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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으로 무림지존-51화 (51/207)

#051. 살아 있다면 꼭 와라!

산전수전 다 겪어 노회한 낭왕은 화운이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고수라는 걸 직감하고는 구환도를 세차게 휘둘렀다.

“이거나 처먹어라!”

공력을 잔뜩 쏟아 부어 화운으로 하여금 깜짝 놀라 물러나게 만듦과 동시에 뒤로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그건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한쪽 다리가 불로 지진 듯 뜨겁게 느껴지더니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끄악! 내 다리! 내 다리!”

낭왕이 죽는다고 악을 썼다.

“선우세가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모른다! 죽일 테면 죽여 봐라, 이놈아!”

낭왕이 소리친 순간 그의 한쪽 팔이 떨어져나갔다.

“어디에 있지?”

“크윽! 죽여라!”

“죽이진 않아 사지를 잘라낼 뿐이지. 그러니까 걱정 말고 대답해.”

“······!”

“왜? 모자라? 그럼 목 빼고 다 잘라주지. 어딜 더 잘라줄까? 귀랑 코도 잘라내고 싶어? 아니면 가운데 토막? 말만 해.”

하는 말은 협박이고 조소였다.

하지만 표정과 목소리는 무심에 가깝게 보인다.

그냥 그렇게 해버릴 거라는 뜻이다.

낭왕이 흠칫 하는 사이에 화운의 검이 허공으로 올라가더니 벼락같이 휘둘러졌다.

“해적! 해적도요! 그들은 해적도에 있소!”

낭왕이 부리나케 소리쳤다.

하지만 화운의 검을 멈추진 못했다.

삭!

낭왕의 머리통이 둥실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그의 머리통이 다리와 팔에서 흘러나온 핏물 속으로 굴러 떨어진 순간엔 화운이 사라지고 없었다.

***

해적도.

아주 오래전부터 해적들의 소굴이라 그렇게 불렸다.

절강성 항주만을 벗어난 앞바다에 천여 개의 섬과 삼천여 개의 암초들이 득시글거리는 군도가 있는데, 일명 주산군도라 한다.

해적도는 그중 바닷길이 가장 험한 섬이다.

바닷길을 잘 아는 해적들이야 언제든 먼 바다로 도망칠 수 있지만, 바닷길을 모르는 배들은 암초에 걸려 좌초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선우세가가 한참 성세를 구가할 때도 해적들을 소탕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화운은 날이 밝자마자 어부들을 찾아가 해적도의 위치를 물은 다음 곧장 바다로 나갔다.

배도 없이 신형을 날린 화운은 바다 위를 그냥 날아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발을 받쳐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것 같았다.

한 식경 정도 빠른 속도로 쏘아가니 어부들이 말한 섬이 보였다.

화운은 그 섬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갔다.

그런데 백여 보 가까이 다가갔을 때다.

해변에서 빛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촉에 빛이 반사한 모양이었다.

화운은 화살을 날린 이를 향해 살짝 방향을 틀었다.

틱!

화살은 화운의 몸에 닿지도 못하고 투명한 막에 막혀 터져버렸다.

두 발의 화살이 더 날아왔으나 소용없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화운은 화살을 날린 이의 코앞까지 날아갔다.

“······!”

시위를 잔뜩 잡아당긴 채 귀신이라도 본 듯 두 눈을 한껏 치뜬 궁수.

놀라긴 화운도 마찬가지다.

“무사하셨군요.”

“정말 운이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화운이 미안한 얼굴로 말한 순간 활을 던져버린 이옥영이 두 팔을 벌려 와락 껴안았다.

“잘 왔다. 잘 왔어. 너야말로 무사했구나! 고맙구나, 고마워!”

이옥영은 죽은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처럼 반겨주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는 물었다.

“여기엔 어떻게 온 것이냐? 가주께서 보내신 것이냐?”

“가주님께서도 무사하신 겁니까?”

“가주께서 보낸 게 아니란 말이냐?”

“예.”

“그, 그럼 어찌 된 것이냐?”

“전······.”

화운은 사황을 만나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검성이 구해주었고, 검성께 무공을 배우고 나와 보니 오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더라는 말을 미안한 얼굴로 들려주었다.

“그랬구나! 그랬어! 너희들이 무사하기만을 빌고 또 빌었는데,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오 년 전에 정무맹이 쓰러지고 온 세상이 숭악한 무리들의 천지가 되자 동 노야께서 찾아와 이쪽으로 몸을 숨기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어렸을 때 잡혀가 해적 생활을 조금 해봐서 물길을 대충 안다고 하시더구나. 그래서 세가의 무인들과 인근의 무관들을 죄다 규합해서 이곳으로 왔다.”

동 노야, 동태전은 선박 십여 척을 가진 선주로 선우세가에 늘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해적들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동 노야께서 숨은 고수셨다. 지금의 너만 할 때 해적들에게서 간신히 탈출했는데, 그때 거둬주신 분이 본가의 가주님이셨다는구나. 유성이의 할아버지 말이다. 당시에 가주께서 무공도 가르쳐주셨는데 노야께서는 어부로 살기를 바라셔서 세가가 멸문의 위기에 처하거든 그때나 한 번 도와달라고 하셨다는구나.”

