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늙은이가 여기에 왜 있어?
화운은 검법이라는 걸 인지한 순간부터 송문고검의 움직임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였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검신이라 불려야 함이 마땅한 무당검성의 가르침이거늘.
“공(功)이라는 건 음과 양이 어울린 것이다. 음과 양이 하나 되니 어찌 힘(力)이 되지 않을까. 공력이라 함은 그저 음과 양의 어울림일 뿐이다.”
어느 순간 검성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송문고검의 움직임 역시 멈추지 않았다.
화운은 송문고검이 펼치는 검법을 보면서 검성의 말을 새겨들었다.
“천기(天氣)와 지기(地氣)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맑은 기운이 위로 오르니 천기요, 탁한 기운이 가라앉으니 지기다.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되듯 천기와 지기가 서로를 쫓으니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그렇게 늘 흐르는 법이다. 하늘과 땅이 있고, 그 사이에 네가 있으니 천기와 지기가 너를 지나감이다.”
도가의 공부는 어렵다.
알 듯 말 듯 묘한 말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도(道) 자체가 본시 허허롭기 때문이다.
허허로움을 표하자니 헷갈리게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도가의 공부는 중생을 계도하기 위한 것, 듣고 듣고 또 듣다 보면 언젠간 대오의 순간에 이르게 된다.
사람에 따라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래서 도가의 스승들은 천천히 하라고 한다.
어차피 도달할 것이니 바쁘지 않다고 한다.
그 가르침이 무당검성의 인자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화운은 송문고검의 검법을 무수히 반복해서 보았다.
성의 가르침 또한 듣고 또 들었다.
시간은 흐르는 법이다.
특히나 화운에게 시간은 특별했다.
하지만 지금의 화운에게는 시간이라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송문고검과 무당검성의 목소리만이 존재했다.
그것을 보고 듣는 지각과 함께.
시간이 흘렀다.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흐른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이 검법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불현듯 화운이 물었다.
“빈도의 심득이었으나 이젠 너의 것이다. 너의 것을 빈도가 이름 지을 순 없느니라.”
“무당파 검술에 어울릴 만한 이름 정도는 지어주십시오.”
“무당의 검도 아니오, 오롯이 이 늙은이의 심득에서 시작하여 너의 검이 되었다. 허니 무당의 굴레로부터 자유롭도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난 검이니 건곤무상검(乾坤無上劍)이라 하겠습니다.”
화운이 눈을 떴다.
광휘로운 기운이 두 눈을 가득 채웠다.
그 빛나는 시선으로 새로운 세상을 본 화운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아!”
천지만물은 본시 기운으로 이루어진다.
그 말 그대로 화운의 눈에 비춰지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기운으로 보였다.
뭉치고, 흐르고, 얽히는 형형색색의 기운들.
그야말로 신천지처럼 보였다.
그러한 가운데에 새하얀 빛의 고리가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가시렵니까?”
“무심은 없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다. 빈도는 이제야 무심을 알아 육신의 허울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큰 가르침, 다시 뵙는 그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너여서 즐거웠느니라.”
화운은 넙죽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자 신천지처럼 보이던 광경이 사라졌다.
무당검성 또한 정좌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화운은 무릎걸음으로 걸아가 무당검성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무심의 도를 얻으셨으니 이 땅의 근심은 제게 넘기시고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공손히 말한 화운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들었으나 어느 누구보다 자연의 도에 가까워지기를 바랐던 분이니 그대로 두기를 바라실 터.
화운은 졸졸 흐르는 개울을 따라 그곳을 떠났다.
묵빛의 검 한 자루가 허리에 달랑거리고 있었다.
***
한여름의 열기가 온 천지를 후텁지근하게 채우고 있었다.
녹음이 짙은 숲 안의 그늘도 숨통이 막힐 정도로 무더웠다.
“에혀! 이 망할 놈의 여름은 대체 언제 끝나는 겨?”
“여름엔 덥다고 언제 끝나냐고 지랄, 겨울엔 춥다고 언제 끝나냐고 지랄. 그놈의 지랄은 언제 끝나는 것이냐?”
얇은 조끼 하나 달랑 걸치고도 덥다고 연신 조끼자락을 펄럭이던 노광은 상 표두가 타박하자 입만 댓 발 빼물다가 못 들은 척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보오! 날도 더운데 뭘 그리 빨빨거리며 가는 거요? 바람 난 여편네 잡으러 가는 거 아니면 쉬었다 가시오!”
노광이 소리치자 길을 따라 지나가던 사내가 멈춰서더니 이쪽으로 왔다.
허리춤에 검 한 자루가 달랑거리고 있으니 분명 무인이다.
