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47화 (47/207)

#047. 당신은 뭘 해도 나한테 안 돼

정도무림연합맹.

화운이 임무를 부여받기 위해 맹주부로 들어간 사이에 신풍대 세 사람은 맹주부 전각 밖에서 대기했다.

맹주부 역시 맹 전체의 공사와 맞물려 한참 확장 공사 중이라 앞마당엔 발 디딜 곳이 없었다.

“누님, 이 검 참 멋지지 않아요? 어둠 속에서 갓 튀어나온 놈처럼 새까만 것이 나야 나! 내가 바로 묵령이야! 그러는 것 같죠?”

남궁현이 허리춤의 검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묵령?”

“예. 지금 막 그렇게 이름 지었어요.”

남궁현이 씩 웃었다.

“그럼 나도 묵령이라고 할까?”

선우유성이 말했다.

“묵령은 얘고, 걔한텐 다름 이름을 지어야지.”

“근데 그거나 이거나 똑같잖아.”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검은 한 쌍인 것처럼 같은 모양이었다.

다만 선우유성의 것이 한 치쯤 더 길었다.

“야, 쌍둥이라도 이름은 각각이잖아.”

“아, 그치.”

선우유성은 바로 수긍하며 무슨 이름을 지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쌍둥이면 성이 같을 거잖아.”

백리연의 말에 선우유성이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맞아요! 쟤가 묵령이니까, 얜 묵······ 묵······ 묵······혼! 묵혼 어때요?”

“묵혼, 멋진 것 같아.”

“고맙습니다.”

선우유성이 헤벌쭉 웃으며 고마움을 표할 때 남궁현이 입을 댓 발이나 빼어 물었다.

“칫! 난 반나절 내내 생각하고 만든 건데.”

“알았어. 이 형님이 그 노고를 잊지 않으마.”

“니가 왜 형님이야?”

“내 검이 더 크잖아.”

“크다고 다 형님이냐?”

“어. 우리 묵검가에서는 그래.”

“묵검가? 오홍! 그럴듯한데?”

“그치? 우린 묵검가 형제야.”

“그냥 쌍둥이 하자.”

“좋아.”

그렇게 시답지도 않게 두런거리더니 남궁현이 백리연을 향해 불쑥 말했다.

“누님도 그 검의 이름을 짓는 게 어떻겠습니까.”

백리연이 자신의 검을 들어보았다.

두 사람의 검과는 살짝 달랐다.

전체적인 형태는 같으나 색이 달랐다.

일단 붉은 수실이 달린 두 사람의 검과는 달리 하얀 수실이 달렸다.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검의 손잡이를 휘감고 있는 가죽의 색도 두 사람의 검보다 조금 더 밝았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검집이었다.

백봉(白鳳)!

백리연을 위한 검이라는 의미로 그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난 이름 같은 거 없어도 괜찮아.”

“그러지 말고 지어보세요. 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검이 이름을 갖게 되면 이름을 준 주인이랑 생사를 같이한다는.”

“그런 말도 있어?”

“지금 막 지어낸 이야기예요. 헤헤!”

남궁현이 실없이 웃었다.

남궁검가의 소가주 답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그래서 더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럼, 백봉이라고 할래.”

“백봉 좋은데요.”

“묵혼, 묵령, 백봉! 멋져요.”

선우유성이 다시 한 번 헤벌쭉 웃었다.

선우유성은 요즘처럼 즐거웠던 시절이 없어서 아주 작은 일에도 기쁨이 넘칠 정도로 행복했다.

“묵혼, 묵령? 그게 니들 별호라는 거냐?”

시비를 거는 목소리가 세 사람의 즐거움을 깨트렸다.

세 사람이 돌아보니 십여 명의 무리가 보였다.

우문산을 비롯한 후기지수들로 황보장을 따르던 패룡대에 속했던 이들이었다.

물론 지금 황보장은 폐인이 되어 황보세가로 돌아갔고, 패룡대는 와해되었다.

그럼에도 패룡대 출신들이 몰려다니는 건 아수라파천권이라는 희대의 마공을 익힌 황보장을 따랐던 벌로 맹 내를 순찰하는 임무를 맡고 있어서였다.

선우유성과 남궁현 그리고 백리연은 무슨 헛소린가 싶어 쳐다보다가 왜 그런 오해를 한 것인지 이내 알아차리고는 피식피식 웃었다.

백리연의 별호가 백봉이다 보니 그런 오해를 한 것이다.

“묵혼 선우유성! 그럴싸한데?”

“묵령 남궁현! 멋진데?”

남궁현과 선우유성이 서로를 보며 히죽 웃었다.

무척 즐거워 보인다.

우문산을 비롯한 이들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자신들은 요 며칠 맹 내 순찰이나 도느라 창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남궁현과 선우유성은 무척 즐거워 보이니 울화가 치밀었다.

그렇다고 이유 없이 성질을 낼 수는 없어 인상만 잔뜩 쓰고 있자니 눈에 보이는 게 있었다.

