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정면돌파
황보세가주는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필경 둘 중 하나다.
극심한 내상을 입었거나 위험한 극독에 중독된 것이다.
황보세가주는 후자다.
얼굴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엿보이는 걸 보니 틀림없다.
“무슨 독입니까?”
화운이 검을 집어넣으며 묻자 중년인은 잠시 망설이다 칼을 집어넣었다.
화운에게 악의가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모르네.”
“황보세가주님이시라면 공력의 화후가 깊으실 것인데, 몰아낼 수 있겠지요?”
“그러길 바랄 뿐이네.”
“알겠습니다. 태양소마는 제가 막지요.”
“태양소마?”
“예. 그놈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
“염려 마십시오. 제가 막을 것입니다. 그나저나 아주 나쁜 새끼군! 이렇게까지…….”
화운은 황보장이 가증스러웠다.
황보세가주를 완벽히 죽이기 위해 독까지 쓴 게 틀림없었다.
황보세가주가 죽어야 그가 세가를 장악하여 전장을 맘껏 누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다시 말해 황보세가주의 죽음은 막을 수 없다는 거다.
“어느 문파이시오?”
“선우세가의 화운입니다.”
화운은 당황하는 황보세가의 무인들을 두고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독에 문외한이니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
황보세가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여인처럼 가냘픈 몸매다.
키는 커서 호리호리한 체형이랄까.
한 손에는 길쭉한 장창을 들어 어깨에 턱 걸친 채 휘적휘적 걷고 있었다.
험악한 산중으로 들어선 지 오래건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사내의 앞에 화운이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태양소마 맞지?”
“누구지? 난 너를 모르는데, 넌 나를 알고…… 꾸엑!”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던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큼지막한 바위에 처박혔다.
화운이 다짜고짜 검을 휘두른 것이다.
“큭큭큭!”
가슴팍에 검강을 적중당한 사내가 괴소를 흘리며 일어섰다.
입가에 핏물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한데도 쓱 화운을 쳐다보는 눈길은 불같았다.
“말하는 중에 공격하는 게 어딨냐!”
“기분 나쁘냐? 그럼 실력을 보여봐라.”
“나 태양소마 명강이다. 그러다 너 죽는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했구나!”
화운의 검에 새파란 강기가 넘실거렸다.
단순한 강기가 아니다.
강기처럼 보일 뿐 실상은 검환 즉 검멸이다.
명강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장창을 크게 한 바퀴 휘두른 다음 화운을 향해 쭉 뻗었다.
“성륜태양창(聖輪太陽槍)! 널 상대할 이름이다!”
“사혼구검!”
잠깐 대치한 두 사람은 순식간에 부딪쳤다.
화아악!
대기를 관통하며 일직선으로 뻗은 명강의 장창.
그 창두에 도사리고 있는 건 백열의 강기다.
걸리는 건 그게 무엇이든 태우고 박살을 내버릴.
꽝!
사혼구검 삼초식 사혼격.
검멸의 검환을 잔뜩 일으킨 채 펼치자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과시했다.
“돌아가라. 우리들의 싸움은 정사대전에서 다시 벌어질 것이다.”
“크크큭! 일초지적도 안 된다는 건가?”
장창을 땅에 막아 꼴사납게 나뒹구는 것만은 간신히 면한 명강이 장창을 뽑고 허리를 폈다.
“이름이 뭐냐?”
“화운. 선우세가다.”
“이화태양종 명강이다. 반드시 다시 보게 될 거다.”
***
북궁무결의 검이 백리연의 가슴을 찔렀다.
새하얀 가슴팍에 붉은 피가 혈화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
백리연의 눈이 와락 커진 순간.
화운이 한 줄기 낙뢰가 되어 나타났다.
쿠-웅!
백리연의 심장을 찔러 들어가던 북궁무결의 검이 서둘러 물러갔다.
화운은 백리연의 앞에 철탑처럼 서서는 검을 휘둘렀다.
쾅쾅쾅쾅쾅쾅쾅!
정신없이 막던 북궁무결이 결국 뒤로 날아갔고, 시커먼 기운이 북궁무결을 감싸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화운은 검을 집어넣으며 돌아섰다.
“선우세가의 화운입니다.”
백리연은 핏물이 번지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당황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
황보세가주가 죽임을 당했다.
함께 있던 황보세가의 정예 역시 전멸당했다.
태양소마 명강이 아닌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한 짓이라고 한다.
화운은 자신이 떠난 후에 벌어진 일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냉정히 말하면 자식을 잘못 키운 업보일 테니까.
구룡태자 북궁무결이 백리세가를 공격한 것과 맞물려 정파인들은 분노했고, 맹을 결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장사로 가는 길에 황보장이 합류했다.
“선봉에 서겠다는 거 그저 입바른 말이 아닙니다. 저와 패룡대가 기꺼이 선봉에 서겠습니다. 허니 패룡대의 이름을 맹의 조직도에 가장 먼저 올려주십시오!”
“올려주십시오!”
