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이게 다 당신 탓이야!
우문검가주의 요구는 무례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확실한 게 좋겠다는 표정들이 많았다.
화운의 입장에서는 입을 다물어도 된다.
그걸 가지고 뭐랄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맹에 입성할 수 없게 된다고 봐야 한다. 설사 입성하게 되더라도 맹의 중추로 들어가기가 어렵게 된다.
‘저 인간이……!’
화운은 우문검가주가 나서자 짜증이 났다.
한참 전의 삶에서는 낭왕한테 자신을 떠밀지 못해서 안달하더니 지금은 또 무공 내력을 밝히라고 지랄을 하고 있었다.
‘아주 지랄 같은 악연인가 보다.’
모두가 화운의 입을 예의주시하는 가운데 화운은 우문검가주를 향해 걸어갔다.
단지 걸음을 걷는 것뿐이었지만 우문검가주는 심한 압박을 받았다.
스산한 기운이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그래도 명색이 일가의 가주다.
우문검가주는 억지로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으며 버텼다.
화운은 손만 뻗으면 닿을 곳까지 다가갔다.
“연장자를 예우하는 게 도리에 맞는 것이지만, 연장자라 하여 나이 어린 사람에게 함부로 해도 되는 건 아닙니다.”
“무슨 무례를 했다는 건가?”
“누군가에게 이름을 물을 땐 자신이 누군지 먼저 밝히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우문검가주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묻고 계시는 분께서 스스로를 가주라 하시니 어느 무가의 가주이시라는 건 알겠습니다만, 어느 무가인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묻는다고 제 사문을 고해바칠 이유가 있을까요?”
“난…… 우문검가의 가주네. 이제 내가 누군지 알았으니 신분내력과 무공내력을 밝히시게.”
“아! 우문검가! 선우세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곳!”
“허튼소리!”
“그럼 왜 선우세가의 사업들이 죄다 우문검가에 넘어갔을까?”
“본가의 사업을 확충하려는 시기에 매물로 나온 것들이 있어 사들인 것일 뿐이네. 선우세가가 팔지 않았다면 본가가 인수하지 않았을 것인데 어찌 그걸 본가의 잘못으로 몰아간단 말인가?”
“우문검가에 돈이 많나 보네요?”
“자네 무공 내력을 밝히고 싶지 않다면 그렇다고 말하게. 괜히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려고 하지 말고.”
“우문검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싫습니까?”
“무공 내력을 밝힐 수 없다는 것으로 알겠네. 선우세가주님 상황이 이렇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실 겁니까?”
우문검가주가 갑자기 선우세가를 향해 물었다.
화운은 이건 또 뭔 짓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본가는 상황이 어렵다고 하여 식솔들을 버리진 않소.”
선우세가주 다운 대답이 나왔다.
그러자 우문검가주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허면 함께하지 못하겠구려. 안타깝소이다.”
“뭔 소립니까! 함께하지 못하다니?”
화운이 선우세가주를 향해 물었다.
대답은 우문검가주가 했다.
“신분과 무공이 불분명한 널 감싸는 한 선우세가는 정파무림연맹에 참여할 수 없다!”
“뭔 개소리를……! 빠져도 나만 빠지면 되는 것을!”
“네가 밝히면 되는 일이다. 대체 뭘 감추려는 것이냐! 모두가 염려하는 대로 사이한 대법이라도 받은 것이냐? 아니면 사술이라도 익힌 것이냐?”
이제껏 듣고 만 있던 남궁검가주가 말했다.
남궁검가주마저 이렇다는 건 우문검가주 말대로 될 거라는 뜻이다.
“이런 젠장!”
화운은 신경질적으로 우문검가주를 쏘아봤다.
우문검가주는 담담한 척 서 있었으나 두 눈 깊은 곳엔 승자의 여유가 가득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화운은 배알이 뒤틀렸다.
“확실히 말발로는 안 되는군. 그런 것도 연륜이랍시고 아주 잘하네. 나도 주산군도의 해적들에 관해 할 말이 있는데 관두겠어. 말발에 밀리는 것도 짜증나고 더는 귀찮아. 그리고 내가 더 잘하는 게 있거든.”
중얼거린 화운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저쪽에서 던져버렸던 몽둥이가 끈으로 묶어 잡아당긴 것처럼 홱 날아왔다.
화운은 몽둥이를 손에 쥐었다.
“미안하다. 널 너무 빨리 버렸나 보다.”