“큭큭큭! 쟤들 보여? 잘 봐봐! 세가의 소가주라는 것들이 삼류 잡인들도 안 하는 방패를 다 차고 있다. 하긴 어디 가서 눈 먼 화살 맞지 않으려면 방패라도 차야겠지.”

“진짜네! 진짜 방패잖아!”

“쯧쯧쯧! 한심하다, 한심해!”

우문산의 비웃음에 몇 명이 동조하여 혀까지 찼다.

“뛰어난 방패는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도 모르냐!”

선우유성이 나섰다.

“어이쿠! 몰락해 버린 세가의 소가주님께서 그렇다고 하시니 뼛속까지 새겨놓아 절대 따르지 않도록 하겠나이다! 크크큭!”

우문산의 비웃음이 지나치게 적나라했다.

선우유성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왼손을 크게 휘둘렀다.

“이런 병신이!”

우문산이 주먹을 뻗어 막았다.

떠엉!

놀랍게도 선우유성이 휘두른 방패가 우문산의 주먹을 밀고 들어가 머리통을 후려쳤다.

휘-청!

머리통을 가격당한 우문산의 몸이 모로 쓰러질듯 크게 기우뚱했다.

“이것이 이 방패의 첫 번째 공격술이다. 두 번째 공격술은 이렇게 들어서 머리통을 찍어버리는 거다. 받아볼래?”

선우유성이 방패를 높이 쳐들었다.

거무튀튀한 방패는 생각보다 얇아서 머리통을 단박에 둘로 쪼개놓을 것 같았다.

게다가 방금 보인 힘.

우문산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했다.

“······!”

우문산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선우유성에게 당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고, 선우유성이 이토록 강할 것이라고는 더더욱 놀랐다.

그러고 보니 외양이 많이 달라져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만만해 보이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진짜 무인답게 변해 있어서 어딘가 모르게 껄끄럽다.

“니들 다 뒤질래! 이 새끼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어디서 시비질이야!”

버럭 소리친 이는 남궁현이다.

선우유성이 혹시라도 그동안의 화까지 터트려 사고라도 칠까봐 나선 것이다.

다행히 선우유성이 쳐들었던 방패를 내렸다.

“니들도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산다면 정사대전이 벌어졌다는 걸 명심해라. 언제까지 애새끼들처럼 몰려다니면서 희희낙락할 거냐.”

선우유성이 우문산과 그의 동료들을 향해 내뱉었다.

누구도 반발하지 못했다.

그들도 느낀 것이다.

선우유성이 크게 달라졌음을.

선우세가의 소가주가 한 꺼풀 껍질을 깨고 나왔다는 것을.

하지만 틀렸다.

아는 만큼 보는 법이라 선우유성이 적어도 세 꺼풀은 깨고 나왔다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

“가라 가. 다시는 깝죽거리지 말고.”

남궁현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우문산 등은 패잔병처럼 잔뜩 처져서 쫓기듯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을 한쪽에서 화운이 지켜보고 있었다.

화운은 달라진 선우유성의 모습이 기뻤다.

그가 선우유성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지금의 모습 그 하나였다.

위축되지 않고 당당해지는 것.

“잘했어. 그렇게만 해. 뒷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화운은 선우유성을 칭찬한 후 세 사람을 데리고 비천각으로 향했다.

정파무림연합맹 비천각.

송사문은 오늘도 각지에서 올라온 정보를 취합 분류하는 직무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깥이 시끄럽더니 누군가가 문을 부술 듯 밀치고 들어왔다.

“장강수로십팔채 쪽의 동태를 윗선에 보고한 게 그쪽이오?”

“그, 그렇소만 뉘신지?”

“신풍대주요.”

“신풍대라면······!”

“장강수로십팔채 쪽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보아야겠소.”

“그, 그건 왜······!”

송사문은 크게 당황했다.

화운이 그걸 보게 된다면 사천독왕의 존재를 알면서도 윗선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게 들통이 나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비천각에 쳐들어와서 행패를 부린단 말이냐!”

호통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음성에 송사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화운이 돌아섰다.

비천각의 부각주인 우문위가 들어서고 있었다.

“넌······!”

놀라는 우문위.

하지만 곧 더욱 크게 분노한 듯 호통을 쳤다.

“니놈이 감히 어디서 행패냐! 선우세가에서는 그리 가르치더냐!”

“말조심 하십시오. 난 맹주님 직속인 신풍대주입니다.”

“뭐라?”

“맹주님 외에 그 누구도 내 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방문은 맹주님 허락을 받은 것입니다.”

“······!”

“이곳의 부각주시라죠?”

“그렇다.”

“장강수로십팔채 쪽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보아야겠습니다.”

“그걸 왜 본단 말이냐?”

“그 이유까지 설명할 의무는 없으니 보고서나 내놓으십시오.”

바로 이때였다.

송사문이 탁자 위에서 먹을 갈 때 쓸 물을 담아둔 옥병을 슬그머니 쓰러트렸다.

