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자허도장
“시간의 축을 뒤트는 놈이 너로구나!”
노인의 말이 청천벽력처럼 귓가를 때리자 화운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도 놀라운 경험들을 했기에 이제는 놀랄 일이 없을 거라 여겼는데, 지금 노인의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구십니까?”
화운이 물었다.
노인의 기도에 짓눌려 숨 막혀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흠? 묘한 걸 가졌구나!”
노인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러자 화운의 몸이 잡아당긴 것처럼 끌려갔다.
깜짝 놀란 화운은 황급히 검을 뽑아 그었다.
쾅!
눈앞의 허공을 향해 긋는데 굉음이 터졌다.
하지만 노인이 인상 한 번 쓰자 더욱 강력한 기운이 휘몰아쳐 화운을 검과 함께 움켜잡아 버렸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거인이 손을 뻗은 것 같았다.
화운은 호신강기를 잔뜩 일으킨 다음 폭자결을 운용했다.
콰앙!
거대한 폭발이 터졌다.
하지만 더욱 강렬한 기운이 휘몰아쳐 폭발력까지 움켜잡아 버렸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화운은 가슴이 철렁했다.
영약들을 무수히 복용하여 세 번의 환골탈태를 한 데다 중단전까지 열었기에 공력만큼은 천하제일이라 자부했는데, 노인의 힘 앞에서는 세 살배기의 재롱일 뿐이었다.
“가소롭도다!”
노인이 외친 순간 화운이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화운이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항거불능.
대적불가.
그것이 노인의 존재였다.
화운이 바로 앞까지 끌려오자 노인이 손을 뻗었다.
“아, 안 돼!”
화운이 외쳤다.
소용없었다.
그의 품속에 있던 경천보패가 노인의 손으로 빨려갔다.
“흐음.”
노인은 신기한 물건을 살펴보듯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정말 묘한 물건이로구나.”
오색찬란한 경천보패를 한참동안 이리저리 살펴보던 노인.
어느 순간 갑자기 손아귀에 힘을 줬다.
퍽!
“헉!”
화운의 입에서 비명이 토해지는 것과 동시에 경천보패가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그러자 시간이 되돌아갔다.
일각 전으로.
***
화운은 저 앞에 기암괴봉 하나가 우뚝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주위의 모든 기암괴봉들이 무너져 평지처럼 변해 버린 가운데 그 하나만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 있었다.
화운은 그 기암괴봉을 향해 다가갔다.
그런데 반 각 정도 다가갈 때였다.
“끄악!”
“크악!”
기암괴봉 위에서 십여 명이 피를 쏟으며 날아갔다.
그리고 화운이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춘 순간 무지막지한 기운이 휘몰아쳐 화운을 움켜잡아 기암괴봉 위로 단숨에 끌고 갔다.
콰앙!
화운이 호신강기를 폭자결로 터트려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기암괴봉 위로 끌려간 화운은 곤룡포를 입은 노인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누구······ 십니까?”
화운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만큼 압도적인 강함을 지닌 노인.
화운은 눈앞의 노인을 기억하지 못했다.
조금 전 경천보패를 발동시킨 것은 노인이었다. 다른 이가 경천보패를 발동시키게 되면 회귀 중 겪었던 모든 기억이 사라질 거라던 제천마존의 말은 틀렸다.
보패가 발동된 일각 동안의 기억만 사라진 것이다.
물론 화운은 그런 상황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화운에겐 이 모든 일이 처음 겪는 상황일 뿐이었다.
“······정말 재밌는 물건이로구나. 부서지면 시간을 뒤틀어 사라져 버리다니.”
“······!”
화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뭐, 뭐야! 경천보패를 말하는 거야!’
황급히 자신의 품을 뒤지는 화운.
품안에 경천보패가 있는 것을 확인한 화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직 나한테 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아!’
화운은 가슴이 철렁했다.
노인이 경천보패를 부순 게 틀림없다.
그러니 자신은 노인을 기억 못하는 것이고, 경천보패는 일각 전에 있던 자리로 고스란히 되돌아간 것이리라.
‘그렇다는 건······ 허걱! 이젠 죽으면 끝이라는 거잖아!’
화운이 기겁하고 있을 때였다.
“흠, 고것 참 재밌는 물건이로세. 어찌 현세에 이토록 신묘한 법보(法寶)가 남았을까?”
노인이 손을 뻗었다.
화운이 어찌해 볼 사이도 없이 경천보패가 노인의 손아귀로 날아갔다.
‘안 돼!’
그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허공이 열리더니 한 자루의 송문고검이 튀어나와 노인에게로 날아갔다.
노인의 안색이 굳어지며 손을 저었다.
쩌엉!
마치 빙판에 금이 가는 것 같은 기음이 터지면서 검 한 자루와 노인의 손이 대치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무공을 지닌 노인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검 한 자루와 팽팽한 대립을 하는 그 순간.
허허로운 기운이 쏟아져 나와 화운과 경천보패를 휘감아 허공의 열린 공간으로 끌고 갔다.
