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이화태양종(離火太陽宗)
복건성 복주.
한여름의 열기가 한풀 꺾인 시기.
“이보게, 그 소문 들었나?”
“뭔 소문?”
“안휘성에서 들려온 소문 몰라?”
“안휘성? 그곳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역시 모르고 있었군.”
“뭔데 그래?”
“점소이! 여기 모태주 큰놈으로 한 병 가져와라. 안주는 간단한 것으로 가져오고. 괜찮지?”
점소이에게 큰 소리로 주문한 변위가 동료 상우충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이 사람 이거 크게 시킨 걸 보니 정말 대단한 이야기 거리라도 물어온 모양이군.”
“당연하지. 그러니까 이리 뜸을 들이는 것이지.”
“술값은 내가 지불할 것이니 염려 말고 어서 풀어놔 보게.”
“좋네. 자, 안휘성 합비 하면 뭐가 떠오르나?”
“합비?”
“그렇네.”
“합비, 합비라······ 당연 남궁검가지.”
상우충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놀라 제 입을 스스로 틀어막고는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요 근래 자주 보이던 사황천의 무리들은 없는 것 같았다.
“남궁검가 이야긴가?”
상우충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맞네.”
“남궁검가는 왜? 거긴 사황천에게 넘어간 지 오래잖나.”
“그랬지. 그런데 그렇지 않게 된 모양이야.”
“응? 그게 무슨 말인가? 그렇지 않게 된 모양이라니!”
“그러니까 한 열흘 전쯤이었다고 하네. 한 사내가 남궁검가에 나타난 것이.”
“사내가 나타나? 그것도 혼자서? 혼자 뭘 할 수 있다고?”
“그렇지가 않으니까 이야기 거리가 되지. 말 끊지 말고 가만 있어보게.”
“아, 알았네.”
말을 하다 보니 두 사람의 목소리가 차츰 커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혼자 나타난 사내가 남궁검가에 있던 사황천의 무리들을 전부 죽였다는 거야. 그때 죽은 자들 중에 흑마갱주와 혈악주도 있었다는군.”
“헉? 천사련 시절에 삼천육지(三天六地) 중 육지에 들어가던 고수들 아닌가?”
“맞네. 그런 고수들이 그 한 사내에게 죽었다는군. 뿐만 아니라 그들을 수하처럼 부리던 유령노조마저 사내에게 일검을 맞고 쓰러졌다는 거야.”
“유령노조까지?”
“더 놀라운 건 뭔지 알아?”
“또 있어?”
“이게 대박이야!”
“뭔데?”
“그 사내가 남궁검가 정문에 깃발을 걸었다는 거야.”
“무슨 깃발?”
“남궁검가, 선우세가, 신풍대. 그 세 개의 깃발을 한꺼번에 달았다고 하네.”
“헉? 정말 놀라운 일이네. 안휘성이면 사황천의 앞마당은 아니어도 옆 마당쯤은 될 텐데.”
“그러니까 말이네.”
“이러다 또 한바탕 큰 싸움이 벌어지는 거 아냐?”
“글쎄, 정무맹이 하도 크게 당해서 그럴 힘이나 있을까?”
두 사람이 그렇게 두런거릴 때였다.
가까운 자리에서 식사를 하던 청년이 다가왔다.
부둣가 하역장에서 잡일을 하는 청년인지 무명옷의 양팔을 떼어내 조끼처럼 걸치고 있었는데, 팔을 다쳤는지 왼팔엔 누런 천을 잔뜩 감고 있었다.
“저기 대화중에 죄송한데요, 그 사내의 정체는 밝혀졌답니까?”
“응? 뭔 사내?”
“아, 죄송합니다. 제가 귀가 밝아 듣게 되었습니다. 하도 궁금해서 그러니 좀 알려주십시오.”
꾸벅 인사하는 청년, 그는 다름 아닌 선우유성이었다.
선우유성이 공손히 청하자 변위와 상우충은 서로를 쳐다보며 어떻게 할지 의사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곧 변위가 말했다.
“사실 그 사내의 정체가 밝혀진 건 아니라네. 근데 나한테 이 이야기를 해준 분께서는 그 사내가 남궁검가의 소가주인 것 같다고 하시더군.”
“엇? 묵령사신 남궁현이요?”
“쉿! 목소리 좀 낮추게.”
“아, 예.”
“생각해 보게. 남궁검가에 목숨 걸고 나타나 그렇게 간 큰 행동을 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남궁검가는 아직 죽지 않았다. 우린 건재하다.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겠는가.”
“아, 그러고 보니 그럴 것도 같네요.”
선우유성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다 고맙다고 인사 한 후 객잔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잠시 후.
변위와 상우충이 서로를 향해 눈짓을 하더니 객잔 밖으로 쫓아나갔다.
선우유성은 휘적휘적 걷고 있었다.
부둣가로 향하던 선우유성은 거의 다 도착할 무렵 갑자기 방향을 꺾더니 인근의 야산으로 올라갔다.