“올려주십시오!”
황보장의 일장연설이 끝나고 패룡대에 속한 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복명한 순간이었다.
화운이 갑자기 황보장을 공격했다.
일언반구도 없이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정도십주에 속하는 노고수들이 막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공공무영비를 펼쳐 피하거나 검강을 날려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짧은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황보장을 무차별적으로 두들겼다.
그대로 죽을 것 같은 위기에 몰린 황보장은 결국 아수라파천권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말리는 사람이 없어지자 화운은 더욱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육 성에 불과한 아수라파천권으로는 화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황보장은 개처럼 두들겨 맞은 끝에 단전마저 박살이 났다.
화운은 너덜너덜해진 황보장을 그와 함께 온 황보세가 무인들에게 던져주고는 정도십주에 속하는 노고수들 앞에 섰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저자가 아수라파천권을 익히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사문이 어떻게 되는가?”
우진궁주가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선우세가의 화운이라고 합니다.”
공손히 예의를 갖추는 화운의 모습은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로서 한 치의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니 정도십주에 속하는 노고수들의 눈에 들 수밖에 없었다.
“오오! 선우세가! 드디어 선우세가가 옛 광명을 되찾겠군!”
“저물었던 태양이 다시 떠올랐으니 만천하를 두루 비추겠지요!”
“이놈! 아주 시원했다. 저런 발칙한 종자들은 너처럼 속시원하게 날려 버려야 한다.”
멸절신니의 걸걸한 칭찬이 끝날 때였다.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우문검가주가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이 바라보자 헛기침을 한 번 한 우문검가주는 화운을 직시하며 말했다.
“백리세가와 황보세가가 급습을 받은 것도 모자라 아수라파천권이라는 희대의 마공까지 등장했소. 그에 본 가주는 화 소협께 정확한 신분 내력과 무공 내력을 밝혀줄 것을 부탁하는 바이오.”
“선친께선 글을 읽으신 분이라 말씀드려도 모르실 것이고, 망모께선 선우세가주님의 동생이십니다.”
선친에 망모.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셨다는 뜻이다.
“아미타불!”
“무량수불!”
“네 녀석이 이토록 훌륭하니 두 분께서도 기뻐하실 게다.”
나한당주와 우진궁주 그리고 멸절신니가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허나 우문검가주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위인이 아니었다.
“맞소?”
우문검가주가 선우세가주를 향해 물었다.
“저 녀석은 틀림없는 선우세가 핏줄이오. 내 조카가 맞소.”
“흐음.”
우문검가주의 침음이 깊었다.
‘하필 선우세가에 이런 놈이!’
그는 이대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직 무공 내력을 말하지 않았네.”
화운은 우문검가주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제 스승님은 성이 담이고, 함자는 대 자, 후 자 이십니다.”
“담대후?”
혼자 중얼거리는 우문검가주.
누군지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갸웃 할 때다.
“검마 담대후! 검마 선배가 정말 스승이시란 말이냐?”
남궁검가주가 소리쳐 물었다.
“검마란 흉명은 스승님을 모략하는 자들이 만들어 낸 악의의적인 별호입니다. 남궁 숙부님이라 하더라도 듣기가 거북합니다.”
화운이 대답한 순간.
‘옳거니!’
우문검가주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도를 걷는 자의 제자 따위가 감히 이 자리에서……!”
우문검가주가 위엄차게 호통을 치던 순간이다.
갑작스런 바람과 함께 화운이 그의 코앞으로 나타났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다.
더 심각한 건 화운의 움직임에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 했다는 것이다.
우문검가주는 크게 놀라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당신도 내 스승님을 모략하려는 것이오?”
화운의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뿜어지고 있었다.
우문검가주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살기 가득한 불길이었다.
“난……!”
“스승님께선 천생이 무인이신 분이오. 앞에서 검을 든 자는 용서치 않으셨으나 뒤로 물러난 자는 돌아보지도 않으셨소. 스승님을 모욕하려거든 검을 뽑으시오. 제자 된 도리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화운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싸움을 걸었다.
말이 아닌 무공으로 다투자는 것이다.
우문검가주는 검을 뽑지 못했다.
아수라파천권을 익힌 소패룡을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으로 날려버린 화운이었다.
그런 화운이 코앞에서 살기를 일으키며 씩씩거리고 있으니 우문검가주는 머릿속이 다 하얘졌다.
“검마 선배가 괴팍할지는 몰라도 마인이 아님은 안다. 네가 그러는 건 선배의 명성에 누가 될 뿐이다. 물러나라.”
“숙부님! 검마라는 흉명은 거둬주십시오.”
“검마 선배 스스로가 자신을 검마라며 받아들이고 있거늘 제자라는 네가 감히 뭐라고 하는 것이냐! 그것이야 말로 스승의 뜻을 거스르는 기사멸조가 아니더냐!”
남궁검가주가 호통을 쳤다.
화운은 못이기는 척 우문검가주에게서 물러났다.
“사과드리거라.”
