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정도무림연합맹 그리고 맹주
화운은 황보장을 상대할 때 일부러 검환을 발휘하지 않았다.
검신에 검강만 잔뜩 일으키고 상대했다.
황보장의 아수라파천권에 대한 경지가 육 성에 불과하여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 때문에 사람들은 화운이 검환의 경지라는 걸 알지 못했다.
화운이 바라는 삼류무공으로 강기의 경지까지 오른 기재.
그렇게 인식되었다.
“할 말이 있겠지?”
“예.”
여유가 생기고 주변이 조용해지자 선우세가주가 화운에게 물었다.
“속인 것이냐?”
선우세가주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미간의 골이 깊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주 많이 화가 난 건 아니다.
“힘이란 건…… 필요한 일에 써먹어야지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거들먹거려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건 저자의 왈패들이나 하는 짓이라구요.”
이 말은 지어낸 말이 아니다.
화운의 선친께서 하셨던 말이다.
“검마가 그렇게 가르쳤단 말이냐?”
“아뇨.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입니다.”
“흠, 그랬었군.”
“…….”
“정말 괜찮겠느냐? 정파엔 검마를 꺼려하는 자들이 많다. 그에게 피해를 당한 곳도 꽤 있고.”
“선우세가에 피해가 갈까봐 걱정이 됩니까?”
“세가가 아니라 네 걱정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저 때문에 다른 정파인들과 마찰이 빚어지게 될까봐 걱정이 되는 거냐고 여쭌 겁니다.”
화운이 불씨를 당겼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불만이다.
“비연이도 너도 너희들 생각만 하는구나.”
결국 선우세가주 역시 오래 묵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화운의 모친이 세가에서 중매하려던 남궁검가주를 마다하고 화운의 부친을 선택하여 세가를 나가 버린 일.
“가주님께서는 세가 생각만 하구요.”
“난 세가의 가주다.”
“세가를 생각하기 전에 세가에 사는 사람들을 우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사람들 없이 세가가 어찌 존속할 수 있겠습니까.”
“세가가 있기에 그들도 있는 것이다.”
“사람이 없으니 세가가 몰락하는 것을 보고도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세가에 힘이 없어서 그런 거다.”
“그 힘이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그 사람이 바로 나다. 세가의 가주가 강해지면 모든 게 해결된다.”
“그럼 수련만 하십시오. 유성이나 다른 사람들 더 힘들게 하지 마시구요.”
“닥쳐라! 니놈이 뭘 안다고……!”
“모르는 건 가주님입니다! 세가 사람들이 다 굶어죽게 생겼는데, 그깟 명성이 뭐 그리 중합니까!”
“……!”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팽팽한 평행선, 그런 느낌이었다.
***
호남성 장사.
정도무림연합맹, 일명 정무맹의 깃발이 높이 걸렸다.
칠대문파와 오대세가 그리고 백칠십이 개의 중소문파가 참여한 대대적인 규모의 연합맹이 탄생한 것이다.
초대 맹주는 조양신검 조극산이 추대되었다.
천하십대고수를 꼽으면 반드시 거론되는 고수인데다 칠대문파와 오대세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아 이권다툼에서 한발 물러날 수 있기에 연합맹 초기에 혼란스런 정국을 이끌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평이었다.
전면전이라도 벌어진다면 모를까, 맹을 만들었다고 하여 모든 문파가 죄다 모이는 건 아니다.
수만 명이 한꺼번에 묵을 곳을 마련할 수도 없거니와 각파 역시 지켜야 하기에 적당한 선에서 지원군을 보냈다.
각 문파의 규모에 맞게 파견한 것인데 칠대문파 같은 경우는 원로 두세 명에 바로 그 아래 고수 네다섯 명 그리고 향후 각파를 대표해야 할 후기지수들과 일대제자들 정도였다.
오대세가들은 조금 달랐는데 세가의 가주들이 정예들을 거느리고 직접 참여했고, 후기지수들 역시 동원되었다.
오대세가를 지키는 건 태상가주를 비롯한 가문의 전 세대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모인 숫자가 수천 명이니 천사련과 한판 벌일 발판을 마련한 셈이었다.
문제는 초대맹주 조극산을 비롯한 맹주부였다.
조극산은 자신이 맹주로 추대된 배경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허수아비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여 맹주인 자신의 명만 따를 강한 직속부대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각 명문대파들이 바쁘게 움직여 힘이 될 만한 중소문파들을 끌어 모아 세력을 키우고 파벌을 형성하는 가운데 맹주 역시 한 사람을 맹주부로 불러들였다.
의사 타진을 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래, 자네가 신검룡이로군.”
육십이 넘어가는 나이임에도 가슴께까지 길게 기른 수염이 숯처럼 새까만 노인이 바로 조양신검 조극산이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대청 중앙을 바라보는 눈빛은 맹주 자리에 오른 사람답게 위엄찼다.
