! 쾅!
미친 듯이 세 번을 후려치더니 남궁검가의 정문을 바라보며 섰다.
그리고는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으아아아아악!”
화운이 분노할 대상이 아닌 걸 알게 되자 분노를 해소할 길이 없어 더욱 울화가 치민 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으아아아아악!”
남궁검가의 정문을 향해 울분을 터트리는 남궁현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숙연하게 만들 정도로 처절해 보였다.
옥쇄를 각오하고 결사항쟁하다 몰살을 당한 남궁검가.
남궁현은 그들의 한을 풀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거라고 각오했었다.
“힘을 아껴둬라. 잠시 후면 한바탕해야 할 테니까.”
한바탕해야 한다는 말에 남궁현은 터벅터벅 걸어와 화운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검으로 땅을 짚은 채 두 눈을 감았다.
나름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 모습이 화운의 눈과 가슴에 콱 박혔다.
‘현아, 미안하다.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남궁검가의 분들이 다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아직은 사황을 상대할 수가 없어서다. 이대로 그를 만난다면 경천보패를 빼앗기고 말 테니까.’
어쩔 수 없다.
지금도 사황천하인데 경천보패까지 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면 무당검성이 살아서 돌아와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게다가 천마도 있다.
무당검성이 말하길, 사황이 나왔으니 그 역시 반드시 나올 거라고 했다.
그러니 지금은 고통스럽더라도 준비를 해야 할 때다.
그들에게 맞설 힘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약속하마. 반드시 돌아가신 분들과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날을 만들어 주겠다고.’
남궁현에게 하는 약속이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결의이기도 했다.
화운은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후 백리연을 돌아봤다.
백리연의 모습은 강렬하게 달라지긴 했으나 여전히 아름다웠다.
별빛을 담은 듯 빛나는 두 눈과 오똑 선 코 그리고 탐스런 입술.
옥의 티처럼 거슬리는 뺨의 상처만 뺀다면.
‘저번엔 다리를 크게 다쳤는데 이번엔 얼굴이군. 내가 한 눈만 팔면 다치는 건가?’
화운이 빤히 바라보자 백리연은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감출 수도 없었고, 사실은 싫지도 않았다.
뺨의 흉터도 그리고 관심도.
“많이 흉한 가요?”
“멋진 여고수가 되길 바랐는데, 당찬 여전사가 된 것 같습니다.”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멋을 부릴 수가 없어요. 실망했나 보군요.”
“자유로워 보이는 걸 보면 그동안 구속을 싫어했었던 모양입니다. 이제야 알겠어요.”
“······!”
화운의 말에 백리연은 적잖게 놀랐다.
기실 그녀는 미모가 훼손되면서 자유를 찾았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된 느낌.
그 덕분에 당차게 변했고,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 놈은 날카로워졌고, 한 놈은 단단해졌고, 한 분께선 자유로워지셨군.”
화운의 시선이 남궁현으로 갔다가 선우유성에게로 그리고 다시 백리연에게 돌아왔다.
그러다 곧 멀리 쭉 뻗은 대로 끝을 응시했다.
“세 사람만 온 겁니까?”
“맞아요. 위험 부담이 크다고 올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럼 한 식경 내로 시작되겠군.”
“······!”
“그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사방에 천라지망을 펼치기 시작했을 겁니다. 조금 더 기다려보고 더 이상 나타날 사람이 없다고 판단되면 몰려오겠지요. 우리 네 사람의 목을 따기 위해서.”
화운을 만나러 온 세 사람도 어느 정도는 각오한 바였다.
그럼에도 화운에게서 천라지망 어쩌고 하는 말을 들으니 절로 긴장되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죠?”
“여긴 내가 판 함정입니다. 저들은 천라지망을 펼쳐 우릴 잡으려 들겠지만, 결과는 반대가 될 겁니다.”
“자세히 말해보세요.”
“살아남은 정무맹을 이끌고 있는 건 누구지요?”
“무당파의 장교진인이세요.”
“맹주님께선 돌아가신 겁니까?”
“그날 사황을 맞아 우리가 퇴각할 시간을 끌어주셨어요.”
“그랬군요.”
“말해 봐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
“우린 미끼입니다. 앞에서 적의 아가리를 잡아줄 미끼.”
“그럼 뒤는 누가······ 설마 정무맹인가요?”
“맞습니다.”
“오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럼 별수 없지요. 우리끼리 아가리를 부수든 도망치든 해야지요.”
“세상에! 어찌 이리 무모하게······!”
화운은 그저 웃어주었다.
무모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좋은 기회요. 얼마나 많은 적들이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정무맹이 아직 거뜬하다는 걸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는 기회. 이런 기회를 마다할 정도로 움츠린다면 난 당신들과 상관없이 내 방식대로 움직일 거요.’