“죄송합니다.”
화운은 포권하며 사과했다.
다들 보란 듯이 명문정파의 제자들처럼 동작 하나하나까지 계산하여 반듯하게 행동했다.
“가주님 말대로 백리세가와 황보세가가 공격을 당하고 황보세가주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신 데다 아수라파천권까지 나타난 상황입니다. 시중에 떠도는 악의적인 억측으로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남궁검가주는 선우세가주의 지기이기에 우문검가를 예의주 시하고 있었던 터라 우문검가주가 어떤 사람인지 대략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더는 화운을 몰아붙이고 선우세가를 벼랑으로 내몰지 못하도록 끼어들었다.
‘진작 좀 그렇게 하시지…….’
화운은 그때까지 쥐고 있던 몽둥이를 던져 버리고 선우세가주와 남궁검가주 곁으로 갔다.
허공에서 한 바퀴 원을 그린 몽둥이는 공교롭게도 우문검자주의 몇 걸음 앞의 땅에 꽂혔다.
화운이 던지는 경고였다.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몽둥이를 보게 될 거라는.
남궁검가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 검마 선배와 닮았다. 화를 스스로 다스릴 줄 알아야 할 터인데…….’
화운을 염려스럽게 본 남궁검가주는 이내 정도십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검마 선배는 손속이 과해서 마인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만, 진짜 사마외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검마 선배의 제자이기 전에 선우세가의 피가 흐르고 있고, 제게는 조카나 마찬가지인 녀석입니다. 두 세가가 보증할 것이니 검마 선배의 제자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는 없어야할 것입니다.”
남궁검가주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화운에게 검마의 제자라며 떠드는 자는 남궁검가주의 체면을 무시하는 자가 되게 생겼다.
하지만 이 자리엔 남궁검가주의 체면을 무시할 만한 이들도 있었다.
“언제부터 남궁검가가 스스로를 마(魔)라 칭하는 자를 두둔하고 나섰는가!”
바로 화산파의 매화검주였다.
그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검객이었다.
화산에 대한 자긍심과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또 그래야 하는 위치이기도 했다.
남궁검가주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상대가 정도십주의 일인이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어서다.
“대체 얼마나 더 나이를 처먹어야 꽁하는 성격을 버릴 참이냐! 늙은이 소릴 들을 나이가 되었으면 나대지 말고 좀 세상을 크게 봐. 애들이 투닥거린다고 여기저기 다 참견할 테냐!”
걸걸한 목소리로 매화검주를 타박한 이는 멸절신니였다.
매화검주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러나 단 한 마디도 못하고 먼 산만 쳐다봤다.
“남궁가주 자넨 그 아이는 되었으니 황보가나 마무리 짓게.”
“예. 신니.”
황보세가의 무인들은 황보장이 아수라파천권을 익히고 있었다는 걸 몰랐기에 자신들의 소가주가 단전이 부서지는 끔찍한 일을 당했음에도 아무 말도 못하고 한쪽에 찌그러져 있다시피 했다.
멸절신니에게 공손히 대답한 남궁검가주는 그들에게로 갔다.
기실 황보세가의 처리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정파 전체를 적으로 돌릴 생각이 아니라면 봉문이다.
세가 밖으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그것만이 황보세가의 이름이나마 지키는 길이다.
남궁검가주는 황보세가 무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우문검가주는 체면만 구긴 채 속으로 이만 갈았다.
그렇게 분위기가 싸하고, 어색하고, 무겁게 가라앉아 버리자 백리세가주가 나섰다.
“은공께서 말하지 말라고 했으나 더는 못 보겠습니다. 여기 화운 소협은 본가주와 백리세가를 구해준 구명의 은인이십니다. 그러 분을 마도로 매도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백리세가주의 말에 가라앉았던 놀람이 다시 한번 파문처럼 번졌다.
“오호! 백리세가를 구했다는 귀인이 바로 이놈이었다고? 하긴 아수라파천권을 부숴 버린 놈이니 천사련의 태자란 놈이라고 어찌 버텼을꼬! 끄헐헐헐헐!”
멸절신니가 얼굴의 주름을 더욱 주름지게 만들며 웃었다.
“신니 말씀이 맞습니다. 구룡태자란 놈은 화 소협의 공격에 이렇다 할 반격도 못하고 도망쳤습니다. 으허허! 정파에 대단한 신진고수가 나타났으니 정사대전에 서광이 비치는 듯합니다.”
백리세가주는 일부러 정사대전을 들먹였다.
정사대전을 앞두고 있으니 화운 같이 대단한 고수를 정파에서 밀어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 백리세가주의 뜻에 멸절신니가 동조했다.
“구룡태자란 놈의 무위가 대단했다며?”
“말씀 마십시오. 여기 화운 소협이 때마침 막아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신니를 뵙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화운을 두둔하고 칭찬했다.
화운은 상황이 자신의 의도한 바대로 흘러가자 속으로 히죽 웃었다.
‘우후후! 이런 게 사는 맛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