“모르는 것인가? 하긴 별호라는 게 보통 당사자가 가장 늦게 아는 법이지. 자넬 부르는 별호는 신검룡이네. 백리세가주께서 침을 튀겨가며 부르는 바람에 모두가 그렇게 부르고 있다네.”
“신검룡…… 제겐 과한 별호입니다.”
“소패룡을 날려 버렸으니 과하진 않을 것이네. 그리고 이렇게 직접 보니 알려진 것 이상인 걸 알겠네. 대단해. 아주 훌륭하네.”
“감사합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남평화씨가문의 화운입니다.”
화운이 공손히 예를 올렸다.
그의 앞에는 맹주 조양신검과 그의 지낭이 된 군사가 함께 있었다.
맹주 조극산은 화운의 강함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기경팔맥은 물론이고 전신의 팔만사천 세맥까지 일기관통하여 체외로 발출한 공력을 뜻대로 여의할 수 있는 이기제기의 경지에 올라선 것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단순한 강기의 무위 정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챘다.
‘아마도 강기의 끝자락쯤에 있겠지.’
조극산은 모른 척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며 물었다.
“선우세가가 외가가 아니던가?”
“맞습니다.”
“선우세가를 내세우지 않는 건 선을 긋겠다는 것인가?”
“예.”
“좋네. 선우세가주의 협의지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걸 모르지 않으니 본 맹주 역시 선을 긋고 말하겠네. 황보세가가 돌아가는 바람에 본맹의 전력에 지대한 누수가 생겼음을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허면 자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건가?”
“상종 못 할 인간을 패준 게 전부입니다. 그걸 가지고 잘못했다, 죄다, 그러신다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상종 못 할 자라고 한 건 아수라파천권을 익혔기 때문인가?”
“아닙니다.”
“아니다?”
“예. 잘못은 사람에게 있지 무공에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호! 검마의 무공을 익혔지만 상관없다는 말이기도 하겠군.”
“…….”
“그거야 생각하기 나름이니 그렇다 치고, 상종 못 할 놈이라고 한 연유는 뭔가?”
화운은 대답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했다.
“밝힐 수 없다는 건가?”
“예.”
“자네가 맹에서 입지를 다지는 데에 나만큼 제대로 도와줄 수 있는 이가 또 있을까?”
젊은 후지기수들이 가장 바라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는 것이다.
조극산은 노회하게 그 점을 부각시켜 화운을 끌어들일 생각을 했다.
화운은 검마의 제자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반대로 절 내치기 가장 쉬운 분도 맹주님이십니다.”
“잘 아는군.”
조극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부리기가 쉽지 않겠군!’
조극산이 포기해야 하는지 고심할 때 화운은 그의 속셈을 파악하고자 애썼다.
‘원하는 게 뭐지? 황보장을 날려 버린 것 때문에 날 부른 게 아니야. 입지를 다지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왜?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야……. 자신을 따르라고? 어차피 명을 따를 수밖에 없는데, 왜? 흠…… 그렇군! 무조건 따라줄 충견이 되어달라는 거로군! 그거였어!’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진 화운은 인상을 썼다.
그리고 대놓고 물었다.
“충견이 필요하십니까?”
“이왕이면 충신이라고 하지.”
조극산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자신에게 대놓고 물을 줄은 몰랐기에 화운에 대한 한 가지 평가가 더 추가 되었다.
‘당돌한 놈!’
“전 나름의 가치관이 있어서 누굴 맹목적으로 따르진 못합니다.”
“아쉽군.”
“정말 아쉽습니까?”
“옳은 일에만 명을 따를 고수들은 맹에 널렸다네.”
“알겠습니다. 다른 명이 없으시다면 물러나겠습니다.”
“물러가도 좋네.”
조극산이 허락하자 고개를 숙여 보인 화운은 뒤돌아 성큼성큼 걸었다.
그렇게 한참 가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저랑 맹주님의 생각이 다를 일이 많을까요?”
“글쎄, 어쩌다 한 번쯤은 있겠지.”
화운이 돌아섰다.
“그때까지 만이라도 맹주님을 존경하고 따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날 존경한다는 사람은 많네.”
“그 사람들 중에 저만큼 배경이 만만하고 저만큼 강한 사람들도 있습니까?”
“자넬 부른 이유를 잘 아는군.”
“맹주님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나 보지요.”
“비슷한 생각? 그렇군!”
화운의 대답에 조극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껄껄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한바탕 웃음을 멈추고는 화운을 불렀다.
“이리 오게.”
화운이 다가오자 한 개의 동패를 내밀었다.
“천하 형세에 새바람을 일으킬 것이라 신풍대라 이름 지었네. 이건 신풍대주의 신분패고.”
한쪽엔 신풍 반대편엔 정파무림연합맹을 상징하는 정무라는 글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화운이 공손히 받았다.