중얼거린 화운은 몽둥이를 허공에 휘둘러보았다.
붕-붕!
듣기 좋은 소리가 들렸다.
“오호라!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그런다고 해결이 될 것 같으냐!”
우문검가주가 코웃음 치며 한 걸음 물러났다.
“해결? 그런 거 안 되도 상관없어. 어차피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니까.”
“다들 들으셨지요! 이놈도 아수라파천권 같은 마공을 익힌 게 틀림없습니다. 모두 합심해서 상대해야 합니다!”
우문검가주가 계속 물러나며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아니오! 이건 아니외다! 구룡태자를 물리쳐 본가를 구해주었고, 아수라파천권을 막은 게 여기에 있는 화운 소협이오! 필경 말하지 못할 연유가 있을 것이오!”
백리세가주가 더는 안 되겠다는 듯 나섰다.
“그게 다 눈속임이오. 기만한 것이란 말이오!”
우문검가주가 외쳤다.
백리세가주가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화운이 몽둥이를 손에 쥔 순간부터 우문검가주가 바라는 대로 급속도로 흘러갔다.
‘어리석은 놈 덕분에 선우세가까지 끝장나게 생겼구나!’
화운을 피해 물러나면서도 우문검가주는 득의양양했다.
화운이 아무리 강해도 정도십주 다섯을 동시에 상대할 순 없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놈은 이 자리에서 팔다리가 잘리거나 무공을 전폐당할 것이고, 선우세가는 정파무림에서 배척을 당해 더욱 빠르게 몰락할 것이다.
‘으흐흐! 이보다 좋을 순 없겠구나!’
우문검가주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넘쳐날 때였다.
“몽둥이를 내려놓거라.”
“돌이키지 못할 것은 없다 하였네. 몽둥이를 내려놓고 차분히 이야기해 보는 게 어떻겠나?”
선우세가주와 나한당주가 동시에 말했다.
“맞습니다. 충분히 돌이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승질 좀 맘껏 부려야겠습니다.”
말이 끝난 순간 화운이 우문검가주에게로 쏘아갔다.
“멈추지 못할까!”
“아서라!”
멸절신니와 일양신수가 신형을 날리며 외쳤다.
매화검주는 두 사람 보다 먼저 움직여 화운을 향해 검을 뻗고 있었다.
“본가의 아이입니다! 본가주가 가르칠 것입니다!”
선우세가주가 매화검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때 화운은 우문검가주의 코앞에서 새파란 강기를 머금은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우문검가주의 상상을 웃도는 속도였다.
번쩍!
우문검가주의 검이 폭발적으로 뽑혔다.
화운이 코앞에 나타난 것이 느껴진 순간 반사적으로 대응한 것인데, 일가의 가주답게 무척 기민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게 또 있었다.
바로 화운이 휘두르고 있는 몽둥이에 실린 힘이다.
쾅!
굉음이 터졌다.
우문검가주의 검이 대번에 튕겨버리고 전방이 훤히 열렸다.
그리고 힘을 잃지 않은 몽둥이가 불쑥 밀고 들어와 당황하는 우문검가주의 얼굴을 강타했다.
빡!
우문검가주가 얼굴을 감싸 쥐고 휘청 뒷걸음질 한 순간.
“이놈!”
“물러나라!”
달려오던 멸절신니가 검을 날렸고, 일양신수는 일양지를 발출했다.
그와 동시에 짤막한 신음이 터졌다.
“크음!”
화운이 돌아보니 선우세가주가 매화검주를 감당 못해 팔에 일검을 허용했다.
뒤이어 뛰어든 선우유성은 가슴팍을 걷어차여 저만큼 나동그라졌다.
그 광경에 화운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주체 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썅!”
분노한 화운이 수중의 몽둥이를 크게 휘둘렀다.
순간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새파란 고리모양의 검환 십여 개가 빗발치듯 날아간 것이다.
콰앙! 콰과과과과콰콰쾅!
온산을 뒤흔드는 굉음이 잇달아 터졌다.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터져나간 강기의 파편들이 주위를 초토화시켰다.
땅거죽이 찢어지고, 거목들이 터져 부러지고, 바위들이 박살이 났다.
