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48화 (48/207)

#048. 기이한 일

“이 찢어죽일 놈들!”

“계집! 얼굴을 그어주마!”

흑사채주가 큼지막한 낭아봉(몽둥이에 못 같은 걸 박아놓은 무기)을 휘두르며 남궁현을 향해 달려들었고, 교룡채주가 날의 폭이 좁고 길쭉한 직도를 백리연을 향해 내리찍었다.

그리고 무하채주가 선우유성을 향해 두 자루의 쇠도끼를 폭풍처럼 휘둘렀다.

이전의 삶에선 남궁현과 백리연이 대등하거나 살짝 우세였다. 그리고 선우유성은 하염없이 밀렸었다.

하지만 이번 싸움엔 양상이 완전히 달랐다.

세 사람 다 상대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특히 선우유성의 약진이 대단했다.

이전의 삶에선 무하채주를 상대로 쩔쩔맸던 그가 지금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으니 힘이면 힘, 검세면 검세 그야말로 일취월장한 모습이었다.

대환단의 약성이 뛰어나다지만 공청석유와 인형설삼을 나눠먹은 것보다 더 낫다고 보기는 어렵다.

거기서 거기에 가깝다.

하지만 이번 삶에선 방패를 동원하고 있었다.

남궁현과 백리연이 삼두독각망의 비늘로 만든 방패로 상대의 공격을 쳐내며 벼락같은 검공을 구사하니 상대는 뭘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물러나기에 급급해졌다.

화운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본 후 시선을 돌렸다.

“내 상대는 아줌마겠지?”

“아, 아줌마라니!”

표독스런 인상의 여인이 소리친 순간 화운의 주먹이 일직선으로 뻗었다.

빠악!

여인은 돌덩이처럼 굳은 채 뒤로 넘어갔다.

“한 식경만 버텨! 그럼 끝날 테니까!”

화운이 소리치며 허공으로 솟구쳐 돛대 위로 올라섰다.

우직-쿵!

돛대가 배의 바닥을 뚫고 강바닥에 박혔다.

화운은 신형을 날려 중형선박의 돛대를 마치 징검다리 건너듯 밟으며 장강수로왕과 사천독왕이 있는 대형선박을 향해 달려갔다.

물론 화운이 밟고 지나간 중형선박의 돛대들은 예외 없이 강바닥에 박혔다.

운항불가가 된 것이다.

촤라라락!

장강수로왕은 척혈묵린편이라는 기병의 이점을 잘 살렸다.

성난 이무기처럼 허공을 요동치는 척혈묵린편은 어디가 공격의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러웠다.

“멋지다!”

감탄하는 화운의 검에 새파란 강기가 맺혔다.

그런데 이전에 펼치곤 하던 강기와는 많이 달랐다.

강기가 무려 오 장(15m)이나 뻗칠 정도로 길어진 것이다.

보통 고수들은 강기를 일 장(3m) 이상으로 발휘하지 않는다.

강기를 길게 발휘하려면 공력과 집중력의 소모가 크기 때문이다.

일 장, 이 장 이상의 강기를 맘껏 발휘할 정도의 고수라면 검환을 펼칠 수 있는 고수이기에 강기를 그렇게 발휘할 일도 없다.

하지만 화운은 이전의 삶에서 장강수로왕이 척혈묵린편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는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순도 높은 강기를 척혈묵린편처럼 발휘할 수 있다면 검환 못지않은 대단한 공격력이 될 거라고 내다본 것이다.

촤라라락! 촤촤촤촤촤-아!

척혈묵린편이 검은 이무기처럼 요동치자 화운의 검에 맺힌 오 장 길이의 강기가 새파란 이무기가 되어 마주 요동을 떨었다.

두 이무기와 같은 공세는 숨 가쁘게 얽혔고, 어느 순간 검은 이무기의 몸통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끄억?”

크게 당황하는 장강수로왕의 입에서 피화살이 뿜어진 순간.

사천독왕이 녹빛의 독강을 날렸다.

화운의 강함이 놀라울 정도라 이전에 화운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날렸다.

그에 뒤질세라 화운은 검강을 거둔 후 검환을 날렸다.