“그야말로 조상님들의 돌보심이었네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 조상님들께서 지켜봐 주신 덕분이다.”

“숙모님!”

“왜 그러느냐?”

“그럼 지금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엔 무탈하시는 거죠?”

“이곳에 있는 동안엔 그렇다만, 어찌 그러느냐? 벌써 가려는 것이냐?”

“예. 유성이랑 가주님을 빨리 찾아야죠.”

“그래, 찾아야지. 살아있을 게다. 그러니 반드시 찾아야 한다.”

화운의 말에 이옥영이 힘주어 말했다.

그에 화운 역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히 살아 있을 테니까, 꼭 찾아야죠. 숙모님, 전에 제가 드렸던 말 기억하세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던 것 말이냐?”

“예. 이번에도 마찬가지예요. 이곳에서 기다려주세요. 유성이를 찾아서 사황천을 몰아낼 겁니다. 온 세상이 저희들의 이름을 외쳐댈 때 모시러 오겠습니다.”

“알겠다. 그리 하거라. 난 이곳에서 기다리겠다. 그러니 너흰 아무 염려 말고 장부로써 할 일을 하거라.”

이옥영이 굳센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아무리 여장부 기질이 있어도 부군과 자식의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거늘 어찌 가슴 졸이지 않을까.

그래도 화운을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이를 찾거든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그렇게 하거라.”

이옥영이 손을 놓아주자 화운은 일부러 웃어주었다.

“다 잘될 겁니다.”

“그래, 그럴 거야.”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다녀오도록 하거라.”

화운은 인사를 한 후 천천히 뒤로 신형을 날렸다.

가볍게 미소 짓고 있는 화운의 신형이 허공으로 천천히 날아갔다.

그리고 곧 번쩍 하더니 사라졌다.

혼자 남은 이옥영은 슬며시 허벅지를 꼬집었다.

“꿈이 아니야. 꿈이 아니었어.”

***

안휘 합비.

뜨거운 햇볕이 머리 꼭대기에서 쏟아지는 시각이었다.

일단의 무리가 합비로 들어섰다.

선두엔 고목처럼 깡마른 노인이었다.

유명귀문(幽冥鬼門)의 유령노조였다.

그는 지금 무척 화가 난 상태였다.

평소 호수를 좋아하여 인근의 소호(巢湖)에 유명궁을 새로 짓느라 자리를 비운 틈에 웬 놈이 나타나 남궁검가를 점거했다는 것이다.

남궁검가는 합비의 아니 안휘성의 오랜 명문으로 이름 높은 곳이라 현판을 부숴버리고 사황의 깃발을 높이 달아 특별히 관리하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그런 곳을 내주었으니 혹여 사황의 귀에 들어간다면 크게 경을 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흑마갱주와 혈악주, 이놈들 고분고분하기에 거두어 주었더니 거기 하나 못 지킨단 말이냐!”

유령노조는 칼칼한 목소리로 성을 내며 성큼성큼 걸었다.

그의 뒤로는 이십여 명의 심복들이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은잠술이 뛰어나고 합공에 능해 정무맹의 잔당들을 사냥할 때 손과 발이 되어주었던 유명귀들이었다.

“저, 저저!”

갑자기 유령노조가 걸음을 멈추고 성을 냈다.

멀리 남궁검가가 보이고 있는데 높이 사황의 깃발이 있어야 할 자리에 새하얀 천에 남궁검가라는 이름이 펄럭이고 있었다.

“치워라!”

유령노조는 짧게 명하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명귀 중의 하나가 땅을 박차고 쏜살처럼 쏘아갔다.

그런데 남궁검가의 정문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였다.

퍽!

유명귀가 돌팔매질에 당한 새처럼 뚝 떨어졌다.

“······!”

유령노조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안력을 높여 남궁검가의 정문을 살펴보았다.

한 놈이 보인다.

자신이 나타났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있다.

더 기막힌 것은 탁자를 가져다두고 태연하게 앉아 음식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

“저, 저놈이!”

유령노조는 조롱당한 기분이었다.

“죽여라!”

유령노조가 명했다.

유명귀들이 달려갔다.

가면서도 간격을 조절하여 협공할 태세를 갖추었다.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가르친 보람이 있다.

유령노조는 그제야 조금 화를 누그러트리며 걷기 시작했다.

놈이 상상 외로 강해도 상관없다.

자신의 걸음이 다시 멈춘 순간 놈은 죽을 테니까.

“남궁검가의 잔당인가?”

여기 합비의 남궁검가 장원에 남아 있던 남궁씨는 모조리 죽였다.

도망치지 않고 필사적으로 버티니 모조리 죽여주는 수밖에.

정무맹에 가 있던 일부는 쥐새끼처럼 도망쳤다고 하니 어쩌면 개중의 하나일 지도 모르겠다.