멀찍이서 따라가던 변위와 상우충은 서로를 돌아본 후 변위는 선우유성의 뒤를 쫓아갔고, 백의 사내는 약간의 시간을 둔 후 품에서 호각처럼 생긴 것을 꺼내 길게 불었다.
삐이이이익! 삐이익!
날카로운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반각 정도 지나자 십여 명의 사내가 저마다 날이 시퍼런 칼을 쥐고는 달려왔다.
그들은 곧 상우충의 인도 하에 야산으로 향했다.
야산 중턱에 한 구의 시체가 있었다.
변위다.
상우충과 칼 든 자들은 시체 주위로 모여들어 사방을 경계하는 한편 시체를 살폈다.
바로 이때 선우유성이 거목 뒤에서 슥 모습을 드러냈다.
“흑천(黑天)의 흑사대가 언제부터 사냥개가 되었을까. 여기저기 잘도 냄새를 맡고 다니는군.”
“역시 정무맹이었구나!”
“맞아. 정무맹의 호걸님이시다.”
말이 끝난 순간 선우유성이 한 걸음에 달려들어 길쭉한 장검을 휘둘렀다.
쓰캉!
칼과 부딪쳐 불똥이 튀는 것 같더니 피가 튀었다.
“크윽!”
흑사대 한 명이 피를 뿌리며 비틀거린 순간 자세를 바짝 낮춘 선우유성이 수중의 장검을 크게 휘둘렀다.
“꺽?”
또 한 명이 쓰러졌다.
바로 이때 상우충이 선우유성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언제 꺼내들었는지 손바닥을 붙여놓은 것 같은 도끼를 내리 찍고 있었다.
그에 몸을 비틀 새가 없었던지 선우유성이 왼팔을 들어 막았다.
‘다친 팔이라고 봐줄 성 싶으냐! 단숨에 잘라주마!’
상우충이 있는 힘껏 도끼로 찍었다.
쩌엉!
팔로 막았는데 쇳소리가 터졌다.
상우충은 이 무슨 황당한 일인지 있는 대로 눈을 치떴다.
그런 상우충의 눈에 선우유성의 왼쪽 팔에 감고 있는 누런 천 사이로 시커먼 쇳조각 같은 게 보였다.
‘방패? ······헉!’
기겁한 상우충이 훌쩍 신형을 날리며 크게 외쳤다.
“조심해라! 묵혼검룡이다!”
상우충은 진짜 크게 놀란 듯 사력을 다해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빙글 돌아 크게 휘두르는 묵혼검룡 선우유성의 장검에 한쪽 다리가 걸리고 말았다.
“억?”
상우충이 나가떨어진 순간 선우유성이 벌떡 상체를 세웠다.
이때 상우충의 경고에 놀란 흑사대가 왔던 곳으로 우르르 물러났다.
하지만 곧 그들 뒤쪽에서 죽음의 손길이 무자비하게 뻗쳐왔다.
쓰악!
날카롭게 베이는 소리가 첫 번째로 울리는 순간 차가운 묵광이 흑사대 사이를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검이었다.
일곱 명이 동시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멈춰 선 죽음의 사신.
인간의 감정을 억지로 지운 듯 극도로 차가워 보이는 얼굴.
두 눈엔 살기만이 희번덕거렸다.
“묵, 묵령사신 남궁현······!”
상우충이 놀라 부르짖었다.
이제 살아남은 자는 한쪽 발목이 베어져 땅바닥에 쓰러진 상우충까지 합쳐서 넷.
하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후다.
번-쩍!
남궁현의 검이 칼을 들고 물러서던 셋을 순식간에 베었다.
이제 남은 건 상우충뿐이다.
남궁현은 상우충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적당히 좀 해.”
선우유성이 막았다.
“비켜!”
남궁현이 사납게 말하며 선우유성을 밀쳤다.
“현아!”
선우유성이 남궁현의 팔을 잡았다.
“놔!”
“복수를 해야지. 하지만 살인귀가 되지는 마, 제발!”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살인귀가 아니라 마귀라도 될 거야! 그러니까 이거 놔!”
남궁현이 선우유성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그는 상우충을 죽일 수가 없었다.
이미 죽어버린 자를 또 죽일 수는 없으니까.
목이 잘린 상우충의 뒤쪽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백봉 백리연 바로 그녀였다.
한데 그녀의 외모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삼단처럼 길었던 머리칼은 단발로 싹둑 잘라버렸고, 살아남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얼굴 한쪽엔 기다란 상처가 생겼다.
“둘 다 계속 애처럼 굴래? 현이 너! 진짜 복수를 하고 싶으면 임무에 집중하도록 해. 눈앞의 한두 놈한테 신경질 부리다가 큰놈들을 놓칠 거야?”
“신경질 부리는 거 아냐.”
“죽을래?”
“······.”
“그리고 유성이 넌 현이 좀 그냥 냅둬. 걔가 애야? 왜 자꾸 부추기고 그래?”
“부추긴 게 아니라 막은 건데요?”
“그게 부추기는 거야. 네가 모른 척 냅둬봐. 걔가 그렇게 나 성질났으니까 말려줘 하는지.”