그런데 그 전환이 놀라우리만치 빨랐다.

삼두독각망의 비늘로 만들어진 검이었기 때문이다.

삼두독각망의 비늘은 내단의 기운을 흡수하며 자라서인지 내력을 받아들이는 게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이전엔 철검으로 검환을 발휘할 때 아주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그조차도 필요 없었다. 거의 생각과 동시에 공력이 검신에 넘쳐흘렀다.

콰앙!

화운이 날린 검환이 녹빛의 독강을 터트렸다.

“독강이다! 피해라!”

무하채주가 기겁하여 소리쳤다.

선우유성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던 그는 독강을 이용해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우유성은 그를 놓아주지 않고 더욱 맹공을 퍼부었다.

남궁현과 백리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강이라는 소리에 크게 당황하는 상대를 더욱 바짝 밀어붙였다.

콰과과과과광!

독강의 파편이 갑판위로 불똥처럼 쏟아졌다.

화운이 돌아왔다.

선우유성과 남궁현 그리고 백리연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반면 세 사람의 상대였던 채주들은 녹연이 자욱하게 깔린 곳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형!”

“대주님 봤어요? 우리가 다 물리쳤습니다!”

“다친 덴 없나요?”

신풍대 세 사람이 반겨주었다.

아직 싸움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아참! 독왕이 있었죠?”

남궁현이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얼굴로 물었다.

“맞아. 독강이 터지면서 걱정했는데 방패를 이용해 막았나 보네. 다행이다.”

“얼마나 놀랐다고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독왕이랑 장강수로왕 둘을 혼자 상대한 겁니까?”

“어.”

“그런데 이렇게 멀쩡해요?”

묻는 남궁현뿐만 아니라 선우유성과 백리연도 크게 놀랐다.

선우유성은 화운의 몸을 살피고 만지고 소란을 떨었다.

“진짜 다친 데 없어?”

“어. 난 괜찮아.”

“대주님이 괜찮다는 건 그들이 졌다는 건데·······?”

남궁현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그냥 놀라서 물러난 정도야. 호들갑 떨지 말고 돌아가자. 이 정도면 임무를 완수한 거니까. 다들 수고했어.”

화운은 장강수로왕과 사천독왕을 죽이진 않았다.

장강수로왕의 애병인 척혈묵린편을 부숴놓았고, 사천독왕은 옷자락을 길게 잘라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놓았다.

사천독왕은 독강을 펼쳐 분전하였으나 화운이 검강을 오 장 길이로 발휘하여 마구 휘둘러 버리자 금세 손발이 어지러워져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화운은 두 사람이 전의를 상실하자 그들이 타고 있던 대형선박의 돛대를 싹둑 잘라 운항불가로 만들었다.

그러니 당분간은 장강을 따라 맹으로 쳐들어올 수가 없게 되었다.

정사대전을 길게 끌고 가고 싶은 맹주 조극산의 뜻대로 된 것이다.

“자, 맹으로 돌아가자!”

화운이 말하자 선우유성과 남궁현이 뒤를 돌아섰다.

“하, 이거 경신공부를 더 하든가 해야지. 묵령 남궁현 님의 체면이 말이 아니야.”

“묵혼 선우유성 역시 동감이다.”

화운은 투덜거리는 두 사람의 말에 피식 웃으며 강변으로 냅다 던져버렸다.

그러고 나자 백리연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섰다.

“우리도 가요.”

당연하다는 듯 행동하고 있지만 얼굴이 살짝 붉어진 백리연.

화운은 웃으며 그녀의 옆구리를 팔로 감았다.

***

지휘선이랄 수 있는 대형선박 한 척과 중형선박 열셋 척이 장강 속으로 가라앉았다.

흑사채주, 교룡채주, 무하채주가 죽었다

장강수로십팔채의 선단을 지켜보던 비선들의 보고가 정도무림연합맹으로 보고되었다.

신풍대 단 네 사람이 올린 전과였다.

그것도 아무런 피해 없이.

천사련을 상대로 올린 첫 번째 승전보였다.

정도무림연합맹의 무인들은 크게 환호했다.