유령노조가 그런 생각을 하며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태연하게 앉아 음식을 먹고 있던 사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검을 뽑아들고는 유명귀들이 들이닥치기도 전에 빈 허공에다 한바탕 검을 휘두르더니 검을 집어넣고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저게 뭔 짓······!”

유령노조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막 합공을 시작하려던 유명귀들이 날개 잘린 새처럼 팔다리가 잘려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고수다.

자신의 걸음이 멈춘다고 하여 간단히 죽일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긴장해야 할 자다.

유령노조는 크게 심호흡했다.

들숨과 날숨이 교차한 순간 환혼유령공(還魂幽靈功)이 전신으로 퍼졌다.

이제 놈은 지옥문을 두드린 것이나 진배없다.

“끄흘흘! 목을 뽑아주마!”

유령노조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걸었다.

양손에 살기로 번뜩이는 공력을 잔뜩 응집한 채.

그렇게 남궁검가의 정문에 태평하게 앉아 있는 사내를 향해서 다가갔다.

역시 사내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피차 말 섞을 사이는 아니니 식기 전에 빨리 끝냅시다.”

사내, 화운이 일어섰다.

입 안 가득 음식을 씹으면서.

도발? 조롱? 무시?

아니다.

이건 그냥 미친 거다.

남궁검가주라 하여도 자신의 앞에서는 이런 미친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니 진짜 미친 거다.

“머리통을 뽑아놓아야 할 놈이로다!”

유령노조가 소리 없이 쇄도했다.

일체의 사전 동작 없이 찰나의 호흡을 틈 타 다가가 두 손을 불쑥 뻗었다.

시커먼 살의가 번뜩이는 손이었다.

한 번 걸리면 목숨을 내놓기 전에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유명잔백수(幽冥殘魄手)였다.

놈이 검을 뽑는 게 보였으나 늦었다.

이미 유명잔백수가 놈의 목과 심장에 거의 다다랐으니까.

유령노조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내걸렸다.

그런데 웬걸 놈의 검이 보인다.

이쪽이 아니라 저쪽에서.

눈 한번 깜빡인 찰나 중간 과정 없이 아래쪽에서 막 뽑혀 나오던 검이 위쪽에서 멈추어지고 있다.

“지기(地氣)는 위로 솟구치는 걸 좋아하지.”

“······!”

뭔 소리지?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유령노조는 지금의 상황을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림처럼 멈추었고, 놈은 검을 집어넣고 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그렇겠지.

저놈이 다시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지 않은가.

뭐하는 놈인지 맛있게도 처먹는군.

됐다. 이제 일어나서 소호에 짓고 있던 유명궁이나 둘러봐야겠다.

‘······!’

갑자기 가슴팍이 뜨겁다.

아랫배까지 계속 뜨거워진다.

엇?

뭔가가 쏟아진다.

아랫배에서······!

‘보, 보고 싶지 않아······.’

그 생각을 끝으로 유령노조는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유령노조가 쓰러진 순간 한바탕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거리의 시체들을 휘감아 멀리 야산으로 가져가버렸다.

식사를 마친 화운은 그릇들을 들고 객잔을 찾아갔다.

객잔의 점소이는 아무 말 없이 받아 주방으로 향했다.

말은 없었으나 눈빛에는 감사의 기운이 엿보였다.

‘남궁검가에 대한 사람들의 신망이 대단하군.’

선우세가가 부러워하고 배워야 할 점이다.

화운은 그런 생각을 하며 객잔 주인에게 다가갔다.

“부탁드린 것은 어찌 되었습니까?”

“저쪽 탁자 위에 두었습니다.”

객잔 주인이 출입구 가까운 곳의 탁자를 턱짓을 슬쩍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부디 지켜주십시오.”

화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객잔 밖으로 나갔다.

사실 객잔의 음식을 먹는 것도 객잔 주인에게는 위험한 일이다.

여기저기 사황천의 눈들이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객잔 주인이 먼저 음식을 가지고 찾아와 주었기에 그 호의를 받아주었고, 그 이후로 매 순간 객잔 주위를 살피는 걸 게을리 하지 않았다.

출입구 가까운 곳의 탁자에서 잘 포개진 천들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간 화운은 정문에 높이 세워놓은 장대를 내렸다.

적들의 피로 휘갈겨 쓴 남궁검가라는 천을 풀어내고는 객잔주인에게 은밀히 부탁해서 만든 진짜 깃발다운 깃발을 걸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세 개였다.

이윽고 화운이 장대를 높이 세우자 세 깃발이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에 확연히 보였다.

힘찬 서체로 쓰인 세 개의 깃발.

각 깃발에 쓰인 이름은 위에서부터 다음과 같았다.

남궁검가.

선우세가.

신풍대.

화운은 온 천하가 보란 듯이 깃발을 높이 달고는 자신이 마련해둔 의자로 가서 앉았다.

‘와라. 살아 있다면 꼭 와라!’

선우유성과 선우세가 그리고 남궁현과 남궁검가를 찾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천하를 다 뒤져보겠는가.

살아 있다면 그들 스스로가 찾아오게 만들어야지.

화운은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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