화운은 그저 바람에 휩쓸리는 나뭇잎처럼 딸려갈 뿐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노인의 말이 끝난 순간 또 한 가닥의 붉은 기운이 튀어나와 경천보패를 향해 마치 송곳처럼 쏘아갔다.
퍼석!
“끄악!”
경천보패가 깨진 순간 화운이 비명을 질렀다.
쭉 뻗은 화운의 손이 경천보패를 쥐었고, 바로 그때 노인이 발휘한 붉은 기운이 경천보패를 부수고 화운의 손바닥을 꿰뚫었다.
천지간의 간극을 뒤틀어 시와 간을 바꾸니 이를 경천보패라 한다!
천상의 울림 같은 준엄한 일갈이 화운의 혼백까지 뒤흔든 순간 화운은 자신이 뒤로 확 꺼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의식을 잃었다.
번쩍 정신을 차린 화운의 눈에 멀리 기암괴봉이 보였다.
“도망쳐야 해!”
화운이 대적불가인 노인의 존재를 떠올렸다.
다행히 이번 보패의 주인은 화운이었다.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저 멀리 기암괴봉 꼭대기에서 붉은 기운이 섬전처럼 쏘아져 오는 것이 보였다.
화운은 깜짝 놀라 신형을 비튼 뒤 공공무영비를 펼쳐 솟구쳤다.
‘느려!’
화운은 애가 탔다.
전력으로 펼치는 공공무영비가 이토록 느리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노인의 속도가 빨랐다.
“제발!”
화운이 고함을 지르며 공공무영비의 속도를 올리고자 공력을 폭발적으로 운용할 때였다.
번-쩍!
눈앞의 허공이 열리더니 검 한 자루가 날아왔다.
“헉!”
사력을 다해 전속력으로 공공무영비를 발휘하던 화운은 미처 방향을 틀 새가 없었다.
다행히 검은 화운을 지나쳐 날아갔다.
하지만 화운은 달리던 속도 그대로 열린 공간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고 말았다.
쩌엉!
뒤쪽에서 송문고검과 노인의 붉은 기운이 부딪치는 소리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열렸던 공간이 닫혔다.
화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래된 검 한 자루만 땅으로 떨어졌다.
“으악!”
화운은 갑자기 눈앞에 개울이 나타나자 손바닥으로 수면을 치고 벌떡 몸을 뒤집은 다음 땅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어리둥절하여 자신이 떨어졌던 허공을 쳐다보았다.
맑게 푸른 하늘만 보였다.
조금 전 있었던 기암괴봉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체······.”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꼴사납게 처박힐 뻔했던 개울이 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초가가 있고, 초가 위로는 붉은 가지를 크게 벌리고 있는 노송이 보였다.
그리고 한 사람.
평평한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노인.
잔뜩 낡은 도사복을 걸치고 있었지만, 허허롭게 풍겨오는 기운과 새하얀 수염을 가지런하게 기르고 있는 외양이 선풍도골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냥 신선이 있으면 딱 저렇게 생겼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누, 누구신지······!”
“이리 오너라.”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음성이다.
절대자의 위엄이 아니라 아이가 할아버지의 말을 따라야 하듯 그렇게 따라야 할 것만 같았다.
화운은 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 경계하는 것을 보니 놀랐던 모양이구나?”
노인은 인자한 얼굴로 가볍게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푸근한 미소 같았으나 경계를 풀 수는 없는 일.
“뉘신지요?”
“앉아서 이야기 하자구나.”
노인에게서는 살기나 적의 같은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화운은 노인의 앞에 가서 앉았다.
“빈도가 누군지 궁금하겠지?”
“예.”
“빈도는 자허라고 한다.”
화운이 처음 들어보는 도명이었다.
“과분하게도 무당검성이라 불렸으니 늘 부끄러웠느니라.”
“무당검성이시라구요?”
화운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무당검성 자허!
지금은 잊혀져 가고 있으나 검을 든 무인이라면, 아니 이 땅에 살아가는 무인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그야말로 검신의 존재!
천마대겁! 사황혈천!
일백여 년 전!
동시대에 나타나 천하를 공포로 몰아간 천마와 사황의 대혈겁을 한 자루 검으로 막아낸 위대했던 검의 신화!
“허허! 과분한 별호이니 그리 놀랄 것 없느니라.”
“하지만 무당검성이시라니 어찌······!”
진짜 자허진인이 맞다면 몇 살인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백 년 전에도 갑자를 넘겼을 나이, 최소한 나이가 백 육십이란 말이었다.
“허허! 좀 전에 널 죽이려던 자가 사황이라는 걸 말해주면 까무러치겠구나!”
“허억! 사, 사황! 진짜 사황이란 말입니까?”
얼마나 놀랐는지 말조차 더듬거린 화운.
“사황 맞다. 역시나 더 강해졌구나.”
무당검성이 탄식하듯 말했다.
하나 화운은 자신을 죽이려던 노인이 사황이라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황이라니, 사황······ 으으, 무당검성에 사황······ 그럼 천마도 있겠지. 사황에 천마······ 크크큭! 하기사 제천마존도 만나봤으니 뭐.”