화운은 정무맹에 손을 내밀었다.
잡을지 말지는 정무맹의 선택에 달렸다.
그 선택에 따라 화운의 선택 역시 달라질 것이다.
화운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화우우우웅!
까마득한 거리에서 허공을 찢어발기는 파공음이 들렸다.
소리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굉장한 힘으로 던진 것이 분명했다.
“왔군.”
화운이 나직이 말했고.
남궁현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선우유성과 백리연은 검자루를 잡았다.
콰웅!
어른팔뚝만 한 굵기의 깃발이 대로에 꽂혔다.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아주 커다란 깃발이었다.
“이화태양종!”
남궁현이 씹어 뱉으며 화운과 어깨를 나란히 한 순간.
깃발이 날아왔던 곳에 거대한 기의 유동이 느껴졌다.
얼마나 거대한 기의 유동이었는지 화운을 제외한 세 사람의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쿠콰콰콰콰콰콰콰!
가공할 일이 벌어졌다.
까마득한 거리에서부터 일직선상에 놓인 양쪽 대로변의 건물들이 차례로 터지고 무너졌다.
무슨 거대한 돌담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다.
화운을 비롯한 네 사람이 있는 곳까지 그 많던 전각과 건물들이 박살이 나면서 대로의 폭이 세 배나 더 널찍하게 변했다.
적들의 속셈이 드러났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단숨에 쓸어버리겠다는 수작일 터.
“형! 사람들이······!”
“걱정마라. 날 찾아오는 사람이 있거든 이 일대의 주민들은 전부 대피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비명이 없었다.
“남궁현.”
“예!”
화운이 부르자 남궁현이 대답했다.
“네가 중앙이다. 품(品)자형!”
화운의 말에 선우유성과 백리연이 남궁현의 양쪽 뒤로 자릴 잡았다.
“누구든 자리를 이탈해 공격하려는 순간 진이 깨질 거고, 진이 깨지면 세 사람은 죽는다. 이번 싸움은 방어다. 버티면 이긴다.”
화운은 그러면서 검을 뽑아 자세를 낮추고 비틀었다.
왼팔은 가볍게 들어 왼쪽 상반신 앞쪽에 위치시켜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오른손의 검을 길게 뻗어 찌르고 휘둘러 베는 몇 가지 동작을 펼쳐보였다.
모든 동작이 끝날 때까지 두 발은 한 걸음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고, 왼팔은 검의 움직임에 따라 상반신 곳곳을 방어했다.
방패를 가진 세 사람이 펼칠 수 있는 방어검공이었다.
이곳에서 며칠 동안 온종일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 생각해 낸 것이었다.
화운이 두 번을 더 펼쳐 보이는 사이에 대로를 따라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창을 든 기백 명의 숫자였다.
하늘을 찌를 듯 장창을 높이 세운 채 대로를 꽉 채우고 다가오니 흡사 거대한 송충이가 기어오는 것 같다.
“긴 싸움이 될 거야. 각오 단단히 해.”
“우린 걱정 말고 오 년 동안 배웠다는 거나 보여주세요.”
백리연이 말했다.
“실망하지 말아야할 텐데.”
“그럼 실망시키지 마세요.”
“나부터 각오 단단히 해야겠군.”
“바로 그거예요.”
백리연의 말에 화운은 씩 웃었다.
백리연도 웃었고, 선우유성도 웃었다.
남궁현은 검을 힘껏 쥐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는 사이에 적들의 선두와의 간격이 백여 보 정도로 가까워졌다.
적들의 움직임이 달라진 건 바로 이때였다.
선두에서부터 하늘로 치켜들었던 장창을 전방으로 뻗어 내리며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함성 따위는 없다.
그래서 더 섬뜩하다.
기백의 숫자가 일제히 돌진하기 시작하자 대로가 진동했다.
들소 떼가 대로를 따라 돌진해 오는 것 같았다.
오십여 보.
이제 얼굴이 확연히 보일 정도로 가깝다.
화운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바로 이때였다.
검을 비껴든 화운은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화운의 앞에 기백의 숫자가 돌진해 오고 있지만, 비교불가다.
숫자는 그저 숫자일 뿐 화운의 걸음조차 막지 못한다.
화운의 시선은 멀리로 향한다.
돌진해 오는 기백의 숫자 뒤.
수십 명의 중년고수들.
그리고 그들 뒤로 십여 명의 노인들.
그리고 그들 뒤로 태양소마 명강을 비롯한 이화태양종의 후기지수들.
그리고 그 뒤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두 명의 노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거인.
태양존자 명교진!
화운의 시선은 거기에 닿아 있다.
‘거기 기다리시오. 내가 가겠소!’
‘놈! 오너라!’
두 사람의 기세가 수백 장을 건너 맞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