정사대전이 제대로 불붙기도 전에 승기를 제압한 것이라 정무맹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그래서 소패룡 황보장을 상대로 보여주었던 화운의 행동이 과격하다고 여겼던 무림 인사들 중에 호의적으로 돌아선 이들도 적지 않았다.

화운과 신풍대는 그러한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맹으로 복귀하기 위해 정문에 나타났다.

“혹시 신풍대입니까?”

정무맹의 정문을 지키던 수문위사들의 수장인 자가 살가운 태도로 물었다.

신풍대주인 화운의 인상착의는 크게 특이하지 않아 설명을 들어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검가의 소가주인 남궁현을 알고 있거나 백봉의 얼굴을 아는 자라면 단박에 신풍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몰라도 어연번듯한 세 명의 청년무인들과 발군의 미모를 자랑하는 여무사가 함께 움직이고 있다면 신풍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봄직 했다.

“그렇소만.”

화운이 대답한 순간이었다.

수문위사들의 수장인 자가 크게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향해 외쳤다.

“신풍대주님과 신풍대가 복귀하는 길이다!”

“멸사봉정!”

수문위사들이 병기를 머리 높이 쳐들며 동시에 외쳤다.

그 모습은 신풍대의 복귀를 가슴으로 반겨주는 것이었다.

“감사하오!”

화운이 포권으로 답례하자 신풍대 세 사람 역시 크게 기뻐하는 낯으로 포권했다.

자신들과 같은 말단들에게도 답례하는 오대세가 후기지수들은 단연코 없었다.

하물며 신풍대가 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도 으쓱거리지 않으니 수문위사들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퍼뜩 떠올랐다.

“들어가십시오!”

수문위사의 수장인 자가 손을 뻗어 길을 열었다.

화운은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인 후 그 길을 따라 맹 안으로 들어갔다.

맹주부로 향하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마다 포권하며 아는 체를 하자 선우유성과 남궁현은 신이 났다.

어디 그뿐이랴!

자신들의 복귀가 그사이에 퍼졌는지 여기저기서 아리따운 소녀들이 훔쳐보기 일쑤인지라 두 사람의 가슴이 한껏 요동치기에 이르렀다.

“이 정도 가지고 칠렐레 팔렐레 하지 말고 품위를 지켜라. 앞으로 너희들은 모두가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위대한 무인들이 될 테니까!”

화운이 무게를 잡으며 말하자 남궁현과 선우유성이 감동한 듯 쳐다봤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자꾸만 힐끔거리는 소녀들을 보게 되자 헤벌쭉 기분이 좋아졌다.

“난 이대로도 충분히 좋아.”

“나도.”

두 사람은 맹 내를 가로질러 맹주부로 향하는 동안 누가 또 훔쳐보나 여기저기 살펴보느라 고개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정무맹 맹주부.

맹주 조극산이 친히 나와 공로를 치하했다.

“수고들 했다. 맹주부 내에 신풍대의 숙소를 마련하였으니 푹 쉬도록 하라. 그리고 대주는 보고할 게 있겠지?”

“예.”

화운의 대답이 끝나자 맹주부를 지키는 무사들이 다가와 신풍대원 세 사람을 새로 마련된 거처로 안내하여 데려갔다.

“들어가자.”

맹주와 화운은 집무실로 들어갔다.

“놀랐다. 선박들만 적당히 부수고 돌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들과 싸웠다지?”

“예.”

“장강수로왕도 만만치 않지만, 독왕은 정말 껄끄러운 상대인데 어찌 상대한 것이냐?”

“제가 어지간한 독에는 내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겐 독왕이 더 만만한 상대였습니다. 장강수로왕의 편공이 더 무서웠습니다.”

맹의 비선들은 강변에서 숨어 보았다.

그래서 화운이 그들과 싸웠다는 것만 알았지 싸움의 형세까지는 보지 못했다.

“듣기론 자네를 쫓지 않았다던데?”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이잖습니까. 제가 만만치가 않으니 선뜻 쫓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흠······ 천하의 독왕이 자존심을 굽힐 정도라는 건가?”

조극산은 화운의 진실한 무위가 궁금했다.