너무 놀라면 되레 차분해지는 것인가.
화운은 허탈해 보이는 웃음까지 터트렸다.
“제천마존이라니?”
무당검성이 물었다.
화운은 잠시 망설이다 눈앞의 존재가 무당검성이라는 생각에 다시 자리에 앉으며 경천보패와 제천마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허허허! 그랬구나! 그리 된 것이었어.”
누가 들어도 크게 놀랄 이야기를 듣고도 무당검성은 허허롭게 웃었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시간이 뒤틀리는 것을 오래전부터 느꼈거늘 이제와 새삼 놀랄 일이 있겠느냐.”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으셨군요.”
애써 담담히 말하고 있으나 속은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제천마존이 그랬다. 영육(靈肉)의 경계를 넘어서면 시간의 비틀림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고······.
이 시대에 하필 그런 인간이 셋이나 살아 있었다니.
“그 보패를 보여줄 수 있겠느냐?”
이때만큼은 주저하고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자신을 구해 준 검성이지 않은가.
화운은 경천보패를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무당검성에게서 허허로운 기운이 일어나 경천보패를 허공으로 둥실 띄웠다.
“대단한 신력이로다. 제천마존의 말대로 신들의 유물일지도 모르겠구나.”
감탄을 터트린 무당검성은 한참을 더 살펴보더니 허공으로 띄웠던 경천보패를 화운에게로 돌려보냈다.
화운은 두 손으로 받았다.
“경천보패가 이 땅에 남아 있는 것도 그리고 그것이 너에게 전해짐도 모두가 하늘의 뜻이겠지.”
무당검성의 목소리가 경건하게 흘러나왔다.
화운은 왠지 공손히 들어야할 것만 같아 숨소리조차 죽여 가며 무당검성의 말에 집중했다.
“빈도가 지금까지 이 땅에 남아 있던 건 천마와 사황 때문이니라. 빈도의 존재가 그들에겐 벽이었으니 하늘의 안배가 그들의 준동을 막은 것이리라. 하지만 시간의 윤회(輪廻)로 인해 빈도가 등선하게 되었으니 그들의 준동을 누가 막을까.”
“네?”
화운은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시간을 돌린 탓에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허나 자허는 그저 허허롭게 웃을 뿐이다.
“아이야, 시간을 뒤트는 건 역천이다. 하여 역천의 존재인 그들에게는 이 땅에 남을 힘을 실어줄 뿐이니라.”
“······!”
화운은 깜짝 놀랐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천마와 사황을 더 강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하니 어찌 놀라지 않을까.
게다가 그들을 막던 무당검성은 시간에 순응하여 등선한다고 하니 자신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큰 위협을 불러일으킨 것 같아 좌불안석이 되었다.
살고자 그런 것이다. 천마와 사황의 존재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
화운은 목구멍까지 치미는 말을 도로 삼켰다.
“괜찮다. 본시 천지만물은 결국 하늘의 법도에 어긋날 수 없는 법이니라. 넌 그저 너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면 되느니라.”
“제게 주어진 소임이요?”
“빈도를 대신해서 그들을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엑?”
“어찌 그리 놀라는 것이냐?”
“전 그들을 막을 힘이 없습니다.”
“네게 필요한 건 힘이 아니라 그들에게 맞설 의지이니라.”
말이 끝난 순간 무당검성의 몸에서 너무나 눈이 부셔 도저히 눈을 뜰 수 없는 두 기운이 뿜어졌다.
청아하도록 시원함이 느껴지는 청의 기운과 어미의 품처럼 포근함이 느껴지는 따스한 홍의 기운이었다.
청과 홍의 두 기운은 용틀임 하듯 허공을 휘젓더니 곧 한데 어우러져 아이 주먹만 한 새하얀 빛의 형상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화운이 눈을 떠 바라본 순간 번쩍 날아와 두 눈썹사이 즉 미간을 파고들었다.
눈을 질끈 감은 화운.
머릿속이 하얗게 터져 버릴 것 같아 당황한 순간 무당검성의 인자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이 두렵느냐. 모든 게 너의 안에 존재하는 것이거늘. 고통도 번민도 너의 것이요, 깨달음도 죽음도 너의 것이다. 굳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굳이 내칠 필요도 없다. 그냥 두거라. 네 안에 있으니 이미 네 것이다.”
알 듯 모를 듯.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전혀 모를 것 같은 말이다.
그래도 그냥 두라는 말은 알아들어 애써 거부하지 않았다.
자신을 지키고자 막지도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그랬더니 머릿속이 종이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그런데 곧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새하얀 머릿속의 공간에 한 자루의 검이 스륵 나타났다.
“아!”
화운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바로 그 송문고검이었다.
화운은 송문고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송문고검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리게 느리게.
선을 긋기 시작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검을 쥐고 허공을 긋는 것 같았다.
허공을 누비듯 천천히 그어지던 선이 점점 더 복잡해졌다.
때로는 사선으로, 때로는 부드러운 원으로.
화운은 복잡해지는 검의 움직임을 보다 깜짝 놀랐다.
‘이, 이건 검이야! 검법이 틀림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