그 파편들이 천지사방으로 비산하여 시야를 뒤덮어버리는 가운데 일양신수의 일양지와 멸절신니가 던졌던 검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선우세가주를 물리치고 막 신형을 날리던 매화검주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환을 연달아 막으려다 피를 뿜고 튕겨버렸고, 백보신권과 태극혜검을 펼친 나한당주와 우진궁주 역시 저만큼 튕겨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정도십주를 한꺼번에 밀어내고도 힘이 남아돈 화운의 앞에 수십 개의 검환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십여 개조차 간신히 막아내는데 그친 정도십주였다.
수십 개가 한꺼번에 날아온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안, 안 된다.”
선우세가주가 신음처럼 말했다.
“은공! 자중을……!”
백리세가주가 안타까이 말했다.
“형……!”
선우유성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백리연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게 다 당신 탓이야.”
화운이 말했다.
짜증이 잔뜩 난 목소리였다.
화운의 앞에는 우문검가주가 잔뜩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꼭 그렇게 얄팍한 잔머리를 굴려야했어? 그냥 쥐 죽은 듯이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돼? 당신 아들도 그렇고 대체 어떻게 생겨먹어야 남을 헐뜯지 못해 안달하게 되지?”
말하면서도 짜증이 더 나는지 몽둥이를 번쩍 치켜드는 화운이었다.
그에 우문검가주의 두 다리가 눈에 보일 정도로 후들거렸다.
“지 탐욕 때문에 부친을 제물로 바친 황보새끼나, 자기 탐욕 때문에 남을 어떻게든 밟고 헐뜯으려는 당신이나 뭐가 달라!”
몽둥이가 가차 없이 휘둘러졌다.
우문검가주의 머리통을 향해.
빠각!
머리통이 박살이 난 우문검가주가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당신 같은 인간들이 백 번, 천 번을 그래봐야 소용없을 거야. 방법을 찾을 거거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화운의 중얼거림이 끝난 순간 수십 개의 검환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 높은 곳에서 정점을 찍은 검환들이 이내 유성처럼 내리꽂혔다.
콰구구구구구궁-쿠쿵!
그야말로 융단폭격이었다.
온 산이 진동할 정도로 엄청난 폭격이었다.
마구 터져나간 대지의 지형이 달라져 버릴 정도였다.
***
만월이 뜬 밤 아래 화운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새하얀 인영이 달빛 아래에서 검무를 추고 있었다.
백봉 백리연이다.
화운은 백리연의 아름다운 검무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검무였다.
발끝에서 시작하고 손끝에서 요동치는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감상한 화운은 검무가 끝나자 조용히 자리를 떴다.
가장 먼저 선우세가와 남궁검가를 노리고 있는 마경을 물리친 다음 황보세가가 공격을 받은 곳으로 달려갔다.
백리세가를 먼저 구하지 않은 건 그들이 구룡태자의 공격을 받아야 맹을 만들고 정사대전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화운은 태양소마가 기습하기 훨씬 전에 도착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틀림없는데, 한곳에 진을 치고 멈춰 있었다.
쉬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뭔가를 원형으로 빙 둘러싼 채 바깥쪽을 경계하고 있었다.
화운은 황보세가를 향해 다가갔다.
화운이 나타나자 황보세가 무인들이 경계했다.
황보세가 무인들을 이끄는 수장쯤으로 여겨지는 중년인은 눈썰미가 예리한 모양이었다.
화운이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반듯한 이목구비에 잘 균형 잡힌 체형, 그리고 한쪽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보고는 그저 그런 떠돌이 검객으로 여기지 않았다.
“우린 황보세가요. 소협께서는 가시던 길을 가시는 게 좋겠소.”
말과 함께 허리춤에 걸린 칼의 손잡이를 슬쩍 잡았다.
함부로 굴지 않으면서도 적당한 선에서 경고를 한 것이다.
하지만 화운은 궁금했다.
“황보세가라고 밝혔소만!”
화운이 계속 다가오자 마지막 경고인 양 말투가 차가워졌다.
“황보세가주께서는 어디에 계신 것이오? 혹시 그 안쪽에 계신 것이오?”
“놈! 정체가 수상하구나!”
중년인이 칼을 뽑았다.
이때 화운이 공공무영비를 펼쳐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채-앵!
중년인이 휘두른 칼이 어느새 뽑아든 화운의 검에 막혔다.
“막아라!”
중년인이 소리친 순간 화운의 신형이 사라졌다.
“어디냐!”
중년인이 재차 소리친 순간 화운은 원형진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이게……!”
화운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황보세가주일 것으로 짐작되는 장대한 체구의 노인이 맨땅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것도 두 눈을 꼭 감은 채.