화운은 그 소리를 들었지만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이 시간에 오면 그 보고서가 탁자 위에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들이 일부러 감추었다는 걸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어이쿠! 이를 어째!”

송사문이 허겁지겁 옥병을 세우고 젖어버린 종이들을 치운다면서 수선을 떨었다.

“이놈 무슨 짓이냐! 설마 여기 신풍대주가 말한 보고서가 망가진 건 아니렸다?”

“어이쿠! 아닙니다. 오늘 올릴 보고서가 젖어버렸을 뿐입니다. 그리고 장강에서 올라온 보고서는 폐기했습니다. 상부에 보고한 내용들 중 기밀을 요하는 것들은 폐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문위와 송사문이 잘도 손발을 맞추었다.

화운은 우스웠다.

빤히 보이는 수작질이라 화도 났다.

“거기 당신!”

화운이 갑자기 검을 뽑아 가리키자 송사문이 하얗게 질렸다.

“이놈 무슨 짓이냐!”

우문위가 외쳤으나 화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보 가지고 장난치지 마. 한 번이라도 걸리면 목이 달아나는 수가 있으니까!”

“그, 그런 짓은······.”

겁에 질린 송사문은 덜덜 떨었고, 보다 못한 우문위가 화운의 앞을 몸으로 막으며 호통을 쳤다.

“이놈! 맹주님을 믿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구나! 어디서 이 따위 행패냐!”

“부각주님, 당신 짓이오?”

“뭐가 말이냐!”

“독왕이 합류한 걸 감춘 것이.”

“뭐?”

우문위는 당황했고, 송사문은 사색이 되었다.

그에 화운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떠오를 찰나.

“어디서 모략이냐! 증거도 없이 이 따위 중상모략을 하다니, 내 원로원에 이 일을 상정하여 네놈을 직위해제 시키고야 말겠다!”

우문위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쳤다.

증거가 없다는 말에 송사문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증거가 없다고 했습니까?”

“그렇다!”

“그럼 장강에 나가 있는 비선들을 죄다 불러들이면 되겠군요. 어떤 새끼가 중간에 독왕의 합류를 감춘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눈이 있어도 빤히 보이는 독왕의 존재를 몰라본 건지. 감춘 새끼들이 있으면 목을 쳐버릴 것이고, 보고도 몰라보았다면 비각을 모조리 물갈이 해야겠지요.”

송사문은 털썩 주저앉았고, 우문위는 부르르 떨었다.

‘끝났어!’

이런 일로 자신의 목이 달아날 일이야 있겠는가만, 우문검가의 앞날은 끝났다고 보아야한다.

우문위가 말이 없자 화운은 검끝을 돌려 그의 목 가까이 어깨에 올렸다.

“당신은 뭘 해도 나한테 안 돼. 그러니까 지랄 같은 건 할 생각도 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 그게 우문가의 현판이나마 지키는 길일 테니까.”

두려움과 수치심에 우문위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당신!”

화운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송사문을 가리켰다.

“앞으로 중요한 기밀사항은 당신이 직접 맹주님께 보고하도록 해. 알았나?”

“아, 알겠습니다.”

송사문이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하자 화운은 검을 집어넣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벌어지면 내 장담하지. 장난질한 그 새끼 목이 달아날 거라는 걸.”

화운은 그렇게 엄포를 남기고는 비천각을 나갔다.

우문위와 송사문은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

장강수로십팔채 선단이 보이는 강변.

화운이 이끄는 신풍대는 장강 한복판에 집결한 장강수로십팔채 선단을 살펴보고 있었다.

“어렵겠는데요.”

남궁현이 한 말이지만, 선우유성과 백리연 역시 보자마자 같은 생각을 했다.

“소형선박들이 바깥쪽을 에워싸고 있어서 일차적으로는 그들의 감시를 피해야 하고, 거길 통과한다 하더라도 중형선박들이 충분한 간격들을 유지하고 있어서 속전속결도 어려워 보입니다.”

남궁현의 말이 이어졌다.

화운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남궁현과 선우유성의 뒷덜미를 동시에 잡았다.

“·····!”

“왜 그러십니까?”

선우유성과 남궁현이 고개만 돌려 쳐다보았다.

“나들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궁금하지. 가서 맘껏 싸워봐.”

화운이 두 사람을 냅다 던져 버렸다.

새처럼 날아간 두 사람이 기겁한 가운데 화운은 백리연의 허리를 휘감아 땅을 박차고 솟구쳤다.

“쏘지 마! 우린 새가 아냐!”

남궁현이 화살을 재고 있는 수적들을 향해 소리쳤다.

“새는 아니지만 적이 맞다! 맘껏 쏴봐라! 푸하하하하!”

화운이 크게 웃었다.

백리연은 그런 화운을 이해할 수가 없어 묘한 눈으로 얼굴을 쳐다봤다.

‘이 남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이토록 겁이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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