하지만 당사자가 밝히길 거부하니 물을 수가 없었다.

“여튼 수고했다. 덕분에 본 맹주의 입지가 더 탄탄해졌다.”

이건 진심이다.

화운이 올린 전공 때문에 맹주로써의 발언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그래, 다친 데는 없고?”

“예. 그들이 쫓지 않으니 편하게 왔습니다.”

“허면 시간 좀 낼 수 있겠느냐?”

“다음 임무입니까?”

“그런 셈인데, 이번 임무는 살펴보고만 오면 되니 어렵진 않을 게야.”

“말씀 하십시오.”

“제천마존의 비동이 있는 곳을 아느냐?”

“예.”

“최근 그곳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는구나.”

“기이한 일이요?”

“그래. 그곳에 가보았다면 알겠다만, 온통 기암괴봉들 천지이지 않느냐. 그것도 하나하나가 구름을 뚫을 정도로 높아서 어지간한 무인들은 발길을 들이는 것조차 꺼려하는 곳이다.”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곳에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인지 하루 종일 굉음이 끊이지 않더니 구름을 뚫을 정도로 높았던 기암괴봉들이 온통 무너져 버렸다는구나.”

“······!”

화운으로서도 무척 놀랍고 기이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곳을 조사해 보라는 것입니까?”

“그렇다. 그쪽을 살피던 이들이 그런 일이 터졌다는 보고를 끝으로 소식이 끊겨 버렸다. 네가 도착하기 반나절 전에 맹의 비천각에서 조사단을 파견했다만, 별도로 네가 가주었으면 싶다. 괜한 노파심인지는 모르겠다만 자꾸만 불길한 느낌이 드는구나.”

조극산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무맹의 맹주로써 걱정을 하고 있었다.

화운은 그 마음이 느껴져 맹주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

화운은 제천마존의 비동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정말 맹주의 말 대로였다.

제천마존의 비동이 존재하던 일대의 지형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구름을 뚫을 정도로 높았던 기암괴봉들.

마치 대나무밭의 죽순들처럼 경쟁적으로 솟아나 있던 그 많던 것들이 마치 유성우가 폭격이라도 한 것처럼 폭삭 주저앉아버렸다.

화운은 놀라운 눈으로 사방을 살피며 이동했다.

그렇게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놀랍게도 단 하나의 기암괴봉이 우뚝 서 있었다.

‘이건 어떻게 남아 있는 거지?’

의아한 일이다.

주위를 한 번 더 살펴보니 가까이에 있던 기암괴봉들이 죄다 무너졌다.

‘저 위에 뭔가가 있기라도 하는 걸까?’

화운이 의문을 드러낼 때였다.

까마득한 기암괴봉 위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하나 둘이 아니다.

수십 개다.

안력을 돋우고 쳐다보던 화운은 이내 이맛살을 찌푸리며 기암괴봉 가까이 찰싹 달라붙어 피했다.

후두두두두둑!

잠깐 사이에 쏟아진 그것들은 놀랍게도 잘리고, 뜯어지고, 찢어진 사람의 육편이었다.

“혹시 비천각에서 보냈다는 조사단?”

이곳에 도착해서도 보지 못했으니 그들일 공산이 크다.

화운은 곧 신형을 날려 허공으로 솟구쳤다.

기암괴봉을 휘감고 있는 새하얀 운무를 뚫고 솟구치니 정상이 보였다.

화운은 단숨에 그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기암괴봉 아래를 홀로 굽어보듯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노인을.

피처럼 붉은 적룡포.

활활 타오르듯 새빨간 머리카락.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 세상을 짓밟을 것처럼 여겨지는 존재감.

조심해!

싸우지 마!

달아나!

머릿속의 경종이 마구 울려대는 사이에 그가 화운을 향해 돌아섰다.

대춧빛 얼굴에 머리카락처럼 붉은 수염.

위엄이 넘치다 못해 두렵게 만드는 강렬한 눈빛.

노인은 숨이 멎는 것 같아 꼼짝도 못하고 있는 화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툭 내뱉었다.

“시간의 축을 뒤트는 놈이 너로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