“여길 나서자마자 자네가 이끌 대원들을 모집하게. 배경은 상관없네만 자네를 전적으로 신뢰할 자들이어야 하네.”
“숫자는 어느 정도가 좋겠습니까?”
“적을수록 좋네. 맹에는 그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할 테니까.”
“예?”
“맹의 지원을 받지 않는 대신 그 만큼 자유로워질 것이네. 맹의 원로들이라 하더라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는 뜻이지. 이후로 자네의 걸음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자네의 자유의지와 내 명령뿐일 것이네.”
“알겠습니다. 자유롭게, 맹주님의 칼이 되어드리겠습니다.”
“필요한 작전 비용은 내 사비로 충당해 줄 것이니 여기 군사에게 말하면 되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넨 지금 맹 내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네. 하여 자네의 직책을 비밀로 유지할 순 없네. 숙소로 돌아갈 때쯤이면 정식으로 공표할 생각이네.”
“전 상관없으니 맹주님 판단대로 하십시오.”
“알겠네.”
“맹주님.”
“말하게.”
“제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기 전까진 제대로 된 칼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단 제가 알아야 할 일이라면 어느 것 하나도 감추지 말아 주십시오.”
“신뢰는 상호간의 믿음에서 생기는 것이네. 자네 무위가 어느 정도인가?”
“맹주님께서 예측하신 것보다 두 단계 더 위로 보시면 될 겁니다.”
“……!”
화운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조극산의 눈이 커졌다.
“알겠네. 알겠어. 자칫 내 손이 다칠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칼을 얻은 셈이로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맹주님께서 계획하시는 것보다 좀 더 위험한 임무도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좋네. 좋아. 그 정도 호기는 있어야 신풍대주답지!”
“인정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자네가 알아야 할 일이라면 절대 감추지 않을 것이니 그 점은 염려 말고, 열흘을 주겠네. 그 안에 대원들을 모아보게.”
“존명!”
화운이 예를 갖춘 다음 밖으로 나갔다.
“어떤가?”
조극산이 물었다.
“맹주님께서 계속 휘두르지 못할 칼 같습니다.”
군사의 대답에 조극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생각이라는 뜻이다.
“놓아주어야 할 때까지 잘 써먹어야겠군. 그전에 원로들이 간섭하지 못하도록 키워놓을 필요가 있겠지?”
“적당한 임무를 찾아보겠습니다.”
군사가 물러갔다.
혼자 남은 조극산은 화운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예측하는 것보다 두 단계 더 위라고? 흠…….’
***
화운은 선우세가주를 찾아갔다.
“맹주님을 뵙고 오는 길입니다.”
“맹주님을?”
“예.”
“황보세가 일로 부르시더냐?”
선우세가주가 살짝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뇨. 제게 신풍대를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신풍대?”
“예.”
“잘되었구나!”
소패룡 황보장을 날려 버린 무위이니 그럴 만하다고 받아들인 선우세가주다.
“유성이도 함께 입니다.”
“유성이도? 그게 무슨 말이냐?”
“유성이도 신풍대 소속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신풍대가 맹주 직속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선우유성을 신풍대원으로 배치한 게 순전히 화운 자신의 뜻이라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반대할까 봐서다.
그런데 웬 걸 선우세가주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알겠다.”
“걱정되지 않습니까?”
“선우세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
화운이 탄성을 질렀다.
대단하다고 놀라서가 아니다.
‘아, 맞다. 세가를 수치스럽게 할 바엔 나가 죽으라고 할 분이시지.’
화운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때였다.
“아버님! 형이 신풍대주로 발령이……!”
선우유성이 놀란 얼굴로 나타났다.
선우세가는 임시막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날이 더워 활짝 열려있는 막사 입구에서 소리치다 화운을 발견한 것이다.
“호들갑떨지 말거라.”
“예.”
선우세가주의 말에 금방 고개를 떨어트리는 선우유성.
화운은 그 모습이 마뜩치 않아 일부러 큰소리로 말했다.
“유성이 너도 신풍대원으로 배치됐다.”
“정말?”
금세 고개를 들고 반색하는 선우유성.
“어, 사실이다. 그리고 너도.”
선우유성과 함께 온 남궁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 너. 남궁현도 신풍대 소속이다. 설마 싫은 건 아니겠지?”
“아니, 싫다기보단 아버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남궁 숙부님은 내가 만나서 허락을 구하마.”
남궁현이 필요했다.
아무리 맹주라도 남궁검가의 소가주가 포함된 신풍대의 뒤통수를 친다거나 함부로 버리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계산을 알지 못한 남궁현이 히죽 웃었다.
부친의 품을 벗어나 맘껏 활약할 수 있겠다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야…… 좋죠.”
남궁현은 화운이 황보장을 날려 버리는 광경을 보았기에 우러러보게 되었다.
“신풍대엔 또 누가 있습니까?”
웃던 남궁현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화운이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신풍대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막사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
분명 백리연, 그녀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