“그러다 검이라도 뽑으면 어쩌려고 그러는 것이냐!”
상 표두가 다시 나무랐다.
표행 중엔 표두의 허락 없인 함부로 말을 걸어서는 안 되는 법인데, 말을 걸뿐 아니라 이쪽으로 불러들이기까지 하였으니 표행이 끝나는 대로 크게 훈계를 받아야 할 일이다.
상 표두가 표사 노광을 노려보는 사이에 사내가 다가왔다.
“표행 중인가 봅니다.”
“예. 태안으로 가는 상화표국 사람들입니다. 어디까지 가시는 분이십니까?”
상 표두는 혹시라도 모를 마찰을 막기 위해 정중하게 대했다.
그런데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태안이라구요?”
“예. 태안으로 가는 길인데, 어찌 그러시는지요?”
“근방에 태안이라는 곳이 있습니까?”
“하루거리에 있는데 이 근방이 처음이신가 봅니다.”
“몇 번이나 와봐서 잘 아는데······ 아! 이 근처의 산세는 처음이군요. 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사내가 모르겠다는 얼굴로 상 표두를 다시 바라봤다.
“제천마존의 비동이 있는 곳이 어느 쪽입니까?”
사내의 물음에 상 표두는 물론이고, 상화표국의 모든 표사들과 일꾼들인 쟁자수들까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호, 혹시 사황천의 분이십니까?”
“사황천이요?”
“사황천을 모르시오? 무림인이?”
“아뇨, 첨 듣는 곳입니다만?”
“처음 듣는다구요?”
“혹시 천사련에 소속된 곳입니까?”
“천사련에 소속된 곳이냐구요?”
“사파 대부분은 천사련에 가입했잖습니까?”
“천사련이 사황천에 무릎 꿇은 지가 언젠데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길 하는 거요?”
갑자기 노광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사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노광을 돌아봤다.
“천사련이 사황천에 무릎을 꿇어요? 언제요? 사황천은 또 뭡니까?”
“벌써 오 년은 지났을 거요. 사황천이 사황천이지.”
“오 년이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사내.
잠깐 당황하는 것 같더니 불쑥 물었다.
“정무맹은요?”
“정무맹?”
“정도무림연합맹 말입니다. 거긴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되긴, 거기가 제일 먼저 쑥대밭이 되었는데.”
“예에?”
“사황이 가장 먼저 쓸어버린 걸로 아는데······ 맞지?”
자신의 기억이 맞냐는 듯 동료를 돌아보며 묻는 노광.
사내는 믿기지 않는지 눈만 깜박거렸다.
그사이에 상 표두가 노광에게 연신 눈짓을 했다.
그만하라는 뜻이다.
정체도 모르는 자에게 함부로 말했다가 하룻밤 사이에 멸문의 길을 떠나버린 문파가 어디 한둘이던가.
“뭘 그리 경계하고 그러십니까? 딱 보니 어디 산간벽촌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기어 나온 모양이구만, 형장, 내 말이 맞지?”
“아무래도 그런 모양입니다. 그럼 이곳은 어딥니까?”
“저기 저 큰 산 보이시오? 저게 태산(泰山)이오.”
“태산? 산동의 그 태산이란 말입니까?”
“하하하!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노광이 답답한 속이 조금 풀린다는 듯 껄껄 웃었다.
하지만 사내는 웃을 수가 없었다.
“산동이라니, 사황이 정무맹을 쓸어버렸는데 난 오 년 동안 태산에 있었단 말인가?”
사내, 화운은 기가 막혀 무얼 더 물어야 할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추스른 화운은 노광에게 물었다.
“절강으로 가려면 어느 쪽 길입니까?”
“남동이니 저 방향일 것이오.”
상표두의 대답에 화운의 눈길이 돌아갔다. 가야 할 곳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화운이 포권하자 상 표두 역시 포권했다.
“형씨, 어디에 처박혀 있다가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화운이 신형을 박찼다.
노광은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눈만 멀뚱거렸다.
눈앞에 있던 화운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헉! 방금······ 그 친구, 어디로 갔습니까?”
“주둥이 꿰매버리기 전에 조심 좀 해라!”
두리번거리며 묻는 노광에게 상 표두가 사납게 소리쳤다.
상 표두는 화운이 사라져버린 솜씨가 자신은 물론이고 표국의 그 누구 도 흉내조차 내지 못할 공부라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그래서 화운이 흉악한 이가 아니었기에 자신들의 목이 붙어 있다는 걸 깨달아 노광의 부주의함에 부아가 치밀었던 것이다.
***
절강 항주 선우세가.