“그게 아닌데······.”
“너도 죽을래?”
“······.”
“임시 신풍대주로서 말하는데 한 번만 더 이런 모습이 내 눈에 보이면 둘 다 죽을 줄 알아.”
백리연이 눈을 부라리자 둘은 꼼짝을 못했다.
오 년 전, 사황성에 정무맹이 쑥대밭이 되어 무참히 쫓겨난 후 선우유성과 남궁현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넋을 잃은 듯 하루 종일 멍청하게 앉아만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일으켜준 게 백리연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둘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온종일 두들겨 팼다.
두 사람은 하도 맞다 보니 악이 생겨 반격을 했지만, 두 살 차이가 준 무위를 극복 못하고 아주 녹초가 될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
그날 이후로 임시 신풍대주를 자처한 백리연에게 꼼짝도 못했다.
“아, 맞다. 신풍대!”
선우유성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신풍대가 왜?”
“반드시 확인 해봐야 할 게 있어요.”
선우유성은 살짝 들떠 보이는 얼굴로 객잔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백리연과 남궁현은 동시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화 공자!”
“공자는 무슨 겁쟁이 주제에!”
“겁쟁이 아니라니까! 분명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무슨 사정이 있어서 오 년이나 숨어 있어?”
“숨은 게 아니라니까!”
선우유성과 남궁현이 언쟁을 벌였다.
화운이 자신을 죽여도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는 선우유성이었고, 함께 싸울 거란 믿음이 배신당했다고 여기고 있는 남궁현이었다.
특히 남궁현은 남궁검가의 몰살 소식으로 인해 한동안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할 정도로 절망하였던 터라 화운에 대한 배신감이 더 커져버렸다.
“숨은 거든 아니든! 정말 그 인간이 맞다면 물어볼 거야. 그동안 어디에 있었냐고. 만일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죽여 버릴 거니까 넌 절대 끼어들지 마!”
선우유성은 뭐라고 하려다가 남궁현의 심정을 알기에 그리고 화운을 믿기에 내버려두었다.
“돌아가자.”
백리연이 먼저 돌아섰다.
“무영투 영감님께 부탁해 보죠. 그분이라면 하루, 이틀? 그 정도면 다녀올 테니까요.”
선우유성이 백리연에게 달라붙으며 말했다.
“무영투 어르신은 잠행을 떠나셨어. 한동안 안 돌아오실 거야.”
“그럼 어떡해요? 형이 분명할 건데.”
“뭘 어떡해? 우리가 직접 가야지.”
“진짜죠?”
“신풍대주인지 확인하러 가는 거야. 신풍대가 아니면 누가 가?”
“그럼요. 신풍대가 가야죠!”
선우유성의 목소리가 힘차게 울렸다.
***
태양을 상징하는 커다란 조형물 아래 가장 높게 자릴 잡은 태사의에 검은수염의 중년인이 위엄찬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오 년 전, 장강에 나타나 수로왕과 독왕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놈이라고?”
“정황상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흠, 그럼 그놈이 남궁검가에서 그러고 있는 이유는 뭐고?”
“아마도 자신의 동료들을 부르는 듯 보입니다.”
“동료들을 불러?”
“예. 혹여 함정은 아닐까 알아보았더니 오 년 전에 정무맹을 쓸어버리기 직전부터 모습을 보인 곳이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오 년 동안 어디에든 처박혀 치료를 했거나 무공 수련을 했을 거다?”
“그렇게 사료됩니다.”
“재밌는 놈이로고! 오 년 전엔 사정대전이 정식으로 벌어지기도 전에 한바탕 장강을 뒤엎어놓더니, 이제 정파가 끝장난 마당에 오 년 만에 나타나 큰 싸움의 불씨를 던지고 있어?”
“잡아야 합니다.”
“왜?”
“은밀히 알아보니 사황께서 놈을 잡으라 명하셨다고 합니다. 그것도 오 년 전에 낭왕에게 밀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사황께서 직접?”
“예.”
“낭왕은 지금 어디에 있고?”
“절강성 항주 선우세가에서 죽었습니다.”
“죽어? 놈이 한 짓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흠.”
“놈이 그곳에 그러고 있으니 동료였던 자들이 필경 몰려올 겁니다. 불시에 들이칠 수 있는 곳에서 대기한다면 놈을 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무맹의 잔당도 처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기만 한다면야 그렇겠지.”
“제게 명만 내려주십시오. 태양성군을 끌고 가 그 자리에 모인 자들을 일망타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오 년 만에 나타난 것도 그렇고, 이런 정세 속에 남궁검가 앞에 태연히 나선다는 것도 그래. 수로왕과 독왕도 꼼짝 못했다며? 허투루 대할 놈이 아니야.”
“하오면?”
“이제라도 세상에 본종의 힘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본좌가 직접 가겠다. 본종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일거에 쓸어버리겠노라.”
“존명!”
이화태양종(離火太陽宗)의 종주 태양존자 명교진이 전 병력의 출진을 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