화운이 선우세가에 당도한 건 어둠이 가라앉은 시각이다.
선우세가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대문부터 시작해서 온 사방에 밝은 유등을 걸어놓아 그야말로 대낮처럼 밝았다.
허공을 날아온 화운은 선우세가의 앞마당에 조용히 내려섰다.
대낮처럼 밝은 건 좋았다.
그런데 온 사방에서 들려오는 술판 벌이는 소리와 여인네들의 교성은 다 뭐란 말인가.
화운은 선우세가의 내원으로 향했다.
앞마당을 지나 내원이 가까워지자 어둠이 짙은 곳곳에서 경계를 서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화운이 워낙 당당히 걸어가자 누구도 막지 않았다.
화운은 내원으로 통하는 월동문까지 갔다.
“이 시각에 누구신지요?”
월동문 앞에 두 명의 무인이 서 있었다.
험악한 인상으로 보아 심성이 좋아 보이는 자들은 아니었다.
화운은 대꾸 없이 그냥 지나쳐 월동문 안으로 들어갔다.
두 명의 무인은 한 번 물어보고는 다시 묻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금세 드러났다.
화운이 월동문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무인은 그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혈도가 찍힌 것이다.
화운은 선우세가의 가모 이옥영의 거처로 향했다.
코고는 소리가 진동했다.
화운은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에 두 사람이 보였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장대한 체구의 노인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이었다.
화운은 소스라치게 놀라 여인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다행이 처음 보는 여인이었다.
그나마 안도한 화운은 검집 채 뻗어 장대한 체구의 노인 발을 냅다 후려쳤다.
빡!
“으헉? 누, 누구냐!”
노인이 벌떡 일어나려다 한 차례 기우뚱거리더니 한 발로 중심을 잡고는 벽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낭왕?”
화운은 기가 막혔다.
“늙은이가 여기에 왜 있어?”
화운이 물었다.
“누, 누구냐? 누군데 날 아는 것이냐?”
묻는 와중에도 낭왕의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침대 옆에 세워둔 자신의 구환도를 향해서.
“선우세가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어?”
“선우세가? 선우세가 놈이로구나!”
구환도를 잡은 낭왕이 벼락같이 휘둘렀다.
그런데 마주 휘두른 화운의 검과 부딪친 순간 벽에 부딪친 물줄기처럼 튕겨버렸다.
노회한 낭왕은 자신이 상대할 고수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는 구환도를 크게 휘둘러 화운의 접근을 차단함과 동시에 신형을 날려 창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갔다.
“으응?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알몸의 여인에 부스스 깨어났다.
하지만 화운이 대충 휘두른 검의 넓은 면에 머리통을 맞아 픽 하고 기절했다.
이때 밖으로 나간 낭왕이 호각을 길게 불어댔다.
삐이이익! 삐이이이익!
화운은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곳곳에 걸린 유등들이 어둠을 밀쳐낸 가운데 내원 앞마당으로 사방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내리꽂혔다.
“으흐흐흐! 네놈이 선우세가의 화운이라는 놈이렷다? 오 년이나 지났지만 사황께서 직접 명하신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해주어 고맙구나.”
“사황이 날 잡으라고 했단 말인가?”
“그렇다. 여기 흑사령들이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그러니 넌 죽은 목숨이다. 크흐흐흐흐!”
검은 방갓을 쓴 열두 명의 괴인들.
그렇잖아도 그들에게서 죽음의 냄새가 풀풀 나고 있었다.
화운은 검을 휘둘렀다.
새파란 검강이 직격당한 괴인 중의 하나가 저만큼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크흐흐흐! 어리석은 놈! 사황께서 괜히 흑사령을 보낸 줄 아느냐! 죽여라! 놈을 갈기갈기 찢어버려라!”
낭왕이 외친 순간 열두 명의 흑사령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바로 이때 화운이 비껴든 검의 검신에 한 줄기 새하얀 빛이 관통했다.
마치 손에서 흘러나온 새하얀 기운이 검신을 따라 검끝까지 이어진 것 같았다.
낭왕이 ‘그래 봤자 헛수고다!’ 라는 생각을 할 때였다.
화운의 신형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낭왕의 두 눈이 인지하는 속도 이상으로 움직인 것이다.
퍽퍽퍽퍽퍽퍽퍽!
낭왕이 화운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순간 단단한 박 깨지는 소리가 잇달아 터지더니 흑사령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고꾸라졌다.
한 명의 예외 없이.
“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상상도 못한 결과였다.
낭왕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눈만 휘둥그레 뜬 순간.
“선우세가 사람들은 어디에 있지?”
화운이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